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필자의 논문,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공간훼손과 풍수정치-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신라문화 제56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20년 6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음을 밝힌다.
조선신사의 입지와 풍수정치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불안한 정세를 안정화시키고 정치·사회적 통합을 위한 수단으로 천황의 이미지 쇄신을 꼽았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 중심에 국가신도가 있었다. 이에 일본은 국신, 역대 일왕, 국민적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신사를 새로 건축했으며, 전국의 모든 神社에서 행해지는 의례에 국가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로써 일본은 천황제를 국가적 통합체의 상징으로 한 천황체제를 이룩했다.
일본은 국가신도를 통한 자국의 통합체제 구축의 경험을 조선 식민지 지배 전략의 하나로 도입하였다. 물론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 종교가 등장한 것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피식민지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서 결국 종교를 통해 식민지를 지배하려고 의도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한발 나아가 피식민지 국민들을 자국 국왕의 臣民으로 삼으려고 종교를 동원했으며, 그 중심에 신사가 있었다.
조선 내의 신사의 역사는 16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무역재개에 관한 조약(乙酉條約)이 체결되고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그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金刀比羅神을 모신 작은 사당이 부산진에 세워진 것이 그 시초다. 이후 강화도조약에 의해 조선 체류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일본은 자국인들을 위한 신사가 필요했고, 일본인 체류자가 많은 경성, 인천 등의 지역들에서 신사가 건립되었다. 이에 1910년 이전에 조선에는 이미 약 12개의 신사가 있었다.
1910년 이전까지의 조선 내의 신사는 조선 거주 일본인들을 위한 신사이며, 조선인들과는 거의 무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한 이후의 신사는 순수한 종교적 목적보다는 정치적인‘식민지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일제는 신사 공경 풍속을 조선 전역에 보급하는 것이 조선 통치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에 그 조영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국가신도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內鮮一體라는 목적에도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1면 1신사주의’를 표방하면서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신사를 군국주의적 속성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로써 일제는 식민 통치 기간 동안 한반도의 거의 모든 面들에 신사를 설치함으로써, 신사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닌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記號로 작용하게 되었다.
지리적 관점에서, 조선인들의 효과적 통치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조선신사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했다. 일본의 경우, 신사가 입지한 곳은 대부분 숲으로 둘러싸인 장소였다. 일본의 국가신도 체제하의 신사들은 성역을 숲으로 차단함으로써 신성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신사의 입지는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적 목적이 加味되었고, 또 풍수가 활용된 양상도 보였다.
이에 연구는 조선신사들의 지리적 입지를 통해, 일제의 조선 통치 방향이 신사 입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과정에서 풍수의 활용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먼저 신사 건립시기를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했다. 개항 이후부터 한일병합이 있은 1910년까지를 1기, 1910년대를 2기, 1920년대를 3기, 1930년대에서 해방까지를 4기로 구분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일제의 조선 통치시기를 구분하는 일반적인 방법과 동일하다. 이에 일제의 통치 방향과 신사 입지의 관련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특히 그 과정에서 일제의 의한 풍수정치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분석의 기준 두 번째는 신사의 지형적 입지 유형이다. 통상 기존 연구에서 조선신사의 입지는 조망이 탁월한 丘陵에 위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연구는 지리적 관점에서 신사의 입지 유형을 좀 더 세분화시켜 山腹形, 丘陵形, 平地形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산복형은 산의 사면에 위치해 있는 유형이다. 구릉형은 신사가 일반적으로 산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작은 언덕의 사면 또는 정상에 위치해 있는 유형이다. 평지형은 산복형 및 구릉형에 속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평지에 위치해 있는 유형이다.
분석의 기준 세 번째는 신사 입지의 조선 邑治와의 관련성이다. 이때의‘읍치’는‘읍성’이 있었던 고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 고을의 治所가 있었던 곳을 의미한다. 통상 조선시대 읍치의 입지를 결정하는 요인에는 군사·교통·정치사회적 조건 등 다양한 인자가 있지만, 그중에 풍수적 요인도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읍치가 지역 일대에서 풍수적 국면을 갖춘 곳에 입지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신사의 입지가 읍치 내 또는 주변에 있다면, 기존 조선시대의 자연적·인공적 풍수적 구성물과 상충되고, 또 그것이 훼손되는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에 연구는 읍치와의 관련성 여부를 세 가지, 즉 신사가 읍치 내에 있거나 바로 인접해 있는 경우(○), 인근에 읍치가 있지만, 신사가 읍치와 어느 정도 떨어져서 건립된 경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읍치 등의 마을이 크게 형성되지 않았던 곳에 신사가 건립된 경우(×)로 구분했다.
마지막으로 분석의 기준 네 번째는 신사의 입지가 어떠한‘풍수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다. 구체적으로 풍수의 사신사(주산·청룡백호·안산)의 관점에서, 신사의 입지가 고을의 사신사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사신사는 도시 단위를 대상으로 하는 陽基風水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인이며, 또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사신사를 상정하는 중심 위치(풍수의 穴)는 읍치가 있었던 곳은 관아를 기준으로 하며, 읍치가 없었던 곳은 신사 건립 당시 고을의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했다.
<표1>은 지금까지의 네 가지 분석 기준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항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주요 도시들에 설치된 신사 중 현재 남한 지역에 속하고, 그 위치 및 건립년도의 확인이 가능한 41개소의 입지유형 및 풍수적 특징을 정리한 것이며, <그림 1>은 <표1>을 도표화한 것이다.
신사의 입지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신사 입지의 지형적 유형을 보면, 1시기의 6개소 중 구릉4·산복2·평지0, 2시기의 13개소 중 구릉6·산복4·평지3, 3시기의 12개 중 구릉7·산복3·평지2, 4시기의 10개소 중 구릉6·산복4·평지0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체 41개소 중 5개소를 제외한 36개소(87.8%)가 구릉형 또는 산복형이었다. 이것은 시기별 일제의 통치 방향과 무관하게 구릉 또는 산복 지형이 신사의 입지로 선호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사의 구릉(산복)지 입지는 인간의 공간 심리를 이용한 일제의 시각적(상징적) 지배전략을 최대화시키는 입지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俯瞰이라 하며,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는 것을 仰觀이라 한다. 이때, 부감경과 앙관경은 인간에게 상반된 심리를 유발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경은 시각적인 편안함과 遠望의 즐거움을 제공하며, 위를 쳐다봐야 하는 앙관경은 존경심과 권위감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이에‘하늘과의 소통’등의 정신적 측면이 강조되는 종교용 건축물들은 동·서양을 떠나 대부분 높은 언덕이나 산 위에 자리한 경우가 많다. 건축물의 형태 또한 수평 대비 수직의 비율이 커 하늘을 향한 수직성을 강조하고, 진입 공간에 연단이나 계단을 조성함으로써 초월적 신비한 기운을 극대화시켰다. 평소‘낮은’곳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은 구릉지 위‘높은’곳에 있는 신사로부터 무의식적인 신성, 권위, 감시 등의 감정을 강요받았다.
신사의 구릉지 입지는 또한 풍수의 관점에서 유의미한 입지일 가능성이 높다. 풍수 고전『錦囊經』에서 풍수의 요체로서 가장 먼저 제시되어 있는 구절인‘乘生氣’는‘땅의 地氣를 타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이는 기본적으로 산의 능선(구릉)을 올라타야 가능하다. 특히 죽은 자(死者)를 위한 陰宅風水에서는 그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陽宅風水와 고을 규모를 다루는 陽基風水에서의 구릉지는 읍치 후방의 主山에서 읍치로 이어지는 산줄기(地脈)가 되거나, 읍치 주위를 감싸고 도는 四神砂가 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일제가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이다. 조선신사는 식민지 지배전략의 상징물로서 한반도를 總鎭守할 만한 곳이어야 했다. 이에 1차적으로 지리적·정치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인 京城이 선택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남산의 한양공원으로 결정되었다. 한양공원은 조선총독부청사, 일본인 거류지, 경성신사와 인접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구릉지 위를 타고 있음으로써, 시가지 전체를 조망하고 위압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풍수의 관점에서, 남산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내사산 중에서 경복궁의 案山이다. 이에 조선신궁은 경복궁 전면에 배치된 조선총독부와 함께 그 전시적 파급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신사와 읍치와의 관련성을 보면, 신사의 입지가 기존 읍치와 인접 및 인근에 있음(○, △)으로써 둘의 관련성이 높은 경우가 1시기는 6개소 중 3개소(50%), 2시기는 13개소 중 8개소(61.5%), 3시기는 12개소 중 7개소(58.3%), 4시기는 10개소 중 9개소(90%)였다. 특징적인 것은 일제의 통치 시기가 경과할수록 둘 사이의 관련성이 증가추세에 있는 것이다. 특히, 4시기인 1930년대 이후 건립된 신사의 입지는 이전 시기보다 읍치와의 관련성이 대단히 높다.
이것은 신사의 입지가 최초 단순한 종교적 목적에서 통치 후반부로 갈수록 정치적 양상을 갖게 된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즉 일제는 최초 일본 거류민의 경제성·접근성 등을 우선시해 신사를 건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사를 식민지 지배 목적을 위한 정치적 일환으로 활용했다. 이에 신사의 입지를 조선 읍치와 관련성이 높은 곳에 건립함으로써, 기존의 풍수 구성물과 충돌을 일으킬 개연성을 만들었으며, 1930년 이후 건립된 신사의 입지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신사의 입지와 각 도시의 철도역까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현상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표2>는 신사의 입지와 각 도시의 철도역까지의 거리를 통치시기별로 나타낸 것이다. 단 연구는 <표1>의 41개소 중 해당 도시의 철도역의 개통 년도가 확인되고, 또 신사 건립 년도가 철도역 개통 년도보다 늦은 신사 19개소만을 대상으로 했다. 신사가 철도역 개통 년도 이전에 건립된 곳은 신사의 최초 건립 당시 철도역의 입지가 신사의 입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신사 입지와 철도역까지의 평균 거리가 1∼3시기는 거의 유사했지만, 4시기에 들어 약 2배가 증가했다. 이것은 통치 후반부로 갈수록 신사의 입지가 읍치와의 관련성이 높아지는 것과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1∼3시기에는 신사의 입지가 일본 거류민들의 경제성 및 접근성을 따져 철도역과 가까운 곳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4시기에는, 신사의 입지가 정치적 목적에 부합될 경우에는 철도역과 다소 떨어져 있더라도 건립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읍치의 기존 풍수 구성물과의 상충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신사 입지와 풍수적 특성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 둘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통치시기별 신사의 입지에 풍수적 특징이 드러나는 개소가 1시기는 2개소(33.3%), 2시기 7개소(53.8%), 3시기 7개소(58.3%), 4시기 10개소(100%)로서 통치 후반부로 갈수록 신사의 입지에 풍수적 특징이 많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의 신사의 입지가 통치 후반부로 갈수록 읍치와의 관련성이 높아진 것과 동일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체 41개소 중 풍수적 특징이 개입된 26개소의 유형을 구분해 보면 신사가 읍치(고을)의 주산에 건립된 곳이 11개소(42.3%), 안산에 건립된 곳이 8개소(30.8%), 청룡이나 백호에 건립된 곳이 7개소(26.9%)였다. 주목할 점은 주산 및 안산에 건립 개소를 합치면 19개소(73.1%)로 아주 높은 비율인데, 이것은 신사의 입지가 읍치에서 시각적 상징성이 높은 곳을 차지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신사의 입지가 읍치의 주산에 위치한 비율이 가장 높은데, 이것은 풍수의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신사가 읍치의 주산에 자리하는 것은 주산에서 읍치로 이어지는 지맥을 끊거나(단맥), 중간에 가로챈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신사가 읍치의 뒤편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항상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는 심리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건립시기별 신사의 입지를 앞서 살펴 본 일제의 조선 풍수에 대한 인식 변화의 맥락과 비교하면, 둘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무라야마 지준의『조선의 풍수』(1931) 출간은 일제의 공간적 훼손을 바라보는 관점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기준이 된다. 즉 그 출간시기를 기준으로, 1920년대까지는 일제가 아직 식민지 통치사업에 풍수를 활용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을 시기였다. 그리고 일제는 1930년대 이후『조선의 풍수』출간을 통해 습득한 풍수적 지식을 식민지 통치에 일정 부분 활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1930년대 이후 건립된 조선신사의 입지는 조선 읍치와의 관련성이 높은 곳에 건립됨으로써, 기존의 풍수 구성물과 충돌을 일으킬 개연성을 높였으며, 특히 풍수적 특징이 개입되는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추세는 곧 1930년대 들어, 일제가 식민지 통치사업에 풍수를 활용할 가치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또 신사의 입지선정에 풍수를 활용한 풍수정치를 시행했음을 나타낸다.
경주신사의 입지와 풍수정치
경주에서의 신사는 경주군내 각 면마다 있었고, 읍내에는 두 곳이 있었다. 읍내에 있었던 신사 두 곳을 보면, 먼저 현 경주교회(동부동) 뒷마당 부지에 있었던 경주 신사(太神宮 慶州遙拜所)가 있다. 경주 신사는 1930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 곳은 현 황성공원 충혼탑 자리의 황성공원(신라 숲) 신사이다. 황성공원 신사는 일제 말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2>는 일제강점기 경주읍내 시가지도(1931년)이다. 이 지도는 일제가 식민통치 기반을 확실히 다진 시기인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기 경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제 때, 경주 시가지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옛 조선관아 터를 기반으로 군청, 경찰서 등 식민통치기관이 집중된 경주읍성 내 관청구역이며, 또 하나는 경주민이 대대로 살아왔던 남문과 동문 밖 지역이었다. 이때, 일본인들의 회사 및 가게들은 本町(현 봉황로)과 樓町(현 중앙로)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중심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경주역은 1936년 성동동 경주역이 신축개설되기 전으로서, 현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인 사정동(1918년 개통)에 있었다.
이를 통해 경주 신사의 입지를 살펴보면, 경주 신사는 조선 시대 당시 읍성 남동쪽 모서리 지점으로 軍器庫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1910~192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신사는 당시 경주시가지에서 가장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당시 경주신사의 입지가 시가지 중심부에 있어 상징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경주 거류 일본인들의 경제성·접근성이 더욱 고려된 위치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입지 형태는 1920년대까지의 전국의 조선신사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의 사정동 철도역에서 경주신사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0.8km로서 여타의 조선신사와 유사한 형태인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추정)에 황성공원 신사가 건립된다. 경주신사가 황성공원으로 옮겨간 원인은 1936년 성동동 경주역이 신축개설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경주시가지 중심 도로는 시가지 중심부를 동서로 가르며 경주역에서 중앙시장을 연결하는 화랑로이다. 그러나 화랑로는 성동동 경주역 개설 전까지 본정과 누정에 못 미치는 작은 길에 불과했다.
이후 성동동 경주역의 개통은 경주시가지 변화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었다. 화랑로가 확장 및 연장되었고, 상권을 철도역 인근(성동시장)으로 이동시켰으며, 경주역 앞을 지나는 원화로가 포항과 울산을 잇는 주 통로로 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주에 새 신사를 짓자는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황성공원 신사가 건립된 것이다. 그런데 황성공원 신사의 입지는 원화로 확대로 인해 이전보다 접근성이 나아진 측면도 있었지만, 경주민들에 대한 황성공원의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된 입지라 할 수 있다.
풍수에서는 터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사신사라고 한다. 사신사는 터의 후방을 받치고 있는 玄武(주산), 앞의 朱雀(조안산), 좌우측의 靑龍과 白虎로 구성되며, 터의 사방을 둘러싸고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내부의 생기를 보호해주는 역할(藏風)을 한다.
그 중 풍수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주산이다. 주산은 터의 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특히 주산이 터의 북쪽에 있을 경우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건축 및 난방 기술이 미발달했던 우리나라의 과거 선조들에게 추운 북풍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산이 다른 사신사와 차별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은 터와 직접 산줄기(용맥)로 연결되어 있어 그 기운을 터에 전달해 주는 것이다.
현 황성공원 일대는 경주 읍내의 상징적인 주산이라 할 수 있다(그림3). 풍수의 주산이 터와 산줄기가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경주 읍내의 지맥은 동쪽의 토함산에서 이어져 왔기에 현 황성공원 일대는 풍수의 측면에서 완전한 주산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남향인 경주 읍내의 뒤를 받치고 있는 측면에서 상징적인 주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주의 지세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임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이 유난히 텅 비어 있다. 북쪽의 소금강산이 동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예로부터 경주인들은 차가운 북서풍을 막고자 동쪽의 소금강산에서부터 서쪽의 西川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숲(高陽藪)을 조성했던 것이다. 신라시대 때는 이곳이 수렵지로도 활용되었다는 기록에서 숲의 면적이 광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숲은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공원구역’으로 난개발이 제한되고 있다.
물(水)의 관점에서 보면, 황성 숲 일대는 경주 읍내의 水口가 된다. 풍수에서는 하나의 流域 내 모든 支流들이 모인 本流가 유역 밖으로 흘러나가는 출구 지점을 水口라 칭하여, 吉地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건의 하나로 다루었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수구가 좁은 것(水口關鎖)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수구가 벌어져 있어 물이 유역 밖으로 쉽게 빠져 나갈 경우 물과 함께 생기와 재물이 빠져나간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경주는 북쪽이 텅 비어 있어 수구가 벌어져 있는 형국이다.
高陽藪는 바람(風)과 물(水)의 측면에서 경주 읍내의 풍수적 결함을 보완해 주는 비보 숲으로 조성되었다. 풍수의 관점에서 모든 땅은 풍수적 흠결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며, 풍수적으로 완벽한 땅은 없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그래서 땅이 지닌 흠결을 보완하고 좀 더 사람이 살만한 땅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논리 체계를 裨補라고 한다. 풍수의 비보 개념은『청오경』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에서 등장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그 연원을 道詵國師(827~ 898)로 보고 있을 만큼 뿌리가 깊다.
이에 우리 선조들은 숲, 탑, 연못 등 마을의 비보적 조형물들을 마을의 존립과 동일시함으로써, 이들을 신성시하고 보호하기 위한 각종 노력을 기울여 왔다. 고양수 또한 북쪽이 텅 빈 지세를 비보하기 위한 조성된 숲이었다. 그 명칭 또한‘지명비보’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경주 읍내의 북쪽에 높은 산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숲의 명칭에‘높음(高)’,‘밝음(陽)’의 명칭을 부여했다. 高城 또한 숲 속에 자리한 산으로 볼 수 없는 작은 구릉(獨山)에 불과하지만, 명칭에 역시‘高’자를 달고 있다. 이처럼 황성공원 숲은 오랜 세월 동안 경주인의 무의식 속에 단순한 숲이 아닌 경주의 존립과 동일시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성공원 신사는 경주인이 풍수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곳에 입지함으로써, 그 입지선정에 풍수가 활용된 일제의 풍수정치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1930년대 전국의 조선신사의 입지와 맥락을 같이 한다. 즉 황성공원 신사는 단순한 종교 및 경제적 측면을 넘어 일제의 경주인에 대한 식민지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입지한 것이다. 황성공원 신사와 성동동 역과의 거리 또한 약 1.7km로서, 경주신사와 사정동 역과의 거리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한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