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한살이
이진표
가을 들판에 쇠락하는 풀들을 볼 땐 인생만 고행이 아니고 하찮은 풀 한 포기라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민들레가 그러하다. 10월의 민들레는 더욱 그렇다.
어릴 때는 민들레를 좋아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민들레를 그렸고, 노래를 부를 때도 민들레 노래를 불렀다. 양지바른 골목에서 소꿉놀이할 적에는 민들레 잎을 따다 반찬을 만들었고, 민들레 꽃은 밥이 되었다. 진달래가 온 산을 덮고, 개나리가 개울가를 노랗게 물들여도 길섶에 노랗게 핀 민들레가 그렇게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민들레의 아픔을 몰랐다.
지금은 민들레를 보면 측은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민들레 일생은 출발부터 험난하다. 더러는 예외도 있지만, 어디서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데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내민다. 그 작은 씨앗이 *갓털(관모)에 몸을 의지하고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떠다니다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내려앉았다. 노변도, 자갈밭도 좋고 아스팔트길 틈도 피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일생의 시작이다. 그러나 언제 싹을 보일지 기약이 없다. 물기 하나 없는 맨땅에서 싹을 틔울 그날을 기다리는 작은 생명이 애처롭다.
어쩌다 기다리던 싹은 틔웠다지만 언제 생명마저 잃는 수난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 민들레의 삶이다. 태풍에 언덕이 무너지고 땅이 파여 달아날 때는 함께 떠내려간다. 세찬 물결에 휩쓸리다 나뭇가지에 걸려 천신만고 끝에 생명을 건지기도 한다. 민들레가 겪는 세상 풍파다.
또한 이른 봄이면 채 자라지도 않은 어린 민들레를 뽑아다 김치를 담그고 나물로 무친다. 요즘은 발한과 강장에 좋다는 소문으로 뿌리 째 뽑히는 수난을 당한다. 근래에는 세계화의 바람으로 외래종에 밀려 점점 세를 잃어가고 있다. 살아가는 터전마저 빼앗기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고 있으니 생명을 부지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 민들레의 신세다.
뿐인가. 땅이 탈 듯 내리쬐는 땡볕에도 갈라질 듯 목이 타는 가뭄에도 땅바닥에 몸을 붙이고 산다. 지나가는 소들이 사정없이 짓밟아도 피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뭉개도 달아나지 못한다. 그래도 민들레는 흔들리지 않았고 원망도 저주도 하지 않았다. 만난이 닥쳐도 자신을 지켰다. 억척같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다.
더구나 민들레는 줄기가 없다. 땅속뿌리에서 잎이 나온다. 그래서 언제나 땅바닥에 몸을 붙이고 살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조차 어렵다.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마치 숨어 사는 은자처럼 겸손하니 참으로 가련하다. 그러나 아무리 찢기고 망가져도, 주렁주렁 꽃을 달고 뽐내는 개나리를 돌아보지 않았고, 온 산을 분홍으로 물들이는 진달래도 외면한 채 앙증맞은 꽃을 피우며 다소곳하고 차분하다. 안분지족의 삶이다. 오로지 먼 뒷날 찾아올 그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딘다. 그러다 꽃을 피울 때는 꽃대를 높이 밀어 올린다. 조금이라도 씨앗을 멀리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는 자식 잘되라고 떠받드는 모정 같은 마음이다.
이런 민들레가 가을이 되어도 끈을 놓지 못하고 마지막 꽃대를 밀어 올린다. 어찌하여 이 늦게 꽃이냐고 물으면 찢어지고 구겨진 지난날의 상처를 내민다. 제대로 성한 곳이 없다. 그래서 봄에 피는 민들레보다 가을에 피는 민들레가 더 애처롭다.
가을 바람에 잎마저 말라버린 꽃대가 갓털을 나부끼며 떨고 있다. 민들레의 백발인가! 날 가고 달 가면 끝내는 백발까지도 다 떠나고 꽃대만 외롭다. 일생 내내 소망이었던 분신을 갓털 하나에 실어 어딘지도 모른 채 날려보내고 맨몸으로 바람에 견디는 민들레 꽃대에서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는 배고픔에 못 견디어 기약 없이 집을 떠난 아이가 동네마다 많았다. 가난에 쫓겨 고향을 버리고 마치 갓털에 매달린 민들레 씨앗처럼 정처 없이 떠났다. 이리저리 살 곳 찾아 헤매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피땀으로 살다, 지금은 자식들 모두 떠나고 홀로 남은 노인으로 외롭다. 나 역시 소농가에 태어나 계속되는 흉년과 가난에 예외일 수 없어 고향을 뒤로하고 도시로 떠나왔지만 전쟁으로 피폐한 세상인심은 야속하기만 했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가는 나날은 자갈밭에 뿌리내린 민들레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지금은 자식들 다 떠나고 홀로 남아 외로우니 이 또한 인생 늦가을 찬바람에 견디는 민들레 꽃대가 아닌가. 그러나 민들레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민들레 한살이는 생명의 끈에 매달린 고행이다. 칠전팔기 인생보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다. 굽이굽이 몰아치는 수난에도 끝내 씨앗까지 날려보내고 이제 헐벗은 몸으로 찬바람에 떨고 있는 민들레 꽃대가 오늘따라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헐벗은 꽃대, 위대한 일생이다.
*갓털(관모) : 씨방의 맨 끝에 붙어 있는 솜털 같은 것. 꽃받침이 변해서 된 것으로, 민들레나 버들개지 따위에서 볼 수 있음.
=======저자 소개 <제2호> 참고========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