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책을 읽다가 “나는 여름날이 긴 것을 사랑한다.”는 문장을 읽었다. 아주 평범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 문장과 만나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여름날의 오후는 길다. 이하의「뒷 정원에 우물을 파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시 중에서 “하루가 천년처럼 길어져 / 흘러가지 않았으면 一日作千年 不須流下去”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천년 같은 하루 ! 병도 늙음도 죽음도 없는, 그저 무한으로 흘러가는 극락의 시간이요,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 같은 선계(仙界)의 순간이다. 긴 여름날의 오후가 달콤하고 행복한 것은 그것이 짧게 지나가는 생의 덧없음과 아쉬움에 대한 복수인 까닭이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도 그 긴긴 여름날 오후의 낮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일까 ?
8월의 햇빛들은 냉혹하다. 그것은 맹렬한 뜨거움 그 자체이지만, 그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은 잘 벼린 칼날이 뿜어내는 몸을 오싹하게 하는 서늘함을 품고 있다. 8월의 나무들은 오로지 녹색의 잎만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대응한다. 나는 텃밭에 나가 잘 익은 토마토 몇 개를 딴다. 토마토는 태양의 붉은 반점을 자랑스럽게 적자(嫡子)의 표식으로 둥근 몸에 두르고 있다. 토마토들은 붉음의 정점을 보여준다. 토마토는 간밤의 폭우에 튀어오른 흙이 약간 묻어 있고, 햇빛을 오래 받은 탓에 토마토를 쥔 손안에서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진다. 토마토의 과육을 베어 물면 초록색 내부가 파열하며 즙이 턱밑으로 흘러내린다. 그 순간은 놀라움의 순간이다. 내가 깨문 것은 8월의 냉혹한 햇빛이며, 땅의 정수이고, 태양이 익힌 둥근 우주이다. 한반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신기루와 같이 막연하던 행복이라는 것이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오는 놀라움의 순간이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신이 우리에게 베푸는 행복의 조건들을 오감(五感)을 활짝 열어 맘껏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애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시들은 어떠한가 ?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가 ?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다
혹은
하아얀 햇빛이 깔린
어느 도서관 정원이라 해도 좋다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노곤한 그리움이여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다정한 얘기가 하고 싶다
아니 그냥
당신의 그 성그런 눈속을 들여다 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다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이제하, 「청솔 그늘에 앉아」
내 아가, 내 누이동생아,
저기 가서 같이 사는
감미로움 생각해 보렴!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지고
너를 닮은 그 고장에서!
안개 낀 날씨
젖은 태양이
내 정신에겐 눈물 거쳐 반짝이는
변화무쌍한 네 눈의
그토록 신비로운
그런 매력 풍긴다네.
거기선, 일체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로움, 고요함과 그리고 쾌락뿐.
오랜 세월에 닦여
윤나는 가구들이
우리 방을 장식하리.
가장 희귀한 꽃들
은은한 용연향에
그들 향기 뒤섞고,
호화로운 천장,
깊은 거울들,
동양의 찬란함이여,
거기선 일체가
영혼에게 은밀히
그 감미로운 모어(母語)를 말하리.
거기선, 일체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로움, 고요함과 그리고 쾌락뿐.
보라 저 운하 위에
배들이 잠듦을
그들의 성미가 방랑자 같아,
세계의 끝에서
그들이 거기 온 것은
네 사소한 욕망도 채워주기 위함이네.
서산에 지는 해는
들판을 물들여서
운하들이며 온 거리거리
보랏빛과 황금빛,
세상은 잠들도다
저녁노을 훈훈한 빛속에.
거기선, 일체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화로움, 고요함과 그리고 쾌락뿐.
―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L'INVITATION AU VOYAGE)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가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 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한차례 소나기 지난 뒤 회복되는 푸르름.......
하늘에 다시 화색이 돈다. 나물들이 빗방울을 털면 포석은 빗물을 마신다. 도시도
수많은 문장을 길어 올린다. 물기 머금은 웃음과 빗발치는 맨발들. 풍경이 온통
믿음에 흠뻑 젖어 있는 것만 같다.
이 푸르름을 잘 가꾸어 한가로운 손길로 거둬다가 삼베 앞치마나 버드나무 바구니에
담고 싶으리라. 하늘을 다발로 엮어, 그 향기 흩뿌리고, 몇 시간 동안 그 아름다움을
껴안아 화해하고 싶으리라.
그러고 싶지만, 바라볼 따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아무런 몸짓도
말도 없이, 풍경은 아랑곳없건만 일편단심을 향한 어리석은 욕망을 안고, 저기 빛 속에
머물러 서 있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비록 한차례 소나기 지난 뒤 정원 풀밭에 듣는
빗방울처럼 여리다 해도, 사랑은 우리의 과제이고 의무이기에.
―장 미 셸 몰푸아, 「푸른 시선」
혹은, 이런 노래는 어떠한가 ?
I just want you to be happy
I might not be the one to make you though
It hurts so much to see you down
I just want you to feel better
I just want you to be happy
I might not be the right one, who knows
It hurts so much to see you decay
I just want you to find the way out
I just want you to be happy
You might not feel like talking to me
But it hurts so much to hear the silence
I'd rather hear you scream from your soul
You never tell me what the pain is for
You let your heart be stuck in the fall
You don't have to share
Just come out of a cage
Then the sun will banish your fears
I just want you to be happy
I might not be the one to make you though
It hurts so much just to be around you
When you are too hard on yourself
I just want you to know
I just want you to know
I just want you to know
that it's okay to be happy in the fall
I just want you to be
I just want you to feel
I just want you to be
I just want you to be happy
Bonnie Pink - I just want you to be happy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하게 다른, 존재 내부에서 아주 미묘하면서도 돌연한 형질 변경이 일어나는 오후들이 있다. 오늘은 어제와 분명하게 다르다. 낡은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고 새로 칠한 듯, 내 존재의 내부가 쇄신한 듯한 느낌이다. 나는 이미 너무 다른 존재가 되어 결코 어제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생의 일회성은 그렇게 되돌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 오후의 시간에 거창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무뚝뚝한 사물과 존재들. 그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여름날의 긴 오후는 충동, 도약, 비상과는 거리가 멀다. 어리석은 욕망과 피의 격동이 잦아든 뒤 찾아오는 관조, 몽상, 나태의 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여름날의 오후에는 어떤 영혼도 비명을 지르는 법은 없다. 약간의 우울증, 잠깐 동안의 생기 부족, 미량의 멜랑콜리 때문에 질식하는 영혼은 없기 때문이다.
햇빛은 여전히 눈부시고, 하늘은 옥양목을 잘 빨아 펼쳐놓은 듯 은은한 빛으로 빛나고, 수목의 잎들은 바람에 찰캉찰캉 쇳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우체부가 다녀가고, 오접된 전화를 두 번 받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후의 시간이다. 책상 위에 쌓인 우편물과 서류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하다. 오대산 월정사의 풍경도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을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연주곡이나 아니타 존스의 노래들이 정오의 희망곡으로 흘러나오고, 나는 의자에 앉아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에 든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것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몽롱한 오후에 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멜라닌 색소와 같이 영혼의 표면에 침착(沈着)하는 우울, 다정한 부재의 느낌들, 어떤 상실 때문에 일어나는 날카로운 통증들....... 인생은......그냥......지나가는 것이다.
그 오후의 시간에 17세 소년시인은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그때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 노곤한 그리움”으로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가슴을 벅차게 만든 그 그리움의 정서적 내역은 아주 소박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 다정한 얘기가 하고 싶다 / 아니 그냥 / 당신의 그 성그런 눈속을 들여다보며 /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다”. 당신은 멀리 있다. 당신의 깨끗한 손과 다정한 목소리도 멀리 있다. 이 부재, 그리고 부재의 실감이 만든 한가로움. 그리하여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막막함은 존재 내부를 그리움이라는 바이러스가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덧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욕망을 누가 나무랄 수 있는가 !
긴 여름날의 한가로운 오후는 홍차를 마시거나, 지루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나른한 재즈를 듣기에 아주 적절한 시간이다. “행동은 꿈의 누이가 아니던가 ?”(보들레르) 가장 위대한 업적들도 처음 한 동안은 어렴풋한 몽상, 몽롱한 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 오후의 시간들은 저 바쁜 일상적 노동과 의무에서 우리의 손과 발을 해방시켜 공익과 상관없는 몽상과 사색, 혹은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꿈들을 한가롭게 부화시킬 일이다. 거창한 준비는 필요없다. 조금 편안한 의자에 몸을 반쯤 눕히고 홍차를 한 잔 마신다. 그리고 프랑시스 퐁쥬의 시집, 이하시선(李賀詩選), 노자의 『도덕경』, 오정희 단편소설을 게으르게 읽는다. 9급공무원 채용고시 교재를 파고들듯 너무 집중해서 읽을 필요도 없다. 반쯤 졸며 읽다가 낮잠 속으로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가난과 힘든 노동의 수고에서 벗어난 몸은 오후가 베푸는 게으른 평화로 충만해진다.
첫댓글 나른한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