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밥은 고봉밥값을 해야 해서
박갑순
어스름 새벽을 기름지게 경작한다
어둠이 내린 사랑채 문을 닫고서야
행랑채에 따로 피로를 풀 수 있다
그의 밥값은
주인의 안위를 살뜰히 챙기는 일
밥을 입으로 먹지 않는 머슴
타들어가는 주인집 전답을 외면하고
이웃집 논에 물을 댄다
사방이 훤한 대낮에 도둑과 한편이 되어
안방 금고를 내주거나
이웃집에서 버린 생활 폐수로
주인의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주인을 분간 못 하는 가짜 머슴
세경은 이 집에서 받고
저 집 일을 해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직하는 주인이 늘고 있다
골목마다 머슴이 던져버린
무뎌진 쟁깃날이 널브러졌다
시들어가는 팽나무 치아가
밥 짓는 냄새를 우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