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그늘에서 사욕을 채우는 료칸(良觀)
스다: 대성인 재세로 말하면 고코라쿠 사 료칸이야말로 ‘참성’의 전형입니다. 다리의 건설 등 사회사업이나 나병환자 구제 등의 자선사업을 행하여 ‘생불(生佛)’ ‘보살’ 처럼 숭배 받았다고 합니다.
사이토: 그러나 대성인은 그 가면 속에 감추어진 본질을 예리하게 간파하셨습니다.
“지금의 율승(律僧)의 거동(擧動)을 보아하니 포견(布絹) · 재보(財寶)를 모으고 이전(利錢) · 차청(借請)을 업(業)으로 하니 교행(敎行) 이미 상위(相違)하므로 누가 이를 신수(信受)하리요.
다음에 길을 만들고 다리를 만드는 것은 도리어 사람의 한탄이니라. 이지마(飯嶋)나루터에서 무쓰라(六浦)의 관미(關米)를 징수하니 제인(諸人)의 한탄이 많고 각지칠도(各地七道)의 관소(關所)도 여행자(旅行者)의 괴로움은 오직 이 때문이며, 안전(眼前)의 일인데 그대는 보느뇨 보지 못하느뇨.”(어서 476쪽)
자료에 의하면 료칸이 전국에 세운 다리는 189개소, 부설(敷設) · 수복(修復)한 도로는 71개소, 새로 판 우물은 33개소에 이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고쿠라쿠 사는 도카이도에서 가마쿠라로 들어가는 주요한 가도(街道)의 관소(關所)에서 지나는 사람마다 통행세를 징수했습니다. 이것이 ‘인별(人別)의 전(錢)’입니다.
엔도: 그뿐 아니라 해로(海路)의 요소였던 이지마나 무쓰라의 항구에서도 관미(關米)를 거두었다. 필시 막대한 이권(利權)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이토: 대성인의 지남(指南)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군요. 료칸의 무리들은 자선사업을 하는 한편으로, 값비싼 물건들을 사들이거나 재보를 축적하고 대금업(貸金業)을 하고 있었다. 이 통행세나 토목사업으로 이익을 얻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통행세 징수가 얼마나 서민을 괴롭히고 있었던가를 대성인은 엄하게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중략)
사이토: 고쿠라쿠 사의 승려가 가난한 서민과는 동떨어진 우아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군요.
SGI회장: 그렇지요. 대선인은 료칸의 모습에 대해 “몸에는 삼의(三依)를 가죽과 같이 벗는 일이 없고”(어서 349쪽) 라고 말씀하십니다. 검소한 듯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간을 향한 포즈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는 권력과 유착하여 관소에서의 전화(錢貨) 징수권이라는 이권을 쥐고 민중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실로 “이양(利養)에 탐착(貪着)”하는 모습 그 자체입니다. 참성증상만의 실태입니다. 또 본래 승려의 ‘옷’은 민중을 위해 일하는 작업복입니다. 그것이 ‘권위의 옷’이 되면 전도(顚倒)입니다.
스다: 의사의 백의, 변호사나 정치가의 배지 등도 권위의 옷이 되고 권위의 배지로 되는 전도를 볼 수 있지요.
엔도: 료칸이 본성을 드러낸 것은 1271년 기우(祈雨)의 승부에서 대성인에게 패하고부터입니다.
사이토: ‘료칸이 패한 경우에는 대성인의 제자가 된다’는 약속을 했지만, 료칸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그늘에서 배회하며 대성인 박해의 뒷 공작을 도모해 갔던 것입니다.
(중략)
SGI 회장: 료칸은 지계 제일이라며, 살생 금지를 사람들에게 설했다. 이른바 벌레도 죽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 대성인을 죽이도록 호소했던 장본이었다. 이것이 ‘살아있는 부처’의 실태였던 것입니다.
사이토: 료칸의 경우,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참성’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료칸은 어느 쪽인가 하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하물며 가마쿠라 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렇게 훌륭한 료칸님을 나쁘게 매도하는 니치렌 중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엔도: 그렇군요. ‘정말로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탐구가 아니라 단순한 이미지에 의해 움직인다.
현대 매스컴의 대부분도 철학이 없기 때문에 정보가 예사로 상품이 된다. 팔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만 하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자세입니다.
사이토: 결국 민중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참성증상만이 생각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을 민중이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SGI 회장: 어떠한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침범하기 어려운 터부(금기<禁忌>)가 있는 법입니다.
권위라고 해도 좋다. 그 가면의 그늘에 숨어 있는 것이 ‘참성’인 것입니다. 그 ‘권위’는 종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겠지요.
때와 장소에 따라 참성증상만이 나타나는 방식은 바뀌지만, 방정식은 같습니다. 항상 그 사회의 ‘성스러운 것’을 이용하여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엔도: 현대의 참성에 대해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간 사람들에게 지도자로서 신뢰받는 학자 및 평론가, 문학가, 또 세상의 지도기관인 일류 일간신문의 논설 등이 그 이익 및 감정 등을 위해 관헌 등과 결탁하여 하종불법과 그 광선유포의 활동에 강하게 공격을 가하는 때가 나타난다고 한다면 제삼류의 강적이 출현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다: 지금이 바로 그렇군요.
사이토: 확실히 현대에는 ‘성스러운 것’이 이른바 종교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토인비 박사는 17세기 기독교의 후퇴에 따라 서양에 생긴 ‘공백(空白)’은 세 종류의 다른 신앙이 대두함으로써 매워졌다고 선생님과의 대담에서 이야기했습니다. (‘21세기를 여는 대화’)
제1은 기술, 과학면에서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신앙. 제2는 내셔널리즘(국가주의), 제3은 공산주의라고.
SGI 회장: 그렇습니다. 토인비 박사는 그 세 가지 모두가 벽에 부딪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 미래의 종교 즉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 두 사람의 결론이었습니다.
엔도: 이 연재의 첫머리가 생각납니다. 철학의 공백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공(眞空)을 참지 못하고 새로운 결합원리를 구한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나 여러 가지 종교가 퍼지고 있다고.
(중략)
사이토: 일본은 전쟁 전에는 일종의 종교국가였습니다. 전쟁 후에는 경제가 ‘성스러운 것’으로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SGI 회장: 그러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경제가 언제부터인가 경제발전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인간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경제를 위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전도(顚倒)는 의료, 학문, 정치, 과학, 그 외 모든 경우에서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 전도를 모두 ‘인간을 위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엔도: 진정한 ‘인간을 위해’ ‘인간의 존엄’ 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 시대의 ‘성스러운 것’을 믿고 있는 사이에 어느 사인가 ‘성스러운 가면을 쓴 참성’에게 지배되고 맙니다.
그 단적인 예가 파시즘입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스다: 일본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군국주의의 가장 마지막으로 온 것이 가장 먼저 왔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향했을 것이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SGI 회장: 참성의 정체를 민중에게 폭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부의 사람들만 자각하는 것으로는 사회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일으켜 참성증상만을 드러나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추궁하면 그 사회의 사람들이 법화경 행자를 버리든지, 아니면 참성증상만을 버리게 됩니다.
법화경 행자를 버린 사회는 참성증상만에게 조종당한 채 결국은 망국의 길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삼류의 강적과의 싸움’은 즉 입정안국(立正安國)의 싸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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