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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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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품이야기 스크랩 임금님진상품 나전(螺塡), 자개, 전감(?嵌), 함방(陷蚌), 취라(吹螺)
isidorus 추천 0 조회 12 14.11.24 21: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전(螺塡)은 야광 조개와 전복 조개 등의 껍질을 숫돌 등으로 갈아서, 여러 두께로 한 다음 무늬로 잘라 나무, 칠기 등에 붙이거나 끼워 넣어 광택을 내는 장식기법이다. 중국에서는 서주(西周)의 유적에서 발굴된 칠기에 조개껍데기를 붙인 것이 있었다. 당대에는 상당히 발달하여, 야광 조개의 두터운 것을 사용하여 자단(紫植)과 심향(沈香)에 감입(嵌入)한 목지라전(木地螺鈿)이 많고, 대매(?瑁)와 옥을 병용했다. 미진조개(微塵具)를 라피스 라줄리나 터키석 분말과 혼합하여 모래처럼 닦아내는 예와, 큰 조개 표면에 화조를 모조(毛彫)한 예도 보인다. 또 경배(鏡背)에 칠(漆)이나 아스팔트 계 도료를 칠하고 나전이나 옥으로 장식한 것도 보인다.

원 ? 명대에는 얇은 조개를 써서 산수, 화조, 인물 등의 정밀한 모양을 나타냈고 조개껍데기 뒷면에 금박(金箔)을 찍거나 채색을 한 화려한 장식기법도 발달하였다. 원대에는 강서 길안부 노릉현(盧陵縣)에 나전기의 공방이 있었고, 명말 이후는 주로 양주에서 나전제작이 있었다. 청대에는 기술이 더 정묘(精妙)해져서, 대형 가구와 병풍장식에도 쓰였으며 유럽에도 수출되었다.

한국, 고려 시대의 나전은 도예와 함께 대표적인 공예로서 관영인 중상서(中尙署) 에서 제작하였다. 원종13년(1272) 에는『전함조성도감(田函造成都監)』이 설치되어 대장경상(大藏經箱) 등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의장(意匠)에는 국당초(菊唐草)와 입국(立菊) 등의 무늬에 연주문(連珠文)과 별모양을 썼고, 금세선을 이용하여 조개 뒤에 대매를 붙인 것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전복 껍데기를 써서, 초기에는 목단당초 등을 독특한 곡선으로 표현하였고, 또한 자개에 균열(翁裂)을 만들어서 붙이는 수법도 썼다. 후기에는 회화적 무늬가 많으나 표현은 특출한 것이 못된다. 태국과 베트남에서도 나전제작이 있었으며,특히 베트남에서는 19세기에 목지라전의 가구와 공예품을 유럽에 많이 수출하였다.

중국에서는 전감(?嵌)·함방(陷蚌)·취라(吹螺) 또는 나전(螺塡)이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원래 자개라고 하였다.
나전에 사용하는 조개껍데기는 야광패(夜光貝)·전복껍데기가 주로 쓰이며 이 밖에도 담패(淡貝)·현패(?貝:가막조개)·멕시코 포패(鮑貝) 등 진줏빛을 내는 조개를 사용한다. 조개껍데기를 숫돌 등에 갈아서 여러 두께로 만들어낸다. 이것을 100장씩 포개 놓은 것이 두께의 단위가 되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후패(厚貝)가 4치(12.1cm), 박패(薄貝)가 2푼 5리(7.3mm)짜리를 기준으로 삼고 각종 두께로 만들어진다.

진상품관련근거
나전, 자개는 제주도 제주목에서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환박물에 기록되어있다


나전을 붙이는 방법
감입법(嵌入法:나전의 문양대로 목심을 도려내고 거기에 끼우는 법)·첩부법(貼附法:문양을 아교나 풀로 붙이는 법)·살부법(撒附法:나전을 잘게 썰어 뿌려 붙이는 법)의 3가지 방법이 있으며, 다시 조개껍데기를 성형하는 방법과 작업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후패법(厚貝法)은 조개껍데기의 후판(厚板)을 끌이나 실톱으로 자른 다음 줄칼로 형태를 다듬는다. 이것을 목심이나 칠면에 붙이는 방법은 위에서 말한 감입법이나 첩부법을 사용한다. 붙이기 작업이 끝나면 닦아서 윤을 낸다.
박패법(薄貝法)에는 얇은 자개를 자르는 데는 손칼이나 바늘 끝 등을 사용하는 '도려내기법'과, 무늬가 똑같은 끌을 만들어 찍어내는 '찍어내기법'이 있으며, 이렇게 만들어낸 무늬를 첩부법으로 목심에 붙이고 마무리작업을 한다. 이 밖에 조개껍데기를 원형대로 붙여 놓고 그 위에 옻[漆]으로 무늬를 그려 이것이 마른 다음 희석한 염산을 발라 무늬 이외의 부분을 부식시키는 '부식법'도 있다.
할패법(割貝法)은 자개조각에 인공적으로 균열을 만들어 둥근 기물 등에 붙이는 방법이다. 균열을 만드는 데는 후패의 경우 자개를 종이에 붙이고 망치로 쪼개거나 유발(乳鉢)로 부수고, 박패의 경우는 한지에 붙인 자개조각을 붓대 등에 감아서 금이 가게 하거나 미리 바늘 끝으로 자개에 선을 내어 감는다.
시패법(蒔貝法)은 자개를 잘게 부수어 뿌려서 붙이는 방법으로 세편(細片)을 체에 쳐서 분류하는데, 그 중 잔것을 미진패(微塵貝)라 하며 소도구의 장식용 등에 쓰인다.
치패법(置貝法)은 세모꼴·네모꼴·마름모꼴 등으로 자개조각을 잘게 잘라 칠면에 늘어놓는 방법이다.
복채법(伏彩法)은 얇은 자개의 뒷면에 채색하거나 금박하는 방법으로 중국 명나라 때 성행하였다.
모조법(毛彫法)은 자개에 머리털 같은 가는 선을 새기는 방법으로 꽃잎·나뭇잎·깃털 등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부조법(浮彫法)은 칼을 사용하여 자개에 무늬를 양각하는 방법으로 조패(彫貝)라고도 한다.


나전의 역사
자연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전통공예 나전칠기지금도 최고급 공예품으로 평가받는 나전칠기의 유래는 청동기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적으로 고구려 고분에서 칠기의 흔적이 보이고 신라와 백제에서도 칠기가 유행했었다.나전기법은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으며 그것이 우리 나라와 일본에 전하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래의 초기에는 주로 백색의 야광패(夜光貝)를 사용하였으나 후대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청록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세련된 귀족문화와 함께 금속선을 꼬아 식물줄기 문양을 장식하고 거북의 등껍질을 얇게갈아 그 뒷면에 붉은 색을 칠한 “대모복체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조선시대에는 고려 나전칠기와 차별화된 문양을 사용하여 둥글고 넓은 자개의 표면을 망치로 쳐서 바닥에 닿게 하는 “타발법”과 자개를 길고 가늘게 오려 무늬를 형성하는 “끊음질” 기법을 통해 대형작업과 회화적 표현이 가능해졌다.
특히 조선시대의 나전칠기는 현재까지 큰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말기에는 문방구류, 가구류, 여성용품류 등의 기물들이 제작되었다.
나전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중국 당(唐)나라 때 매우 성행하여 자단(紫檀)이나 침향(沈香) 등의 목심에 자개를 박은 것이 많았고, 대모(玳瑁)와 옥을 병용하기도 하여 당시의 나전기술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당시의 나전은 대부분 남방산(南方産) 목심을 썼고, 자개도 남해산을 쓴 것으로 보아 나전의 기법도 남방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대(宋代)에 이르자 나전법은 한때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오히려 한국과 일본에서 성행하였다.
《격고요론(格古要論)》이나 《준생팔전(遵生八?)》을 보면 원(元)·명(明) 시대에는 장시성[江西省] 루링[廬陵]과 안후이성[安徽省] 신안(新安)에서 나전칠기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기법은 명·청대에 더욱 발달하여 패각 뒷면에 채색하거나 금박을 붙여 박패(薄貝)의 색채가 찬연하게 빛나는 정교한 수법도 쓰였고, 이것을 ‘친색전감(?色?嵌)’이라 하여 그 아름다움은 칠보와 같다고 하였다. 


한국의 나전
한국의 나전은 삼국시대, 중국 당나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믿어진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라 전하는 당나라 양식의 《보상화문평탈나전경감(寶相華文平脫螺鈿鏡鑑)》이 민간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위의 추측은 신빙성이 있다. 그후 중국은 송나라 때부터 나전기법이 쇠퇴하였으나, 한국은 고려 때 나전기법이 눈부시게 발달하여 도자기 공예와 더불어 고려의 대표적 공예가 되었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에 관하여는 《고려사》 《동국문헌비고》 등에 그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유물도 전해지고 있어 그러한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미 고려에서 요(遼)나라에 나전칠기를 예물로 보낸 기사가 보이며, 1123년(인종 1)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나전칠기에 대하여 “그 기법이 매우 세밀하여 귀히 여길 만하며, 나전이 장식된 말안장도 매우 정교하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나라의 나전칠기는 고려시대 이후 독자적인 기법으로 발전 전승되어 한때는 세계적인 기술을 자랑할 만큼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고려 인종때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고려 나전칠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만 하고 나전이 장식된 말안장도 매우 정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전칠기에 쓰인 문양도 시대에 따라 구분되는데, 조선조 초기인 15, 16세기의 나전의장은 고려시대의 여운을 남기고 있으나 연당초문(唐草文), 쌍봉문, 보상화문 등 고려시대의 섬세했던 도안이 조방해지고 아울러 표현이 대담하며 활달하다.

17,18세기 경에는 전기의 기법이 다소 쇠퇴하면서 점차 매죽(梅竹), 화조(花鳥) 등의 그림이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점차 사군자(四君子)나 십장생(十長生) 등 문인화풍의 문양이 성행되었다. 말기인 19세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어 십장생과 산수문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칠기가 언제부터 한국인의 생활에서 쓰이기 시작했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국의 역사서에서 보면 한(漢)대에 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낙랑고분에서 칠기가 출토되고, 신라의 관직제도에 칠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나전칠기가 완성되기까지는 수 많은 과정을 거칩니다. 먼저 전복의 속껍질을 가는 전복껍질 갈기로부터 시작하여 줄로 모서리를 갈아 부식시키는 줄로 썰기, 칼로 껍질을 가늘게 자르는 상사설기, 실상사를 이어서 칠과 토분을 이겨서 고태바르기를 하고 밑그림을 그립니다. 그런 다음 활질로 자게에 구멍을 뚫고 실톱으로 무늬를 오리고, 종이본에 자개를 붙여 인두로 눌러붙입니다. 종이본을 떼내고 옷칠을 다시 합니다. 마무리 단계로 자개에 묻은 옻칠을 닦아 낸 다음 인두로 마름질을 하고 숯과 기름으로 옻칠에 윤기를 내는 광내기를 합니다.

이러한 목칠나전(木漆螺鈿)의 정품(精品)들은 당시 관영 공예품 제작소였던 중상서(中尙署)에서 화업(畵業)·소목장(小木匠)·위장(韋匠)·칠장(漆匠)·마장(磨匠)·나전장(螺鈿匠) 등 칠공들에 의하여 양산된 사실이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되어 있으며, 중상서는 목종(穆宗) 때 설치되어 고려 말기까지 존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간행되면서 그 경책(經冊)을 넣어 두기 위한 나전경상(螺鈿經箱)을 만들기 위하여 1272년(원종 13)에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 설치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경상류가 지금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나전의 명품들이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흑칠나전포류수금문향상(黑漆螺鈿蒲柳水禽文香箱) 외 4점을 비롯하여 일본 도쿠가와[德川]미술관에 있는 합자(合子), 다이마사[當麻寺]에 있는 대모장염주함(玳瑁裝念珠函), 게이?인[桂春院]에 있는 대모합자(玳瑁合子),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경상(經箱), 영국 대영박물관의 경상, 독일 쾰른의 동양미술관에 있는 나전상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동양미술관에 있는 경상 등이며, 이들은 모두 흑칠나전(黑漆螺鈿)으로 국당초무늬[菊唐草文] 등의 장식을 한 명품들이다. 이러한 고려의 나전공예는 고려의 쇠퇴와 함께 13세기 후반부터 점차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해이해지면서, 성글고 거친 기법이 조선 전·중기의 나전으로 전승된다.

조선시대의 나전칠기는 대체로 크게 3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즉, 조선 전·중기인 15~16세기의 나전의장(螺鈿意匠)은 연당초무늬[蓮唐草文]·쌍봉무늬[雙鳳文]·쌍룡무늬·보상화무늬[寶相華文] 등 고려시대의 도안이 조략(粗略)해지고 아울러 표현이 대형화된다. 후기인 17~18세기에는 점차 매죽(梅竹)·화조(花鳥) 등 해체된 그림 의장이 우세해졌으며, 이 시대의 청화백자무늬와 함께 순정적인 표현이 많아진다. 말기인 19세기에는 나전기법에 ‘끊음질’이 성행하였고, 따라서 문양보다 자연묘사에 중점을 두어 십장생(十長生)과 산수(山水)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나타난다.
한편, 매죽·화조무늬를 익살과 동심적(童心的)으로 표현하는 기풍이 늘어나서, 색다른 치기(稚氣)의 아름다움으로 조선시대의 나전이 지니는 하나의 매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후 일제강점기하에서 나전공예는 근근히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8·15광복과 더불어 다시 개화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경제성장기에 접어든 1960년대부터는 전례없는 나전공예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으며, 기법도 현대감각에 맞게 더욱 정교하고 다양해졌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양주문화관광, 위키백과,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 남환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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