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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대화의 기술
(The Art of Christian Conversation)
Rev. Peter H. holtvluwer
최근에 교우들과 가진 사교모임이 썩 유쾌하지 않게 끝난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사실, 그런 모임은 아주 힘듭니다!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대화 방식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가진 모임은 꽤 즐거웠고, 많이 웃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 간 뒤, 교우들 혹은 가족들과 나눈 수다들이 진부하고, 대화의 주제는 피상적이며, 그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까?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 대부분은 이런 경험들을 해 보았을 텐데, 이는 우리가 대화의 기술, 특히 그리스도인들 간의 대화법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줍음 씨(Mr. Shy)
아마도 여러분은 다음 세 유형의 대화 상대를 만나 봤을 것입니다. (나는 이들 중 어떤 유형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세요.): 수줍음 씨(Mr. Shy), 장악 씨(Mr. Take-Over), 표면 씨(Mr. Surface).
수줍음 씨( 혹은 수줍음 양)은 당신의 소파에 조용히 정중하게 앉아서, 될 수 있는 대로 단답형으로 대답하려 합니다. 그의 가족들, 하고 있는 일, 관심 분야나 취미활동에 관해 묻지만, 당신이 알게 되는 것은 막연하고 모호한 내용일 뿐이고, 모임이 끝날 즈음엔, 처음보다 더 이상 진척이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에 대해 알길 원하지만, 적정 거리 이상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 동안, 수줍음 씨는 당신에게 한 마디도 묻지 않았으며, 일방적인 대화는 점차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장악 씨(Mr. Take-Over)
한편, 장악 씨는 빠르게 대화를 주도합니다. 그의 생활과 체험한 일 등 인사말을 시작으로, 그 주제로 신나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이런 저런 화제로 이야기는 이어지며, 대개는 그의 입장과 주장을 엮어 펼칩니다. 당신은 다른 질문을 거의 하지 못합니다. 전혀. 당신이 만일 의견을 끼어 넣거나, 당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면, 장악 씨는 곧장 그의 살아온 인생과 관련시켜, 재빨리 대화를 한 이 십 여분 동안 낚아챕니다. 그가 천 마디 말을 할 동안, 당신은 열 마디도 채 하지 못합니다.
수줍음 씨가 자신에 대해 의미 있는 아무런 말도 나누길 원치 않는 동안, 장악 씨는 기억이 닿는 대로 너무 상세한 묘사로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그건 지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당신을 위한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자리를 뜨기 한 삼십 분 전쯤에야 짧게 한 마디 합니다. “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우리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군요....” 정말로요?!
표면 씨(Mr. Surface)
표면 씨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교우들과 친근하게 교제하려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웃고 즐기려 합니다. 그를 좋아하는 그룹의 일원이 되고자 하며, 몇 몇의 표면 씨와 표면 양이 모입니다. 표면 씨들은 각자 커피를 마시거나 바비큐, 저녁 식사를 즐기고 저녁 게임도 하곤 합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날씨에 관해서나 일, 스포츠, 쇼핑, 남자친구 혹 여자 친구,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나 맥주, 최근의 휴가나 떠날 바캉스 등 그와 같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 주제들은 통상적이며, 일상에 관한 것들이지만, 표면 씨 그룹은 믿음의 문제, 예배, 분투하는 일, 고난, 실현 하지 못한 꿈들, 또는 깊은 기쁨과 사랑에 관해서는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가벼운 화제에 머무르며, 뼈 속 깊은 주제에 관해서는 마음을 열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저 즐거운 대화만을.
쓸모없는 대화들
당신은 문제의식을 느꼈을 텐데, 아마 이런 일들을 경험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류의 대화를 한 가지( 혹은 더 이상!) 했던 시간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 대화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막다른 길에 이르며, 그리스도인의 형제애의 결속을 다지기에 유익하지 못합니다.
수줍음 씨는 당신과 의미 없는 관계로 있으려고 당신을 그렇게 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열하지 않습니다. - 다만 내성적인 사람일 뿐 - 그렇지만, 그가 계속 구석자리를 고수하려 한다면, 그는 삶의 체험들을 진정으로 당신과 나눌 수 없는 “미상의” 인물이 됩니다.
장악 씨(Mr. Take-Over)는 의도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서 당신을 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일방적인 대화는 관계를 무너지게 합니다. 그가 자기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낼” 동안 상대방은 그 사람이 낭송하는 경험과 의견을 들어주느라 “메말라” 버립니다. 또한 장악 씨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주의를 기울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 지에 대해 깊은 질문을 할 수 도 없게 됩니다. 이런 대화는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훈육을 할 뿐 아니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화는 서로가 동등하게 나누며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가장 슬픈 것은 장악 씨가 자신이 모임을 독차지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집에 돌아가서는 아주 멋진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표면 씨들의 대화에서는 모든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 중 한 명이 건강 문제나 신앙생활에서의 고투, 인간관계의 단절과 같은 불편한 주제를 꺼내기 전까지 말입니다. 삶에서 재밌고 즐거운 일이나 손쉬운 주제에 대해서만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암 선고를 받은 친구에게, 교회를 떠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배우자가 떠나가 버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주겠습니까? 서로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일으켜 세우거나 타이르고 훈계하겠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는 기본적인 명령으로 시작하며 색다르고 더 나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누군가를 돌보고 선을 베풀며 친절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우리 이웃의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누군가가 물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질병을 앓거나 다친 경우) 우리는 그를 물리적으로 돕습니다. 누군가가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좌절하고 외로워하며 우울하고 주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우) 우리는 교제하고 대화하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며 때로는 잘못을 고쳐주고 이끌어주며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그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을 보이기를 원하시는 분명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수줍음 씨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표면 씨들이 평소에 이러한 주제를 꺼내 들어서 서로 도움을 주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적인 필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수줍음 씨나 장악 씨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알아 갈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들을 돕겠습니까?
상호적인 대화
그리스도인의 대화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반드시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이는 곧 대화의 당사자가 서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빌립보서 2:3에서 다음의 말씀으로 이같이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연합하여 “한 마음”이 되고 그리스도가 하셨듯이 다른 사람을 먼저 섬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2:1-11) 만약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묻는 것을 힘들어하고 그들의 개인적인 상황, 곧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무관심하며 마음의 문제에 대해 관여할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결코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수줍음 씨가 침묵하며, 장악 씨가 자기 경험만 이야기하고, 표면 씨는 가벼운 수준에 머무는 이 모든 것은 우리 이웃을 첫째로 두지 않는 것이고 그를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구세주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 지체의 안녕을 위해 사용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은사에는 봉사, 가르침, 권고, 온유, 지도, 자비의 사역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최소한 하나의 선물을 그리스도의 성령으로부터 받아서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알아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선물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 생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거부하거나 이웃과 대화하며 “거기 가기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 이웃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자기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막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찾는 동시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양방향으로 일어나는 것, 곧 상호적인 대화입니다!
경청하라
그리스도인의 대화는 최소한 두 가지의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첫째가 주의 깊게 듣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9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부주의한 자세로 몇몇 핵심만 듣곤 합니다. 아니면 말을 멈추기만을 기다렸다가 끼어들어서 그 사람이 말하는 동안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는 특히 장악 씨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수준에서 무슨 일인지를 알고 이해하려 합니다. 우리는 몸을 기울여 두 귀로 듣고 말해야 합니다.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질문해야 합니다.
다음 방문 후에, 자신을 체크해 보십시오. : 내가 자신들에 관하여 말할 진정한 기회를 주었는가? 다른 사람이 50% 정도는 말할 시간을 할애하였는가? 나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나는 그들이 말한, 느낀 것을 정말 이해했는가? 그들이 나와 나눈 얘기들의 정확한 요지를 되 뇌일 수 있는가? 잘 듣고 잘 이해했는가?
사실, 당신이 방문하는 모든 사람과 절친이 되거나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의 어려움들을 오픈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드러낼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생활을 나눌 정도로 모든 기회를 주도록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최대한 그들이 멈추고, 듣고, 강조할 수 있도록 그들을 살피며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답할 때, 스포트라이트를 우리에게 비추지 말고, 그들의 형편을 살펴, 격려와 축복의 말로 상대를 세우는 대화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질문들을 하라
두 번째 핵심은 관심어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 참견을 하거나 남의 소문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위한 진정한 관심으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기 위하여 그들의 즐거움을 알기 원해야 하며, 그들과 슬퍼할 수 있기 위하여 그들의 슬픔을 알기 원해야 합니다. (고전. 12:26을 보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의 고군분투함을 지원하기위하여 알기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똑같은 수준으로 면밀한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날씨나 스포츠, 휴일 같은 가벼운 수다를 나눌 때는 괜찮습니다. 삶에서 최상층 이상으로 나아가서 이런 질문을 하기를 배워 봅시다. : 당신의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부모님, 형제자매들, 아내나 남편, 자녀들) 만일 싱글이라면, 친구 관계나 특별히 의미 있는 관계들에 대해 의논할 수 있도록 질문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것도 시도해 보십시오.: 최근에 직장생활은 어떠십니까?(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맡은 일은 무엇입니까? 오년 안에 진로는 어떻습니까?) 사람에게 가족들, 가까운 관계들, 일은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여기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관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오픈할 이슈가 있다면, 아마 이 세 가지 범주에 들 것입니다.
지역 교회에서의 생활에 대해 묻는 것도 좋은 질문입니다. (무슨 성경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교회 목사님은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 그들의 취미나 해야 할 자원 봉사에 관해 알아보십시오. (스포츠? 공예? 독서? 퀼팅? 중고 할인점? 청소년 센터?). 범위를 더 넓혀서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당면한 현실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세계관, 예를 들자면 뉴스에 나오는 새 아이템들에 대한 관점, 정책들, 영화들, 책, 건강 상식, 과학, 음악, 예술- 그것들을 지지하는 사고방식과 이념들- 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주장을 교환하고, 성경의 관점들을 이성적인 추리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대화를 격려하고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더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접근이 좋은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줍음 씨, 장악 씨, 표면 씨 인지(였는지) 알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고, 필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좀 더 사려깊이 세심하게 그리스도인의 대화의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주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개인의 관계들은 풍성해지고, 우리 교회의 형제애는 더욱 강화될 것이며, 주님의 이름이 더욱 더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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