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여인들
"야앗!"
구천인은 있는 한껏 내력을 모아 단지흥을 향해 장력을 발산했다. 10년 넘게 수련하여 기른 힘을 모두 이 한 번에 응집시켜 단지흥을 일거에 꺼꾸러뜨릴 작정이었다.
단지흥이 이 장풍에 격중되면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상은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단지흥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던 듯 오른손은 여전히 홍칠의 등에 댄 채로 왼손을 들어 구천인의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勞宮穴)을 가리켰다.
"이크!"
구천인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깜짝 놀라며 단지흥에게 혈도가 눌릴까 봐 잽싸게 한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가 발산한 장풍은 엉뚱하게 방안의 나무걸상을 박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구천인은 역시 단지흥의 무공이 만만치 않음에 내심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흥은 구천인은 보지 않고 여전히 눈을 내리뜬 채로 말했다.
"악이 마음에서 생기면 마음은 악의 늪이 되고 그 늪이 깊어지면 다시 고치기 어렵거늘 내가 보기엔 방주께서 손을 떼야 할 땐 손을 떼고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해 줌이 옳을 줄로 아오."
'뭐? 손을 떼야 할 땐 손을 떼고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해 줘야 한다고?'
구천인의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
'내가 이제 중도에서 그만두면 네가 화산 무예시합에서 주인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나더러 이 절호의 기회에 너를 그냥 놓아주는 바보 짓을 하란 말이냐?'
이렇게 생각한 구천인은 전술을 바꾸어 이번에는 홍칠에게 공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극히 교활한 생각이었다. 만약 재차 단지흥을 공격한다면 단지흥은 구천인의 공격을 몇 번이고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칠을 공격한다면 단지흥은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입장이라 그 공격을 막아 주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구천인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홍칠의 앞가슴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구천인이 홍칠을 공격하자 단지흥은 역시 짐작대로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는 황급히 구천인을 향해 손가락을 뻗쳤다. 그러나 그의 일양지공은 구천인에게 채 미치지 못한 채 그대로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구천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홍칠을 향해 장풍을 날리려 했다.
구천인의 독한 심보를 꿰뚫어 본 단지흥은 부지중 탄식을 하며 말했다.
"악한 마음이 생기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더러워진 마음을 악이라고 하오. 구 방주 마음이 더러워지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일지라도 고치기가 어려운 법이니 아무쪼록 회심하여 선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어떻소?"
그러나 구천인의 귀에 그런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계속해서 홍칠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단지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음만 조급해졌다. 홍칠에게서 손을 떼고 전력으로 구천인과 싸우면 이길 수가 있겠지만 그럴 경우 홍칠의 생명을 보존키가 어려웠다. 현재 단지흥은 일양지진력(一陽指眞力)으로 홍칠이 전신의 혈도를 통하게 하고 그 심맥을 당겨 심실과 이어 놓으며 심맥에 입은 극히 위험한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이것은 말로는 쉬우나 실제로는 아주 복잡한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홍칠의 몸에서 손을 떼서는 안 되는데, 손을 떼는
순간 홍칠은 그대로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지흥은 속으로 탄식을 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나 인간들끼리 서로 자비를 베풀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이때였다. 느닷없이 구천인의 귀에 속살거리는 듯한 가벼운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젠 그만둘 때가 되었잖아요?"
구천인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소복 단장을 한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여인은 한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서서 구천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소리 하나 없이 자기의 몸 뒤에까지 와 서 있는 걸 보면 이 여인은 기이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인은 홍칠에게 가하던 공격을 멈추고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여인이 구천인을 향해 씽긋 웃어 보였다. 구천인은 그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주 냉염한, 깊은 원한이 서려 있는 듯한 차디찬 웃음이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방주님, 이제 그만하고 물러가는 것이 좋겠어요. 여기서 송장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에요."
여인의 말에 구천인은 다시금 악이 받쳤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사람 죽이기로 유명한 구천인이다. 네 년 하나쯤 죽여 없애는 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야.'
구천인은 속으로 으르렁거리며 여인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섰다. 이러다가 돌연 손을 써서 단번에 여인을 쳐 죽일 작정이었다.
여인이 그의 생각을 빤히 읽은 듯 냉소를 지었다.
"구 방주님, 날 해칠 작정이세요? 그렇다면 철장탈혼(鐵掌奪魂)을 쓸 건가요, 쌍장추정(雙掌推鼎)을 쓸 건가요?"
구천인은 흠칫 놀랐다.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길래 철장방의 무공을 이처럼 익숙히도 알고 있단 말인가?
"넌 도대체 누구냐? 어서 물러가지 못해?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는 줄 알아라!"
구천인이 소리쳤다.
여인은 단지흥과 홍칠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구천인에게 물었다.
"단황 나으리와 홍칠공을 죽일 작정이었나 보죠?"
"그렇다. 내 비위를 거슬리기만 하면 난 누구나 다 죽인다!"
구천인은 턱을 치켜 들며 거만하게 대꾸했다.
"내가 비위를 건드리면 나도 죽이겠군요?"
여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거야 물론. 내가 죽인다면 죽는 거야."
구천인은 이 여인이 다른 병장기는 없이 다만 진불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기의 독한 철장으로 서너 번만 공격하면 여인은 당장에 피를 물고 꼬꾸라질 게 뻔했다. 그는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냉큼 몸을 솟구쳐 여인을 향해 장을 내밀었다.
여인은 구천인의 돌연한 습격에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진불을 들어 홱 휘둘렀다. 순간 수많은 화살이 한시에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구천인은 대번에 낯색이 하얗게 질렸다. 진불 한번 휘두르는데 저렇듯 광풍이 이는 듯하니 이 여인의 무공도 놀라울 정도가 아닌가?
구천인은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을 돌리며 진불의 공격을 피했는데 몸을 돌리는 순간 바람에 날린 옷소매가 진불에 맞아 쭉 찢어졌다.
임조영은 이번엔 구천인의 두 다리를 겨냥하여 진불을 내리쳤다.
"어이쿠!"
구천인은 냉큼 날아오르며 아래로 장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임조영은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만소문예(漫掃蚊 )'의 법식을 취하며 허공에 뜬 구천인의 배를 후려갈기려 들었다. 구천인은 다른 법수는 쓸 수 없어 두 손바닥으로 장풍을 아래로 내리쳐 진불의 힘을 막았다. 그러나 그 장풍이 아무리 세다고 한들 갈기처럼 퍼져 나오는 진불을 몽땅 막아낼 도리는 없었다. 몇 오리의 진불 가닥이 구천인의 손을 후려치자 구천인은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끼며 허둥지둥
땅에 내려섰다.
땅에 내려온 구천인은 몸을 돌리며 큰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더니 다시금 임조영을 향해 공격태세를 취했다. 임조영은 자기의 이번 진불 공격에 구천인이 피를 흘리든가 크게 상할 줄 알았는데 생각 밖으로 아무렇지도 않자 구천인의 무공이 범속치 않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왕중양의 말이 과연 옳군. 과연 철장방 방주다운 솜씨야.'
이렇게 생각한 임조영은 오히려 더 신이 났다. 임조영은 왕중양과 무예를 겨룰 때도 어떻게든 이겨 볼 욕심으로 조금도 양보를 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러한 그녀에게 왕중양말고도 겨루어 볼 만한 적수가 나타난 셈이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진불을 내두르며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그녀가 쓰는 법수는 스스로 창조하여 집대성한 일명 '옥녀심경(玉女心徑)'이라는 검술인데 하나하나의 법술이 모두 정묘하기 그지없어 구천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구천인은 열세에 몰려 자꾸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천하에 이렇듯 강한 여인이 다 있단 말인가? 구천인은 문득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대가 임조영?"
구천인이 소리쳤다.
"그렇다. 내가 임조영이다. 이제야 사람을 알아보는 모양인데 사정을 봐주기엔 이미 늦었어. 넌 오늘 내 손에 죽는 줄만 알아라."
임조영의 공세는 점점 날렵해졌다. 구천인은 그것을 막느라고 갈팡질팡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둘이 한창 어지럽게 싸우는데 문득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사나이는 한편에서 임조영과 구천인이 싸우는 것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그의 손에도 진불이 하나 들려 있었다.
'아이구, 저 놈도 왔네.'
구천인은 한눈에 그가 왕중양임을 알아보고 더욱 맥이 풀렸다.
당시 무림인들치고 전진교 교주 왕중양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에게 탄복하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악하기로 유명한 흑도(黑道)의 효웅(梟雄)들도 왕중양의 이름만 듣고도 멀리 피하거나 두려워할 정도였다. 구천인은 임조영 하나도 당해 내기 어려운 판에 왕중양까지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임조영을 막아내고 있는데 다시금 사람 넷이 연달아 뛰어들었다. 다름아닌 단지흥의 호위병들인 어부, 농부,
나무꾼과 선비였다. 한바탕 혈전을 벌인 끝인 듯 농부는 다리를 절었고 어부는 왼팔을 상한 눈치였다. 넷은 늠름하게 방안에 들어와 양편으로 갈라서더니 왕중양과 단지흥의 분부를 기다렸다.
왕중양은 한눈에 벌써 임조영이 구천인과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음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는 눈길을 돌려 단지흥과 홍칠에게 시선을 주었다.
단지흥은 내공으로 홍칠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홍칠이 지금 긴급한 관두에 올라 있는 듯 단지흥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져 갔다. 그는 느닷없이 구천인이 뛰어드는 바람에 그와 대항하느라고 진력(眞力)을 적지 않게 소모한 터라 홍칠을 치료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눈치였다.
왕중양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홍칠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른손 식지와 중지에다 기를 모아 홍칠의 심장 부위를 천천히 눌렀다.
"중양진인,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왕중양은 단지흥이 이 말을 할 때 극히 깊은 내공을 쓰고 있음을 알고 내심 탄복하며 물었다.
"단황 나으리께서는 어떤 고견이 계시는지요?"
"홍칠은 구천인한테 그만 심맥을 다쳤습니다. 나는 지금 홍칠의 심장 위치를 움직여 심맥에 잇대어 놓고 있는데 이렇게만 되면 큰 탈은 없을 겁니다."
왕중양도 그 이치를 알고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홍칠의 심장 부위를 누르고 있는 두 손가락은 떼지 않았다. 홍칠의 상황을 알게 된 왕중양은 더욱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단지흥은 왕중양이 하는 양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출지법을 보니 우리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과 같아 보이는데 우리처럼 손가락 하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두 개를 쓰는 게 다르구나. 참으로 묘한 일이로군.'
왕중양은 진력을 홍칠의 몸에 천천히 주입시켰다.
멀지 않아 홍칠의 낯빛이 점점 생기가 돌고 발그레한 혈색이 비치며 호흡도 점차 평온해졌다.
"단황 나으리, 이 홍칠이 영웅호걸이란 말은 벌써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함께 진력을 주입시켜 줌이 어떻겠습니까?"
문득 왕중양이 말했다.
단지흥도 이 왕중양이 영웅협객들을 좋아하며 천하 영웅들을 사귀기를 즐겨할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침략을 일거에 격퇴시키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던 터라 흔쾌히 대답했다.
"중양진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리 하십시다."
둘은 모두 왼손을 들어 동시에 장풍을 일으키더니 다시 그것을 회수하며 손가락을 갈고리같이 만들어 각기 홍칠의 오른손과 왼손을 턱 잡아 쥐었다. 그러자 큰 힘 두 가닥이 홍칠의 오른손과 왼손의 노궁혈을 통해 체내로 끊임없이 흘러 들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홍칠은 가슴속 깊이에서 산악을 뒤흔들 듯한 큰 힘이 용솟음쳐 올라 흉벽을 두드리며 줄기차게 흐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아― 아―" 하는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지붕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왕중양과 단지흥은 서로 마주보며 웃고는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역시 고함을 내질렀다. 우렁찬 왕중양의 음성에는 패주의 기운이 넘쳤고 맑은 단지흥의 음성에는 왕자의 기운이 넘쳤다. 한편 계속해서 흘러 나오는 홍칠의 고함소리에는 울화와 분노, 그리고 세상에 대한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홍칠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앉더니 왕중양과 단지흥에게 말했다.
"대은불언사(大恩不言謝)라고 긴말은 아니 올리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인사를 올리고는 더 말이 없었다.
왕중양과 단지흥도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팔짱을 끼고 임조영과 구천인이 싸우는 것에 눈길을 돌렸다.
임조영과 구천인은 여전히 한창 어지럽게 싸우고 있었다. 불리한 처지에 빠진 구천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발악하듯 대항하다가 문득 홍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홍칠이 언제 상처를 입었는가 싶을 정도로 조용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홍칠까지 달려들면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아닌가. 게다가 밖에 있는 부하들 스무 나믄 명도 이미 대리 사걸들한테 녹아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구천인은 완전히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이럴 땐 다른 생각 말고 몸을 피하는 게 현명한 거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달려드는 임조영을 필사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뜻하지 않은 엄청난 장풍에 임조영이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때다 싶은 구천인은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구천인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왕중양이 쫓아가 붙잡으려는 듯 발딱 몸을 일으켰다. 단지흥이 그를 말렸다.
"불심에 마음을 두시고 공명을 즐기시며 가원(家院)에서 유한히 시간을 보내시고 산애(山崖)에서 도를 닦으십시오. 저런 사람은 가면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뒤를 쫓아 무엇하겠습니까?"
단지흥의 말에 왕중양도 깊이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머리를 끄떡이며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지흥과 왕중양, 홍칠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들을 바라보던 임조영은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녀는 한쪽에서 잠자코 서 있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바로 이날 황제는 황궁 안의 전당에 앉아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간척(千戚)이라는 춤이었는데 각각 여덟 명씩 네 줄로 서서 손에 제각기 간극(千戟)을 들고 추는 춤이다. 황제는 남송(南宋)의 영종(寧宗) 조괄(趙括)이었다. 그가 경원(慶元) 성대(盛代) 용의에 앉아서 기쁨이 한량없는 표정으로 30여 명 궁녀의 춤과 기악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환관 하나가 곁에 다가오더니 뭔가 여쭐 말이 있다는 눈치를 보였다. 영종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환관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영종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큰소리로 명하였다.
"됐다. 이제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궁녀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살금살금 물러 나갔다.
"그래 그 계집이 왔다, 이거렷다?"
영종이 환관에게 물었다.
환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옥벽(玉壁) 하나를 영종에게 올렸다. 반 조각 난 옥벽이었다. 영종은 그것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며 환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 뜻을 안 환관은 난각(暖閣)으로 가서 자그마한 용봉갑(龍鳳匣)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들어왔다. 황제는 용봉갑을 열고 안에 있는 반 조각 옥벽을 꺼내어 두 조각의 옥벽을 맞춰 보았다. 두 조각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자 황제가 큰소리로 분부했다.
"좋다. 수향헌(漱香軒)으로 불러들여라."
수향헌은 자그마한 난각으로서 커다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을 뿐 다른 시설들은 별로 없는 깨끗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위아래 온통 검은색 무림의 복장을 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황제 앞에 꿇어앉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여쭈었다.
"폐하께 신첩 인사 올립니다."
여인은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어서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짐 앞에서까지 이런 복장을 할 필요가 있는고?"
황제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신첩은 어명을 따르겠나이다."
여인은 머리를 조아리더니 일어나 옷을 벗었다. 황제 앞이건만 옷을 벗는 품이 매우 당당했다. 그녀는 먼저 두건을 벗어 땅에 내려놓고 이어서 무림의 복장을 벗었다. 그녀는 곧 스무 살 안팍의 젊은 궁녀복 차림의 요염한 여인으로 둔갑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다.
"고생이 많았다. 그래 짐이 분부한 일들은 어떻게 되었는고?"
황제의 물음에 여인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근사하게 되어가나이다. 그런데 차제 개방에 분란이 많아져 당분간은 더 손쓰기가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경의 말대로 하면 철장방이 짐의 분부를 받들어 시행하겠다고 한다면서?"
황제의 말에 여인은 눈을 치뜨고 한번 황제를 바라보더니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명이신데 철장방이 감히 거역할 리 있겠습니까마는 철장방의 세력이 아직까지는 강호에서 그렇게 크게 미치지 못하여 일호백낙(一呼百諾)은 어려운 상황이옵니다."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누가 강호에서 일호백낙을 할 수 있단 말인고? 개방 방주 미운산인가, 아니면 전진교 교주 왕중양인가?"
"왕중양이올시다."
여인이 대답했다.
"경은 왕중양을 만날 수 있는고?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고? 그 사람에게 용의 자태나 천자(天子)의 외표라도 있단 말인가?"
황제의 물음에 여인이 살포시 웃음을 머금었다.
"용의 자태가 다 뭡니까? 그건 모두 하릴없는 대신들의 헛소리에 불과한데 폐하께선 어찌 그 말을 곧이들으시옵니까?"
이에 황제는 기뻐 웃으며 여인을 향해 말했다.
"경이 내 곁을 떠난 후로 난 매일이다시피 그런 말을 귀로 들었기에 묻는 것이니라."
그리고는 여인을 넋 나간 표정으로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황궁에서 황제는 매일 미녀들을 상대하고 있고 어떤 때는 하룻밤에 미인 서넛을 한꺼번에 끼고 자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인들 가운데는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채워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 여인을 마주하자 황제는 너무나도 황홀하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 이리 가까이 오지 못하는고?"
여인이 빙긋이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임금님 모시기가 호랑이 모시기란 말이 있지요. 폐하께서는 황제이시니 호랑이도 보통 호랑이가 아닌 줄 아옵니다. 호랑이한테 그냥 안겨 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고? 글쎄 대신들이 내 곁에 붙어 있는 건 나도 싫어. 사내들끼리 한데 있은들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하지만 자네는 다르잖은가? 자, 이리 가까이 오게나. 어서."
황제가 팔을 벌려 보이며 애가 타는 듯 재촉했다.
여인은 또 생긋 웃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황제를 떠보듯 말했다.
"삼천 궁녀가 곁에 있는데 신첩 같은 거야 벌써 잊으셨을 줄로 아는데요?"
"무슨 소리? 내가 어찌 한시인들 그대를 잊었겠는가? 괜한 투정 부리지 말고 어서 내 무르팍에 와 앉거라."
그러나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유독 여인만이 황제의 부름에 이렇듯 부동의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환관들이 보면 또 뭐라고 수군거리겠나이까? 황제께서 음락에 빠졌다고 뒷소리할 거고 그러면 어느 대신이 그들의 말을 듣고 입궁하여 황제께 또 간할 것이옵니다. 선조께서 몽진(蒙塵) 중에 계시오니 폐하께서 자중하시와 음락을 경계하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여인의 말에 황제는 허허 소리내어 웃었다.
"자네는 참 말도 많구만."
그는 고개를 돌려 환관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내 명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와선 안되느니라."
"예잇―."
환관들은 두말없이 서둘러 물러갔다.
수향헌에는 황제와 여인만이 남았다. 여인은 엉덩이를 한들한들 흔들며 사뿐이 황제 앞에 다가오더니 그대로 선 채 어리광하듯 물었다.
"아이 참, 폐하의 무릎 위엘 어떻게 앉으란 말씀이옵니까?"
황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여인의 손목을 잡아당겨 냉큼 끌어안았다. 그는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숨찬 소리로 물었다.
"임자, 밖에서 잘생긴 사내들을 더러 보았겠지?"
여인이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나, 폐하처럼 잘생긴 미남이 천하 어디 있다고 그러시옵니까?"
"글쎄 그걸 나도 모르겠다 이거야. 궁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내 앞에선 무릎을 꿇고 맹수나 만난 듯 오돌오돌 떨기만 하거든. 그래 그녀들이 정말 내가 좋아서 그럴까?"
"그야 저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여인은 탄식조로 대답했다.
황제는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짐은 오직 임자가 날 좋아함을 알고 있지. 짐은 임자를 강호 바닥에 내놓아 고생시켜야 하는 게 얼마나 마음 아픈지 몰라. 하지만 어쩌겠나? 짐이 휘종(徵宗) 선제처럼 되어서 자기 여인을 내놓아 남의 사내를 수청 들게 한다면 그처럼 수치스런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짐은 이런 수치를 사전에 방비하고자 이러는 거야."
황제는 이렇게 말하며 여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이 여인은 다른 궁녀와 달라서 황제 앞에서 어떤 행동이든 부담없이 할 수가 있었다. 황제의 수염을 잡아당길 수도 있고 다른 궁녀들은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욕지거리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더 받고 있는 여인이었다.
"저 미운산 있잖아요."
여인이 교태 섞인 음성으로 떠보듯 입을 열었다.
"그는 정말 사내 중의 사내더군요."
"그래?"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나 여인은 그의 속을 빤히 꿰뚫어 보면서도 모르는 척 약을 올렸다.
"미운산이 남자 구실할 때면 정말……."
여인은 미운산과의 황홀했던 밤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듯 다분히 흥분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확실히 미운산은 절륜의 기력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였다. 그녀의 몸 위에서 미운산은 맹수와 같은 힘으로 그녀를 미칠 듯한 격랑에 휩싸이게 했는데 쾌감이 최고조에 이를 때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 정도였다. 미운산과의 밤을 생각하고 여인은 어느덧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숨결이 절로 가빠졌다.
"그래 그 녀석과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과 정말로……."
황제는 약이 바싹 올랐다.
여인이 깔깔 웃었다.
"폐하도 참……, 그냥 농담을 해 본 것뿐이옵니다."
그러나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짐은 일찍이 신신당부한 바 있으렷다? 오로지 짐한테만 충성을 해야 하고 다른 놈들과는 임기응변으로 그러는 척만 하라고 하였는데 그래 그걸 잊었단 말인가?"
"어찌 감히 그걸 잊었겠사옵니까? 누구의 엄명이시라고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신첩만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희비들과 궁녀들한테 폐하도 임기응변 그러는 척만 하셨나이까?"
여인이 능청스레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임자가 황제인가? 황제가 뭔지 알기나 하고 그 따위 소리인가?"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야……."
"무엄하도다. 황제란 오늘 밤에 끌어안고 좋아하던 여인도 다음 날 아침 사람을 시켜 죽여 버릴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이니라.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황제의 눈에 날카로운 핏발이 섰다.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미운산한테 정이 들었단 말이렷다? 좋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마.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황제가 밖에 대고 버럭 고함을 쳤다. 그 소리에 작은 체구를 가진 태감 하나가 설설 기면서 들어왔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
"무슨 분부가 계시옵니까?"
"네가 한번 말해 보아라. 짐이 이 계집을 어떻게 죽이면 좋겠느냐? 장살(杖殺)을 시킬까, 교살(絞殺)을 시킬까?"
태감은 어리둥절해져 말문이 막힌 듯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도 이 여인이 황제에게 그 누구보다 큰 총애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이 여인을 죽여 버리겠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황제는 앙상하고 창백한 손으로 여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자고로 제일 무정한 사람이 제왕들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내 말 한마디면 너 같은 목숨은 당장에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무섭지 않느냐?"
"무섭지 않습니다. 무서울 게 없지요. 폐하께서 신첩을 강호에 내보낼 제 신첩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사옵니다. 그러한 몸이 더 무엇을 두려워 하겠나이까?"
여인은 차분히 대답했다.
황제는 고개를 젖히며 허허 웃고는 태감에게 명했다.
"어서 잠자리 시중이나 들도록 해라."
태감은 서둘러 원앙휘장을 드리우고 쌍베개를 놓고 비단 이불을 펴는 등 한동안 부산을 떨더니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다 되었나이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문을 조심스레 여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여인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여인의 미끈한 몸매가 드러나자 황제는 완전히 넋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을 미친 듯이 주물러 대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강호에 가서 야성을 좀 배웠겠는데 왜 짐한테 그 야성을 좀 부려 보지 못하는고?"
그러자 여인이 와락 몸을 일으켜 황제를 깔고 앉으며 소곤거렸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 맛을 보여 드리지요."
여인은 정말 발정한 암코양이처럼 용상 위에 누운 황제를 떡 주무르듯하며 온갖 음탕한 짓을 다하였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자 황제는 지칠대로 지쳐 나른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배 위에 앉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황제는 다시금 기운을 내어 여인의 목을 와락 당겨 안았다.
"이 세상에 폐하를 따를 사내는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가 최고이옵니다."
여인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황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인의 말에 황제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그럼, 내가 누구냐? 내가 이 나라 황제가 아니더냐……?"
여아는 한 자그마한 집 안에 앉아 있었다. 소미타와 사개에 의해 죽은 거나 다름없던 그녀는 한 괴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녀는 빠개지는 듯 아픈 머리를 싸쥐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너무도 끔찍한 정경에 여아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모두 내 탓이야. 내가 그 마차를 타지 않았으면 마부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이 집에 들지 않았으면 이 집의 노파와 아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죽지 않았을 거야. 모두 내 잘못이야. 당신들의 원혼이 있다면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문득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집 안에 누구 계십니까?"
노인의 음성이었다.
여아는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구신지 들어오세요."
여아는 다 죽어 가는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혼자말로 웅얼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상하구만. 집 안이 왜 이렇게 캄캄하고 어둡지?"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더듬더듬 사람을 찾는 것 같더니 땅에 쓰러져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일어나요, 일어나. 객이 왔는데도 잠만 잘 거요?"
노파가 움직이질 않자 그가 혀를 찼다.
"허 참, 단단히 곯아떨어진 모양이구만. 이런 한심한 일이 다 있나?"
그는 투덜대며 이번에는 마부와 노파의 아들을 흔들어 댔다. 문득 그는 뭔가를 깨달은 듯 소스라쳐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구, 몽땅 죽은 사람들 아냐? 세상에……."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이번엔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여아를 가만 들여다보더니 킥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의 눈이 이처럼 큰 건 처음 보는군 그래."
그는 손바닥을 펼쳐 여아의 눈앞에 대고 오락가락 흔들어 보고는 여아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
"그래, 옛말이 하나 틀린 거 없다니깐? 한이 많은 사람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더니만 꼭 그 짝이야. 그러면 이 여자는 무슨 한을 그렇게 품고 죽었을까?"
그는 여아의 맞은편에 풀썩 주저앉았다.
여아는 여아대로 이 사람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그는 옷차림부터가 희한했다. 위에 공자삼(公子衫)이라는 저고리를 입었는데 앞가슴엔 새 몇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에는 공자건(公自巾)이라는 두건을 썼는데 그 두건에는 저잣거리에서 파는 아이들 노리갯감 따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황아장수들이 쓰는 딸랑이북에다 다는 딸랑이, 엿장수들이 쓰는 방울, 귀염둥이 아이들 옷에 달아 주는 백보대(百寶袋) 따위로, 아무리 적게 봐도 3, 40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이런 것을 달고 다니니 실로 가관이었다
그가 여아의 코에 손을 대보더니 중얼거렸다.
"아니, 숨결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인데? 아이고, 안 되겠다. 이러다가 아예 마저 죽어 버리면 내가 큰 변을 당하지. 죽은 원귀가 나를 끌고 가면 나까지 죽는 거다. 아이고, 어서 내빼자. 이럴 땐 내빼는 게 상수야."
그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여아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애걸하는 듯한 여아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측은한 듯 말했다.
"내 묻는 말에 대답해 봐요. 말을 못하겠으면 눈이라도 꿈쩍거려 봐요. 그대는 여자임에 틀림없지?"
여아는 그 물음에 눈을 꿈쩍했다.
"죽지 않은 건 틀림없군."
여아는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서글프게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한테 이런 해코지를 당한 거요?"
그 말에 여아는 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가 미운산의 여인이 된 지는 오랜 옛날 일로 운낭과 더불어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왔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운산의 정이 점차 식어 가기 시작했는데 그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급기야 오늘은 미운산이 사람을 시켜 자기를 죽이게까지 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 역시 미운산에 대한 정이 완전히 식어 버렸다. 그녀는 미운산을 위해 아낌없이 청춘을 바쳐 온 지난날이 한없이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여아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바라보던 사나이가 측은하다는 듯 혀를 차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걸 보고 그냥 갈 수는 없고, 어디 봅시다."
그는 여아의 팔목을 쥐고 맥을 짚어 보았다.
"남한테 목을 조여 혼절했다가 겨우 깨어났구만. 말도 못하겠고 몸도 안 움직여진다 이거지?"
여아가 그렇다는 듯 눈을 한 번 꿈쩍했다.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마음 푹 놓게나. 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댈 치료해 줄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양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여러 날 병구완을 하여서야 여아는 몸이 차차 회복되어 갔다. 그제야 여아는 자기를 돌봐 주는 사나이의 이름은 주백통이고 별명은 노완동임을 알게 되었다. 여아가 그를 오라버님이라고 부르자 노완동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여아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 작은 마을의 집 한 채를 얻어 10여 일 가량을 병을 치료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여아는 이제 일어나서 밥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둘은 농담도 하며 아주 가깝게 지냈다.
여아는 이 노완동이 아주 솔직하고 너그러우며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순수한 사람임을 알고 속으로 아주 존경하였다.
어느 날 밤이었다. 여아는 바깥 방에 있고 노완동은 안방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여아는 오늘따라 가슴이 뛰었다. 여아는 노완동이 곁으로 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곁에 와서 종남산 전진교의 일들이며, 그의 사형인 왕중양의 이야기며 그가 어떻게 왕중양의 사제가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노완동 자신도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매우 즐거운 눈치였다.
여아는 지금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갈망했다. 노완동은 비록 말이나 행동이 실없고 의젓하지 못한 것 같기는 하나 마음씨 하나만은 무던하고 너그러웠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 따위는 근본적으로 없는 사람이었다. 여아는 이런 남자와 같이 살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아는 노완동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아직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한편 노완동은 혼자서 술을 마시며 여아와는 아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형님, 형님은 지금 어디 계시우? 미인이 화근이란 말도 모르우? 그깐 임조영과 밤낮 코를 맞대고 있다간 좋지 않은 일을 당할게 분명해요. 제발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 무예나 수련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텐데……."
여아는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우리 둘은 오다가다 이렇게 만난 사이로 내 속마음을 이 기회에 터놓지 않으면 결국 후회하게 될 거야. 시일이 더 지나 내가 완쾌되면 저분은 훌쩍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텐데 그때 가서 후회하느니 당장 고백해야지."
여아는 조급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오라버님, 이리 좀 와 보세요. 이리루 와 보시래두요?"
여아의 부름에 노완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싶어 급히 건너가며 물었다.
"여아, 무슨 일인가?"
"오라버님도, 내 곁으로 가까이 오시면 큰일이라도 나나요? 이리 가까이 오세요."
여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주백통이 어정쩡하게 물었다.
"무서워서 그래요. 곁에 앉아 말벗이나 좀 해 줘요."
남녀간의 일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짝이 없는 노완동은 여아가 정말 혼자 있기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어린애 달래듯 말했다.
"참, 무섭긴? 여아는 여기 있고 나는 저기 있지만 한 집 안에 있는데 무섭긴 뭐가 무섭다는 겐가?"
"그래도 난 무섭단 말예요. 무서워서 말벗이나 해 달라는데 싫단 말이에요?"
여아가 뾰로통한 기색으로 투정하듯 말했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하지. 여아가 원하는 일인데 마다할 수야 있나."
주백통은 여아의 곁에 주저앉았다.
여아의 얼굴이 봄날 피어나는 해당화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노완동은 여아의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벽창호 같은 소리만 해댔다.
"여아, 정말 그렇게 무서우면, 자, 내 손을 잡지."
주백통의 말에 여아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오라버님은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말인가? 난……."
주백통은 갑자기 어색해서 말끝을 흐렸다. 무예를 닦는 데만 일심정력을 기울여 온 탓으로 그는 여태까지 여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여아로부터 이런 질문을 듣고 보니 그는 그만 주눅이 들어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남녀가 함께 있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오라버님은 그 재미를 모르세요?"
"그래 봐야 아이나 낳고 살림이나 하며 둘이 함께 다니는 것뿐인데 거기에 재미가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여아는 주백통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날 보세요. 우리 둘이 이렇게 같이 지내는 건 어떨 것 같애요? 싫으세요?"
주백통은 눈을 크게 뜨고 여아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아는 개방 방주 미운산과 부처간이 아닌가? 미운산이 여아를 버렸다고 해도 나하고는 부처가 될 수 없어. 난 여인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사형인 왕중양 형님께서도 말했듯이 난 천상 무예나 닦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깐. 나는 일심정력 무예나 닦아 장차 좀 큰일을 해 볼 생각이야. 여하튼 난 여자와 같이 살 사람은 아니라구."
그의 말에 여아는 눈물이 글썽하여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나 같은 건 싫단 말이군요. 나 같은 건 싫다 이거예요."
주백통은 여아에게 어떻게 제 속을 내보여야 할지 답답해졌다.
여아는 주백통의 손을 잡아 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뭣 땜에 날 살려 주었어요.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난 오라버니를 사랑해요. 정말 진심으로 사랑해요……."
주백통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여아가 자기 손을 붙들고 흐느껴 우는 것을 당장 한 이불 안에 들자는 뜻으로 알고 황급히 머리를 내저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우리 둘은 자리를 같이할 수 없어."
여아는 그만 수치를 느꼈다. 주백통이 자기를 경시하고 있으니 자기가 아무리 사랑을 고백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더더욱 서글퍼졌다.
이때였다. 두 사나이의 말소리가 불쑥 끼여들었다.
"저런 음탕한 년 같으니. 그래 도저히 못 참겠다 이거지? 사내라면 한바탕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건가?"
다른 한 녀석이 핫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저런 바보 같은 사내 놈도 다 있군. 자네 같으면 저 녀석처럼 가만있겠어? 계집이 몸뚱이를 던지며 눈물을 흘리는데 바보처럼 멍청히 보고만 있겠나? 나 같으면 그냥……."
그들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음란한 말들을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재밌다고 웃어젖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여아와 주백통 앞에 나타났다. 여아는 한눈에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하나는 개방의 금의파 장로인 운중연 서불성이고 다른 하나는 오의파 장로인 과청천 제갈옥생이었다. 그들은 한심하다는 듯 주백통을 바라보았다.
"뭣하는 사람들이오? 여긴 왜 왔소?"
주백통이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저 여자가 누군지나 알고 그러고 있느냐?"
과천청 제갈옥생이 빈정대듯 웃었다.
"누구긴 누구겠소? 여아지."
주백통은 좀 얼떨떨해서 대답했다.
"물론 여아지. 내 말은 저 여자가 누구의 여자인지 아느냐 그 말이야."
과천청이 또 비양거리며 물었다.
주백통이 다시 대꾸했다.
"저 여자가 과거에 개방 방주 미운산한테 있었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쯤 알고 있으면 됐다! 저 여자는 말이야, 개방 방주의 여자란 말이다. 너 같은 놈이 건드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주백통이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대꾸했다.
"여아가 미운산의 여자이기에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못한다 이말이오? 그럼 어쩐다지? 난 이미 여아를 구하기 위해 팔에 안아도 봤고 무서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여 손도 잡아 주었는데, 그래 이걸 어쩐단 말이오?"
노완동은 난처하게 되었다는 듯 머리 아픈 시늉을 했다. 개방의 두 장로는 한심해 죽겠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한바탕 웃고 난 서불성이 빈정대며 말했다.
"뭐 어쩌겠나? 자결을 하는 수밖에."
"자살? 내가 왜 자살을 한단 말이오?"
노완동은 눈을 부릅떴다.
"자살하기가 무서우면 우리가 도와주지. 우리 형제들이 먼저 너를 죽이고 나서 저 여인을 마저 요절내겠다!"
"당신들 둘이 날 죽일 수 있다고?"
노완동이 히히 웃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여자는 뭣 땜에 죽이겠다는 거요?"
"말해 준들 네깐 놈이 알아듣기나 하겠느냐? 서로 명복이나 빌어 주는 게 좋을 거다."
과천청이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은 노완동의 겉모양만 보고 여지없이 깔보고 있었다.
"자, 우리 둘이 합세하여 먼저 저 놈부터 저승으로 보내고 저 년을 처치하자구."
과천청의 말이 떨어지자 둘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과천청은 노완동의 눈, 인후, 심장을 겨냥하여 암기 열 개를 내던졌고 운중연 서불성은 노완동의 몸을 겨냥하여 두 손으로 장풍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