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이 땅에 씨를 뿌려 곡식을 가꾸고 열매를 거두어 먹고 살던, 그 여러 천년의 긴 세월에, 우리 겨레 말의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의 이름을 짓고, 산과 내의 이름을 짓고, 마을의 이름을 지었다. 풀과 나무의 이름도, 짐승이며 벌레의 이름도 물고기의 이름도 지었다. 농사를 짓는 데 쓰는 여러 가지 연모의 이름도 지었고, 일을 할 때 필요한 말, 일을 하면서 느끼는 괴롭고 즐겁고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을 지어서 쓰고, 사랑과 미움, 소망과 절망 온갖 마음을 말로 나타내었다. 이 모든 농민의 말은 우리 겨레 말이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
우리 조상들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이름짓지 않았다. '달개비꽃'은 그 꽃잎이 꼭 닭의 볏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씀바귀'는 맛이 쓰다고 해서, '제비꽃'은 이른 봄 논둑 밭둑이나 산기슭에 이 꽃이 피면 제비가 날아온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할미꽃'은 너무나 잘 알듯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고,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었을 때 나오는 물이 젖먹이 아기똥같다 하여 그리 이름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마찬가지다.
「마을 뒤 골짜기에 가재가 많이 나면 '가재골'이라 했고, 나비가 많다고 '나비실'이라 했다. 밤나무가 많으면 '밤나무실', 박달나무가 많으면 '박달골'이라 이름붙였다. 대나무가 많아서 '대뫼'라고 하는 마을도 있다. 그런데 한문을 숭상하던 (왕조시대) 양반들은 이런 마을 이름들을 한자말로 지어 붙였다. 양반들이 새로 지어 붙인 마을 이름들은 대개 큰 마을뿐이었는데, 일본인들이 침략해 들어와 총독정치를 하고부터는 모든 마을 이름을 한자로 지어 불렀다. 이런 총독이 한 짓은 우리 양반들도 환영하는 바가 되어 그로부터 마을 이름, 땅 이름은 우리 말과 한자말 두 가지로 아울러 쓰이더니 차츰 우리 말이 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이 물러갔는데, 일본인들이 물러갔으니 땅 이름, 마을 이름을 당연히 우리 말 이름으로 되돌려 불러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분단 40년 동안 더욱 철저하게 우리 말 이름들이 멸시를 받고 시들어 없어지게 되었다. '가재골'로 부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모두가 '가자곡'(柯子谷)으로 부르고, '나비실'은 아주 '첩곡'(蝶谷)이 되고, '밤나무실'은 '율곡'(栗谷)으로, '박달골'은 '박다동(朴多洞)'으로, '대뫼'는 '죽산'(竹山)으로 되어 버렸다. 모두 엉뚱한 한문글자가 아니면 우리 말의 뜻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어설픈 한자음으로 된 마을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 왕조시대 때는 지체높은 양반님네들이 잘난 척하려고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꿨다고 치고, 일제 시대 때는 창씨개명하듯 마을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꿨다고 하자. 그럼 왕조시대도 끝나고, 일제시대도 끝나고, 군사독재시대도 끝난 지금은 다시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이 깃든 우리 말 이름으로 되돌려 써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도 왕조시대와 일제시대 때의 이름들이 버젓이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그 시대의 비민주적 잔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을 이름, 땅 이름에서 순수한 우리 말이 사라져가는 역사는 그대로 우리 겨레가 병들고 우리 백성들이 수난당하는 역사로 보아야 한다.」
무조건 우리 것만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자곡'(柯子谷)보다는 '가재골'이, '첩곡'(蝶谷)보다는 '나비실'이, '율곡'(栗谷)보다는 '밤나무실'이 훨씬 의미 전달도 쉽고 더 정감있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백국채'('애기똥풀'의 한자 이름. 뒤에 나오는 예들도 앞에 나오는 말이 한자 이름임)보다는 '애기똥풀'이, '목통'보다는 '으름덩굴'이, '차전자'보다는 '질경이'가, ''피마자'보다는 '아주까리'가, '대두'보다는 '콩'이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도 어줍잖은 영어를 사용해서 말한다거나 쉬운 우리 말로 쓸 수 있는 말인데도 괜히 어려운 한자말을 쓴다거나 하는 것들도 모두 이 땅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사소하지만 지나칠 수 없는 행동들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얼마전에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쓰기>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 준다.
첫댓글 천영범님, 북극성 회원 명단하고 접수한 원고좀 제 멜로 보내주시어요.^^* 진행사항 알고 싶고 빨리 추진해야 될 일인거 같아서요^^* 부탁해요 멜주소 : adelajyj@cyberpacific.com / adelajy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