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국교회 사제 존 셀비 스퐁은 다원주의 시대를 맞아 급속하게 변모하는 21세기의 기독교를 ‘새로운 기독교’(A New Christianity)라 부른다. 신약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이를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A Newly Emerging Christianity)라고 일컫는다. 어떤 사람들은 ‘신세계 기독교’(A New World Christianity)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교계는 이 ‘새로운 기독교’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일컬어 왔다.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신학 유형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여 그것이 역사적 기독교(Historic Christianity)와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는 하나님, 성자, 성령, 십자가, 부활, 교회, 구원, 종말 등 신학상징(theological symbols)들과 용어들을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 패러다임, 뿌리를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기독교’(Liberal Christianity)라는 표현이 이 ‘새로운 기독교’의 개념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통일된 규칙이나 정연한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신학 흐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대마다 이론이 다르고, 정통신학과의 거리도 일정하지 않다. 온화한 자유주의가 있는가 하면 과격한 자유주의가 있다. 극단의 자유주의를 배제하는 자유주의가 있는가 하면, 성경의 신적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 능력 같은, 기독교의 근본 도리를 신봉하지 않는 자유주의도 있다. 성경을 신화, 영웅담, 전설집으로 여기는 자유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자유주의자도 있다.
그레스앰 메이첸은 여러 세대 전에 이 ‘새로운 기독교’의 정체를 규명한 바 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에서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 전혀 다른 뿌리에서 생겨난 별 개의 종교라고 단정한다. ‘자유주의’(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별종 종교(a different religion from Christianity)이며, 유서 깊은 기독교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아우를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 메이첸은 이 사실을 교리관·신론·인론·성경관·기독론·구원론·교회론·봉사론을 견주면서 그 차이를 규명한다.
과연 자유주의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가 아닌 ‘별종 종교’인가? 이러한 메이첸의 판단은 옳다면 그러한 신학을 지향하거나 그와 비슷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진리에 역행하는 일이다. 그의 판단이 옳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지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하나로 묶거나 아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인가? 역사적 기독교와 ‘근본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1. 새로운 기독교: 자유주의
자유주의 기독교는 일제의 한국지배가 본격화될 때부터 한국장로교회가 전수한 유서 깊은 기독교 신앙을 줄기차게 공격해 왔다. 장로교회와 정통신앙을 이탈시키고, 한국교회를 자유주의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여러 가지 지략을 짜내고 독설을 내뱉었다. 예컨대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김재준 교수는 “옛 건물”(정통신학)을 파괴해야 “새 건물”(자유주의 신학, 신신학)을 건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정통신학은… 인본주의요 정통적 이단이다”2)고 힐난(詰難)했다.
자유주의 기독교의 속성을 대략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적 기독교와 상반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연주의(Naturalism)에 뿌리를 박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 기초를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현실 세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는 세상의 합리성과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마저 넘어서는 영속성을 가진 진리일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계시의존 신앙에 근거하지 않고 종교경험, 깨달음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성에 바탕을 둔 인간 진리와 신의 계시에 바탕을 둔 기독교 진리 사이에 단절이 없다고 본다. 기독교만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계시가 기독교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둘째, 성경과 교리를 무시한다.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유태인들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성경의 언어는 인식언어가 아니라 고백언어라고 본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은 의미를 고백한 것이라고 한다. 고백언어란 사실과 거리가 먼 신화, 꾸며낸 영웅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유주의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를 강조한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성(그리스도의 도성인신, 동정녀 탄생, 대속죽음, 육체부활, 기적수행능력 등)을 부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리와 신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변화무쌍한 개인 경험을 절대화 할 수 없다고 본다.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적인 기독교를 배타적인 집단으로 단정한다. 죄 사함이나 영혼구원이나 영원한 생명 따위 보다 지상천국 건설과 사회정의와 윤리실천에 역점을 둔다. 복음보다는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신자화, 복음화가 아니라 인간화, 사회화에 열성을 보인다.
셋째, 기독교를 도덕생활과 윤리실천 종교로 이해한다. 정의실현, 사회악 타파, 구조악 철폐, 인권투쟁, 성차별 철폐, 핵무기 제거, 환경보존, 창조세계의 통합과 가난, 전쟁, 인종차별, 평화, 사회악 개선 등 현세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하나님이 전 우주를 통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도 세상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천명한다. 악의 원인은 무지이며, 인간의 원죄나 타락한 본성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기독교의 뿌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영지주의(Gnosticism)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역사성을 부정하면서 그리스도로부터 밀교(密敎)를 받았다고 주장한 당대의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도 일컬어지는 17-18세기 영국의 이신론(Deism)도 일종의 자유주의 기독교였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섭리와 통치를 부정했다. 기독교가 일반 종교 가운데 발견되는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들만이 기독교의 참된 것이라고 보았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기독교는 인간 이성의 제한성, 상대주의, 주관주의를 몰고 온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인식론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독일의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온상에서 자랐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와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이 대변하는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기독교의 핵심이 인간경험과 윤리에 있는 것으로 본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종교의 본질이 신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radical sort of awareness of divine reality), 감(感)에 있다고 보았다. 리츨은 기독교의 본질이 교리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실천과 우주적인 사랑 공동체 구성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잠재 가능성과 도덕 실천을 통한 지상낙원을 추구했다.
성경, 계시,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자유주의 기독교의 태도는 성경 비평학을 고무시켰다.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고,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며, 창세기를 단일 저자의 기록이 아니라 여러 전승(傳承)들을 편집한 것으로 보는 경향을 낳았다.
전술했듯이, 현대주의-근본주의 논쟁기(1920-1930년대)에 나타난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는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기적수행 능력 등을 단지 ‘이론’(theories)이라고 보았다. 성경이 역사 사료편찬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본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 접근을 지지한다. 복음 메시지에 추가된 문화적, 신화적 요소를 배제한다고 하면서 ‘바울 기독교’와 ‘예수 기독교’를 구분한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뒤에 다양한 형태의 현대주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주의, 불트만의 비신화화 신학,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을 부정하는 고등비평학, 구약성경을 신화집, 전승집으로 보는 성경신학, 성경적 신론을 신화로 여기는 폴 틸리히와 존 로빈슨의 신학,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 알타이저의 사신(死神)신학,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 신학, 하나님 없는 기독교를 주창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로 나타났다.3)
정통신학자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성경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다. 성경 권위보다는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신 교훈에만 권위를 둔다. 과학, 역사, 도덕에 관한 성경 본문에는 오류가 있다고 본다.
(2) 반(反)교리적이다. 성경에 바탕을 둔 교리, 신조를 배척한다. 기독교는 생활이지 교리가 아니라고 한다. 신조는 사상의 자유를 앗아간다고 본다. 교리나 신조는 각 종파 사람들의 심리 경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3)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며, 신관(神觀)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교리가 아니라 예수라고 한다.
(4)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5)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6) 그리스도를 신앙의 모범으로, 독특한 인물로 추대하는 반면 그의 초자연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과 구속적인 기능을 가진 그의 인격을 부정한다.
(7) 원죄를 부정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고 그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인간 타락의 교리를 부인한다. 죄의 중대성과 흉독성을 희박하게 여긴다.
(8) 성경이 제시하는 것과 상관없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구원을 부정한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한다. 성령으로 중생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9) 천국과 영생의 희망을 포기한다.
(10)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신앙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를 선행으로 극복하겠다고 한다. 타계적, 초자연적 능력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격변시키려 하지 않는다.
(11) 영벌과 지옥, 형벌, 심판도 없고, 백색보좌도 없고, 심판주도 없다고 한다.
(12) ‘내재하는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일을 자신들의 비범한 업적으로 여긴다.
그 내재성은 전통적인 성경적 유신론의 내재성이 아니라 과학에 맞추기 위해 초월성을 제외한 내재성이다.4) 용어의 개념은 그것이 사용되는 콘텍스트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의 보수계 교회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체계화한 신신학, 바르트주의(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 기독교’에 포함시킨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했으며, 변증법적 신학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박형룡은 구자유주의와 바르트주의를 모두 ‘자유주의 신학’으로 분류한다. 바르트주의가 자유주의 신학과 연루(連累)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 둘째, 파괴적인 성경비평학을 허용한다. 셋째, 인본주의에 기초한 신학을 재구성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바르트주의는 성경적인 기독교에서 떠났다고 한다.5)
바르트주의는 전통적 신학술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정통신학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술어에 새로운 개념을 부가하여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기독교와 다르다. 옛 신학술어들을 그대로 쓰면서 그 속뜻을 다르게 풀이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을 새 사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상투적인 수단이다. 바르트 신학도 옛 신학술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해석에서 성경적 전통적인 본의를 떠남으로써 기독교를 재해석한다. 일종의 새로운 신학체계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편에서는 그의 보수적 경향에 주목하여 ‘신정통’이라고 부르지만 코넬리우스 반틸 같은 신학자는 이 신학에 담긴 자유주의 내용을 보아 ‘신현대주의’라 일컫는다.7)
한국교회가 바르트주의를 자유주의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관례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괴적 성경관과 성경비평학을 수용하는 현대주의자들, 아빙돈주석 사건,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바르트주의 성경관에 대한 논쟁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박형룡은 1930년대 중반에 장로회신학교(평양)에서 ‘기독교신학난제’를 가르치면서 기독교계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신학 사조들을 비판했다. 그 무렵,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김영주, 김춘배, 김관식, 조희염 목사 등은 자유주의 신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한국교회사가들은 바르트주의를 자유주의 기독교 범주에 포함시켜왔다. 김양선은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1956)에서 광복 후의 한국교회의 분열을 자유와 보수의 대결로 파악한다.7)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프린스톤신학교의 존 매카이와 에밀 부룬너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단정한다.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친 바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는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의 연장선상에서 김재준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규정한다.8) 총신대학교의 박용규 교수는 『한국장로교사상사』(1992)9에서 간하배의 논지를 확대 서술하면서 김재준과 송창근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분류한다.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의 성경관과 신학에 대해 총회에 제출한 진정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소개한다.
장로교 남부총회(1946)가 조선신학교를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공식 인준할 무렵, 그 학교 안에는 교회에서 정통신학을 배우고 자란 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다가 충격을 받고서 ‘진정서’(1947)를 총회에 제출했다.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성경관, 교리, 신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 진정서는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교수의 신학을 다루지만, 주로 김재준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김재준은 구약성경을 유태교의 성경이라고 하며, 문서설을 주장하여, 모세 6경설, 제2이사야서설을 가르친다. 성경은 주변국의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 성경에는 오류가 많다. 노아홍수설, 바벨탑 기사, 인류의 기원 등은 모두 허구이다. 여리고성의 함락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승리였다.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이며 정통적 이단이다. 성경은 교리의 교과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칼빈의 예정론은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 유일신 엘로힘은 셈족의 신이라고 가르친다는 것 등이다.10)
김재준은 자신의 성경관이 이단시비에 걸려들자 바르트주의 성경관을 자신의 것으로 천명했다. “성경에 다소 오류가 있으나 그 속에 구속하는 이치가 있다”11)는 점에서 성경은 무오(無誤)하다고 설명했다. 성경의 역사와 과학 관련 본문에는 오류가 있으나 구원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점에서는 성경은 무오(infallable, not inerrant)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재준은 철저한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철저한 바르트주의자도 아니다. 정통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포괄성과 수용성의 면모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신학은 모두를 부정하는 부정신학(Nein-Theologie), 모두를 수용하는 포괄신학(Umgreifen Theologie), 마치 이것인 듯하기도 하고 저것인 듯하기도 한(Als-Ob) 신학이다. 어느 한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높고 먼 공중을 떠도는 신학―장공신학(長空神學)이다.12)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의 자유주의 기독교는 근년에 이르러 종교다원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윤성범, 변선환, 홍정수, 한신대학교의 김경재 교수 등이 이러한 물결을 주도해 왔다. 한국의 보수계 교회들은 김재준을 동력(動力)으로 출범한 기독교장로회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기독교감리회를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이라고 생각한다.
최덕성 박사의 리포르만다에서 (크릭하면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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