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카타콤부터 유래된 로마의 공동묘지 베라노 정문. 가로 1㎞, 세로 3㎞에 이르는 초대형 묘지다.
로마에 처음 들른 것은 1994년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로마 최고 인산인해 공간은 테르미니 중앙역(Stazione Termini)이었다. 이미 29년이 흘렀지만 로마 첫 방문 당시의 기억 대부분이 남아 있다. 로마 국제공항에 내린 뒤 기차를 타고 30분 만에 테르미니에 도착했다. 역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하늘 멀리 펼쳐진 오렌지빛 석양이 눈에 들어왔다. 깊고도 신비로운 하늘이었다. 자타가 공인할 듯하지만 로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곳이 테르미니다. 홈리스, 쓰레기, 악취, 낙서로 뒤덮인 테르미니가 속(俗), 평온한 황금색 하늘이 성(聖)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구름’은 석양을 바라보던 중 발견한 기묘한 풍경이었다. 영화 속에서만 봤던 ‘버드댄싱(Starlings)’이었다. 구름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새들이 직접 만드는 ‘움직이는 구름’이다. 고대도시 로마만이 갖고 있는 신비한 풍경이다.
로마 테르미니의 장관 ‘버드댄싱’
참새의 두 배 정도 크기로, 몸길이 20㎝ 의 검은색 찌르레기가 버드댄싱의 주인공들이다. 한꺼번에 떼를 지어 빠른 속도로 날아오른다. 지휘관 역할을 하는 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단 한 마리도 서로 부딪치지 않은 채 급상승, 급강하를 되풀이한다. 돌풍형, 폭죽형, 부채형, 첨탑형에 이르는 수많은 자연 디자인을 창조해내면서 석양을 장식한다.
“맑은 날 석양이 시작될 무렵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무리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해가 떨어지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역 바로 앞 키오스크 50대 주인으로부터 언덕 위에 들어선 테르미니가 로마 버드댄싱의 최고 전망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해가 질 경우 어디로 저 많은 새들이 날아가는지 물어봤다. “신만이 수많은 새들의 집이 어디인지 알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베라노(Veraro)에 가면 새들의 보금자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키오스크 주인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지만, 이후 베라노는 필자의 로마 방문 영순위 리스트에 올랐다. 베라노는 테르미니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로마 아니 이탈리아를 통틀어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다. 묘지 주변에 들어선 엄청난 나무들이 바로 새들이 몰려드는 이유다. 지중해 특유의 묘지 풍경대로 20~40m 높이의 사이프러스 소나무로 채워진 땅이 베라노다. 고대 그리스 이래 전통이지만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자(死者)를 기리는 키다리 상징목(木)이 사이프러스 소나무다. 기독교권만이 아니라 이슬람권 묘지도 사이프러스 소나무로 장식돼 있다. 사이프러스 소나무는 찌르레기를 위한 공동 아파트일지도 모른다.
베라노 묘지 안 여인 조각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성경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이 적혀 있다.
사이프러스 소나무로 채워진 땅
최근에도 로마에 가자마자 바로 베라노로 향했다. 이유는 팬데믹 기간 중 저승으로 간 여배우 때문이다. 영화팬이거나 장년 세대라면 ‘정사(L’Avventura)’나 ‘백야(Le notti bianche)’의 주연 여배우 모니카 비티(Monica Vitti)를 기억할 것이다. 지난해 2월 부음소식을 들었다. 안개꽃 같은 이미지의 배우지만, 감독으로도 활동한 이탈리아 영화계의 역사이기도 한 인물이다. 최근 가수 현미의 부음 소식이 그러하듯, 한 시대를 풍미한 연예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장수 연예인의 활동은 동세대 사람들의 인생과 겹쳐진다.
20세기는 연예인 대량생산과 무관하던 시대였다. 21세기 들어 등장한 인터넷과 다채널 덕분에 연예인 수가 폭증한다. 전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성형수술이 배경에 있겠지만, 연예인들을 서로 구별하기조차 어렵다. 모니카는 그 같은 21세기 엔터테인먼트 현실의 정반대편에 섰던 배우다. 91세 인생 대부분이 이탈리아인 삶 속에 녹아 있다. 인터넷으로 지켜봤지만, 모니카의 장례식은 로마 포폴로광장 교회에서 치러졌다. 이탈리아인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하고도 아름답게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모니카가 최종 안착한 곳이 베라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여배우의 품격에 어울리는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동묘지 베라노의 역사는 19세기 초 이래 200여년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묘지로서의 베라노 역사는 무려 2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 당시의 공동묘지 카타콤이 들어서 있던 땅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카타콤이라고 하면 기독교부터 떠올릴 듯하다. 카타콤에서의 예배 장면도 영화에 등장하지만, 전부 과장된 모습일 뿐이다. 지하의 카타콤은 기독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무덤이었다. 기독교 포교 이전에 유행한, 페르시아계 종교인 미트라스(Mithras) 신자도 카타콤에 묻혔다. 언제부턴가 관광 명소로 변했지만, 로마 외곽에는 10여개의 크고 작은 카타콤이 산재해 있다.
로마시대 카타콤이 기원
묘지에 관한 한 베라노에 준할 권위와 역사를 가진 곳이 있을지 의문이다. 예루살렘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올리브 동산 내 공동묘지 정도가 떠오를 뿐, 전 세계를 통틀어 2000년 역사의 베라노에 비견될 땅이 없다. 무덤문화는 문명·문화의 결정판이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간단히 말해 무덤문화가 발달한 곳일수록 문명·문화의 수준도 높다. 주목할 부분은 ‘선진’ 무덤문화의 정의다. ‘얼마나 크고 높고 화려한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작고 소박하며 금빛 무덤이 아니라도 된다. 크게 두 가지 요소가 무덤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첫째 당대의 무덤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가 핵심이다. 특별층만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롭고도 부담 없이 이용하는 무덤문화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 같은 부분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파라오의 나라 이집트 여행에 나섰다. 당대의 기록을 보면 파라오 무덤 피라미드에 관한 인상이 남아 있다. “엄청난 크기의 피라미드라지만, 이집트인들의 원망과 파라오의 망상이 쌓아올린 결과일 뿐이다.” 인류의 그 누구보다도 큰 무덤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 명의 파라오를 위한 공간일 뿐이란 의미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일반인과 전혀 무관한 ‘당신들의 무덤이자 잔치’에 그쳤다. 일반 이집트인들의 경우 피라미드는커녕 작은 미라 무덤도 불가능했다. 파라오와 권력가, 부자 몇몇에게만 허용된 특수시설이 이집트 무덤문화의 실체다. 당시 헤로도토스의 나라 고대 그리스는, 작지만 시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허용된 무덤문화가 존재했다. 현재 전 세계 박물관을 가득 채운 그리스 유물·유적의 대부분은 기원전 5세기 시민 모두가 향유한 무덤문화의 흔적들이다.
무덤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두 번째 요소는 ‘공동묘지가 같은 장소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됐는가’라는 점으로 모아진다. 공동묘지는 돈이나 권력과 무관한, 가난한 무명의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개인 차원에서 무덤을 가질 형편이 안 되는, ‘빈자의 터’가 공동묘지다. 한국 공동묘지의 대명사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원래 15세기 이래 조선 왕족 묘로 사용하다가, 한국전쟁 후 국군묘지를 거쳐 국립현충원으로 승격됐다. 그리스, 로마의 경우 이미 2000년 전부터 일반인 공동묘지가 상용화됐다. 한국은 조선, 고려, 삼국시대 어디를 봐도 일반인 공동묘지가 드문 반면, 왕이나 권력자 같은 금수저용 풍수지리 묘터 잡기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앞서 있다. 잠시 스쳐간 집단 화장터는 곳곳에 넘친다.
베라노 공동묘지에 안치된 유명인들의 묘. 이탈리아 유명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왼쪽)와 여배우 모니카 비티의 묘. 비티의 묘에는 남편 루소의 이름(가운데)과 젊었을 때의 얼굴 사진이 새겨져 있다.
베라노에 묻힌 예술인들
베라노는 걸어서 가는 것이 좋다. 로마는 아무리 멀어도 도보 1시간 거리에 모든 것이 있다. 1분에 100m 정도로 걷는 도보 여행이 오래 남고 건강에도 좋다. 흑백필름이 한층 더 어울리는 로마의 모습과, 낡은 노면기차의 종소리가 베라노까지 걸어가는 동안 만날 풍경이다. 일부러 석양에 맞춰 베라노로 향했다.
베라노 앞은 수십여 개의 꽃가게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 인도나 방글라데시인들이 운영한다. 이탈리아인들은 무덤용 꽃으로 장미나 릴리를 선호한다. 흰색 국화는 없었지만, 국화 사촌 격인 작은 흰색 꽃이 눈에 띄었다. 약 20여 송이의 꽃을 5유로에 구입했다. 꽃가게 10년 경력이라는 방글라데시인에게 버드댄싱에 대해 물어봤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탓인지 한 달에 4~5번 나타날 뿐이다. 점점 만나보기가 어려워졌다.”
베라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늘로 향해 두 팔을 펼친 여인 조각상이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보니 ‘Ego sum resurrectio et vita’란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성경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베라노는 타원형 공간으로, 가로 1㎞, 세로 3㎞에 달하는 초대형 공동묘지다. 빽빽이 들어선 무덤들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기 십상이다. 모니카가 영순위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다른 영화배우와 감독들에게도 참배를 하고 싶었다.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지만, 필자의 인격 형성에 도움을 준 예술가들이다.
먼저 모니카 무덤에 들렀다. 가로 1m, 세로 50㎝ 정도 크기의 하얀색 대리석이 전부다. 십자가와 함께 ‘Russo’란 글자가 대리석 위에 새겨져 있다. 모니카가 69세 때 결혼했던 영화감독 ‘로베르토 루소(Roberto Russo)’를 의미하는 듯하다. 모니카를 지키는 것은 물론, 언젠가 남편도 함께 묻히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웃음기가 없는 신비한 표정의 20대 모니카 사진이 무덤 위에 드리워져 있다. 배우의 운명, 아니 희망이라고나 할까? 인기 절정이던 젊을 때 모습 그대로 기억되기를 모두가 바라는 듯하다. 필자의 머리에 저장된 모니카의 모습은 1961년 베를린영화제 황금상 작품 ‘밤(La Notte)’에 등장하는 ‘발렌티나’ 역할에 머물러 있다. 매력적이고도 우아하며 사랑스러운 젊은 여인의 모습이다.
모니카에 이어 찾아간 곳은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Marcello Mastroiann)의 무덤이다. ‘해바라기, 라돌체 비타(La Dolce Vita), 8 2/1’ 주연으로 활약한, 1960년대 이탈리아 영화 전성기의 간판배우다. 사실 마르첼로 무덤은 이미 4년 전에도 찾아 나섰던 곳이다. 무덤의 미로라고나 할까? 당시 스마트폰도 없이 돌아다닌 탓에, 여기저기 헤매다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구글 지도를 따라가자 5분 만에 마르첼로 무덤이 나타났다. 모니카 무덤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이다. 두 사람은 ‘밤’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마르첼로 무덤은 붉은색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다. 참배객들의 꽃들이 무덤 주변에 펼쳐져 있다. 방금 갖다놓은 듯 싱싱한 꽃도 많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가족무덤
베라노를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무리 길어도 30년이다. 천하의 권력자와 부자라도 30년이 지나면 잊힌다는 의미다. 증거는 꽃이나 무덤 주변 장식물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꽃도 없고 무덤 장식물들도 방치된 상태다. 잡초도 무성하고,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무덤을 지킨다. 고인의 직계 자식이야 신경을 쓰겠지만, 손자 세대로 넘어가는 순간 잊힌다. 마르첼로는 1996년 72세의 나이로 저세상에 갔다. 장례식은 거의 국장 수준으로 치러졌다. 이미 27년이나 흘렀지만, 일반 참배객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게 느껴진다. 들고 간 흰꽃을 마르첼로 무덤 정중간에 바쳤다. 붉은 대리석에는 흰꽃이 어울릴 듯하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는 베라노 참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필자의 유년기 기억이지만, 매주 토요일 아버지와 함께 심야 MBC ‘주말의 명화’를 지켜봤다. ‘자전거 도둑’은 가장 인상에 남은 영화다. 바로 비토리오의 작품이다. 스스로 배우로도 활동한 인물로, 온화한 웃음과 품격의 자세가 인상 깊은 인물이다. 네오 리얼리즘이 그러하듯, 눈앞에 닥친 서민들의 애환을 과장 없이 전하는 메시지로서의 영화가 많다. 1952년 개봉된 ‘움베르토 디(Umberto D)’를 보면 전후 이탈리아인들의 생활고가 어느 정도로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비토리오 작품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누구 탓’을 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자전거 도둑’이나 ‘움베르토 디’에서 보듯, 가난·무지·불합리에 주목할 뿐 누구를 비난하는 식의 투쟁적 메시지와는 무관하다. 비토리오 무덤은 마리아 조각상을 앞에 둔 흰 대리석 하나로 장식돼 있다. 혼자가 아닌 가족 모두의 공동묘지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1974년 세상을 뜬 인물이지만, 방금 다녀간 듯한 참배객들의 꽃과 화분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신비한 석양 빛이 멀리서부터 비쳐온다. 버드댄싱은 베라노에 오기 전부터 머리에 맴돌던 생각이다. 줄곧 하늘을 보면서 걸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비토리오 무덤에서 벗어나는 순간, 태양빛 아래에 뭔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 멀어서 한동안 지켜봐야만 했지만, 자세히 살펴본 결과 버드댄싱이란 것을 알게 됐다. 무리를 지어 사방팔방 종횡무진 날아다닌다.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고 고마웠다. 2000년 역사의 무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한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버드댄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베라노의 기억과 시간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