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퇴 임 사]
오늘 저가 이 자리에 서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면, 제주에서 지난 72년10월22일에 제주소방서유급상비대원으로 발령을 받고서 지금에 이르면서 파란 만장한 36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순간이 너무나 짧기만 한 것 같습니다.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해 본다면, 제가 유급상비대원으로 들어와서는 저의 목표가 아마도 소방장 정도면 족하리라 생각을 한 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방서 생활이라는 것이 마치 다람쥐가 채 바퀴가 돌듯이 매일 반복되는 일과 시간에 소방에 들어 올 때에는 청운의 꿈을 품고 들어 왔다 하더라도 막상 입사하여 3개월이 지나고, 다시 6개월이 지나다보면 타성에 젖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 합니다.
저는 소방에 입문하여서 출동대기 시간에 모두가 장기나 바둑을 두는데, 전 직원이 내기를 붙여서 걸려 있는 금액을 가지고 직원들이 무례함을 달래려고 간식거리를 구입하여 먹는 것만을 생활화 하고 있어서 바둑과 장기도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주변의 상황에 물들지 아니하고 저 나름대로의 생활 철학이 있었기에 오늘 날과 같은 정년퇴직이라는 영광이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제가 지금, 오늘의 순간을 마지막으로 장식을 해 줄 수 있도록 주변에서 많은 조언과 지도 편달을 해 주신 선배님들과 제가 모시던 상사님들, 그리고 동료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제가 지나온 과거를 중요한 사안들만 살펴본다면, 유급상비대원에서 국가직 소방원에 특채 시에도 제주에서 7명을 선발하는데 선순위를 차지한 바가 있습니다만, 저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도 응시를 못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고교 시절에 우리 집안 경제사정이 안 좋아서 제가 신문팔이며, 중학 3년생이 고교 입시를 준비할 시간에 '64년 1월1일에 눈보라가 휘날리는 한라산에서 숯 한 가마를 등에 짊어지고 운반하여 그것을 팔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온 인생 입니다.
막상 소방서에 발을 들여 놓으니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서 국가직 특채 시험을 치르고 나서 저에 대한 생활의 자신 감을 가지게 되어 1년 후에 제 1기 소방간부후보생에 도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서울 행 항공료도 없어서 저의 형님께서 대납을 해 주셔서 공채 시험을 볼 수가 있어서 오늘의 영광스런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당시에 서울 왕복권 항공료를 대주신 나의 형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간부후보생 교육 중에도 과거 경력이 사진에 자신이 있어서 앨범 제작에도 간여하여 경찰후보생보다 가격도 저렴해도 칼라와 흑백을 겸용 편집하여 그 당시 치안 감 이순구 경찰대학장에게 편집을 잘했다고 칭찬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소방간부후보생으로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소방경위에 임용되어 소방 파출소장을 발령을 받고서도 직원들 기초교육에 열중하여 위험물 성상이나 시설 기준을 상세히 교육하여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무허가 위험물 단속에 박차를 가하여 법을 우습게 아는 일반인들에게 경종을 울린 바도 있습니다.
파출소장 시절에는 직원들이 불법위험물 단속에 주력하여 후보생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바도 있으며, 우리 소방 홍보를 간접 홍보로서 소방사 시절부터 생활화하던 사항으로서 봄철 나무 묘목을 공급하는 데에 전심전력하여 [소방서 나무 아저씨]로 매스컴을 타기도 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소장 시절에 실수를 한 것은 평소에 아끼던 직원이 약속을 위반하여 조퇴를 한다는 말에는 내가 당직인데 짜장면이나 한 그릇 사고서 조퇴를 하라는 말에는 제게 직원이 달려들어서 제게 멱살을 잡는데, 막무가내라서 다음 날에 징계를 하려는데 해당자가 그 사실을 알고서 직원이 사표를 쓰고 종적을 감추어도 수리하고 말았으나 그 사건 이후에 다시 공채로 소방에 들어와서도 그 친구는 승진이 상승하면서 동료들에게 후보생이라고 핀잔을 받으며 근무를 하는 모습도 보아 온 사람입니다.
간부로서 저의 치적을 살펴본다면, 제주소방서 소방과장으로 부임하여 선임과장이 본예산도 못 세운 것을 저는 추경에 파출소 신축예산을 확보하여 신축하고 기관의 설립에 따른 인원도 모두 17명[소방위1, 소방장2, 소방교4, 소방사 10명]을 받고서 그 해에 신설 파출소 개서를 한 바가 있으며, 소방서 본관 좌측 전면에 경찰파출소가 이전되어 경찰서장 관사로 사용하던 것을 다시 관사가 이전이 됨에 따라 부지가 교육청 승인으로 사용한 부지임을 알고서 직원들을 동원하여 건물을 허물고 야전차고를 늘리고, 이곳을 간이 운동장으로 사용하도록 작업을 시도하여 경찰관들이 저를 요주의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었습니다.
소방경에 승진하고서 서귀포소방서 방호과장으로 부임하여 소방서 개서에 따른 관인을 제작해 달라고 도 소방과에 요청하여 도 소방과 주무계장인 소방계장이 법규정을 모르고 불응하는 것을 관인규정을 보라고 권유하여 관인이 상부에서 관보에 등재하여 교부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 소방계장 일반 행정직 사무관이 제에게 당한 일로 인하여 소방서 신축 준공식에 참가하여 식이 끝이 나고서 내방에서 내 자리를 권유하는데, 저에게 [너하고는 말을 안 한다]는 한마디에 사무관 일반직 소방게장을 한 주먹 날린 사실도 있습니다만 정의를 위하여 했던 일도 많습니다.
그 외에도 소방준감을 달고 서울에서 구조구급과장과 방호과장을 하면서 소방청이라는 명칭을 받기 위하여 심지어 저의 직책을 걸고서 청와대 회원게시판에 [제주몽생이] 아이디로 무려 43개의 글을 올리면서 내 조직을 위하여 앞장서서 나섰던 일도 다반사라 생각합니다.
그뿐 만이 아니라 서울근무를 하면서 아산병원 간호사가 대학원석사 논문에 우리 구급대원들이 기록유지를 잘못한 자격구분 통계를 가지고 응급 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구급대원이 많으면 구급환자의 소생 율이 높을 것인데 자격증이 없다고 논문을 발표하여 이에 항의 하러 서울의 현대아산병원을 방문하여 응급실장에게 주먹을 날리려 하자 아산병원 사업본부장께서 말리면서 서로가 양쪽의 입장을 들어 보자는 제의에 순응하여 결국에는 아산 병원 측에서 사과문을 독자 투고로 발표하여 승복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제주소방서에서는 소방서를 이전하기 위하여 도교육청 소유 부지를 매입하여 대한 항공에 다시 되 매각을 하고서 남는 예산으로 소방서 이전을 실시 할 수가 있도록 서귀포 소방서로 발령을 받으면서 강경주시장님에게 건의하여 시행을 한 바도 있습니다.
서귀포소방서에서는 관내를 파악하기 위하여 남제주군청 민방위과에서 오토바이를 무상 양여를 받고서 오토바이를 타고서 관내 자연부락을 파악하느라고 매일 밤마다 순찰 겸 지역 정찰을 다니다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여 초대 서장이 이임하는 데에도 참석하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도청 소방과로 발령을 받고서 예산과 장비를 담당하면서 남제주군 대정읍 소방차를 대 폐차 하는데 의용소방대장이 모슬포 미공군부대에서 부속을 공급을 받아서 수리하면서 장거리 물을 운반하는 용도로 활용해야 한다는 말에는 폐차되는 차량티오를 그대로 살려서 활용하도록 조치를 취한 바도 있으며, 소방 차량이 1대 신규 도입되면 내무부장관 지시로 운전원 2명을 배치하라는 지시 공문서를 활용하여 각 시 군에 소방차를 신규 배정하면서 운전원을 기능직으로 모두 2명씩 증원하여 받아 놓은 것이 지금 소방서 인원이 많은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런 사실을 광주광역시에 전입을 가서 말했더니 그런 일도 있냐고 하면서 반문을 하는 동료분도 있었습니다.
도 소방과에서 근무 중에 서귀포 소방서 중문 파출소를 신설하기 위하여 신축을 하는데 신축 부지를 서귀포에서 근무 당시에 물색하여 도에 근무를 하는데 건축 보고서를 받아보고서 시청에서 민방위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우리 파출소 신축 청사를 중문리 사무소 부지를 소방에 주려니 아쉽다고 2층 출입문을 따로 내자는 등 소방서의 기세가 말려들어서 소방과장에게 보고를 하고서 건축 설계 현장 지도 차 현지에 나가서 한 건물로 사용할 수가 있게 독단적인 건물이 되도록 일반직 회계과장을 설득하여 관철시켜서 지금의 서귀포 소방서 중문파출소가 좋은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입니다. 서귀포시청 회계과장을 설득하는데 별 사유를 다 들어 가며서 관광단지에 부지를 마련 해 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현지를 고수하여 소방이 위상을 지킨 바도 있습니다.
소방령을 경에서 8년 만에 승진하여 광주 감찰계장으로 발령을 받고서 한참 근무를 하는데 난데없는 도박 사건이 일어나서 시 감사실에 사실 보고를 하고서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처리 후에 보고 한다는 말에는 감사실장에게나 부시장님에게 직원들이 한 밤중에 공평하게 처리 하라는 전화를 한다면서도 저에게는 한마디 항의 전화를 받지도 아니하고서 5명 전원을 본부장이 전남도로 전출을 시킨다는데, 불복하여 징계처리를 하라는 지시에는 도박에 간여한 참가자 전원을 3월 감봉으로 처리를 하고서도 직원들이 제에게는 아무런 원망도 못하도록 공평하게 처리를 하여 광주 직원들의 찬사를 받은 바도 있습니다.
저는 광주소방본부에서 감찰계장으로 소임을 다하면서 고향으로 귀향이 어려움을 알고서 ‘88년도 1월12일에 제주에서 어머님 제사를 마치고 자녀들과 온 가족을 대전으로 이주를 시켜서 8개 월 정도를 광주에서 더 근무를 하다가 대전소방본부 창설요원으로 전입하고 본부장이 나를 고참이라고 행정게장을 못 시키니 소방서 방호과장의 보직을 주려고 하는 것도 마다하고서 다시 감찰계장의 보직을 받고서 열심히 일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 같이 직원들을 징계처분이 될 사안도 본부장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까지 훈계처분을 하였으나, 결국에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감찰계장으로 충남지역으로까지 소문이 퍼져나갔으나 저는 개의치 아니하고 근무에 열중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서부소방서 방호과장을 맡고서 근무 중에 서장이 기본교육 중에 저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번한 대전서구 괴정동 소재 경성스포츠 신축건물 준공 동의를 하면서 담당 계장이 돈5백만 원을 받고서 준공을 해 준다는 말에는 기겁을 하고, 소방시설은 절대로 시설물이기 때문에 사전 준공은 안 된다. 라고 못을 박고서 서장이 교육 후에 업무를 전개 하면서도 다시 설득하여 준공처리를 99%의 완공을 보고서 하였는데, 1천만 원을 받고서 준공을 해 주었다는 입소문에 의하여 신문과 방송이 나가더니 대전지검 특수부에서 91년7월3일10시에 불려가서 44시간을 검찰특수부에서 조사를 받고서 동년7월5일 오전5시에 무혐의로 나왔으나, 이 사건으로 저를 구속 시키지 못한 이 모 검사는 사표를 내고, 저는 소방정으로 승진을 해서 본부 행정과장으로 임용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방호과장을 나가지 못한 소방령 급 간부가 없는 사실을 특수부장을 통하여 고발하여 일어났으나 금품을 제공받지 아니해서 살아난 것입니다. 그 사건에 말렸다면 아마도 제가 이런 영광스런 정년퇴임 자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 바입니다.
저가 소방서장으로 재직을 하면서도 업무에 충실하기 위하여 내수면의 사고처리가 경찰서장에서 소방서장으로 넘어 온 것을 관보를 보고서 담당계장에게 수난구조 계획을 수립하라는 서장의 정당한 업무 지시에도 주무계장이 예산과 장비가 없으니 업무를 시작도 해 보지 아니하고서 못한다는 말에는 관보에 등재 되었으니, 하나의 공문서인데 계획을 수립하지 아니하면 직무유기가 된다고 하면서 제가 직접 메모로서 기안을 하도록 독려하여 상부에 보고를 하라고 지시를 하니 그 때서야 상부에서 업무 지시가 내려왔다고 저를 보고 반항하던 계장이 꼬리를 내리고 하는 말이 [서장님이 선진행정을 하고 있다]고 하는 말에는 제 자신이 놀라지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서 전국에서 맨 처음 [수상구조대]를 운영하다 보니 이번에 대학원 석사과정 논문도 [수난구조에서 수중 탐색에 관한 연구]로서 석사학위 논문을 세계에서 최초로 수몰지점 찾는 기법을 가지고 논문을 제출하여 졸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소방업무가 모르면 안 하는 풍조로 발전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대목 입니다.
구급업무를 추진하는데 구급을 담당하는 여자대원으로부터 건의가 들어와서 추진했던 한 가지 사항을 열거 해 본다면, 여자구급대원이 아파트에 환자를 후송하러 도착하면 걷기가 불편한 환자를 만나면 들것이 한일자로만 사용되는 접이 형이 아니라서 환자를 업고 내려 와야 한다는 말에 접이 형 들것을 구급차에 교체하여 주기 위하여 예산 집행 과장에게 차량 비를 년 말에 집행하다가 남은 예산으로 구입을 해 주도록 지시하니, 담당과장이 차량 비는 차량운영이나 고장수리에만 사용해야지 과목이 틀려서 안 된다고 하기에 감사를 나오면 내가 직접 확인서를 써 주겠다고 하면서 차량 비에서 남은 집행 예산을 전용하여 구급차량 3대에 들것을 교체하여 주고서 마침 그 소방서에 재직 시에 감사가 나와서 내가 나서서 감사를 받으면서 지적 사항에 대하여 당위성을 설명하여 그대로 넘어간 사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소방공무원들은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힘들고 예산이 나오면 집행하는 것도 어려워서 주어진 예산을 반납하는 일이 다반사임을 알 수가 있답니다.
다시 한 가지업무 지시로 야산에 문화재 공사를 6억짜리를 진행 중인데 무허가 위험물을 대량 사용하기에 후보생을 나온 신출 라기 직할 소장에게 확인서를 징구하고 단속을 하라고 하였는데, 확인서를 받아온 것이 아니라, 공사 시행자가 안양에 있는 회사인데 대전에서 폭력 집단을 불러 들여서 서장실에 들려서 반 공갈조로 서장을 협박을 하려는데, 민원인을 내 보내고서 소장을 불러다가 혼을 낸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 소방 업무가 개개인이 길거리를 가다가도 불법사례가 있으면 적발을 해야 하는데, 경찰에서는 의경도 법을 집행하는데 차질 없이 하고 있으나 우리 소방공무원들은 보고서를 쓰기 싫어서 모두가 불법을 보고도 못 본체 넘어가다 보니 국민들이 불법인지, 타협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는 바입니다.
대전에서는 소방서가 4개서인데 제가 근무하는 소방서에서는 1년에 40건씩 소방법 위반 사항을 적발하여 입건을 시켰는데, 나머지 3개 소방서가 합해서도 1년에 제가 입건한 건수도 못 채우는 상황이었습니다.
감찰계장을 하면서도 나의 업무 한계를 넘어서 본부장 지시로 방송통신대학도 포기하고 열심히 하였지만, 감찰계장으로 제가 오자마자 파출소 신설 계획이며, 소방서 신설 계획을 수립하여 제가 부임하는 해에 산내, 용문, 파출소를 신축 개설하고, 동부 소방서와 북부 소방서를 신설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우려서 동부 소방서 부지를 확보하고, 북부 소방서는 경제기획원까지 드나들면서 7억원의 국비를 받아 오면서 신설을 한 바가 있습니다.
저는 다음 승진을 포기하고서 정년 준비를 하려는데, 대전광역시교육청에 부 교육감으로 집안 일가분이 오셔서 인사차 들렸는데, 저 보고서 나이가 얼마인데 벌서 제대 준비를 하느냐는 질문과 함께 계급 정년이면 한 번 더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해 보라고 하시면서 집안 어르신을 소개해 주셔서 제가 서울까지 올라와서 쇠金에 빛 光에 나아갈 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근무를 하다가 오늘에 이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를 도와주신 우리집안 일가 어르신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제가 국비로 신분이 전환이 되어야 승진을 하는데 저는 조건부로 국비로 전환을 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에 모 국장 출신이 2회에 걸쳐서 소방공제회장 선출에서 시 도 대의원들이 반기를 들어서 부결을 두 번하고서 모 국장이 제게 제안이 와서 선임자인 모 국장 출신을 회장으로 선출하는데 동의를 모아서 제가 국비가 되어서 경사가 겹치는지 모르나 제 둘째 딸이 결혼 날자와 행정자치부에서 전입신고 날자가 동일하여 저는 주무과장의 도움으로 장관께 신고를 생략하고 제 녀석의 혼사 일에 참여한 일도 있습니다.
중앙소방학교에 연구실장에 보직을 받고서 근무를 하는데, 학교장이 동기라도 일을 열심히하다보니 신임되어 연구소를 설립을 해 보자는 제의에 저는 동참을 하여 연구실 직원들이 반대하고 젊은 과장들이 반대를 하는 데에도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에 동화초등분교가 폐교되어 청소년수련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가 앞장서서 아산교육장을 설득하여 무상임대로 정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학교장과 제가 근교현장 답사를 다니는데 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곳이 많은 데에도 일반 회사에서도 점령하여 임대로 사용을 하는데, 우리 기관에서는 너무나 늦었다는 감이 들기도 하여 서둘러서 아산시를 설득하고 아산시 교육청을 설득하여 결론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 곳은 우리 학교와도 원거리에 위치 해 있어서 폐교가 된 학교라서 문화와 후생시설이 형편이 없어서 제가 손수 점심도 마련을 해주고, 저녁은 이웃 방앗간 주인을 설득하여 그 곳에서 야간 저녁을 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곳에서는 집에 가는 일도 주말에만 다니고 주 중에는 당직직원들과 당직비도 없지만, 상대를 해 주기로 하고서 동일하게 생활을 한 바가 있습니다.
중앙소방학교 근무 중에 소방간부후보생 제12기를 선발하여 교육 도중에 체력단련훈련이로서 10Km달리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훈련에 교직원들이 참석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나하고 연구실에 근무하는 오 주임이 송악면 동화리에서 아침부터 운동을 달리기 트레이닝을 하기에 물어 보니, 며칠만 있으면 후보생들하고 장거리 달리기가 있다고 하기에, 그러면 왜 나에게는 말을 안 하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나이가 들어서 말을 안했다고 해서 나는 오기로 참석을 한다고 나서니 동기생인 학교장이 나를 걱정하면서 나이가 24년이나 후배들하고 장거리를 달리다가 무슨 창피를 살려느냐고 하면서 말렸으나 끝내 참가하여 망신은 고사하고 내가 후보생들과 호흡을 같이하여 달려서 전체 평균 달리는 시간을 20분이나 단축을 해서 모두가 놀라고 말았답니다. 나는 ‘하면 된다.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나의 좌우명을 후배들에게 보여준 것이 참으로 보람이라 생각을 하는 바입니다.
그 후에도 서울에서 승진하여 근무 중에 영국 쉐필드에서 제8회 세계소방관경기대회에 참석을 못하게 방해를 소방청에서 한다는 말에 선수로 등록하여 하프 마라톤을 처음으로 영국에서 실시하여 제 시간에 들어 온 바가 있으며, 이제 이력이 붙어서 다시 서울에서 여의도 119마라톤과 서울시 직원마라톤에 참가하여 하프를 달려 완주를 한 바가 있습니다.
중앙소방학교 연구실장을 하면서 어렵사리 소방사상 처음으로 국비 예산을 가지고 [소방과학연구소]설치 용역사업을 하는데, 호서대학에 채경석 교수님에게 용역을 맡겼는데 책임 교수는 일본 등지로 여행을 다니다가 마무리 할 즈음에 귀국하여 같이 거드는 교수와 연구소 조교에게 맡겨 놓고서 3개월이면 완성한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막상 일을 맡아 놓고서 납품기일이 다 되어야 기간을 연장한다고 하는 말에는 내가 책임 사업추진 주무 담당 실장으로서 지체보상금을 물린다고 한마디를 하였더니 적반하장 식으로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당하고 나니 나도 학부도 나오고 해야 말발이 선다는 것을 느끼면서 소방준감에 승진하여 서울에 근무를 하게 되니 학구열이 발동하여 초당대학에 편입해서 대학 졸업장을 받고서 다시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원 방재공학과에 입학하여 이번에 저가 평생을 다니던 직장을 정년을 앞두고서 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석사학위 논문도 대전에 근무 할 당시에 전국에서 최초로 수난구조대를 설치하여 운영을 하면서 직원들과 현장을 누비다 보니 물의 흐르는 원리와 수난자가 수몰되는 사안을 유심히 관찰하여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그러한 사례를 가지고서 세계 최초의 [조난자 수중탐색 기법]을 개발 해 낸 것입니다.
서울에서 근무를 하면서는 직원들과 친근감을 가지려고 비 간부들과 이메일을 교환하다보니, 직원들이 제가 조직을 위하여 할 말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급직원들이 감히 서장에게도 말을 못하는 사안들을 제게 상담을 해서 해결을 하여 주다보니 입소문이 났던지 하급직원들이 개인 신상에 대하여 상담을 이메일로 오면 성실하게 답하여 주어서 해결을 하다보니 하급직원들이 잘못된 것에 대하여 꾸지람을 마구 퍼 부어도 오히려 제에게 후원자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서울에도 조직을 위한 일을 하는 간부들만이 비 간부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구급대원인 여자 직원이 남편도 구조대원인데 저에게 자기 신상문제로 발작하는 병의 증세를 털어 놓고서 소방행정계장과 신경전을 벌리는 것을 발작하는 병의 증세는 스트레스에 더욱 민감하므로 절대로 소방행정계장과 신경전을 벌리지 말고서 오히려 보약으로 한약 한제를 지어다 먹고서 다음부터 발작 증세가 나오면 휴직을 한다는 각서를 써 주어서라도 한 발작 후퇴를 하도록 설득하여 그 여직원이 자녀도 둘을 낳고 열심히 근무를 하는 것을 보고서 저는 항상 보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종로소방서 3층인 광화문에서 근무를 할 당시에는 건강 상태도 별로 안 좋다가 이곳 남산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나서부터는 매일 같이 아침마다 7시30분에 출근과 동시에 컴퓨터를 검색하고서 7시40분에 남산을 운동 삼아 1시간동안에 6킬로미터를 걷기 운동을 하다보니 광화문 근무 시절에 눈이 침침하여 바늘귀도 실을 못 꽤다가 이제는 안경 없이도 바늘에 실을 꽬 수가 있고 영국에서부터 세계소방관경기대회에 출전하여 하프마라톤에 참가하여 여의도에서 2회까지 총3회를 3년간에 연속 달려서 관절이 나가서 일어서기도 불편하다가 남산 걷기 운동으로 이제는 관절도 다 낳았다고 할 정도로 건강이 좋아진 것을 느낀답니다.
저는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화자찬을 하고 싶답니다. 제 마누라가 저의 뒷바라지에 힘겨워서 당뇨병에서 합병증으로 전이되어 1주일에 투석을 병원에서 3회 실시하여 그렇지 제가 정년을 앞두고서 자녀 4명을 모두 결혼시키고, 이제는 손자들이 모두 6명인데 부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려서 오늘날까지 저의 주변에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선 후배 여러분들과 가족 친지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오늘과 같은 영광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바쁘신 가운데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 선후배님들과 이웃 친지 가족 여러분들께도 거듭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들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과 행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퇴임사에 당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12월28일
정년퇴임(예정)자 소방 준감 김 광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