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과 하멜 표류기
글 : 나천수
1. 서언
筆者가 1996년 10월에 네덜란드 남홀란드 주 홀큼시에 있는 하멜의 생가 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는 꽃으로 유명하여 農道인 전라남도와 네덜란드의 꽃을 연계하고자 한국인으로서 네덜란드 화훼 도매시장에서 일하는 이병국씨의 도움을 얻고 아울러 네덜란드의 화훼재배현황을 보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1653년 제주도에 난파하여 상륙하게 되는 네델란드인 하멜이 통산 13년을 조선의 땅에서 살다가 귀국하여 쓴 하멜 표류기로 최초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럽지역에 알리어진 계기가 되는 역사를 인연으로 하멜 고향지역과의 교류문호를 열고자함이었다.
민선정부 출범 직전에 KBS TV에서는 하멜 표류와 관련하여 역사스페셜을 방영하고 2회에 걸쳐 하멜 표류기를 극화하여 방영하였다.
여기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인 「요스트 울프스윈클(Joost Wolfswinkel)」이 조선국에 정착한 「벨테브레(한국명 朴淵)」 역할을 맡았으며 다른 외교관들은 하멜 등 역할을 하였다.
이즈음에 강진에서는 문화원의 주관으로 하멜 표류 역사학회 발표가 있었으며 울프대사님은 필자가 동행하여 참석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하멜 일행이 강진 병영성에서 약 10년 간을 살았기 때문이다.
울프 대사님은 하멜 관련하여 하멜의 고향시인 홀큼시 하멜의 고향은 Gorinchem인데 이의 발음을 화란어로 홀큼으로 하는데 영어식으로 고린켐으로 읽으면 틀리다고 필자가 네덜란드 방문시 확인한바 있다.
와 강진군이 자매결연을 하고, 홀큼시가 있는 남홀란드주와 전라남도가 자매결연 하도록 권유하는 적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강진군과 홀큼시는 자매결연이 체결되었고, 남홀란드주와의 교류는 울프대사가 교량역을 하였으나 성사되기 전에 아랍에미레이트(UAE) 국가로 가시게 되어 후속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筆者도 1996년도에 홀큼시를 방문하여 하멜과 관련하여 홀큼시와 우리도 강진과의 교류를 하도록 교량역할을 하였으며, 시장과 시 관계관의 안내로 연안지역 항해와 홀큼 시가지를 시찰하면서 하멜의 생가 터까지 가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교류를 계기로 홀큼시에서는 강진군에 실물 크기의 하멜 동상을 제작 기증하였고 아울러 병영성의 네델란드촌 조성에 많은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화란어로 된 하멜일지의 英譯본은 몇 가지가 있으나 이 글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와 흥미 본위로 엮어졌었다. 그러던 중 네덜란드 학자 회팅크에 의해서 「하멜일지」와 「조선에 관한 기술」의 정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하멜이 소속회사인 동인도 회사에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함이었다. 제목은 「야하트船 스페르웨르號의 생존 선원들이 꼬레왕국(조선)의 지배 하에 있던 켈파르트섬(제주도)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조선에서 겪었던 일 및 조선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 - 네델란드령 인도총독, 요한 마짜이케르 각하 및 평의원 제위 귀하」이다.
이 회팅크판을 정본으로 영역한 자료를 장폴 바이스 테제수도회 수사가 처음으로 한국어 번역을 하였으나 외국인에 의한 한국어의 번역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1994년 11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하멜의 영역판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前 전남대학교 영문학과 金泰鎭 교수에게 한국어 번역자로 정식 추천하여 번역본이 1995년에 출간되었다. 김태진교수는 번역을 하였으나 책이 출판되기 전에 불행히도 운명하시고 말았으며, 광주 무등파크 호텔에서의 「요스트 울프스윈클(Joost Wolfswinkel)」대사 주최로 한국어 출판기념 기념회에서는 미망인이 참석하여 네델란드 대사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바 있다. 필자도 참석하였다.
350년전의 하멜이 다시 살아 이곳을 방문한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리고 자신이 귀국하여 쓴 표류기(Hamel's Journal)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지대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2. 하멜 표류 史實
1653년 효종4년 1월에 네덜란드 상선은 바타비아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 O C)의 동양 무역 본부는 바타비아항인데 오늘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이다.
을 출항 타이완(대만)에 도착하였다. 그 해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는 타이완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였다. 항해 중에 폭풍우를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난파하여 일행 36명이 제주도 山房山 앞 바다에 漂着하였다.
이들 일행중 하멜을 포함한 7명이 1666년 9월에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하기 까지 통산 13년을 조선에서 살았으며, 1657년부터 1666년까지 10년간을 전라도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하멜 표류기의 중요 부분은 전라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1654년 서울로 압송하는데 해남을 거쳐 영암, 나주, 장성, 태인, 전주, 연산, 공주를 거쳐 서울로 갔다.
이들은 서울에서의 탈출사건 때문에 1657년 다시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병영에서 다시 1663년 여수 전라도 좌수영으로 배치되어 잡역을 하다가 드디어 1666년 9월에 작은 배로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귀국후 13년간의 조선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저술했는데 조선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서양에 소개하는 최초의 책으로 당시 유럽인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하였다.
하멜은 스페르웨르호의 포수이면서 書記였다. 1653년 네덜란드를 출발한 배는 7월16일 타이완에 도착하였고 이들은 다시 일본으로 가도록 명을 받아 7월30일 항해에 나섰다. 그리고 8월12일부터는 심한 풍랑을 났고 8월16일날 밤 1시경에 육지와의 세 번의 충돌로 배는 산산이 조각나 표착 상륙을 할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들 말로는 켈파르트섬인 제주도 남방 산방산 인근이다. 하멜 표류기에는 일등항해사가 표착 후 관측을 통하여 북위 33°32′의 켈파르트 섬(제주도)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선원64명중에 36명만 살아 남았다.
해안으로 밀려오는 시체를 찾아 묻어주고 8월17일에 제주도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다. 제주사람들은 처음으로 푸른 눈, 금발머리, 이상한 옷차림, 이상한 언어를 쓰는 이방인을 보고 구경꾼처럼 보았을 것이다. 하멜일 행은 일본으로 가는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야판(Japan)」이라는 단어로 말을 하였으나 일본을 왜나라 또는 일본이라고 말하는 조선인이 영어발음의 일본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굶주린 그들에게 죽과 밥, 그리고 술을 대접해 주었으며 난파선을 불태워 쇠붙이를 모두 모은 것을 보았으며, 일부 불량한 자들이 인양 작업 중에 짐승 가죽이라든지 철물 등 훔쳐간 도둑들을 붙잡아 30~40대의 곤장형을 처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제주목사가 있는 곳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이 당시 제주목사는 李元鎭으로서 아마 李牧使의 심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으나 의사소통은 여의치 않았다.
10월29일에 드디어 한양에서 급거 내려온 네덜란드인 얀스 벨테브레(朴淵)의 직접 심문을 받고 동족인 네덜란드 사람으로 확인 된 것이다.
하멜 일행에게 말하는 벨테브레의 조선 거주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벨테브레는 네덜란드 「드 레이프」 출신이며 1626년 홀란디아호를 타고 고국을 떠났으며 1627년 오베르커크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조선 해안 근처에서 식수가 부족해서 보트로 육지에 상륙하였는데 일행중 3사람은 주민에게 체포되었고 그중 두 사람은 18년전 만주(청나라) 침략이 있을 때 죽었다는 것이다. 아마 군역에 동원되어 전투에 참가한 듯 함. 필자주
그렇다고 보면 벨테브레는 하멜의 표착 이전 27년 전부터 이미 조선에 머물러 살았던 것이다. 하멜 표류기는 벨테브레의 나이를 72세로 적고 있다.
오랫동안 조선에 살았던 벨테브레도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려 한동안은 하멜 일행과의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았는데 한달 정도 같이 생활하므로 서 언어 소통이 되었다.
하멜 표류기는 표착 후 초기와 탈출시기의 기간동안에는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었으나 조선 체류 중의 기간은 서술내용이 간단하다.
또한 하멜은 표류기에서 자신을 제삼자로서 말하고 있고 하멜은 표류기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거의 모든 기록들은 하멜을 저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은 그가 언제 표류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出島)에 강제로 머물러 있던 기간동안에 표류기의 초안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조선에서 운 좋게 탈출한 뒤 이미 그들은 1666년 10월 23일 Esperance 호로 바타비아로 떠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허가를 받지 못했고 데지마에서 일년을 더 지내야 했다.
하멜 표류기에는 벨테브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더 있다. 표류기의 한국어판 번역자인 이평도씨는 증간판에서 1700년도 자료에서 벨테브레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고 인용하고 있다.:
淵은 신장이 크고 약간 체중이 많이 나가는 체격이었다. 그는 푸른색 눈 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복부까지 늘어트린 턱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그 는 조선여자와 결혼해서 1남1녀를 두었다.
만약 벨테브레가 부인과 아이들이 있었다면, 하멜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이 흥미로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이평도씨가 인용한 다른 한국어 문서에도 벨테브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淵은 구인후 대장 진영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들이 훈련도감 등 록명부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인용문에서 주목할 점은 '아들들'이란 말인데 벨테브레는 아마 한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인용 언급된 훈련도감은 16세기 말에 무기 생산과 이의 사용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조정이 설립한 군사훈련기구였다. 등록명부에는 대포의 제조법과 같은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의 이름을 제한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이런 직업은 대를 물리는 것이었고 다른 문헌에서도 벨테브레는 한양에서 무기제조 책임자였고 이 분야에 전문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전 인용문이 유래된 한국어 문서에서 이를 읽어 볼 수 있는데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淵은 무기지식 분야에서 전문가였다. 그는 대포주조에 매우 뛰어났고 마 무리 손질은 아주 훌륭했다.
이 문서에는 스페르웨르(Sperwer)호의 난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효종4년(1653) 이상한 배 한 척이 진도해안에 좌초되었다. 배에는 36명 이 승선했다. 그들은 두드러진 옷자림에 신장도 월등했다. 얼굴에 대해 코도 높았으며 눈은 깊게 패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말이나 글을 알지 못 했다. 조정에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박연을 내려보냈다. 朴淵은 이들을 보고 매우 감격해했다. 그의 수염은 눈물로 젖었다. 그는 그들이 자기네 나라말을 하는 고향사람들이라 말했다. 그래서 왕은 박 연을 통역관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수년간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살았다. 그들은 무기제조 기술과 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 내, 외곽에 자리한 수비대 에 편입되었다.
제주 표착 후 李牧使 재임시에는 하멜 일행에게 쌀과 찬류가 제공되었으나 1564년 1월에 새로 부임한 후임목사는 쌀 대신 보리를, 밀가루 대신 보리 가루를 지급하였고 부식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국왕의 답서가 없기 때문에 계속 제주에 억류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5월초에 제주 앞바다에 출항장비가 있는 배 한 척을 발견하고 일행 5명이 탈출을 시도했는데 해류의 흐름과 바람을 이기지 못하여 돛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다시 붙들려와 심문을 받고 곤장 25대씩을 맞았다.
그리고 외출 금지와 밤낮으로 감시를 받게 된다.
그 해 5월말 경에 국왕으로부터 소식이 도착하여 서울 압송이 되었다.
아침에 출발한 정크선은 육지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말을 타고 해남까지 갔다. 다음날은 영암까지 왔는데 일행중 1명이 죽어 영암군수의 명령으로 일행 앞에서 땅에 묻고 다시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나주에 도착하였고, 그리고 장성 입암산성, 정읍을 지나 태인, 금구, 전주, 여산, 은진, 연산, 공주를 지나 큰 강(한강)을 건너 한양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왕(효종) 앞에 끌려 나와 신문을 받았는데 다행히 벨테브레의 통역이 있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왕에게 고국으로 보내달라는 건의에 대하여 「외국인을 국외로 내 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국법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하며 대신 부양을 해주겠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왕은 하멜 일행을 친위병으로 삼았고 매달 일정량의 식량과 신분증인 호패도 받았다.
큰 코, 금발머리, 흰 살결 때문에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집에서조차 구경꾼 때문에 편히 쉬질 못했다.
11월의 조선은 매우 추웠다. 집주인 중국인은 매일 땔감을 해 오라고 괴롭혀국왕이 제주도 난파시 가져온 일행들의 물건을 다시 주어 그 중에 가죽을 팔아 2-3명씩 살집 몇 채 사 이사를 하고 겨울옷도 샀다.
1655년에는 청나라 칙사가 조선을 방문하여 핸드릭 얀스 안세와 헨드릭 얀스 안세보스가 칙사 지나가는 길목에서 숨어 잇다가 갑자기 다가가 칙사가 탄 말고삐를 잡고 압류사실을 알리려 했다. 이 사건으로 두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 졌는데 사인은 알수 없었다.
그 해에는 청나라 칙사가 수차 다녀갔는데 그때마다 하멜 일행은 격리되고 엄중 감시를 받았다.
1656년에 이들이 청나라 칙사 앞에서 어떤 말썽을 부릴지 몰라 전라도로 유배하기로 하였다. 3월초 아들은 한강의 강나루에서 벨테브레와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그 이후에는 하멜측과 벨테브레가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하멜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적지 않았는지 아니면 벨테브레가 하멜측을 만나지 않을려 했는지 모른다.
추측컨대 1655년 국왕이 제주도에 외국배가 난파되어 왔는데 벨테브레에게 현지에 가서 조사하라는 명을 자신은 고령이라 갈 수 없다고 고사하자 하멜일행중에서 조선말을 제일 잘하는 세사람이 그 배가 어떤 배인지 제주에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벨테브레는 노령으로 사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들은 한양입성 때 지났던 길을 따라 똑같은 고장을 지나 강진 병영성까지 왔다.
병영성에 합류된 자는 33명이다. 제주 난파당시 압류되었던 녹피가 병영성으로 되돌려 왔다. 이것으로 옷을 장만하고 새로운 숙소에 필요한 필수품도 준비했다.
1657년에는 새로운 절도사가 부임해 왔는데 잦은 노역과 땔감을 지급이 중단되어 몹시 힘든 나날이었는데 절도사가 심장마비로 죽자 주민들과 함께 기뻐했다. 후임 절도사는 쌀공급 이외에는 전혀 무관심하였다. 식사는 쌀과 소금 그리고 물뿐이었다. 구걸을 하여 겨울을 넘겼다.
1658년은 흉년이 들고 장티푸스가 퍼졌다.
1659년은 효종이 죽고 그의 아들 현종이 즉위하였다.
일행들은 스님들과 친교가 좋았다. 스님들은 외국 풍물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1660년 새절도사가 부임해 왔는데 동정적 입장에서 도와주고 자기가 권한만 있다면 본국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말했다.
1661년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1662년 흉년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 갔다.
도둑이 많아졌고 이들 잡고자 도로마다 경비대가 주둔했으나 마을과 國庫가 습격당해 곡물을 강탈당했으나 범죄자는 잡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부분 고관의 하인들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1663년에도 흉년이다. 하멜 일행들에게 지급되는 쌀마저 여의치 않아 2월에는 세 고장으로 분산시키라는 명을 하였다. 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씩 분산되었는데 그때까지 22명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멜은 이때 여수로 배치되는 것이 결국 탈출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흉년 때문에 여벌의 옷과 식량이 없어 좌수사에게 노역을 마치면 외출을 할수 있도록 하락을 받았다. 구걸하여 얻은 물건은 똑같이 분배하였다.
1664년 신임좌수사가 부임하였는데 모든 노역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었다. 또한 바닷가에 살면서 바닷가에 배도 많은 왜 일본으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때마다 왕의 허락도 없고 길도 모를뿐더러 남의 배를 탈취하면 절도죄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여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1665년 배를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작은 배를 구하여 부식감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섬을 돌아다녔다.
1666년, 2년 동안 호의를 베풀었던 좌수사가 영전되어 떠나갔다.
후임 좌수사는 매일 벼를 찧는 등 노역을 시켰다. 그 후 수군 훈련시 포수의 부주의로 정크선이 폭발하는 사건을 은폐하려다가 암행어사에게 발각되어 좌수사는 유배되었다.
후임 좌수사도 마찬가지로 노역을 심하게 시켰다.
하멜은 착한 조선인의 친구를 통하여 탈출용으로 쓸 큰배를 두 배의 값을 치르고 샀다.
순천에서 살고 있는 동료 두 명이 여수에 와서 탈출 모의를 합의하였다.
9월4일 저녁때까지 주민들과 즐겁게 보내는 한편 식량, 물, 냄비, 땔감, 기타 물건을 성벽을 넘어서 배까지 날랐다. 달이 질 무렵 하멜 일행 8명은 출발하였다. 헨드릭 하멜, 호버트 드네이스, 그의 아들 디오네이스 호버트, 마테이스 에이보큰, 얀 피터스, 헤리트 얀스, 베네딕터스 크렐크이다. 조류도 도와주었고 순풍이었다. 9월5일 동틀 무렵 돛을 내리고 노를 젖기 시작했다. 돛을 올리면 발견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오 무렵 다시 돛을 올리고 남동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조선의 땅 끝점이 멀리 보여 잡힐 염려가 없다고 마음을 놓았다.
9월6일 일본열도 섬 하나에 접근했다.
나가사키에 이르려면 오른쪽에 섬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조선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항해를 하였다.
9월8일 드디어 일본 배에 발견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商館長 윌렘 볼헤르 각하, 니콜라스 드 루이 차석, 기타 관리들이 하멜 일행을 맞이해 주고 네델란드식 옷을 주었다.
하멜은 13년 28일 동안 슬픔과 위험 속에 억류생활을 했던 그들을 구해준 하느님께 감사 드렸다.
10월25일 나가사키 총독에게 54문항의 질문과 답변이 있었다.
3. 조선 탈출후의 상황
하멜의 탈출후의 상황을 보자.
나가사키로 탈출한 일행은 바타비아로 출발하기까지는 무려 1년 이상이 걸렸는데 왜 일본은 그들을 귀국시키지 않았는가?
10월1일 7척의 배가 데지마를 출항하여 바타비아로 향했으나 1년에 한번 배가 바타비아로 출항한다.
하멜일행은 그 배를 탈수 없었다. 억류 이유에 대해 표류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현종 7년과 8년의 실록 서울대 규장각 소재
을 보면 하멜 일행의 억류사실을 놓고 에도(江戶)막부측과의 10개월간 집요하게 조선정부를 공격해온 기록이 있다. 막부측은 하멜 일행을 억류시켜 놓은 채 이 사실을 조-일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 시켰던 것이다. http://www.geocities.com/capecanaveral/4611/index.html
(일본 도찌바나)- "소위 오란다는 오래 전부터 일본에 곡물을 바쳐온 속 국이요. 근데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요?"
(김석주-조선측 接慰官)- "오란다가 일본의 속국이라 말씀하시오만 그들 의 생김새와 차림새는 일본국과 조금도 닮은데가 없 으니 어찌 그것을 알겠소?"
(일본 도찌바나)-"그들이 가진 물건까지 빼앗고 억류시킨 귀국의 처사는 오랑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김석주-조선측 接慰官)-"물건은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처분한 것이고 그들이 조선으로 온 이후로 모두 모여서 살았소이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는데 무슨 억지 소리요?"
(일본 도찌바나)-"지난 을미년 약조에서 표류한 배는 서로 통보키로 했 는데 지금 통보도 없이 13년 동안이나 억류시켰으니 어찌 성실한 도리라 하겠소?"
(김석주-조선측 接慰官)-"그들과는 의사 소통이 되지 않으니 목적지가 조선인지 일본인지 어찌 알 도리가 있었겠소?"
(일본 도찌바나)-"조선에는 박연이란 자가 있지 않소? 그런데 어찌 그들 으니 행선지가 일본이라 몰랐다 하시오? 박연을 통해 분명히 알았을게 아니요?"
(김석주-조선측 接慰官)-"도리라 하였소?"
(일본 도찌바나)-"그렇소 우리 일본은 귀국에게 도리를 다하였소."
(김석주-조선측 接慰官)-"귀국은 이 남만인들을 귀국에 인도하지 않았 다 하여 우리를 질책하고 있으나 어찌 전날의 박연 사건은 잊고 있으시오? 박연이 표류해 왔을 때 우리 는 그들을 동래의 왜관에 인계하려 했소이다. 그러나 귀군은 인수를 거부하지 않았소? 어째서 똑같은 사안 에 대해서 귀국의 태도는 이렇게 다르단 말이오?"
일본의 리쿄대 문학부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지었다.
"1627년 네델란드인 박연이 동료 3명과 조선에 표착했고 조선은 관례대로 이들을 왜관에 보냈지만 쓰시마측이 신병인수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전례에 비추어 조선은 일본의 태도를 의심하게 됩니다. 막부측 입장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조공을 받치는 속국이므로 조공국인 네덜란드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박연의 말 때문에 조선은 막부측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측에서 박연을 들고 나오자 막부측은 더 이상 협상을 끌고 나갈 명분을 잃어버렸다. 조선은 종결을 통보하고 이 사안을 마무리지었다.
하멜은 "우리는 1년 동안이나 데지마섬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슬픔 속에서 나는 스페르웨르호의 난파 후부터 13년간 우리가 겪었던 일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동인도회사 서기로서 나는 그 동안 기록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조국 네덜란드가 나에게 부여한 의무이기도 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표류 처음부터 기록해 온 것도 아니고 기억을 더듬어 기록을 함으로서 누락된 부분이 많이 있고, 보고서 자체가 귀국 후에 보상금을 타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조선 억류 중에 고생도 하였지만 편하게 살았던 시절도 있고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둔 사항까지는 기록에서 제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667년 10월 22일 하멜 일행은 바타비아로 향하는 배를 탔다.
1667년 11월 28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 도착하였다.
조-일 협상으로 조선에 잔류된 7명의 네덜란드인도 남원에 집결하여 1668년 7월에 동래에 있는 일본 무역기지를 거쳐 9월16일에야 나가사키로 도착했다.
이들도 1668년 10월27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1669년 4월8일 바타비아에 도착하여 하멜과 합류했고, 1670년 그들 전원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670년 8월 하멜은 두 번째 생존자들 중 2명과 함께 Heeren 17세 앞에서 조선에 감금되어 있는 기간동안 받지 못한 임금에 대한 지불을 요구한다.
Heeren 17세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고려해서 그들은 Sperwer호에서 살아남은 모든 직원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액수는 그들이 조선에서 13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 받아야할 전체 분량에 미치지 못했다. VOC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무역회사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 이후 하멜의 생활은 조선에서 머물기 전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1734년경 홀큼에 보관되어 있는 손으로 쓴 문서에는 하멜이 1670년 홀큼에 정착했다고 씌여 있다. 그리고 1692년 2월 12일 "여전히 미혼인 상태"로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2세였다.
4. 하멜일지에 나타난 조선말
하멜 일행중에 가장 조선말을 잘한 사람은 마테이스 에이보큰이다.
하멜은 그보다 못한 것 같다.
하멜식 발음
현재의 발음 또는 뜻
에이보큰식 발음
현재의 발음 떠는 뜻
예나라
왜나라
아이키
아기
일폰
일본
아텔
아들 또는 애들
목소
牧使
부용
무명
목간
牧館
캄
감
오란카이
오랑캐
둔
눈
페잉스
병사
하넬
하늘
티엑스
대국사람(청나라)
칵시
각시
툐센쿡
조선국
풀
불
티세
조세
푸챠
부처
첸티오
전주
피단
비단
콩티오
공주
사탕
설탕
두이치앙
대창
티옹월
정월
훈진
은진
이월
2월
헤이남
해남
서월
4월
예함
영암
오벌
5월
예산
여산
유벌
6월
옌산
연산
칠벌
7월
이팜산샹
입암산성
팔벌
8월
크닝헤
금구
쿠벌
9월
나디어
나주
시벌
10월
남한산샹
남한산성
티옹시텔
11월
나만
남원
수텔
12월
푸산
부산
야흐닐
1
사이싱
좌수영
툴히
2
산시앙
장성
속솜
3
시올
서울
덕소
4
에이보큰식 발음
현재의 발음 또는 뜻
에이보큰식 발음
현재의 발음 떠는 뜻
카셋오
5
서치엔
4000
요셀욘
6
오치엔
5000
예롭칠
7
육치엔
6000
야델팔
8
칠치엔
7000
아홉콘
9
팔치엔
8000
욜칩
10
쿠치엔
9000
소멜
20
아나
하나
셸한
30
툴
둘
마한
40
서이
셋
스윈
50
더이
넷
예쉰
60
타셋
다섯
일훈
70
요셋
여섯
야단
80
일홉
일곱
아한
90
야닯
여덟
일페익
100
아홉
아홉
이페익
200
이얄
열
삼페익
300
서이
쇠
사페익
400
취
쥐
오페익
500
찻
단지
유페익
600
치비
집
칠페익
700
터챠비
도깨비
팔페익
800
텃
돈(돼지)
쿠페익
900
티알크
닭
일첸
1000
탈
달
이예치엔
2000
스톡
떡
삼치엔
3000
피단
비단
5.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하멜관련 내용
○ 효종4년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ꡒ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ꡐ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ꡑ 하니, 다들 ꡐ야야(耶耶)ꡑ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쩏쩎)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ꡓ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보고 ꡐ과연 만인(蠻人)이다.ꡑ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 효종6년
당초에 남만인(南蠻人) 30여 인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이르렀으므로 목사 이원진(李元鎭)이 잡아서 서울로 보내었다. 조정에서 늠료를 주고 도감(都監)의 군오(軍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자가 길에서 곧바로 하소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청사가 크게 놀라 본국을 시켜 잡아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 현종 개정판
비변사가 아뢰기를,
ꡒ엊그제 전라 감사의 장계로 인해 전라도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도망쳐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본도에 공문을 보내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더니, 좌수영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좌수사 정영(鄭英)을 나문하여 죄를 주소서.ꡓ
하니, 상(임금)이 따랐다.
○ 현종 개정판 8년
수찬 김석주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해 보냈다. 일찍이 갑오년에 남만인(南蠻人)의 배가 표류해 대정(大靜)의 해변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탄 배가 죄다 파손되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주 목사가 치계하여 여쭙자 그들을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에 그중 8명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해 일본 오도(五島)에 도착하였다. 오도에서 이들을 붙잡아 장기(長岐)로 보내니 장기 태수가 그들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는데 아란타(阿蘭陀)의 사람들이었다. 아란타는 곧 일본에 속한 군(郡)이었다. 그 사람들을 강호(江戶:에도)로 들여보냈는데 관백(關白)이 대마 도주(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묻기를,
ꡒ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耶蘇宗門)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귀국이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돌아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이지마는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ꡓ
하면서 여러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양 우리 나라에게 붙잡아 보내주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관백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을 알고도 이를 트집잡아 권현당(權現堂)에 쓸 향화(香火)를 요구할 구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差倭)가 나와 관(館)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참고자료
<일본인이 한 심문 보고서>
10월 25일 통역관은 우리들을 나가사끼의 장관에게 데리고 갔다. 여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을 성심껏 답변한 질문 내용들이 있다. 아래의 글은 심문내용을 꾸밈없이 적어 놓은 것이다
질 문 답 변
1.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네덜란드인이고 조선에서 왔다.
2.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가게 됐나?
1653년 8월 16일 닷새동안 계속된 폭풍우로 Sperwer 호가 좌초되었다.
3. 어디에서 좌초되었나?
우리가 Quelpaert 라 불렀던 조선의 제주도란 곳이다.
4. 몇 명이 승선하고 있었고 포는 얼마나 가지고 있었나?
64명이 승선했고 포 30문이 있었다.
5. Quelpaert(제주도) 는 얼마나 크며 본국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15마일 정도의 둘레에 기름지고 인구가 많으며 본토에서 10-12마일 떨 어진 남쪽에 있다.
6. 어디에서부터 왔고 어느 항구를 들렸는가?
1653년 6월 18일 대만을 향해 바타비아를 떠났다. 배에는 대만 총통으로 Verburgh를 대신할 Caesar가 타고 있었다.
7. 배에 싣고 있었던 짐은 어떤 것이고 어디에 쓸려고 한 것인가?
사슴가죽, 설탕, 명반과 다른 물품들이다. 당시 데지마 장관으로 있던 Coijet에게 줄 것들이었다.
8. 선원들과 Sperwer 호에 있던 포와 짐은 어떻게 되었는가?
난파로 28명이 익사했다. 포의 일부는 건질 수 있었지만 바다물로 심하게 손상되었다. 실려있던 짐도 일부만 구할 있었다. 지금 그 물건들이 어 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9. 난파사고 후에 조선인들이 어떻게 대했나?
잠자리와 먹을 것, 마실 것 등 잘 대해줬다.
10. 당신들은 당국으로부터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 사략선(전시에 나포[拿捕] 하는 면허를 가진 민간 무장선)으로 활동하거나 중국의 해안을 습격하라 는 명령을 받았는가?
그런 명령을 받지 않았다. 우리의 임무는 곧장 일본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폭풍으로 항로를 벗어나 조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1. 기독교인이나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은 없었는가?
선원은 회사의 종사자들로만 구성되었다.
12. 제주도에서는 얼마나 있었으며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나?
약 10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한양에 위치한 왕이 살던 곳으로 데려 가졌다.
13. 한양은 제주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고 일정은 얼마나 걸렸는가?
한양은 제주도에서 약 90마일 북쪽에 있다. Quelpaert . 섬과 본국과의 해 협은 10-12마일 정도이다. 본국의 남쪽에서부터 말을 타고 14일동안 여행 했다.
14. 한양에는 얼마나 있었고, 무엇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가?
우리는 왕의 호위군으로 임명되어 한달에 70온스의 쌀을 받았다. 한양에 서는 3년간 살았다.
15. 한양에서의 체류는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가?
키잡이와 동료 한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중국을 통해 본 국으로 가고자 했는데 이것이 실패하자 우리는 전라도로 귀향되었다.
16. 청사신에게 접근한 동료 2명은 어떻게 되었나?
즉시 옥에 들어갔다. 나중에 우리는 그들이 죽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 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
17. 조선은 얼마나 큰가?
남북으로 150마일, 동서로 80마일 정도로 추정했다. 8개의 지방으로 나누 어져 있고 360개의 도시에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이 있다.
18. 조선에도 기독교인이나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나?
어떤 기독교인도 만나지 않았다. 우리는 Jan Janse Weltevree라는 네덜 란드인을 만났다. 그는 1627년에 대만으로 가다 조선에 도달해 몇몇 동료 들과 붙잡혔었다. 전쟁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 도망쳐 온 중국인들도 있었 다.
19. Jan Janse라는 자는 아직 살아 있는가?
알 수 없다. 우리는 10년동안 그를 보지 못했고 그는 그다지 젊지 않았 다.
20. 조선군의 무장 정도는 어떤가?
소총과 칼, 활과 화살을 갖추고 있다. 대포도 가지고 있다.
21. 성이나 요새 같은 것은 있는가?
모든 도시 근처에 막기 힘든 요새나 성벽으로 방비한 진지가 대부분 높 은 산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는 3년동안 사용할 음식과 군수품이 있다.
22. 조선은 전쟁에 대비한 진지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나?
모든 도시가 진지를 갖추어야 한다. 각 진지는 200-300명이 있고, 노젓는 사람과 병사가 있고 몇몇 작은 포도 갖추고 있다.
23. 조선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거나 공물을 바치는 나라가 있었는 가?
전쟁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일년에 세 번 청나라인이 공물을 거두기 위 해 찾아왔다. 그들은 일본에게도 공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얼마나 되는지 는 알지 못한다.
24. 조선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는가? 우리가 알기로는 그들은 중국과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사 람을 개종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25.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사찰과 상(像)이 많이 있었는가?
산에는 많은 사찰과 사원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중국과 같은 식 으로 숭배되었다.
26. 수도승의 수와 그들의 생김새는?
많은 수도승이 있었다. 그들은 일을 하고 구걸해서 생활을 하고 옷차림 은 일본의 수도승과 같은 복장이었다.
27. 조선의 수도승들은 어떤식으로 차려입고 있었나?
중국식이었는데 말총이나 소의 머리털로 만든 모자나 때때로 대나무 모 자를 썼으며 신발과 양말을 신었다.
28. 벼나 다른 작물이 많이 재배되고 있었는가?
남쪽지방에는 쌀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건기에는 농사가 실패해 기근이 시작된다. 1660년, 1661년, 1662년에 수천명이 굶주려 죽었다. 목 화도 재배되고 북쪽지역에서는 보리와 기장도 재배된다.
29. 말이나 소가 많이 있나?
소는 얼마 없지만 말은 많이 있다. 3년동안의 전염병으로 소의 수가 급격 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30. 조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 온 다른 나라는 있었는가?
조선과 교역을 한 유일한 사람은 일본인이다. 그들은 집단 거주지를 가 지고 있었다.
31. 일본인 집단 거주지에 가본 적은 있는가?
접근이 엄격히 금해져 있어서 가보지 못했다. 그들은 중국인에게 인삼뿌 리와 다른 물건을 판다.
32. 조선은 중국과는 어떤 교역을 하고 있는가?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우리가 일본에 전해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물건들 을 얻는다. 게다가 실크도 구입하고 있다.
33. 국내 무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환수단은 무엇인가?
오래 전부터 광산의 은을 이미 이용하고 있었다. 이익의 4분의 1은 왕의 수입이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그곳엔 다른 광산은 없었다.
34. 조선에는 은광이나 다른 광산이 있는가?
조선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금광을 개발했다. 그 이익의 1/4은 왕의 몫이 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광산은 없다.
35. 인삼은 어디에서 생산되고 어디에 사용되며, 수출되는 곳은 어디인가? 조선의 북쪽 재배지역에서 생산된다. 그들은 이것을 약으로 사용한다. 수확 중 일부는 청나라에게 공물로 바쳐지고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된다.
36. 조선과 중국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로 여름에 는 사나운 짐승들 때문에 산을 통한 교역이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두 나라간의 교역은 바다를 통해 하는데 여름에는 배로 겨울에는 말을 타 고 빙판을 이용한다.
37. 한국에서는 어떻게 지방관을 임명하나?
관찰사는 1년마다 할 수 있고 평범한 지방관은 3년동안 지낼 수 있다.
38. 전라도에서는 얼마동안 살았으며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몇 명이나 거기서 죽었는가?
병영이란 곳에서 7년을 살았다. 달마다 50온스의 쌀을 지급받았으며, 이 기간동안 동료 11명이 사망했다.
39. 왜 다른 도시로 이동되었고 그들 도시의 이름은 무엇인가?
1660, 1661, 1662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지방관은 우리 에게 월 배급량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우리를 세곳으로 나누어 이동 시켰다: 여수 좌수영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
40. 전라도는 얼마나 크며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본토의 가장 남쪽에 있는 곳이 전라도이다. 52개의 도시가 있고 사람들 이 많이 모여 살고 땅이 매우 기름지다.
41. 조선의 왕이 보내 줬는가 그렇지 않으면 달아났는가?
왕은 우리를 절대 보내주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8명이 함께 도망쳤다. 그 나라에서 우리의 여생을 사느니 차라 리 죽음을 무릅쓰는 게 나았다.
42. 탈출 당시 몇 명이었으며 남아 있던 사람들도 당신들의 탈출 사실을 알 고 있었나?
16명이 있었고 8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떠났다.
43.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나?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알리지 않았다. 8명만이 교대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44.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조선을 떠날 수 있나?
일본 황제가 풀어 주라는 서신을 보낸다면 그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황제가 조선에 그들을 자신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라는 서신을 보낸 다.
45. 탈출할 시도는 여러 차례 했는가?
2차례 시도했다. 첫번째 시도 때에는 조선 어선에 대해 잘 몰라 돛대가 2번 부러졌다. 청사신에게 접근을 시도한 것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왕이 사신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46. 왕에게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는가?
그랬다면 그가 왜 거절했는가? 왕은 물론 조정에게도 계속해서 요청 했다. 그때마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외 국인을 결코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47. 배는 어떻게 구했나?
열심히 일하고 구걸한 돈으로 구입했다.
48. 그것이 당신들이 구입한 첫번째 배였나?
아니, 세번째였다. 전에 구입한 2척은 일본으로 건너가기에는 너무 작았 다.
49. 어디에서 탈출했는가?
순천에서 온 3명과 5명이 살고 있던 여수 좌수영에서 탈출했다.
50. 나가사끼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었고 시간은 얼마나 걸렸는가? 여수 좌 수영에서 나가사끼까지 약 50마일로 추정된다. 여수 좌수영에서 고토까 지는 3일이 걸렸다. 고토에서 4일을 머무르고 나가사끼까지 이틀에 걸쳐 왔으니까 전제적으로 9일이 걸렸다.
51. 고토에는 왜 갔으며 멈추라고 했을 때 왜 달아 날려고 했는가?
폭풍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다가 잠잠해지면 항해를 계속 하려고 했다.
52. 고토에서는 어떻게 대접받았고 어떤 문제 거리는 없었나?
동료 2명이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을 뿐 나머지는 다 잘 대해 주었고 별 다른 문제는 없었다.
53. 동료들 중에 일본에 와 본 적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항로를 알았는가?
일본에 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가사끼에 있던 조선인 몇 명이 항 해하는 법을 말해 주었다. 게다가 키잡이가 해줬던 말도 기억했다.
54. 조선에 남아있는 여덟명의 동료들의 이름과, 임무, 나이는 어떻게 되는 가?
1) Johannis Lampen, 조수, 36세;
2). Hendrick Cornelissen, 2등 갑판장
3) Jan Claeszen, 요리사, 49세, 남원에 살고 있음;
4) Jacob Janse, 조타수, 47세;
5) Anthonij Ulderic, 포수, 32세;
6) Claes Arentszen, 급사, 27세; 여수좌수영에 살고 있음;
7) Sander Basket, 포수, 41세;
8) Jan Janse Pelt, 하급 갑판원, 35세.
55. 나가사끼에 도착한 8명의 이름과 역할, 이름은?
1) Hendrick Hamel, 서기, 36세;
2) Govert Denijszen, 조타수, 36세;
3) Mattheus Ibocken, 이발사, 32세 ;
4) Jan Pieterszen, 포수, 36세;
5) Gerrit Janszen, 포수, 32세 ;
6) Cornelis Dirckse, 항해사, 31세 ;
7) Benedictus Clercq, 급사, 27세;
8) Denijs Govertszen, 급사, 25세 .
이리하여 1666년 9월 14일 답변은 성심 성의껏 이루어졌다.
"하멜관련 역사적 기록자료"
효종4년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쩏쩎)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원전】 35 집 645 면
【분류】 *외교-구미(歐美)
효종6년
당초에 남만인(南蠻人) 30여 인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이르렀으므로 목사 이원진(李元鎭)이 잡아서 서울로 보내었다. 조정에서 늠료를 주고 도감(都監)의 군오(軍伍)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자가 길에서 곧바로 하소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청사가 크게 놀라 본국을 시켜 잡아 두고 기다리게 하였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끝내 묻지 않았다.
현종개정판
비변사가 아뢰기를,
엊그제 전라 감사의 장계로 인해 전라도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도망쳐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본도에 공문을 보내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더니, 좌수영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좌수사 정영(鄭쵲)을 나문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현종개정판 8년
수찬 김석주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해 보냈다. 일찍이 갑오년에 남만인(南蠻人)의 배가 표류해 대정(大靜)의 해변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탄 배가 죄다 파손되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주 목사가 치계하여 여쭙자 그들을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에 그중 8명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해 일본 오도(五島)에 도착하였다. 오도에서 이들을 붙잡아 장기(長?)로 보내니 장기 태수가 그들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는데 아란타(阿蘭陀)의 사람들이었다. 아란타는 곧 일본에 속한 군(郡)이었다. 그 사람들을 강호(江戶)로 들여보냈는데 관백(關白)이 대마 도주(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묻기를,
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耶蘇宗門)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귀국이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돌아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이지마는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
하면서 여러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양 우리 나라에게 붙잡아 보내주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관백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을 알고도 이를 트집잡아 권현당(權現堂)에 쓸 향화(香火)를 요구할 구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差倭)가 나와 관(館)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원전】 37 집 547 면
【분류】 *외교-왜
필자후기
<강진 병영의 네델란드촌 프로젝트 추진상황>
강진 병영의 네델란드촌 조성의 프로젝트가 거론되기는 1996년도부터이다.
당시 주한 네델란드 대사 울프 스윈클의 적극적인 관심과 강진군의 의지 때문에 결실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진군과 네델란드 홀큼시와의 자매결연으로 홀큼시장이 이곳을 방문하여 홀큼시측에서도 병영의 네델란드촌 조성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로 하멜 실물크기의 동상을 제작 기증하여 강진군에 보관중었으나 지금까지 동상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문제는 재정 문제였다.
2002년 10월 강진의 네델란드촌 조성이 가시화되었으니, 하멜생활 민속전시관 건립의 사업의 수립되었다.
위치는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70번지에 면적 1만평 규모로, 총사업비는 42억원이다.
이를 위해 추진위원이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천용택 국회 국방위원장, 하인드브리스 주한 네델란드 대사, 도영심 한국 방문의 해 추진위원장, 김종규 한국박물관 협회장, 윤동한 강진군수, 김홍식 명지대교수, 이개호 전남도 관광 문화국장이다.
2002년 10월14일 한국관광공사 회의실에서 추진위원회의를 개최하는데 네델란드촌 조성과 관련된 사업 설명, 조성대상 지역의 원형보존 협의, 앞으로의 추진방안이 거론되면 급물살을 탈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