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이케다 SGI 회장 강의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 (하)
대난이 말법을 구하는 대법홍통의 증거
[강의]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청년 6000명이 모인 '3.16' 기념식전. 은사 도다 선생님이 발하신 용감한 음성은 내 가슴을 깊이 울리며 떠날 줄 모릅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묘법을 깨닫고 니치렌대성인의 유명(遺命)대로 광선유포를 위해 불석신명으로 실천한 은사가 외치신 대확신이었습니다. 홀로 패전의 초토(焦土)에 서서 '여설수행의 왕자'로서 많은 대난을 이겨낸 승리 선언이었습니다. 참으로 학회 만대에 걸쳐 빛나는 영원불멸한 혼의 대사자후입니다.
모든 청년은 은사가 외친 승리의 함성에 불타 숭고한 사명을 자각하고 니치렌불법을 수행하는 환희와 감동에 몸부림쳤습니다. 은사가 지닌 정의로운 대확신을 제자가 곧바로 이어받은 광선유포 의식(儀式)이었습니다.
그리고 52성상(星霜). 나는 <어의구전>에 "사제(師弟)공히 부르는 바의 음성이고"(어서 748쪽)라는 말씀대로 스승의 외침에 따라 불세출(不世出)의 위대한 스승을 선양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묘법을 홍통했습니다.
우리는 사상과 철학의 왕자로다!
평화와 문화와 교육의 왕자로다!
새로운 '인간주의'의 왕자로다!
그리고 드디어 청년들이 창가(創價)의 혼을 이어받을 때를 맞이했습니다.
청년들이 말법만년에 걸친 광선유포의 일체를 계승할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전 인류는 청년들이 세계에 평화와 인도(人道)의 연대를 이을 사명을 짊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창가의 청년들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개가(凱歌)와 함께 본무대도 뛰어나갈 때가 도래했습니다.
지금 <여설수행초>를 배독하는 의미도 청년들에게 모든 후사(後事)를 의탁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불이(不二)의 '여설수행 제자'가 출현한 데 대해, 엄격한 스승의 기대가 담긴 <여설수행초>결론부분을 배독하겠습니다.
[본문]_여설수행초 504쪽 1행~3행 |
[현대어역]
그러면 말법인 이때에 법화경의 절복 수행을 도대체 누가 경문에서 설한 대로 행했을까. 누구라도 "법화경 이외의 모든 경은 무득도의 가르침이고 타지옥의 근원이다. 오직 법화경만이 성불하는 법이다."라고 목소리도 아끼지 않고 외치며 제종(諸宗)의 인(人)과 법(法)을 함께 절복해보시오. 틀림없이 삼류강적이 나타납니다.
정법을 홍통하면 삼류는 반드시 출현
니치렌대성인은 이 어서 앞 단에서 말법에 '여설수행의 행자'가 지녀야 할 신(信)과 행(行)을 논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인을 구제하는 성불의 법인 '일불승(一佛乘)', 결국 법화경을 믿는 일이 불의(佛意)에 맞는 올바른 신심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행복을 방해하고 법화경을 비방하는 세력과 단호히 투쟁하는 '법화경의 절복'만이 말법의 때(時)에 맞는 실천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올바른 신심에 서서 실천을 관철하는 말법의 때에 맞는 '여설수행의 행자'인지 밝히셨습니다.
처음에 "말법 지금의 때에 법화경의 절복의 수행을 누가 경문대로 행하였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법 지금의 때"는 앞 단에서 말씀하셨듯이 "권실잡란(權實雜亂)의 때"입니다. 권실잡란을 바로 잡지 않으면 '투쟁언송(鬪諍言訟) 백법은몰(白法隱沒)'하는 법멸(法滅)의 때를 맞습니다. 그래서 "제경은 무득도 * 타지옥의 근원" "법화경만이 성불의 법"이라고 '권실잡란'을 바로잡는 절복이 중요합니다.
이전경에서는 득도하는 여러 가지 길을 설했는데, 그 길만으로는 결코 성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전경은 십계호구(十界互具), 일념삼천(一念三千) 법리(法理)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전경을 연(緣)으로 법화경에 들어가서 십계호구, 일념삼천의 묘법을 믿으면 득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법에는 제종(諸宗)이 난립하여 자기들이 근본으로 하는 여러 경(經)을 절대적으로 믿고 법화경을 비방하는 가르침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권실잡란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만이 성불하는 법이고, 이전의 모든 경으로는 득도할 수 없다고 파절해야 합니다. 대성인은 누구든 절복을 하면 삼류강적(三類强敵)이 틀림없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의 절복'은 이렇게 성불하는 도리를 근본으로 하는 파절이며 결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습니다. 절복의 근간은 지금까지 확인했듯이 성불하는 법을 아끼는 마음이고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자비의 정신입니다. 정법(正法)을 비방하고 민중을 불행에 빠뜨리는 마성(魔性)과 과감히 싸우는 '신경법중(身輕法重)'의 파절정신을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으면 악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이 법화경의 절복은 법을 지키고 구제하는 정의로운 실천을 하기 때문에 증상만(增上慢)의 세력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법화경 행자가 받는 대난의 본질은 이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모릅니다.
말법은 삼류강적과 벌이는 투쟁
이 점을 이해하는 의미로 '삼류강적'을 다시 확인하고자 합니다.
법화경 권지품 제13 첫머리에 악세의 중생은 선근(善根)이 적고 증상만이 많다고 설했습니다. 또 증상만에 빠진 자는 공양을 탐내고 악인(惡因)을 쌓으며 해탈(解脫)에서 멀어진다고 설했습니다. 정법인 법화경을 증상만의 세력 속에서 설하면 반드시 저절로 박해가 일어납니다.
권지품에서는 멸후악세(滅後惡世)의 사바세계에서 법화경 회좌(會座)에 함께한 보살들이 어떤 대난을 받아도 법화경을 홍통하겠다고 맹세하는데, 그 맹세를 밝히고 박해의 모습을 설한 것이 '권지품 이십행(二十行)의 게(偈)'이고, 이 중에서 박해자를 세 종류로 분류한 것이 '삼류강적'입니다.
경문을 토대로 각각의 특징을 보면, 첫째 속중증상만(俗衆增上慢)은 '무지(無智)한 자고, 둘째 도문증상만(道門增上慢)은 사지(邪智)고 아첨하는 자며, 셋째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은 '인간을 경멸'하고 '자기 이익을 탐내는 악심(惡心)'을 지닌 자입니다.
이런 '무지(無智)' '사지' '악심'과 같은 증상만의 마음은 '무명(無明)'의 작용으로 인해 생깁니다. 무명은 생명에 갖춰진 근본적인 무지(無智)를 말합니다. 그 무지에서 번뇌 등 어두운 충동이 일어나서 생명을 불행으로 몰아넣습니다. 특히 만물이 묘법의 당체임을 모르는 가장 근원적인 무지(無智)를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이 왜 두려운가 하면 정법을 설해도 그것을 신해(信解)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발하며 정법을 파괴하려는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잠재하는 원품의 무명에서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육천마왕에게 생명이 지배당한 자가 법화경 행자를 적대합니다.
<미사와초>에는 말대(末代)의 범부(凡夫)가 부처가 되려고 수행할 때, 그것을 방해하려고 제육천마왕이 가지각색의 작용을 일으킨다고 설해습니다.(어서 1478~1488쪽) 즉 그 사람이 성불하면 많은 사람을 인도해서 부처를 만들고, 머지않아 이 사바세계는 정토(淨土)로 바뀝니다. 사바세계를 영토로 하는 제육천마왕은 자기 영토을 빼앗길까 두려워 모든 부하에게 명해 법화경 행자가 성불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이번에는 법화경 행자의 제자와 단나 그리고 그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몸 속에 들어가 훈계하고 협박하며 방해하려고 획책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제육천마왕은 스스로 국주(國主) 몸에 들어가 어떻게 해서든 법화경 행자가 성불하지 못하도록 위협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삼장사마(三障四魔) 중에서 사마(死魔)까지는 이길 수 있으나 마지막의 천자마(天子魔)가 참으로 두렵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자마가 제육천마왕입니다. 그리고 <미사와초>에 제육천마왕이 속중증상만과 도문증상만을 조종해서 참성증상만의 몸 속에 들어가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도록 만들었다고 밝히셨습니다.
어서에 "원품의 무명을 대치(對治)하는 이검(利劍)은 신(信)의 일자(一字)이니라."(어서 751쪽)고 씌어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신심의 이검만이 제육천마왕을 타파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묘법을 믿음(信)으로써 무명을 타파하면 본디 생명에 갖춰진 '원품(元品)의 법성(法性)'이 용현합니다. 원품의 법성은 부처가 깨달은 만물의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성불은 이 법성이 무명과 투쟁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화경 행자의 절복행은 원품의 법성이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법화경은 법성을 촉발하는 경전
그런데 대성인이 "제경(諸經)은 무득도(無得道)"라고 강력히 파절하신 까닭을 무명과 법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면, 제경이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무명을 더욱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불의 인과(因果)는 십계호구에 준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의미에서 범부는 제경이 설하듯 구계(九界)와 불계(佛界)를 단절하고 구계를 부정해서 불계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상식적'으로 비치고 이해하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권경(權經)은 중생 기근에 따른 수타의(髓他意)의 가르침입니다.
사실은 수타의인 방편의 가르침을 버리고 수자의(隨自意)인 진실한 가르침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권경에 빠지면, 오히려 올바르게 성불하는 인과를 설한 법화경을 부정하고 잘못된 인과에 얽매여 더욱 무명을 조장합니다.
무명의 작용이 권경에 대한 집착을 만들고 불충분한 권경이 무명을 더욱 조장합니다. 제경은 이 무명이라는 사슬 때문에 '타지옥(墮地獄)의 근원'이 됩니다. 반대로 "법화경만이 성불의 법"이란 말은 십계호구의 진실한 성불을 설하는 수자의 경정인 법화경만이 사람들의 불성을 촉발하는 힘이 있는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면 무명을 조장하는 제경을 파절하고 법성을 촉발하는 법화경을 홍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법화경 행자에게 적대하는 제육천마왕이 더욱 격렬하게 작용하도록 하며 삼류강적이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삼류강적이 닥쳐온다는 것은 틀림없느니라."입니다.
[본문]_여설수행초 504쪽 4행~9행 |
[현대어역]
우리의 본사(本師)인 석가여래는 재세 8년간 법화경을 설해서 권경(權經)을 절복하셨다. 천태대사는 30여년, 전교대사는 20여년 그리고 지금 니치렌은 20여년간 권경의 이론을 파(破)했다. 그동안 받은 대난은 헤아릴 수 없다. 석존이 받은 구횡(九橫)의 대난(大難)에 미치는가 미치지 않는가는 제쳐놓고, 아마도 천태대사도 전교대사도 법화경 때문에 난을 받았어도 니치렌과 같은 대난은 받지 않았다. (중략) 이러한 대난을 용수나 천태대사, 전교대사인들 어찌 미치시겠는가. 그러므로 여설수행하는 법화경 행자에게 삼류강적이 반드시 다투어 일어남을 아시오.
대난을 극복하므로 대자비의 투쟁
대성인은 여기서 석존, 천태대사, 전교대사 등이 당한 수난(受難)의 선례를 들어 누가 어떤 대난을 받았는지 밝히셨습니다. 석존도 천태도 전교도 법화경의 정의를 선양하고 권교를 파절했기 때문에 대난을 받았습니다. 석존이 받은 구횡(九橫)의 대난(大難)은 유명합니다. 대성인은 이 석존의 대난은 별도로 하고, 천태와 전교가 받은 대난은 '악구(惡口), 원질뿐'이었으며 대성인과 같은 대난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은 막부(幕府)에서 결정한 두번의 유배와 다쓰노구치 참수(斬首)의 좌(座), 이마의 상처를 입고 왼팔이 골절되는 고마쓰바라 법난 등, 신명(身命)을 위협하는 대난을 계속 받았습니다. 또 대성인과 함께 싸운 제자들도 유배, 투옥, 소령몰수, 추방 등 대난을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성인은 왜 여기서 천태, 전교가 받은 난과 자신이 받은 난을 비교하시는가. 그것은 홍통하는 법의 심도와 대난이 밀접하게 관계하게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치병대소권실위목>에서 법화경을 수행할 때 생기는 삼장사마에 관해, 천태나 전교가 받았을 때보다 대성인이 받으셨을 때가 "두루 일어났으며" "한층 더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난과 묘법(妙法)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념삼천의 관법(觀法)에 두가지가 있으니 일(一)에는 이(理), 이(二)에는 사(事)이리라. 천대, 전교 등이 때는 이(理)이고 지금은 사(事)이며 관념이 이미 뛰어났으므로 대난 또한 더하니라."(어서 998쪽)
'사(事)의 일념삼천'은 원품의 법성을 촉발하는 하종(下種)을 위한 대법(大法)입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통한 직달정관(直達正觀)입니다. 무명을 단절하고 만인의 불성을 불러 나타내는 강력한 대법입니다. 그러므로 원품의 무명을 흔들고 삼장사마 특히 천자마, 즉 제육천마왕까지 불러일으키는 동집생의(動執生疑)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법의 법화경 행자는 성불하는 근원이 되는 하종의 법을 홍통하기 때문에 상법시대 천태와 전교보다 격렬한 대난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난을 극복해야 진정한 법화경 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난을 이겨냄으로써 홍통하는 법력(法力)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난의 와중에 대성인은 '자수법락(自受法樂)'하는 승리의 경지를 유연히 표명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제육천마왕이 작용한 대난 중 하나인 이즈유배 때도 "커다란 기쁨이 있으니"(어서 937쪽),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만한 기쁨이 또 무엇이 있을소냐."(어서 937쪽)라고 환희에 찬 대경애를 선언하셨습니다.
사도에 유배되었을 때도 "당세(當世)에 일본국에서 제일로 부(富)한자"(어서 22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이 완벽하게 승리하셨습니다. 최대 법난인 다쓰누구치 법난도 "다쓰노구치까지도 이겼고"(어서 84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왕(魔王)도 넌더리를 냈으리라."(어서 843쪽)고 말씀하며 모든 대난을 극복하고 제육천마왕을 이겨낸 심경을 밝히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대성인은 모든 대난을 인내하며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대자대비를 위해 싸우셨다. 그리고 모든 대난에 승리하셨다. 이것이 어본불의 실증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불법(佛法)은 승부입니다. 진실한 법화경 행자는 삼장사마와 삼류강적에게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개목초>에 "난을 견디고 자비가 뛰어났음은 공구(恐懼)함마저 가질 것이로다."(어서 20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말법 민중을 구제하는 대자비를 위해 대난을 각오하고 여유만만하게 빙그레 웃으며 법화홍통의 선구에 서셨습니다. 어려운 민중을 지키는 지붕같이. 혼란한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같이 홀로 서서 장마(障魔)의 폭풍을 끝까지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은 악과 불행의 근본을 간파하고, 고뇌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서 소생시키며, 자타(自他)가 함께하는 행복을 지향하는 영원한 선(善)의 연대를 구축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자비즉지혜(慈悲卽智慧)의 혼을 어떠한 장마도 강적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니치렌대성인이 말법만년의 전 인류에 미치는 궁극적인 자비에 싸인 모습을 한 몸에 나타내시기 때문에 말법의 어본불로 배례하고 있습니다.
[본문]_여설수행초 504쪽 9행~11행 |
[현대어역]
그러므로 석존이 입멸한 후 2천년간 여설수행의 행자는 석존, 천태대사, 전교대사 세 사람을 제쳐놓고, 말법에 들어오면 니치렌과 그 제자 단나뿐이다. 우리를 여설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석존, 천태대사, 전교대사 세 사람도 여설수행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진실한 '여설수행의 사제'를 밝히다
도대체 누가 '여설수행'의 행자인가. 이 어서의 결론을 밝힌 중요한 말씀입니다. 석존이 입멸한 후에 말법에 들어오면 '여설수행'의 행자는 석존, 천태, 전교는 제쳐놓고, "니치렌 및 제자 단나"만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셨습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대성인 한분만이 아니라 "니치렌 및 제자 단나" "우리"라고 대성인 슬하에 있는 제자와 문하 일동까지 포함하신 일입니다. 여설수행의 행자는 대성인과 동일하게 사신홍법(死身弘法), 불석신명(不惜身命)의 마음으로 불도수행에 면려하는 제자 이외에는 없다고 밝히셨습니다.
이 얼마나 깊고 깊은 어본불의 대자비입니까.
불법은 사제(師弟)가 정수(精髓)입니다. 진실한 성불은 '여설수행'이라는 사제불이를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니치칸 상인은 문단(文段)에서 "여설(如說)은 사설(師說)이니라. 수행은 제자로 요약한다. 소위 스승이 설하는 바와 같이 제자는 이를 수행한다. 이것이 여설수행이니라."고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설수행', 즉 '사제불이'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승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불이(不二)의 제자가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사방에서 스승과 같은 뜻을 세운 많은 지용의 제자가 활약하는 모습입니다. 스승은 진실한 제자를 원하기 때문에 굳이 똑같은 고생길을 걸으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참된 제자이기에 고생과 시련을 긍지로 여깁니다. "니치렌 및 제자 단나"라는 말씀에서 그 깊은 뜻을 배견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각종 대난 속에서 '스승과 함께'라는 마음으로 함께 투쟁한 제자에게 주신, 가장 깊은 자애가 담긴 말씀입니다. 어쨌든 제자들이 이 어서를 배독하고 불이의 각오로 일어선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사제의 여설수행은 진실한 제자가 분발해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광선유포의 대하(大河)가 도도하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창가학회는 대성인 정신대로 민중을 구제하는 대하를 이어받아 대난과 싸우며 광포의 전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부정부가 가한 탄압에 맞서 싸운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도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선생님도 그리고 제3대인 나도 많은 '삼류강적' '삼장사마'와 싸워 엄연히 승리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부당한 권력이 가한 탄압과 투쟁한 오사카사건의 와중에 엄하게 외치셨습니다. "파절해야 할 일은 철저하게 파절해야 한다. 침묵하면 세간에서는 그것을 진실로 생각한다." "정의가 허위와 기만에 패하면 되겠는가." "정의는 이긴다고 하는데 반드시 이긴다고 할 수 없다. 정의도 싸우지 않으면 패한다. 학회는 정의이므로 패할 수는 없다. 단호히 승리해야 한다. 그래서 투쟁한다."
가장 정의롭기 때문에 계속 투쟁하고 단호히 승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삼대(三代)의 사제에 맥동하는 학회정신이자, '종교계의 왕자'인 학회의 여설수행 정신입니다.
대성인은 아부쓰보의 부인 센니치니에게 주신 어서에서 "좋다. 미워하려면 미워하라. 법화경, 석가불, 천태, 묘락, 전교, 장안 등의 금언(金言)에 몸을 맡길지니라. 여설수행의 사람이란 이것이니라." (어서 1308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은 여성제자에게도 스승과 똑같이 '여설수행'해야 하는 중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학회도 부인부와 여자부의 '여설수행'을 위한 기원과 행동과 단결로 이루어졌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_ 여설수행초 504쪽 18행~505쪽 5행 |
[현대어역]
일생이 지나가는 일은 잠시 동안이므로 아무리 강적이 겹쳐도 결코 물러서는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된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된다. 비록 목을 톱으로 자르고, 몸통을 창으로 찌르며, 발에 족가를 채우고 송곳으로 비벼 뚫어도 목숨이 있는 한,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또 부르며 죽는다면 석가, 다보, 시방의 제불은 영산회에서 약속하셨으므로 즉시 달려와서 손을 잡고 어깨에 둘러메고 영산으로 달려가신다. 그때는 이성(약왕보살, 용시보살), 이천(비사문천왕, 지국천왕), 십나찰녀는 법화경을 수지한 자를 돕고 지키며, 제천선신은 천개(天蓋)로 가려주고 깃발을 세워서 우리를 수호해 적광의 보찰로 반드시 보내주신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얼마나 기쁜일인가.
삼세영원한 성불의 경애를 확립
대성인은 삼류강적에게 고통받으며 고난과 싸우는 문하에게 "결단코 퇴하는 마음 없을지어다."라고 열렬히 지도하셨습니다.
나는 젊은 날에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이 어서의 강의를 받았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런 결심이 없으면 신심의 리더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또 사신홍법, 불석신명에 관한 신심을 가르친 "설사 목을 톱으로 켜서…"라는 어서에서는 "이것이 신심의 진수(眞髓)다."라고 엄격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은사의 예리하고 통렬한 지도는 내 가슴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대성인이나 문하가 받은 박해의 양상으로 보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법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순교주의(殉敎主義)가 아닙니다. "목숨이 있는 한은" "부르고 부르며 죽고 죽는다면"라고 있듯이 끝까지 꿋꿋이 살고 정법(正法)을 수행해야 합니다. 살고 끝까지 살기 위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만일 불법을 위해 순교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결코 불행한 죽음, 비탄에 잠긴 죽음이 아닙니다.
도다 선생님은 "묘법(妙法)을 위한 죽음이라면, 그것은 예를 들면 잠들었을 때 처음에 어떤 꿈을 조금 꾸었으나 다음은 푹 잠들 수 있는 것과 같으므로 성불은 틀림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뜻하지 않은 사고 등으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묘법의 공력(功力)을 생각하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글월에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제목을 부르는 생명은 임종할 때, 불계(佛界)라는 대경애에 들어가서 미래영겁에 걸친 절대적 행복경애에 틀림없이 도달합니다.
석가와 다보의 이불(二佛)과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즉시 달려와서 손을 잡고 어깨에 둘러메고 영산으로 달려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성(二聖), 이천(二天), 십라찰녀(十羅刹女) 등 제천선신이 법화경을 수지한 자를 수호하고 공덕이 넘치는 불국토로 보내주신다고 밝히셨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대성인은 문하에게 만일 대성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범천, 제석, 염마대왕 등에게 "일본제일의 법화경의 행자, 니치렌보(日蓮房)의 제자라고 말씀하시라."(어서 1498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대성인 이름은 시방정토(十方淨土)에도 전해졌으므로 어떤 악귀라도 모른다고 말할 리가 없다고 말씀하신 어서도 있습니다. (어서 1408쪽)
사제불이의 신심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안온(安穩)을 약속합니다.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입니다. 법화경 행자의 제자로서 묘법에 꿋꿋이 살았을 때, 사제가 다 함께 '생도 안온, 사도 안온' '생도 승리' '사도 승리'라는 삼세영원한 행복경애를 반드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 불과(佛果)가 이루어져 적광(寂光)의 본토(本土)에 거주(居住)하여 자수법락(自受法樂)할 때"(어서 504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묘법을 근본으로 끝까지 살면 절대적 행복의 경지(境地)를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서 마지막에 "이 얼마나 기쁜 일인고, 얼마나 기쁜 일인고."라고 밝히셨습니다.
스승에게 맹세한 불이의 신심을 관철하는 인생만큼 영예로운 삶은 없습니다. 더구나 어본불(御本佛)은 그 인생은 반드시 '불과'를 이루고 '적광본토'에 살면서 안온한 경애가 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대난이 닥쳐와도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본불의 영원한 안목으로 보면 '자수법락'은 틀림없다고 보증하셨습니다. 이 이상의 기쁨은 없습니다.
"부르고 부르며 죽고 죽는다면"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끝까지 목소리도 아끼지 않고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제목을 부르는 일, 그것이 사제불이의 '여설수행 신심'을 하는 핵심입니다.
새삼 앞서 배독한 "법화경만이 성불의 법이라고 소리도 아끼지 않고 외치며"라는 일절이 가슴속에 되살아납니다. 이 말씀이 '여설수행 실천'을 위한 요점입니다.
다른 어서에서도 "소리도 아끼지 않고"(어서 726쪽) "말도 아끼지 않고"(어서 1438쪽), 또 "성불사(聲佛事)를 함"(어서 708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리를 아끼지 않고 할 말은 분명히 말한다. 해야 할 말은 일언일구(一言一句)라도 반드시 말한다. 이 절복정신에 준한 홍교(弘敎)의 법칙을 잊지 않는 한, 광선유포는 반드시 크게 전진합니다.
어본불이신 니치렌대성인이 단언하셨습니다. 또 이것이 학회정신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할 말을 못하는 겁쟁이는 대성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은 "이 서(書)를 몸에서 떼지 않고 항상 보도록 하시라."(어서 505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어서를 항상 잊지 말고 영예로운 '대성인 제자'로서 어디까지나 절복정신 근본으로, 열심히 '일대일 대화'를 실천해서 자타(自他)가 함께 생명변혁을 이루어냅시다.
이것이 '종교계 왕자'다운 창가학회의 근본활동입니다. 제목을 부르고 또 부르며, 말하고 끝까지 말하면서 제불(諸佛)과 제천(諸天)이 찬탄하는 불칙(佛勅)의 여설수행을 확대하는 역사를 열어 나아갑시다. <여설수행초> 강의 끝.
나의 진정한 제자가 승리하기를 기원하며
※다음 호에는 <선시초>① (256쪽 1행~ 259쪽 14행) 강의가 실립니다.
* 여설수행초 전문 보기 : http://cafe.daum.net/1ksgi/IvmQ/24
첫댓글 일청님! 자료 제공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마주 많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