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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미국 여행의 시작인 날이다.
어제 긴 자동차 여행으로 다들 지쳐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이번 여행에서 호텔을 예약할 때 윌슨과 애틀란타에서는 조식뷔페가 포함되도록 하였고,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올랜도, 마이애미에서는 조식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그래서 조식도 조금 늦은 시간까지 제공이 된다. 9시 넘어서 1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어머니와 세란이는 이미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음식의 종류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 항상 미국 여행중에 조식을 먹는 경우에 아쉬운 것은 빵, 계란, 베이컨 등은 있으면서 야채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그렇게 살찐 사람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랜만에 베이컨도 먹고 소시지도 먹고 그래도 기분 좋게 아침을 즐겼다. 잠시 후 정세와 일한이도 합류를 하였고 여유를 부리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께서는 큰이모와 통화가 되었고 점심 때 이모 가족이 호텔로 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오늘 윌슨 다운타운에서 무슨 페스티벌을 한다고 하였단다.
아침을 먹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 윌슨 다운타운으로 들어가 보았다. 굳이 헤매고 찾지 않아도 넓은 광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인구가 3만여명쯤 되는 이 작은 타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일도 참 드물 것이다. 주차를 하고 우리들도 그 틈에 끼었다. 흑인은 물론 유색인종은 거의 없고 백인들만 바글거렸다. 무슨 페스티벌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로등마다 바람개비들이 특별한 모양을 갖추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구경하는 행사인 모양이다. 소방차가 와서 어린이들에게 사다리차를 타게 해주는 이벤트도 하고 풍선도 나눠주고 티셔츠도 파는 등 그래도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 넓지 않은 광장을 천천히 산책하며 도니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사진을 몇 장 찍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 곳 윌슨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주도인 랄레이(Rareigh)에서 약 30km쯤 떨어진 위성 도시로 나는 꼭 30년 만에 다시 와보는 곳이다. 1987년 내가 장애인이 되고 만 3년 5개월이 지난 후 나는 재활치료를 위해 미국 워싱턴DC의 국립재활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전문적인 재활치료기관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고 후 3년이 넘는 시간동안 재활이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미국에 사는 지인의 도움으로 개원한지 1년 밖에 안되는 아주 좋은 재활병원에 올 수 있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입원기간 동안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병원비가 너무 비싸 퇴원을 결심한 후 처음으로 간 곳이 이 곳 윌슨의 큰 이모 집이었다. 병원까지 이모와 이모부가 나를 데리러 왔는데 바로 이틀 전에 자동차 에어컨이 고장나 고칠 시간이 없어 그냥 왔었다. 때는 바야흐로 더위의 절정이었던 8월 초였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온도는 거의 40도를 육박하였고, 워싱턴DC에서 윌슨까지는 4시간이 넘는 운전시간이 걸렸다. 가뜩이나 더위 많이 타는 나로서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중간에 얼음을 사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몸 곳곳에 대고 거의 실신 상태로 이모 집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미국 주택들이 그러하듯이 이모네 집도 침대방은 모두 2층에 있었고, 아래층에는 거실과 다이닝 룸 등이 있었을 뿐이다. 2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아 거실 바닥에 매트리스를 하나 놓고 누워있었다. 그 때, 사촌동생 행크와 제넷이 대학생이었고 조는 고등학생이었다. 더욱이 여름방학 기간이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모두들 바빴다. 성격이 자상한 제넷만이 시간을 쪼개 내 옆을 오래 지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 때도 내가 있는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자며 나를 도와주었다.
이모 집에서 3일을 있었지만 거실에 내내 누워만 있었고 단 하루 랄레이에 있는 듀크 대학 병원에 잠깐 다녀왔을 뿐이었다. 윌슨 다운타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30년만에 가족과 함께 윌슨에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주 작은 도시지만 조용하고 평온한 곳이었다.
호텔에 돌아와 잠시 기다리니 이모부 내외와 함께 행크, 조 내외가 아이들까지 데리고 호텔 로비로 들어왔다. 제넷은 결혼하여 두 시간쯤 걸리는 웰밍턴이란 도시에 살고 있어서 오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돌아가며 끌어안고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조와 행크의 처 데비, 조의 처 멜리사와는 페이스북 친구로 가끔 소식을 주고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사촌간의 만남이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어머니 집안은 딸만 다섯이고 어머니가 그 중 장녀였다. 윌슨에 사는 소영이 이모가 어머니 바로 밑의 동생이었고 그 아래 동생과 막내 동생이 애틀란타에 사신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친구들이 사촌들과 가깝게 지내며 좋은 시간 보내는 것을 정말 부러워 했었다. 하지만 내 사촌들은 대부분이 미국에 살았고 그나마 가장 나이가 가까운 소영 이모네 자녀들이 이 먼 미국 땅에서도 촌구석에 사니 그저 막연히 그리워는 했지만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많이 서먹할 것이라 생각했고 미국 피가 훨씬 강한 친구들이라 자기들 시간이 바쁠 것 같아 윌슨에서 이들과 정말 오랜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3일간 여행 계획도 세웠고 우리 가족끼리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첫 날부터 그게 아니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호텔 로비를 독차지하다시피 앉아 이런저런 얘기에 시간이 갔다. 반갑고 좋았다. 이런 것이 핏줄의 땡김인 모양이다. 30년만에 만났는데도 너무 좋다.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행크는 그 지역에서 제법 큰 건설회사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단골인 베트남 음식점에 갔다. 모두가 앉으니 음식점 반은 꽉 찼다. 원하는대로 음식을 주문해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 내내 웃음과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어머니와 이모 내외를 제외하고 맥주들도 가볍게 한 잔씩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행크의 한국 사촌들이라고 식당 주인인 베트남 사람에게 소개를 하니 사장은 자기도 기분이 좋다며 맥주값은 무료라고 하며 대접을 한다. 기분 좋은 시간이 지났다. 잠깐 헤어졌다가 저녁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식당 가까이에 있는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사고 호텔에 들어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행크가 예약했다는 ‘잭스 그릴’이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이모네 가족은 이미 다 와있었다. 우리까지 더하니 10명이 훨씬 넘는다. 메인 디쉬를 제외하고는 행크가 알아서 에피타이저를 주문하였다. 그런데 이 친구 자기가 계산할 요량으로 에피타이저를 정말 많이도 시켰다. 그것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여러 종류로 많이 시켰다. 각자 맥주, 와인, 음료 등을 주문하고 메인 디쉬로는 스테이크, 파스타 등등을 주문한 것 같다. 그 지역에서는 꽤 고급식당이라고는 했는데 기대보다 맛은 덜했다. 하지만 양은 엄청 많았다. 이 식당도 행크의 단골이어서 식당 사장과 인사를 하고 평생 여기에서 살았던 이모네 가족들과 우연히 만난 손님들도 많아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전형적인 미국 식당이었다. 굳이 특별한 음식은 없었지만 떠들고 웃으며 먹으니 즐거웠다.
얘기 도중에 골프 얘기가 나왔고 행크는 당장 내일 라운딩을 한 번 하자고 한다. 동생 정세와 세란이가 골프를 칠 줄 알고 행크와 조도 골프를 꽤 친다 했다. 데비와 멜리사는 칠 줄은 알지만 그렇게 즐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즉흥적으로 내일의 계획이 잡혔다. 라운딩을 하는 동안 나도 같이 18홀을 돌자고 한다. 사고가 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오산 골프장과 안양 골프장 등 서너곳을 라운딩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자는 무슨 운동이든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며 골프 연습장 한 달 회원권을 등록해 주셨다. 그리고는 본전 생각하며 열심히 하라고 하셔서 시도때도 없이 가서 연습을 했더니 결국 한 달도 되지 못해 갈비뼈에 문제가 생겨 열흘 정도는 꼼짝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캘리포니아의 퍼블릭코스 골프장에서 4내지 5홀을 돈 적이 있었다.
내가 전동휠체어로 6km는 훨씬 더 될 18홀 골프장을 다 돌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고 그 넓은 초원을 마음껏 다닐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흥분도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행크가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쉽다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모두들 우르르 행크 집으로 따라갔다. 적당히 큰 규모의 집에 행크가 평소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한 잔 하는 것도 즐겨 집 안에 바도 만들어 놓고 뒷마당에는 그릴과 추울 때를 대비해 난방 장치도 완벽히 갖춰놓고 있었다.
아쉽게도 집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계단이 서너개 있었는데 일찌감치 집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뒷마당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내가 추울까봐 모두들 걱정해 온갖 난방장치는 다 동원이 된다. 작동이 잘 안되는 것도 있고, 결국 장작을 떼서 따뜻하게 해준다. 담요도 몇 개를 갖고 와서 내 무릎과 어깨에 덮어준다. 어머니와 이모는 집 안에 있었고 젊은 친구들은 거의 밖에 있었다. 스피커를 가지고 나와 음악도 한참 틀었다. 조금 쌀쌀했지만 기분 좋은 밤이었다. 우리가 한국 음악을 소개해 주겠다고 일한이가 스마트폰 안에 저장해온 음악을 스피커로 연결해 틀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도 술을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조금 춥기도 하고 한 잔 정도는 기분 좋게 먹고 싶어서 조가 마시는 술이 뭐냐고 물으니 세븐 엔 세븐이란 하이볼 칵테일이다. 처음 들어보는 술이라 그게 뭐냐고 물으니 보드카인 시그램 7 크라운(Seagram’s Seven Crown)과 사이다인 7 업을 혼합해 만든 칵테일이라고 한다. 세븐업의 맛이 강해 달콤하니 술같지 않고 맛있었다. 알코올이 몸에 조금 들어가니 체온도 올라가고 기분이 좋고 분위기도 좋아 서너 잔은 마신 것 같다.
행크는 차고 문을 열어 ‘미국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자기의 스포츠카 콜벳과 데비의 차를 자랑하고 바이크를 즐긴다며 근사해 보이는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도 자랑을 하였다. 윌슨에서는 고등학교까지 수재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나게 공부를 잘했던 행크였다. 조는 공부와는 별로 거리가 멀어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하여 태권도 유단자로써 대회에서 많은 트로피를 타 왔다는 것이 자랑거리였지만 공부 잘하는 행크 덕에 이모가 그 지역에서는 행크의 덕을 많이 봤다고 항상 자랑이었다. 그래도 성실하게 공부하고 직장 생활을 잘 했는지 이제 50을 막 넘은 나이에 원하는 것을 하며 여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좋았다. 늦은 시간까지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까지 서로 가깝게 느껴질지는 정말 몰랐다.
행크는 이번 여행이 우리 어머니의 팔순을 기념하는 여행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자기도 약속을 하겠다며 4년 후 팔순이 되는 큰이모의 생신에 맞춰 꼭 한국 여행을 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렇게 사촌들간의 즐거운 만남을 온종일 피부로 느끼고 느즈막히 헤어져 호텔로 돌아갔다. 사실 아직 시차적응도 되지 않았는데 웃고 떠들다보니 크게 힘들어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 것 같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골프장으로 향해야 한다. 생각보다 쌀쌀한 윌슨의 밤이 깊어간다.
첫댓글 와우 멋진 여행 되세요..
여행 다녀온지 두 달이 넘으니 언제 갔다 왔나 싶어. ㅋ
2번째로 읽습니다. 일단 댓글부터 달고 ㅋㅋ
감사합니다
@Roosevelt 이번 편은 읽는내내 미국영화 '뿌리' 가 생각났습니다.
대서사시의 전조가 느껴집니다
@LoBo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
꼼꼼하게 잘 정리된 여행기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친척분들이 외국에 많이 사시니 어디를 가도 반가운 만남이 계속되네요
가운데 크게 줄무늬 들어간 옷을 입고 계셔서
Roosevelt 님 더 주인공 같으세요~ㅎ
아직은 여행기라기보다 개인적인 얘기들이 많아서 좀 그래요.
며칠 후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면 조금 나을 거예요. .^^
우왕
부럽 부러버요~
차에 리프트 보니 더욱 부럽네요~
즐거운 여행기 기대할게요
부러우면 지는 건데... ㅋㅋ
미국 어느 동네에 가도 저런 리프트차량 렌트할 수 있어요.
미국인들의 특징 중 하나가 한번 정착하면 좀처럼 이사를 않고 평생을 보내는 것이지요. 30년째 작은 마을을 지키는 이모님 가족들~그만큼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뜻이겠지요.
30년이 아니라 50년이지요.
30년 전에는 제가 방문을 했던 것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