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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 사상/철학
『老子哲學』이것이다
도올 김용옥/ 1989 / 통나무 ♧『老子』라는 책의 저작 시기와 「老子」라는 그 사람
•『老子』라는 책은 다음과 세 가지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1) 한 사람의 저작이었다는 가설을 견지한다.
• 만약 다수의 저작 선집(anthology of Taoist sayings)이라면 그 편집인과 저작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사람과 지명, 사건 등의 고유명사가 반드시 명시되었을 것인데 『老子의 道德經』에는 고유명사가 전무하다.
• 그리고 『도덕경(道德經)』의 문체가 『논어(論語)』나 『맹자(孟子)』와 같은 문답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답체가 아니기 때문에 『논어(論語)』나 『맹자(孟子)』에 앞선다고 본다.
•『노자(老子)』의 문체에 있어 주목할 사실은 2인칭이나 3인칭을 나타내는 인칭 대명사가 전무한 반면에, 1인칭 대명사는 수도 없이 나온다. (吾, 我 등)
• 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天下莫能知, 莫能行。... 내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하늘 아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
• “知我者希則我者貴 ... 나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의 가치는 높다.”
• 54장 “吾何以知天下然哉以此 ... 나는 어떻게 천하가 그러한지를 아는가? 이것으로 안다.”
• 4장 “吾不知誰之子 ... 나는 그것이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겠다.”
• 20장 “衆人熙熙, 我獨泊兮。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遣,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 뭇사람은 희희낙락한데 나 홀로 담담하고, 뭇사람은 모두 여유가 있는데 나 홀로 부족한 것 같고, 세상 사람들은 밝고 밝은데 나 홀로 어둡고 어두운 것 같고, 세상 사람들은 너무도 세상을 잘 아는데 나 홀로 모르고 답답하다.”
(2) 이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논리적 일관성이다.
• 전 작품이 상호 모순되거나,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관성 다인(多人)의 생각 파편의 연합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그 작품과 한 인간의 마음의 합일된 경지에 내재하는 유기적 통관성(inherent organic coherence) 이라 함이 더 옳을 것이다.
• 이 작품의 분량이 중국의 문헌 사상 단행본으로서는 가장 적은 분량에 속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이 1인의 저작이라는 강력한 논리를 제시한다.
• 『老子의 道德經』은 불과 5천 자(字) 밖에 되지 않으며 사상과 문체에 상호 모순이 없다.
(3) 또한 그 저작 인물이 황실 도서를 관장하던 사관(史官)으로서 역사가였다는 가설이다.
•『老子』의 제작 연대가 동주(東周), 춘추 말기, 공자와 동시대라고 생각한다. “공자(孔子)는 주(周) 나라에 가서 예(禮)를 노자에게 물으려 하였다.”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 이 사건에 관한 구체적 상황을 증명할 길은 없다. 단지『대대 예기(大戴禮記)』, 『소대 예기(大戴禮記)』, 『장자(莊子』, 『여씨 춘추(呂氏春秋)』, 『사기(史記)』의 「공자 세가(孔子世家)」, 「중니 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등의 자료에 의하여 이러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 동서고금을 통하여 “행간(行間)을 읽으라.”(Read between the Line)라는 독서법의 명언이 보여주듯이 중국 고전을 해석함에 있어 그 글의 장․구(章․句)에 얽매여 좁게만 보지 말고, 그 배면에 함장 된 의미의 전체성을 포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고대사회로 올라갈수록 역사적 연속성(historical continuity)은 요즘보다도 훨씬 더 지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라오쯔(老子)라는 사람은 사관(史官)으로서 자기 자신이 爲政之事(정치를 행하는 일)를 직접 경험해 보고, 소위 치술(治術)에 정통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모든 치론(治論)이 실제적으로 “성인”(聖人)을 주어로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그가 단순한 은자(隱者)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성인지치”(聖人之治)라는 것은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치술이다. 곧 통치자를 가깝게 하고 있었던 석학, 즉 사관(史官)으로서의 통찰력이 근저에 깔려 있다.
•『한서(漢書)』(저자 : 빤 꾸(班固) 의 「예문지(藝文志)」에서 도가(道家)를 규정하는데 있어 “도가(道家)라고 하는 일련의 사람들(流)은 대강 사관(史官)으로부터 나왔다.”라고 웅변하였다.
•「예문지(藝文志)」가 말하고 있는 도가철학(道家哲學)의 노자에 대한 다섯 가지 사실을 미루어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 『노자(老子)』의 저자는 원래 사관(史官) 출신이다.
(2) 노자 철학은 역사(古今)의 흥망성쇠와 화복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기술하여 얻은 역사 경험적 지혜이다. 즉,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을 근간으로 한다.
(3) 노자 철학은 군인(君人)이 남면(南面, 통치하다) 하는 예술(기술), 즉 남면 지술(南面之術)이 그 원래의 내용이다.
(4) 라오쯔 철학의 제일 기본 개념은 “청허”(淸虛), “비약”(卑弱), “양겸”(讓謙) 류의 것이며, 원래 치정 방법(治政方法)으로서 그 존재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5) 후대의 극좌파들이 라오쯔로부터 정치성을 배제해 버리고 사회적 도덕과 질서를 부정하는 극단적 기피주의(escapism)로 흘러 라오쯔 철학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었다.
• 청말(淸末)의 사상가 지앙 쥐엔(강천, 江瑔)은 그의 저서『독자 치언(讀子巵言)』(제자서(諸子書)를 읽는데 필요한 달통한 견해)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서(漢書)』의 저자 빤 꾸(班固)가 말하는 九流(아홉 개의 학파)가 비록 가지는 나뉘고 그 파가 다르지만 모두 옛날의 사관(史官)에서 나왔다. ... 대저 옛날에는 일체의 학술이 官에 있었지 民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民이 한 가치를 표방하고 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러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일어남은 모두 주도(周道 )가 쇠한 이후의 일이다.〕”
• 지앙 쥐엔(江氏)에 의하면 사관(史官)이야말로 백관(百官)의 남상(濫觴)이다. 상고(上古)시대에 있어서 그 정치가 간(簡) 하였고, 그 정치가 단(單) 하면 官 또한 간(簡) 하였고, 官이 간(簡) 하면 學이 또한 간(簡) 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史가 성(誠) 하고 무(巫)가 쇠(衰) 하게 되어 일체의 관직이 史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다. 官이 있으면 반드시 그 관장하는 일(事)이 있게 되는데, 이 사(事)라는 글자 또한 史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옛사람들은 史로서 백관(百官)의 총칭으로 삼았으니 史 이외의 官 이라고 말할 것이 따로 없다. 그리고 무(巫)는 부녀들로 충당하였다. ... 주말(周末)에 이르면 무(巫)가 거의 종식되었던 것이다.
• 지앙 쥐엔(江氏)의 이러한 논의는 청대의 학술 경향 중에서 가장 강력한 논의 중 하나였던 “육경 개사”(六經皆史)의 논점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도서를 육류(六類, 여섯 카테고리)로 구분한 것을 검토한 후 마지막 二類인 수술(數術)과 방기(方技)는 무(巫) 계열의 학문 전승으로 보고, 四類는 육예(六藝), 제자(諸子), 시부(詩賦), 병서(兵書)는 모두 사(史) 계열의 학문 전승으로 본다. 그러므로 육경 개사(六經皆史)란 말은 곧 육예(六藝), 제자(諸子), 시부(詩賦), 병서(兵書)에 들어오는 카테고리에 들어오는 모든 책이 결국 史이며, 곧 사관(史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 제자(諸子)의 학문이 道家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육경(六經)은 모두 라오쯔에게 근본으로 한다. 소위 사고(四庫)식 분류의 경(經) 류와 자(子) 류가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같이 나온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 ”역사에는 과거란 없다.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다.”
♧『노자』 주해에 관한 문제
• “합리성(rationality)을 투과하여 초 합리성(transrationality)에 도달한다.”라는 방법론은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이나 기타 유사한 사상체계에서 충분히 거론된 것이지만 초 합리성은 비합리성(irrayionality)이 아니며, 합리성이 포함되는 그 무엇이다. 합리가 부정되는 비합리가 아니라 합리가 통섭되는 고차원의 새로운 의식의 규정이다.
• (콜링우드) ... 역사는 사가가 연구하고 있는 역사의 생각을 사가의 마음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역사의 사실이 아니라 역사의 생각(the thought of history)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실체화될 수가 없다. 즉 재현(re-enactment) 한다는 것은 “있었던 것을 다시 보인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는 작업과 “있었던 것”을 “있는 것”으로 옮기는 작업으로 구성한다. 다시 말해서 “재현 한다”라는 행위는 “재”(다시)라는 시간성이 개제되고 있는 한, “있었던 것”을 “있는 것”으로 암암리에 전제하는 의식의 지향성이 반드시 개재되어 있다.
• 우리의 재현하는 의식의 행위는 그 과거의 대상을 막연하게 “있었던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관계는 일방적이고 연역적인 관계일 수만은 없다. 그 “있었던 것” 자체가 나의 의식의 작업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 “있었던 것”이라는 실체를 먼저 인식하고 그 실체로부터 나의 의식의 구조를 연혁 해내는 것은 아니다.
•『노자』라는 텍스트 그 자체의 규명은『라오쯔』라는 텍스트가 현현하고 있는 의미구조를 밝히는 작업이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원초적 해답은 “라오쯔를 가지고 라오쯔를 해석한다.”(以老解老) 라는 것이다. 즉,『노자』라는 텍스트에 현현되고 있는 의미구조의 상호 연관성 속에서 그 총체적 의미(holistic meaning)를 찾아내는 것이며, 또 이러한 작업은 『라오쯔』라는 텍스트와 관련된 많은 다른 텍스트를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이러한 『노자』의 통시적 이해의 장(場)을 우리는 “주(注)”라고 부른다.(주해(注解) 혹은 주석(注釋)이라고도 부른다. 주(注)에 대한 주해를 “소(疏)”라고 부르는데 외경(外經)의 경우는 ‘소’가 별로 없다. 이외에도 『老子』의 경우 역사적으로 지귀론(指歸論), 치요(治要), 의소(義疏), 의림(意林), 해(解), 평주(評註), 집해(集解), 의해(義解), 구의(口義), 통의(通義), 익(翼), 통(通), 석략(釋略), 연(衍), 석사(釋辭),정해(精解), 문귀(文歸), 단주(斷註), 측(測), 변(辨), 석의(釋義), 통고(通考), 성문(成文), 술의(述義) 등 등 다양한 표현이 ‘주(註)’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라오쯔』의 이해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한 주해서로는 천재 소년 왕 삐(王弼)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왕 삐의 ‘주(注)야말로 『노자』의 주석 (註釋) 사상 최고의 권자를 누렸다. 왕 삐의 주석이야말로 합리의 극한까지 밀고 나갔으며, 또 합리에 얽매이지 않은 초 합리적 심경(心境)에서『노자』라는 텍스트를 조감(照鑑) 하고 있다.
• 왕 삐(王弼)가 『易』의 注를 단 후에 자기가 『易』을 주해한 방법과 입장 그리고 자기 자신의 『易』注에 나타난 사상을 주제별로 총괄하여 개술한 논문이 바로 주역 약전(『周易略傳』)이다. 이『略傳』의 「명상(明象)」에 나타나고 있는 “득의망상(得意忘象)론은 『장자(莊子)』「외물(外物)」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得魚而忘荃, 得免而忘蹄”(고기를 얻으면 삼태그물을 버리고, 토기를 얻으면 올가미를 버린다)의 사상을 적용한 것인데, 『周易』의 주석서에 있어서 후쿠나가 교수의 지적대로 “망언의 혁명(妄言 革命)을 이룩한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 “뜻을 얻기 위해서는 상(象)을 버려야 한다.”라고 했을 때 왕 삐가 말하는 “뜻”이란 살아있는 인간의 역동적 삶의 주체적 의미이며, 또 그가 말하는 “상(象)” 이란 그것이 고정화되고 객관화되고 실체화되어버린 시스템이며 심벌이다. 그리고 주역(周易) 주석사적으로 말한다면 한대(漢代)의 번쇄한 상수학적(象數學的) 해석이다.
♧ 공자(孔子)의 술(述)의 내용은 육경(六經)의 산정(刪定)이었다.
• “나는 예부터 내려오던 것을 기술만 하였지 창작하지는 않았다.”(述而不作, I am a transmitter, not a creator)라고 공자의 이 말은 축적되어 내려온 기존 문명의 전범(物)에 대한 해석학적 행위(hermeneutical)를 통하여 새로운 문명의 논리를 창출해 보겠다는 공자의 의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의 작(作 )이 아닌 술(述)이야말로 중국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해석학적 기원“(hermeneutical epoch)의 작(作)이었다.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 자체가 해석의 여지와 억측의 가능성을 무궁하게 내포하고 있다. 공자가 세상의 道가 쇠미해져가는 것을 우려하여『서전(書傳)』『예기(禮記)』『악(樂)』『시(詩)』『역(易)』『춘추(春秋)』라는 여섯 개의 서물(書物)을 편찬하였다는 것은 상식적 한마디로 귀결된다.
•『논어(論語)』에서는 “詩書禮樂”이라는 말조차도 하나의 관용구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에 형성된 관용구이지만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커리큘럼으로써 “詩書禮樂”은 관용구적으로 같이 붙어 다닌다. 이 말은 곧 공자라는 인간과 “詩書禮樂”은 어쨌든 깊은 관련이 있지만 “易 春秋”와는 직접적 관련을 맺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우리가 지금 육경(六經)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사전(寫傳) 된 가장 확실한 전적(典籍)은 『詩』『書』였을 것이며, 오늘날 『詩』『書』의 텍스트가 공자의 손(手)을 거친 것이라는 사실은 안심하고 전제할 수 있으나, 『禮』『樂』은 텍스트로는 부재하는 어떤 의식, 어떤 정감의 질서나 혹은 기하학적 비율의 소리 질서에 관한 교양이었을 것이며, 『易』이란 점(占, prognostication)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행위를 중심으로 발전된 삶의 예지나 과학적 우주론의 저급 문화(sub-culture) 적 교양으로서 매우 엉성하게 분포된 구전(口傳)이었을 것이다.
• “詩書禮樂易春秋의 六經”이라는 구문은 경전에 대한 문헌적 사실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육경(六經)”이라는 개념이 독립적으로 성립했다는 역사적 상황의 정보와 그 六經의 내용이 “詩書禮樂易春秋=六經”이라는 기존의 관습적 어구에 의하여 공자라는 역사적 인물의 성격을 전달해주고 있을 뿐이다.
• 공자가 동아시아 문명권 최초의 제국 논리의 정당화의 주체로서 5세기 후에 갱생되었는가 하는 인류 보편사적 기운의 단초는 바로 “六經의 政經化”(the conoization of Six Classics) 였으며, 육예(六藝)를 육경(六經)으로 경화(經化) 시킬 수 있었던 바로 그 권위의 주체로서 공자는 제국 문명의 탄생과 더불어 갱생되었던 것이다.
• “六經의 등장”은 이러한 생활의 양태 변화에 수반된 문명의 인위성(artificiality)의 급증한 요구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등장한 역사적 과정이며, 이러한 “六藝의 六經化” 없이는 제국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정신적 유대의 “풀”(social glue)이 생산될 수 없었던 것이다.
• 공자의 손을 거쳤다고 상정되는 여섯 개의 서물(書物)을 “경(經”이라고 부르고, 그 외의 모든 전적(典籍)을 “전(傳)”이라고 부르려고 노력했던 흔적, 그렇게 함으로써 “經”의 권위를 공자의 권위와 더불어 확립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은 진한(秦漢) 시대 특히 유가(儒家) 계열의 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사이라는 것은 당대의 문헌에 의해서 쉽게 입증될 수 있다.
• 경(經)이란 “항상 기준이 되는 불변의 道를 담은 전적”이며, 전(傳)이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여 보이기 위한 전적”이라는 것이 “經”에 대한 풀이이다.
• 정경(正經)의 권위(orthodox Classics)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주체로서의 공자의 등장이 곧 동아시아 문명권 최초의 제국 문명의 이데올로기로서 경학(經學)을 내용으로 하는 유교(儒敎, Confucian orthodoxy)의 등장을 의미한다. 『장자(莊子)』「천운(天運)」편의 六經 기사로부터 한 무제(漢 武帝)의 독존 유술(獨尊儒術)과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의 설치, 쓰마 치엔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형성되어가는 제국 논리의 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공자의 인학(仁學)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인간이 인간다운 것을 배우는 인문학의 기초적 커리큘럼을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어서 최초로 형성시키려고 노력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한 제국(漢 帝國)의 제국 논리의 맥락을 타고 새롭게 형성된 “경학(經學)”의 핵심을 형성했던 것이다.
♧ 제도사의 몇몇 암시
•『라오쯔』17장 “백성들이 모두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한다.’라고 한다.(百姓皆謂我自然) ... 임 말은 그들의 삶에 흐름에 있어 국가가 의식(인식) 되는 법이 없이 자기의 존재성이 그 존재성의 ”스스로 그러함“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자각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백성이 모두 자기를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고 느낄 때만이, 즉 국가가 국가에 소속한 개인들에게 국가의 존재를 인식시키지 아니할 때만이 그 국가가 정치는 올바르게 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 일본의 오규우 소라이(적생 조래, 荻生徂徠)는 『예기(禮記)』「악기(樂記)」에 있는 “作者之謂聖述者之謂名”이란 말을 빌려 성인(聖人, sheng-jen)이란 개념을 작자(作者, the Maker)로 규정하였고, 따라서 성인이 성인 다운 소이는 바로 작(作)의 행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제작(製作)을 했다는 사실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즉 제작을 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성인이 된 것이다.
• 그 성인이 제작한 것은 “예악(禮樂)”이며, 예악이란 바로 다름 아닌 인간(사람 사이) 문명 제도의 총칭(the abstract and total concept of civilized institution)이다. 그런데 이런 예악은 “六經”이라고 하는 “古辭 ”속에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이 六經(詩 ․ 書 ․ 禮 ․ 樂 ․ 易 ․ 春秋)을 단순한 문자 형상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바로 “선왕 지도(先王之道)” (先王 즉 성인의 길)라고 본다. 先王之道는 천지자연의 자연론적 道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先王이 의도적으로 제작한 道이며 그것은 작위(作爲)의 세계며, 사회(무리)를 인간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행(行)의 길이다.
• 이제론(里制論) → 봉건제론(封建制論) → 군현제론(郡縣制論) → 성읍제국가론(城邑制國家論)
• 자연취락의 기본 특성인 자연성과 혈연성이 모두 파괴된 데서 비로소 발생하는 취락 형태를 통틀어 “인위취락(人爲聚落)”이라는 포괄적 개념으로 놓고 볼 때 자연취락(自然聚落)과 인위취락(人爲聚落)의 양상(兩相) 개념이야말로 우리가 논의해온 인류의 리제사(里制史)의 가장 보편적이며 공시성이 구분되지 않는 지속적 개념이다. 이것이 라오쯔 철학의 주요 양상 범주인 ‘자연(自然)과 인위(人爲)’ 혹은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관념인 구체적인 레퍼런스(reference) 시스템이기도 한 것이다.
• 철학사의 양상 범주인 무위(無爲)와 유위(有爲), 제도사의 양상 범주인 봉건(封建)과 군현(郡縣), 이제사의 양상 범주인 자연취락(自然聚落)과 인위추락(人爲聚落)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긴장 속에 내재하는 중용의 양단과 같은 것으로서 서로 정확한 대응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 봉건제도(封建制度)는 기본적으로 혈연성과 지연성이 자연적으로 확보된 자연취락을 기반으로 성립한 인간 무리의 작위 형태이며, 군현제도(郡縣制度)는 다름 아닌 현연성과 지연성이 파괴되는 곳에서 성립하는 인위취락을 기반으로 성립한 인간 무리의 작위 형태이다.
• 유가(儒家)다, 도가(道家)다, 묵가(墨家)다 하는 춘추전국의 諸 학파가 모두 그 제도적 근원에 있어서 자연취락에 기반을 둔 봉건제의 제반 용태를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쟁명(爭鳴 : 다투고, 울고) 할지언정 모두 동일한 형이상학(칸트적 오성(悟性) 범주 + 사회 ․ 역사적 지평)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 그에 반하여 법가(法家)는 인위취락의 새로운 인간(사람 사이) 이해에 기반을 둔 군현제의 이데올로기로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 도가(道家)는 인간 제도의 지방분권을 극단화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체제적 ․ 아나키스틱 한(해방론적) 사유체계이다. 그에 반하여 인간 제도의 중앙집권을 극단화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친 체제적 ․ 자유 구속적 사유체계가 바로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가 대변하는 법가(法家)이다. 바로 이러한 중용성과 포괄성을 지향하는 전개가 인류사의 보편적 주선(主線)이었다는 데 유가철학(儒家哲學)의 보편성과 지속성이 있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유가적 질서 체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학적 사실이 의립(疑立, 우뚝 섬) 하는 것이다.
• 춘추전국시대, 특히 전국시대에 활발해졌지만, 그 시대의 인위취락 형성 과정은 자연취락의 파괴보다는 새로운 인위취락의 개간 ․ 개척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위취락은 고대사의 문헌에서 소위 “초현(初縣)”(『史記』의 용례), “신현(新縣)”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잇는데, 이때의 “현(縣)”이란 특정한 마을의 사이즈를 지칭하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마을의 행정화”라는 추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새겨야 마땅하다. 즉 “자연촌(自然村)”에 대한 “행정촌(行政村)”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현(縣)의 대폭 증가가 결국 “군현제(郡縣制)”라는 거대한 제국의 제도를 인류에 선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 “군현제(郡縣制)”란 결국 이렇게 새로 증가한 초현(初縣), 신현(新縣)의 대폭적 조직에 의하여 온 땅을 행정화해 버린 사건을 의미하며, 이 과정이 대강 BC 4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격렬하게 일어난 점진적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따라서 신현(新縣)은 일차적으로 군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이것은 작제(爵制)의 최초의 성격이 무용(武勇)을 보상하는 “군작(軍爵)”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신현(新縣)의 확산 ․ 확대는 성읍제 국가(城邑制 國歌)의 최대 과제였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이란 슬로건의 실제 내용이다. 춘추전국시대의 諸子百家, 諸 학파의 사상체계가 사회 현실의 구제 방책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인간 욕망의 확대, 그 인간론적 주체에 일치하고 있다.
• 예를 들면, 종횡가(縱橫家, strategicians)와 같은 諸子들은 현실적인 부국강병책의 전략을 제시하는 얄팍한 이론가들인데 반하여,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숭상하는 유가(儒家)들은 그러한 부국강병의 공리주의를 반대하는 인정(仁政)의 모럴리스트라는 인상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 실 내용에 있어서 유가(儒家)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부국강병론자 들이었다.
•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인정(仁政)은 인정(人政)이다. 상앙이나 한비자가 법을 질서의 준칙으로 삼는 “법치(法治)”를 주장한다면 공맹(孔孟)의 인정(仁政)은 “인치(人治)”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인정(仁政)이란 인정(人政)이며 인치(人治)다. 곧 “사람의 다스림”이다. “사람의 다스림”이란 “사람의 모음 ․ 사람의 끌어들임)”이다. 곧 인구의 확대를 의미한다. 인구 곧 노동력이야말로 부국강병의 근원적 힘이다.
•『상군서(商君書)』(상자『상자(商子)』라고도 한다)는 전국(戰國) 초엽 진(秦)나라의 부국강병을 꾀한 위대한 현실 정치가 상 양(商鞅, 상앙)의 저서이다. 상 양(商鞅)은 위(衛) 나라의 공자(公子)로서 성이 공손씨(公孫氏)이며, 공손앙(公孫鞅), 위앙(衛鞅)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상군(商君) 혹은 상앙(商鞅)이라고 불리는 것은 후에 진(秦) 나라에 등용되어 개혁 정치의 공로로 商五十邑(협서 성 상현)에 분봉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웅지를 품고 진(秦) 나라 왕 효공(孝公)을 만나 정치를 논하고 강병(强兵)의 술(術)을 설(說) 하여 공감을 얻고 등용되어 “변법(變法)의 정책”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상군서(商君書)』「래민(徠民)」(徠는 올 來字의 古字임) 편에는 진나라가 피폐해지고 인구가 분산되어 허약해진 상황 타개를 위해 진왕에게 애타게 헌책하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그 헌책의 내용인즉, 주변 三晋(韓 ․ 魏 ․ 趙)의 民을 유치하여 진나라 땅을 개발시킴으로써 적국인 三晋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 래민(徠民)은 곧 三晋의 民을 秦의 땅으로 오게 만드는 술책으로 오늘날의 “이민론(移民論)”이 되는 것이다. 래민(徠民)의 기사 중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민의 목적과 동기이다. 여기서 이민의 목적이라 함은 왜 하필 이민을 시켜야만 하는가? 어떠한 내재적 목적에서 이민이 장려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 「래민(徠民)」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의 역비례 곡선의 패러독스! 다. 강병(强兵, military power, 군사력)에 힘을 쓰게 되면 자연히 부국(富國, economic power, 경제력)이 소홀하게 된다. 역으로 부국(富國)에만 힘을 쓰면(安居하여 논사만 짓게 하면) 적이 휴식을 취하게 됨으로 상대적으로 전세의 불리함을 초래한다. 바로 이러한 부국과 강병의 모순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설정되고 있는 「래민(徠民)」저자의 의식은 바로 래민(이민)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예를 들면 三晋의 경우는 “땅이 좁은데 비하여 사람이 많아 주택난의 문제가 심각할 정도”이며, 이에 반해 秦나라의 경우는 “인구가 부족하여 도저히 땅을 채울 수 없도록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이민의 필요 불가능성이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진 나라의 넓은 땅에 대적국인 三晋의 民을 이주시켜 부국과 강병의 패러독스, 즉 재력과 폭력의 모순을 해결한다는 병가(兵家)의 술책(術策)을 논구하고 있는 것이다.
• 무조건 동점(東漸)(진은 西에, 삼진은 東에 위치)의 팽창주의는 무모한 짓이며, 보통 군사력의 반만 있어도 그 군사력이 다 소요되는 것보다 그 이상의 효과를 얼마든지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반의 여력으로 三晋之民을 이주시며 농사를 짓게 하면 그것이 오히려 적에게 더 본질적인 손해를 주는 방법이며 결과적으로 전승(戰勝)과 같은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徠三晋之民, 而使之事本, 此其損敵也, 與戰勝同實) 이것을 그는 “반행양등지계(反行兩登之計)”라고 불렀다.
• 이 “반행양등지계(反行兩登之計)”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는 라오쯔(老子)의 생성론적 절대성을 상대화시키는데 발생하는 “병가(兵家)적 응용(the strategist application of Laoism)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은 역사적으로 한비자(韓非子)의 “무위지술(無爲之術)”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道家-法家的 사유의 한 패턴이다.
• 이러한 “반행양등지계(反行兩登之計)”의 성공을 위해서 그는 兵 ․ 農의 완전한 작전적 분리를 주장한다. 즉, 農과 兵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치시킨 三晋의 이민들에게는 완전히 농사에만 전념하게 만든다는 것이며, 따라서 秦의 원주민들은 병사(兵事, military affair)에만 전념케 함으로써(以故秦事敵, 而使新民作本) 완전한 분업을 이루게 하고, 그렇게 되면 군대가 전쟁으로 외지에서 100일 이상 체류하더라도 국내의 생산체계에는 조금도 차질이 없게 된다.(兵雖百宿於外, 竟內失須臾之時) 이것을 그는 “부국양성지효(富國兩成之效)”라고 불렀는데, 즉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이 모두 동시에 이루어지는 효력이라는 뜻이다.
• 인간이 산다는 것은 里制論的으로 말한다면 그저 살 집이 한 칸 있고 갈아먹을 땅이 있으면, 그리고 人의 間에서 발생한 어떤 제도로부터의 생명 의지에 반하는 최소한의 압제가 없으면(그러니까 징병, 세금, 형벌 등) 그냥 사는 것이다. 행복이 어디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없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면 그냥 사는 것이다. (하) 讀 The end 201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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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청람 강진원
독서일기 : 사상/철학 『老子哲學』이것이다 도올 김용옥/ 1989 / 통나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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