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여인들 - 에바 페론과 테오도라 황후 [펌]
- 에바 페론
아르헨티나에는 약 100여 년 전에 태어나 70년 전에 죽은 에바 페론이란 여성 정치인이 있었다. 그녀는 1945년 결혼한 군인 출신 정치인 후안 페론이 이듬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덕에, 아르헨티나 영부인이 됐다. 실질적으로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그녀는 남편보다 유능했으며, 남편보다 훨씬 더 인기가 높았다. 그녀가 자궁암으로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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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는 시골 농장주와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딸로 인정을 하지않아, 청소년기에 이를 때까지 가난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5세 때 무작정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출을 감행한 그녀는 타고난 미모를 무기 삼아, 자기 앞길을 이끌어줄 것 같은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없이 떠났다.
에바는 여러 명의 남자 품을 전전하며 삼류극단 배우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으나, 성공을 향한 물불 가리지 않은 노력 덕분에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1940년 경 마침내 작은 방송국을 소유한, 어느 정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그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화려한 사교술을 익히고 권력의 속성을 스스로 깨치며 성공의 최종 방정식을 정치에서 찾은 것은 젊은 날에 겪었던 바로 이런 인생역정을 통해서였을 것 같다.
- 테오도라 황후
테오도라 황후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거의 대등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후이다. 테오도라 황후는 외설적 연기로 인기를 구가하던 무희 출신 창녀였다는 점, 황제의 조카였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눈에 들어 귀족이 하층민 여성이나 유흥가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며 결혼했다는 점, 제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에서 황제와 나란히 왕관을 받았다는 점 등으로 널리 회자되곤 하는 여성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를 자신과 대등한 제국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신하들에게 두 사람의 이름으로 충성서약하게 했으니, 공동황제인 셈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의견이 다르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철시키려 했으며, 남편 재위 중 제정된 법령에는 거의 대부분 자신의 이름도 올렸다. 그뿐 아니라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고 이웃 통치자들과 서신을 왕래하는 등 황제와 대등한 정치적 종교적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그녀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니카반란 진압사건이다. 서로마 고토수복 원정으로 인한 과도한 세금에 지친 시민들이 전차경주가 열리는 히포드롬에서 법무장관과 재무장관 파면 나아가 황제 폐위를 주장하자, 겁에 질려 도망가려는 황제를 따끔하게 꾸짖으며 돌려세우고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오히려 황제권을 강화한 것이다.
그녀는 권력의 본질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원글; 강 기 석 (에디터) ,<오동나무가 ‘디올백’에도 머리 끄덕일까> 에서
출처 : 시민언론 민들레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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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에바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여배우이자 정치인이었으며,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 비참한 어린 시절
제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5월 7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로스톨도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에바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고, 후닌으로 옮겨가 가난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영화배우의 꿈을 키웠던 에바는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가 5년만에 연예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녀는 1943년 라디오 DJ를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슬픈 듯 하면서 호소력이 짙어 꽤 인기를 끌었다. 이 목소리는 훗날 정계에서도 미모와 함께 뛰어난 연설력으로 에바의 큰 무기가 되었다.
- 후안 페론과의 결혼
제2차 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질 때쯤 1944년, 에바는 산후안에서 일어난 대지진에 대한 이재민 구호기금을 마련하고 있던 노동부장관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1938년 첫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에게 한 눈에 반했고, 두 사람은 1945년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이후 에바는 대통령선거에 참가한 남편 후안을 돕는 과정에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
- 신화의 빛과 그림자
1946년 후안 페론은 정식으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하었고, 영부인이 된 에바는 남편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고통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이해하면서 노동자와 하층민에게 후한 정책을 펼쳤다. 이 와중에 프랑스로부터 식량배급 약속을 받거나, 스페인에서의 아동구호 활동, 노동단체와 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페론 재단의 성립같은 자선사업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그녀는 '가난한 자들의 성녀' 대우를 받았다.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도 더 유명인사가 되었고, 덩달아 남편 후안 페론의 인기도 치솟았다.
페론의 개혁은 장점만큼 문제도 많은 개혁으로 평가된다. 이른바 '페론주의'로 알려진 후안 페론, 에바 페론 부부의 정책은 '중산층을 육성하고 개혁을 시도한 선구자'라는 칭송에서부터 '대중의 인기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라는 신랄한 비판까지 극과 극의 평가받고 있다. 페론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이 남미 '포퓰리스트'의 시초이고 말한다.
실제 '빈민층을 위한 정치'를 명분으로 삼아 남편인 후안 페론과 종신통치를 하려는 낌새를 보이기도 했다. 후안 페론은 정당간 토론 협상을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불신했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계층간 갈등을 표면화시킴으로써 훗날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불안을 유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에바는 성적으로 상당히 난잡했다는 말도 있는데, 무명 배우 시절부터 성공을 위해 성관계를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섹스 스캔들 중에 가장 큰 것은, 영부인이 된 후에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정사이다. 오나시스는 식사를 하고나서 그녀에게 자선사업에 기부한다는 명목으로 정사 후 10만 달러라는 거액의 수표를 끊어 주었다. 그날 점심 때 에바가 만든 오믈렛을 "지금까지 먹어본 식사 중에 가장 값비싼 음식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사망
1950년 당혹스럽게도 자궁암 진단을 받고, 이후 그녀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했기에 1년 후 부통령 후보로까지지 지명되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건강이 나빠 유세도 힘들 정도였지만 남편을 위해 유세를 하고 1951년 11월 대통령의 재선에 성공한 후안 페론은 에비타를 영적 지도자 자리에까지 올려놓는다. 하지만 그녀는 건강 악화로 1952년 7월 26일, 33세에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바 페론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녀의 유해는 죽음을 슬퍼한 남편 후안 페론과 당시 그녀의 지지세력들에 의해 정치적 목적도 더해져서 방부처리되었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