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버스와 우리나라 자동차운전면허1호 (의견에 따라 2인} 1911년 진주에 살았던 일본인 에가와가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과 삼천포간을 오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영업을 시작 했다고 전해진다. 이 차에는 최대 10명까지 탈 수 있었으며, 저녁에는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버스요금은 1인당 마산-진주간이 3원80전, 진주-삼천포간이 1원30전으로, 마산-진주간 한번 승차에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었으니 무척 비싼 편이었다.
◉ 조선 고정시절쯤의 누구인가? 한일합방 후 비로소 자동차 시대 개막 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식 의전용으로 처음 '포드 A형 리무진' 1대가 조선땅을 밟은 후, 일반인에게 자동차의 모습과 존재가 공개되기는 한일합방의 국치년인 1910년부터였다. 이 때부터 어용으로 들여온 차가 4대로 1911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찌가 고종 환심용으로 들여오기 시작 했고 일본인들과 국가 대신들이 자가용으로 몰고 다니기 시작했던 1913년경부터 비로소 일반 국 민의 자동차 시대가 개막되었다. 순종 황제가 캐딜락 리무진을, 순종 황후가 영국제 다임러 리무 진을, 의친왕 이가 공이 미국제 오버 랜드를, 영선공 이준 공이 포드 A형을 애용했으며, 이밖에 순종 황후의 부친 윤덕영과 총리대신 이완용, 박영효 등도 차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항시 외출 때마다 자동차 타기를 즐겼던 사람은 이강 공과 윤덕영 씨였다. 당시 운전 기사들은 대개 일본인들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멋쟁이이자 풍류에 능했던 의친왕 이강 공의 운전 기사는 한국인 윤권이란 사람이었다. 원래 전직 마차부였던 윤권은 1914년에 이태리 공사관에 근무하던 중 공관 자동차로 운전을 배워서 의친왕 이강 공의 오버랜드를 몰게 되었다. 당시 그는 금테 두른 검정 정장 운전복을 입고 고등관 행세를 하며 왕족 운전 기사로 출세해서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서울 낙산에 살던 이용문 씨가 운전 면허 1호 ※그러면 한국인 자동차 운전 면허 1호 취득자는 누구였을까? 처음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들어와 있 을 때는 운전 면허를 내어 줄 곳도, 내 주어야 할 필요성도 없었지만, 1913년 경에는 한국 사람 뿐 아니라 주한 일본인들의 자동차 취득자들도 늘어남에 따라 운전 기사 품귀 현상이 생겼다. 일 본 본토에서 단지 운전기사를 하려고 들어오는 일본인들도 없는 터여서 당시 서울(경성)에서 자 동차 영업을 했던 일본인 '곤도'가 경성자동차 운전자 양성소'라는 최최의 운전 학원을 설치 운영 했지만 지원자가 없어서 골치를 앓았다. 생각다 못한 곤도가 수강생에게 강습료는커녕 월급도 주 고 성적 우수자는 보너스도 지급하겠다는 광고를 내어 10여명의 지원자가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학원 강습을 마치고 최초로 운전 면허를 딴 한국인은 서울 낙산에 살던 이봉래 씨의 아들인 이용문 씨로 운전 면허 취득 제 1호를 기록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운전 면허 시험장은 없 었고 경성 자동차 운전자 양성소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하면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일 설에 의하면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주 한인 동포사회에서 발행했던 [대도보(大道報)]에 실린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학생 이진구는 원래 기계학 유지(有志)로 연전 뉴욕에 제하야 자동 차 사용법을 견습법을 졸업하얏으며..." 라는 기록으로써 유학을 갔던 이진구가 1905년 뉴욕에서 운전기술을 배웠다고 믿어지므로, 이는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국내 면허 취득 1호인이었던 이용문 보다 8년 앞서서 운전 기술을 습득했다고 믿어진다. 어쨌든 19세기 말에 이민갔던 하와이 한인 교포 1세 중에는 자동차 기술을 습득하여 운전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나 공식 기록 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버스 승차요금이 쌀 한 가마값 민간인으로서 제일 먼저 자동차를 탔던 사람은 제 3대 천도교조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 일본 동경에 있었던 1905년에 이미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고 하나 공식적으로 처음에 민간인 갑부들이 차를 수입하여 타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부터이다. 당시 광업계 갑부 박기효, 대지주 배석 환, 서울 갑부 김종성과 백명권 씨 그리고 의암 손병희 선생이 일본에서 열렸던 공진회라는 국제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던 미국제 차 2대를 구입하여, 귀국해서 한 대는 고종께 진상하고 한 대는 자신이 타고 다니기 시작함으로써 대한민국도 드디어 마이카 족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연희학당 창설자인 언더우드 박사와 배재학당 창설자인 아펜젤러 선교사도 마이카 족에 가세했 다. 한국 갑부들이 타고 다녔다는 차는 비교적 값이 쌌던 포드 자동차이고, 일본인들이나 대신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탔던 차들은 제각기 다른 차들을 탔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값이 싼 포드 자동차가 약 4천원, 비싼 차는 만원 정도에 사 왔다는데 당시 쌀 한가마 값이 4원 정도로 차 한 대 값이 쌀 1,000가마에서 2,500가마 값이었으나 서민들은 꿈도 못 꿀 비싼 값이었다. 지금 시세 로 환산해 보면 쌀 한가마가 14만원 쯤 하니까 차 한 대 값이 1억 4천만원에서 3억 5천만원이나 되니 롤스로이스 값쯤 했던 같다. 민간인들이 1913년부터 자동차를 본격적으로 볼 수 있었던 서 울과는 달리 1911년말 진주에 살았던 일본인 에가와는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삼 천포 간을 달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 영업을 시작했었다고 전해진다. 이 차에는 대개 10명까 지는 타고 다닐 수 있었으며, 저녁에는 천막 지붕을 치고 가스 등을 달고 다녔다고 하니 가히 당 시에는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이 당시 버스 요금은 1인당 마산-진주 간이 3원 80전, 진주-삼 천포 사이가 1원 30전으로, 마산-진주간 한 번 승차에 쌀 한가마 값이었으니 꽤나 비싼 편이었다. 마차로는 하루 종일 걸렸던 마산-진주 간 180리 길을 4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어서 당시로선 상 상이 안 가는 빠른 괴물이었으며, 이 버스가 지나갈 때면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넋을 잃고 구경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더욱 화젯거리는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멋진 몸빼 양복을 입은 미남 운전사는 당시 처녀들을 바람나게 하고, 가슴을 설레게 했던 당대 최고 멋쟁이로 소문나서 '처녀 세트럭 반'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 냈다고 한다. 또한 이 당시 유행가 가사에는 "낙동강 700리에 공글(콘크리트)다리 놓고 신작로에는 자동차 바람에 먼지만 나누나"라는 내용으로 시중 에 유행시킨 노래까지도 나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진주 버스 운전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야타족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이 뭇 세인들의 호기심 어린 관심 때문에 자동차에 관한 에피소드도 많았던 것 같고, 못 본 사람들이 더 많았던 터라 입심 좋은 동네 허풍쟁이들이 지어낸 이야기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전해지는 이색 기록을 살펴 보면 1919년 3월 1 일 파고다 공원으로 독립 선언을 하러 간 의암 손병희는 영국제 고급 리무진을 타고 입장했다고 전해지며, 이 해에 부산에 있던 일본 의사 니시무라는 포드 차를 개조하여 우리나라 첫 앰뷸런스 로 운행했다고 하니 꽤나 흥미로운 사실이다. ◉윤보선 前 대통령 운전면허1호(다른이의 의견) 제4대 대통령을 지낸 해위(海葦) 윤보선(1897~1990)은 아마도 한국인 중 학생 자가운전자 1호로 기록될 것이다. 명문가 출신인 해위가 자동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열살 가량이던 구한말 시절, 당숙인 윤치호가 영국제 자동차를 사오면서부터였다. 소년 윤보선은 상하이(上海)에서 데려온 중국인 운전수를 졸라 집안 마당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지금도 보존돼 있는 해위의 서울 안국동 집은 당시 99칸의 대저택이었다.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 공부를 하다가 귀국한 해위는 1918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났으나 "공부를 더한 뒤 독립운동을 하라"는 임시정부 어른들의 충고에 영국 유학을 결심한다. 일본 경찰의 검문을 피해 간신히 영국으로 건너간 해위는 명문 에든버러대에 입학한 지 2년 만에 당시로선 거금인 4백파운드를 주고 검은색 피아트를 사서 몰고 다녔다. 8천명이나 되는 에든버러 대학생 중 해위는 유일한 자가운전자여서 동료 학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차를 살 때 자동차 판매회사에서 기술자가 나와 한달간 운전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쇠막대를 손으로 돌려 시동을 걸어야 하는 이 스포츠형 오픈카를 타고 해위는 시간만 나면 시내를 돌아다녔다. 첫 학생 자가운전자답게 해위는 해방 후 공직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차를 섭렵한 것으로 유명했다. 차를 좋아한 해위는 해방 직후 영국의 유명한 자동차 회사 오스틴에서 제작한 스포츠카를 손수 몰고 다녔다. 서울시장.상공부장관.국회의원을 지낼 때는 지프를 탔다. 당시에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모두가 지프를 타고 다녔다. 6.25 동안 부산에 내려가 적십자사 총재로 일했을 때는 지프를 닮은 영국제 랜드로버를 탔다. 신한당 총재 시절에는 크라이슬러 8기통을 탔는데, 기름을 너무 많이 먹어 폴크스바겐으로 바꾸기도 했다. 해위는 딱정벌레 폴크스바겐을 가장 좋아하는 차로 꼽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 때는 국산차인 현대의 69년형 포드20M을 타고 유세장을 누볐다. 해위의 운전 매너는 아주 좋았다. 많은 시간 차를 운전했지만, 일생 동안 교통법규를 위반한 것은 딱 두 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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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어차 아닌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