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12)
[에피소드28]
76년 여름에 사단 내 연대대항 전투력측정이란 큰 행사가 있었다. 측정할 종목으로는 소대 10Km 완전군장 구보(달리기)와 수류탄 정밀 투척이었다. 연대장은 가을에 실시될 연대 RCT(연대 전술 기동훈련)와 더불어 장군 진급을 위한 중요한 평가가 될 본 측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대대가 연대를 대표하여 그 측정에 나가는 부대로 선발 되었다. 대대장은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다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리도 길고 적임자라고 측정에 출전할 소대장으로 선발했다. 측정은 약 한달 가량 남았는데도 매일 새벽 비무장 구보 4Km, 오후에 10Km완전군장(개인화기와 30KG배낭) 구보를 실시했다.
올림픽 종목 중에도 마라톤이 가장 힘든 종목으로 대회 마지막 날 하이라이트로 치러지듯이, 완전군장구보도 군에서 장거리 행군과 더불어 가장 힘든 훈련에 속한다. 직사광선이 작열하는 한여름 폭염 속에서 한 달 동안이나 매일 무거운 짐을 메고 하루 두 차례나 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체가 사정없이 혹사당하는 일이었다. 소문을 들어보니, 전투력이 군에서 최강이라는 특전부대도 이런 식으로 무리하게 훈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한두번 맹렬하게 훈련하고 그 성과가 있다면 나머지 날짜는 측정 당일 까지 가볍게 몸을 푸는 식으로 컨디션을 조절한다고 들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대대 훈련은 너무 고되다보니 낙오되는 병사들도 나왔고, 그들은 또 다른 튼튼한 병사들로 수시로 교체 되었다. 한번은 측정이 실시될 현지에 직접 가서 예행훈련을 하였다. 나는 그동안 훈련에 지치고 무리를 느껴 중간에 낙오하였다. 소대를 이끌어 나갈 소대장이 낙오하였으니 문제가 심각하였다.
그날 부대에 귀대하자 대대장이 특별정신기합을 주었다. 완전군장을 하고 대대 연병장을 50바퀴나 혼자 돌게 하였다. 과거 육사에서 훈육관을 할 때 평이 좋지 않았다는 L대대장은 이기적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자기 부대로 인하여 연대장에게 혹시 잘못 보일까봐 전전긍긍하며 부하에 대한 측은한 감정은 일절 가지지 않았다. 그는 오직 목적달성을 위하여 무리에 무리를 가할 따름이었다.
측정을 앞둔 어느 날 나는 10Km완전군장 구보를 끝내고 대대 정문을 통과하자 대대장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쓰러져 들어 누어 버렸다. 일종의 무언의 시위였다. 대대장은 군의관을 시켜 나에게 알부민 영양제 주사를 한 병 놓게 했다. 측정이 코앞에 닥쳐왔으므로 교체도 할 수 없는 긴박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대대장도 속이 몹시 탔을 것이다. 마침내 측정 전날 측정지역인 용대리 52연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현지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찍 기상하였다. 나는 책임감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고 걱정이 되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당일 날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나는 현지 예행훈련을 하면서 용대리 백담사 입구가 중간지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지점까지는 최대한 컨디션을 조절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완전군장구보가 시작되었다. 병사들은 긴장하여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나는 처음에는 병사들의 선두에서 뛰어 갔는데 나중에는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측정기준에 의하면 본 대열에서 규정된 거리를 이탈할 경우에는 낙오된 것으로 간주하고 감점하였다. 그래서 나는 뒤처지면서도 일정거리 이상은 처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뛰었다. 그런데 사력을 다하여 뛰었는데도 반환점이 되는 백담사 입구가 영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힘이 빠져갔다. 제법 많이 뛰었는데 중간지점에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아찔해 졌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앞에 부연대장이 격려차 지프를 타고 나타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신호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이미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는 벌써 통과했던 것이다. 그동안 앞만 보며 죽을 각오로 뛰다보니 백담사 입구를 힐끗 쳐다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낙오하면 안 된다는 무서운 집중력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나는 금번 체험을 통해서 생의 기로에서 활로를 찾아 나가고자 할 때 집중력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게 되었다. 부연대장의 도움으로 나는 갑자기 젖 먹던 힘까지 솟아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병사들에게 독려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고려대학 출신인 1분대장 모 하사가 “소대장님! 이제 더 못 뛰겠습니다.” 하며 도중에 포기하려 하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함을 쳤다 “이제 다 왔으니 조금만 참고 힘내라! 포기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하사는 “악” 소리를 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결승점을 불과 몇 분 남겨놓고 아쉽게도 한명이 낙오하여 기대했던 평가 점수 만점을 놓쳤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낙오한 하사는 다리근육이 찢어지고 정강이뼈가 금이 갔다고 한다. 그는 한 달 여에 걸쳐 실시한 훈련의 피로도가 누적될 때로 누적되었다. 그래서 초인적인 정신력으로도 도저히 뛸 수 없는 마침내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에 봉착했던 것이다.
무장구보에 이어서 수류탄 원거리 및 정밀투척이 있었다. 나는 원거리 투척은 자신 있었지만 정밀투척은 만만치 않았다. 정밀투척의 성공률은 극히 낮았다. 40~50M 앞의 조그만 표적에 수류탄을 던져 맞춘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원거리 투척을 일단 성공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정밀투척 사선(射線)앞에 섰다. 소대장이 먼저 던지고 소대원들이 뒤따르는 순서였다. 다른 연대 소대장들은 그 때 까지 모두 실패했다. 부연대장과 대대장, 중대장 그리고 사단참모들, 소대원들, 수많은 다른 연대 장병들의 시선이 전부 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밀투척은 두 번의 기회에 한번만 성공하면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골목에서 야구를 많이 한 경험이 있었다. 한때는 야구선수가 되려는 꿈도 가졌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대구 대봉3동 골목길에서 천보성을 위시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야구공 주고받기를 해가 질 때까지 끝도 없이 한 적이 있었다. 천보성은 나보다 한 해 아래인데, 그는 나중에 경북고 야구선수가 되었고, 한양대 다닐 때는 국가 대표급 유격수가 되었다. 그는 프로야구 삼성에서 명 유격수로 이름을 떨쳤고, 한양대 야구감독, LG 프로야구 감독도 역임했다. 나도 만약에 내가 다녔던 삼덕초등학교에서 한해만 먼저 야구팀이 생겼더라면 천보성처럼 야구에 인생을 걸었을 정도로 야구에 한때 심취했다. 그래서 그 때 익힌 야구감각이 이번 수류탄 측정에 의외로 도움을 준 것이다.
나는 자신이 있어서 병사들처럼 매번 연습을 하지 않았지만, 연습 시 표적을 잘 맞추었다. 그런 나도 하도 긴장한 관계로 사선에 서니 평소의 자신감이 다소 떨어졌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첫 번째 투척을 하였다. 그런데 목표에 약간 못 미쳐 떨어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대대장의 아쉬운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표적을 향하여 신중하게 투척을 하였다. 수류탄이 경쾌하게 날아가더니 갑자기 “빠그작” 하며 표적을 맞추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굉장한 함성이 일어났다. 부연대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일어서서 환호했다. 소대원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전체 소대원 평가에서는 중간이었지만, 소대장평가에서는 나는 만점을 받았다. 다른 연대 소대장들은 정밀 투척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힘들고 괴로웠던 훈련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내가 수류탄 정밀 투척에서 성공한 것은 운이 좀 따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변수와 당일의 컨디션이 상당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잊을 수 없는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의 넓이 뛰기 측정의 뼈아팠던 마음의 상처는 오늘의 성공으로 치유가 좀 되었다. 저녁에 소대원들과 부대로 귀대하여 기분 좋게 막걸리 파티를 하였다.
나는 군에 있을 때 유일하게 한번 10일간 정기 휴가를 간 바 있는데, 그 때 대대장이 나의 노고에 대한 포상차원에서 대대 소대장 중에서 처음으로 휴가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운이 없게도 8. 18도끼 만행사건으로 전군에 비상상황이 되어 금쪽같은 휴가 2일을 단축하여 귀대했다.
그리고 휴가에서 돌아온 얼마 후 내가 폭염 속 한 달여의 강훈련과 측정 결과를 체험수기 형식으로 육군 전 장병들이 보는 전우신문에 기고했다. 어느 날 대대장은 보도된 그 신문 기고문을 읽고 연대장에게 즉각 보고했다. 연대장은 내가 자기 부대인 6828부대를 홍보 선전하였다고 크게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아마 연대장은 사단장에게도 이 사실을 보고하였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전우신문에 게재된 기고문을 대학동기 구본상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도 읽었다는 것을 제대한 후 알게 되었다.
그 후 육사출신 이해영 연대장은 가을 RCT측정도 잘 받아 장군 진급의 소원을 이루었고, L대대장은 그 해 연말에 사단 작전참모로 영전하였다.
아까 앞에서 언급한 동네 야구 후배 천보성은 내가 은행에서 퇴직한 후 친구 노영대 사장과 함께 그의 단골인 강남의 특급호텔인 아미가호텔 지하 바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다가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미가 호텔 지하 밀실 바는 그 당시(90년대 말) 서울에서, 호스테스 위주의 룸살롱이 아니면서 진짜 술을 즐기면서 편안한 대화를 나누려는 주당들이 찾는 곳이었다. 각 밀실은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고급 양주 BAR였다. 다른 밀실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당시 프로야구 LG 1군 감독이었던 천보성을 우리 방에 잠시 데려와 야구와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서 옛 추억을 더듬었다.
[에피소드29]
연대본부가 있는 천도리 마을은 대부분 여관이나 주점, 다방, 음식점 등 소비위주의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완전 전투대기 상황이기 때문에 좁은 지역에 보병, 포병 등 다수의 야전 부대가 밀집되어 있었다. 따라서 밤의 천도리는 항상 술과 여자를 갈망하는 군인들로 흥청 되었다. 다방은 보통 내실에 있는 요정과 연결되어 있어 요정아가씨들이 저녁 술 손님들을 호객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요정 아가씨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 오기도 하는 등 변화가 심했다.
나는 동기들과 다방에서 차를 한잔하러 갔는데 처음 보는 몸매도 좋고 인물도 좋은 아가씨 한 명이 이상하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필이 꽂혔다고 할까, 마침 내가 담배가 없다고 하자 그 여인은 어디선가 담배도 몇 개비 구해 가져다주었다. 전방 마을은 외롭고 고달프다보니, 남녀 간에 쉽게 정이 들기도 하는 특이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다. 나는 이 여인의 친절에 마음이 약해져 몇 번 다방에 연결된 내실에서 같이 술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요청으로 여관에서 한번 같이 잔적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두 사람 다 남녀 간에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한동안 허물없는 술 동무와 친구사이가 되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그 여인은 알고 보니 불행한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다. 좀 더 깊은 단계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그 여인과 나의 로맨스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제심이 많이 작용했다. 그러나 잠시였지만 여인의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내가 그 여인을 서화다방에서 처음 만난 때는 1977년 1월 무렵이었고, 곧이어 봄에 우리 대대는 방책선 부대 교체 계획에 따라 전방(GOP부대)으로 근무지를 이동했다. 그래서 그 여인과의 만남은 너무나 짧게 끝났다. 나는 이후 전방근무 때문에 천도리로 나올 수 없었고, 방책선 부대에서 결국 전역하게 되었다. 전역할 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 여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서울로 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그 여인이 조금씩 나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나의 내부 속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여인이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너무나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사랑의 위대한 힘이랄까. 내가 날카롭고 험악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그 여인만큼 무조건적이고 아무 대가없는 순수한 사랑을 쏟아 부어준 사람이 나의 일생에 과연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여인은 나를 단순한 술집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바쳐 사랑해 보고 싶은 연인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 때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애틋한 마음으로 교제했던 그 젊은 여인이 만약 이 한국 땅 어디엔가 살아 있다면, 아마 지금은 70세는 되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자신을 진정 사랑한 그 사랑의 추억은 영원히 잊혀질 수가 없는, 위대하고 소중한 보석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깊은 공간에서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그 여인에게서 받은 사랑이 솟구쳐 내연(內燃)하면서 강한 위로와 힘을 주고 있다. 그것이 이 세상 어떤 것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바로 사랑의 위대한 힘인 것이다. 불멸의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사랑하는 여인 라라를 버스에서 내려 뒤쫓아 가다가 길에서 쓰러져 사망하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절하게 슬픈 장면이 오늘 문득 떠오른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