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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목사공파 (豊川任氏牧使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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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有後) 만휴공파 스크랩 [근남면]행곡 주천대
豊川 (임성필) 추천 0 조회 70 14.10.01 09: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가 이곳에 우거하면서 풍류적인 의미의 주천대(酒泉臺)라 했음

 

- 주  소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 문  의   : 울진군청 문화관광과 : 054-783-3709)

- 교통편
: 울진군 근남면 엑스포 공원에서 36번도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서 민물고기생태체험장을 지나 '행곡'이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 주변의 볼거리 : '민물고기 생태체험장'과 '격암 남사고 별묘'가 있다.
- 식당안내
 마을앞에 [솔밭식당]

-  둘러보기 팁 :
 1. 불영사 가는 길과 영주, 봉화방면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려 옛 선인들의 풍류를 한 번 그려보기에 좋은 곳이다.




- 사진촬영 일자: 2014년 4월 11일(금)

- 촬영장소 : 울진군 울진읍 월계서원

- 촬영장비:  카메라/캐논 5D-Mark2, 렌즈/ 탐론17-35mm
 

수 년전, 울진군향토사연구회원으로 회원들과 같이 이곳에 들린 기억이 새롭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않고 주변에 별로 볼거리가 없어 관광객들의 거의 찾지 않는 곳 이기도 하지만 그 옛날 선인들이 풍류를 즐겼던 장소로서 지금도 주변의 소나무와 풍경들이 그 당시의 절경을 말해주는듯 하다.

 


(아래의 자료는 울진디지털문화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 의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명칭유래]
주천대는 원래 왕피천 너머의 구릉과 이어져 있던 돌산이 강물에 잘렸다고 하여 ‘수천대(水穿臺)’라 불렸다고 한다.
1628년(인조 6)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가 이곳에 우거하면서 풍류적인 의미의 주천대(酒泉臺)라 고쳐 부른 이후
그 이름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자연환경]
근남면 행곡리 구미동 북쪽에는 구릉이 있다. 이 구릉이 동쪽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왕피천 쪽으로 돌출된 곳이 주천대이다.
주천대 주위로 임유후가 팔경(八景)으로 꼽은 무학암·송풍정·족금계·창옥벽·해당서·옥녀봉·비선탑·앵무주 등이 있다.


[현황]
주천대 위쪽으로는 임유후의 유허비가 있고, 아래쪽으로는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1645~1703]의 유허비가 있다. 매년 음력 4월 2일에 유림이 모여 임유후·김시습·오도일을 기리고 있다.

아래에 세 분의 자료를 남긴다.

 

#김시습

김시습(1435∼1493)은 조선 전기 학자다. 당대 탁월한 문장가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김시습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책을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됐다.
법명 ‘설잠’으로 9년간 전국을 유랑했다.
 세조 때에는 효령대군의 권유로 불경번역 작업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
경주 남산에 내려와 금오산실을 짓고 입산했다.
 이곳에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가 탄생했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서울로 올라와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가 살았던 성동(城東)이 바로 수락산 자락이다. 김시습은 노원에 대한 시를 남기는 등 수락산 자락에 10여년을 은거하며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현재 수락산 입구에 ‘김시습산길’이 있고 곰바위 위에는 매월정과 시비가 있다.

# 오도일 /1645(인조 23)∼1703(숙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영의정 윤겸(允謙)의 손자이다.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680년(숙종 6) 지평·부수찬, 1683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 개성부유수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다음해 예문관제학·사직·이조참판, 1698년 이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 장성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죽은 뒤 복관되고 울진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파집》이 있다. --> 출처: 오씨 종친회

 

 

# 임유후(任有後. 1601-1673)

 임유후는 판서 임국노의 손자이자 교리 임수정의 아들이다.
임국노는 이산해의 무리에 기울어 있는 까닭에 선비들의 여론에 천시를 당했고, 임유후의 숙부인 임취정은 광해군 때 등에 업은 권세가 이이첨과 더불어 서로 막상막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모두 남의 글을 빌어 과거에 올랐는데 임유후 혼자만 그의 집안형인 고 지평 임숙영을 좇아 수학하여 옛날 글을 공부하였고, 글을 잘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동문생인 이해창, 강여재 등이 모두 인정하였다.

인조 초기에 과거에 올라 승문원에 뽑혔고, 무진년에 아우 임지후가 역적의 무리를 좇아 같이 모의하다가 임유후 및 그의 형 임덕후에게 혼나고서 반역 사실을 고발하였는데, 임유후 또한 불충한 신하 박동기가 끌어들이는 바람에 체포되었으나 끝내는 석방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영동을 넘어 울진의 산 속에 살면서 고을 사람들을 가르쳤다.

시일이 한참 지난 후, 조정 의논이 조금씩 그를 수용하여 간간히 찰방, 도사 등에 제수하였고, 고 정승 이경여는
그가 집안이 행실과 품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정에 힘껏 추천하였으며, 재상 김익희 또한 몹시 입김을 넣었다.

그 결과 대간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고, 뒤에는 변방 수령으로서 자급이 승진되어 누차 지역을 맡았으며,
그리하여 재상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경여의 아들 이민적 등이 요직에 있으면서 한결 더 높은 직위에 등용하였으나 세상형편은 끝내 그를 흡족하게 여기지 않아 대관 중에 더러 탄핵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급기야 도승지에 제배되자 동렬 중에는 벼슬하지 않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임유후는 처지가 낭패스러워 감히 조정에 있지 못하다가 이때 와서 외직을 힘써 구하여 경주부사로 떠났는데, 그로부터 1년을 살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행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 정면 방면이 울진읍과 근남 수산리로 가는 길이며 오른쪽의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된다.

 

 

 마을로 진입해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주천대가 있다.

 

주천대의 간략 안내도가 있어 한 번 읽어봤다.
동봉 김시습, 만유 임유후, 서파 오도일 선생들의 이름이 있는데 눈에 익은 이름은 김시습 밖에 없는듯 하다.
술주.酒 의 글자가 들어간 것으로 봐서는 그 당시 이곳은 풍류를 즐기기에 좋은 곳으로 짐작이 된다.

 

 

 비석에 많은 글 들이 씌어 있는데 모두 읽어보지 못했다.

 

  만유 임유후 선생의 유적비

 

 동봉 김시습, 만유 임유후, 서파 오도일 / 세분의 추모비가 서 있다. 건립연도는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주천대는 원래 왕피천 너머의 구릉과 이어져 있던 돌산이 강물에 잘렸다고 하여 ‘수천대(水穿臺)’라 불렸다고 한다.
1628년(인조 6)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가 이곳에 우거하면서 풍류적인 의미의 주천대(酒泉臺)라 고쳐 부른 이후
그 이름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천대의 조그만 능선 앞에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무의자와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주천대 앞으로는 왕피천이 흐르며 물이 제법 깊고 행곡리 마을이 있다.

 

 이곳에 서서 옛날을 한 번 그려보니 경치를 절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천대의 유적비 앞으로 이렇게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주천대 건너편에서 한 번 보았는데 앞으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주천대 위로는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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