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혹은 이해
2002년에 상영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묻습니다. 어머니하고 나하고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냐고? 재미삼아 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질문 안에서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느껴집니다. 시어머니와 가깝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고부간의 갈등! 인류의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처갓집 양념통닭’을 기억하시나요? 예전에 한국에서 양념 치킨의 바람을 일으켰었습니다. 사위가 처가를 방문하면 씨암탉을 잡아주던 것을 연상하게 하는 상호입니다. 요즘도 장모님이 사위의 첫 생일상만큼은 근사하게 대접한다니 사위사랑은 장모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왜 며느리와는 찬바람 불고 사위와는 웃음꽃 피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미혼이셨지만 제자들은 대부분 결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장모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을까요? 제 생각에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라는 직업에 어울리게 건장하며 말수는 적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수제자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모님이 열병으로 몸져 누워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당장 처갓집으로 갑니다. 그의 바람대로 예수님은 그의 장모를 손잡아 일으켜 세우시고, 씻은 듯 나아진 그녀는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열병(熱病)은 장티푸스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일에 몹시 흥분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장모가 장티푸스에 걸렸을 수도 있지만 정황으로 봐서는 후자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요즘은 시댁은 멀수록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옛말엔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베드로의 처가는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어부인 베드로는 자주 처가에 들러 갓 잡아 온 크고 싱싱한 물고기들을 드리고 집안일을 도와드렸을 것입니다. 장모는 그런 사위가 얼마나 듬직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위가 마을을 떠났습니다. 제 정신이라면 최소한 가장으로서 아내에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얼마간 집을 비운다고 얘기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배와 그물을 홀랑 내팽개치고 떠났습니다. 여자에 홀린 것도 아니고 왠 젊은 예언자를 따라 나섰답니다. 도무지 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웃음을 잃은 딸을 보면서 사위에 대한 배신감과 시름은 깊어만 갔습니다.
베드로를 없는 사람으로 여길 무렵 망할 놈의 사위가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떠날 때는 언제고,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것인지... 간신히 삭혔던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습니다.
제가 예전에 5분간 웃을 때 나오는 엔돌핀의 의학적 가치가 5000달러라고 했지요? 그럼 5분간 받는 스트레스로 인한 손해도 5000달러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받았을 스트레스의 기간과 정도를 생각하면 열 받아서 몸져누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요?
아픈 것도 이유지만 사위나 예수라는 사람이나 얼마나 꼴도 보기 싫었겠습니까? 그렇게 등 돌려 누워있는 장모의 손을 예수님이 가만히 잡아 주십니다.
어찌 된 일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즉시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듭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물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선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사로잡혔습니다. 그물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물고기같이.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저도 그 때 그 일만 없었어도...
우리가 성당에 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상처와 분노, 욕심과 열등감으로 괴로워하는 내 손을 주님께서 부드럽게 잡아주시기를 청합니다. 마치 베드로의 장모를 손잡아 일으켜 세우셨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