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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프리오랏의 시작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그분께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분의 오른손이, 그분의 거룩한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다.”(시편 98,1)
서울 프리오랏 설립 배경과 과정
한국 땅에서 1925년 시작된 원산 프리오랏은 1949년 북한 공산치하에서 해산당하고, 남한으로 피란 오신 한국 수녀님들과 본국 송환 후 남한으로 재입국하신 독일 수녀님들이 대구에서 다시 만나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1956년 7월 29일 신암동에서 대구 프리오랏이 설립되었다. 이후 대구 수녀원은 빠르게 발전하여 수도회원의 수가 많아졌고, 사도직도 대구와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확장되었으며, 1970년에는 서원수녀의 수가 200명이 넘게 되면서 베네딕도 수도회로서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규모로는 너무 큰 수도원이 되었다. 당시 대구 프리오랏의 원장 에델트루드 와이스트(M. Edeltrud Weist) 수녀는 “한 수도원에 회원이 너무 많으면 참된 베네딕도의 수도 영성을 살기 어렵다고 하시며, 이렇게 급진적으로 성장하는 대구 프리오랏을 두 개의 프리오랏으로 분리해서 모든 수도회원들이 올바른 베네딕도의 영성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 프리오랏 총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새로 제정된 회헌에 따라 1971년 10월 11일 처음으로 프리오랏 총회가 개최되었다. 제1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1971.10.11-12.1) 때부터 베네딕도의 영성을 보다 잘 살기 위한 프리오랏 분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인적자원과 사도직의 상황으로 아직은 분할이 불가능하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이어서 제2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1972.8.1.-8.24)에서분원과 같이 소규모(기숙사, 학원, 젊은이센터등)로 시작하여 프리오랏 분할을 시도하자는 내용이 있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어느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대구 수녀원은 프리오랏 분리에 대해 계속적인 연구와 의견을 수렴하였고, 제6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1980.1.20.-1.26)에서는 총회안건으로 상정되어 분리의 장단점과 분리 방법에 대하여 심도있는 의견을 나누었다. 이어 제7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1982.4.13.-4.20)에서는 아리랑분원을 서울 프리오랏 본원이 되도록 한다는 전제하에 「프리오랏 분할 연구 추진 위원회」를 대구 수녀원 원장과 4명의 위원(김 베다 원장 수녀, 이 소피아 수녀,장 피아 수녀,김 아빌라 수녀,배 발라바 수녀)등 5명으로 구성해서 설문지와 수녀들의 토의를 통해 프리오랏 분리에 대한 모든 수녀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연구할 것을 결정했다. 연구추진위원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쳐 전 수녀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하지만 응답이 매우 저조했을 뿐만아니라 설문지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수녀들의 응답이 저조했던 이유는 병원확장등 수녀원에 해결해야 할 여러 당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긴급과제가 아니었던 서울 프리오랏 설립문제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제8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1983.4.28.-5.13)에서 프리오랏 설립 추진의 제2단계로 추진 준비위원회를 새로 결성했다. 이 위원회에서 프리오랏 분리에 대한 연구, 조사, 면담, 모임, 세미나 등을 구체적으로 주도하며 분가의 합당한 유형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설립추진준비위원회가 설문지를 낸 결과, 1983년 11월 28일 집계된 응답내용은 서울 프리오랏 설립은 1985년 후반기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1983년 3월부터 시작된 사수동의 수녀원 건축이 시급한 당면과제였으므로, 1985년 12월 본원 준공이후에 있을 대구 프리오랏 총회까지 결정을 연기한 것이다. 따라서 설립추진위원회도 본원 완공 후에 재개하기로 하고 1984년 3월 22일 잠정적으로 해체되었는데, 해체되기 전까지 수차에 걸쳐 모임을 가졌고 서울 프리오랏 설립에 대해 조언을 얻기 위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도 방문하였다. 추기경님은 새로 설립될 서울 프리오랏이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살고, 전통을 살리며, 전례와 기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주어진 여건에서 시작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 후, 대구 수녀원은 대구시 북구 사수동 135번지에 본원과 수련소를 신축하여 1985년 12월에 본원을 이전 했다. 이어서 제9차 프리오랏 총회(1986.9.1.-9.9)에서 모든 수녀들은 프리오랏의 분리에 대하여 많은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해 노력하여 마침내 대구 프리오랏을 「틋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과 「틋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두 프리오랏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보다 소규모의 수도원을 형성하여 참된 베네딕도의 영성을 살기 위한 염원은 위와 같이 15년 동안의 의견 수렴과 논의를 거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9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
제9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 결의사항
서울 프리오랏은 다음과 같이 설립한다.
(1) 유형: 독립 프리오랏
지역 - 서울지구 모든 분원 : 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한다.
단. 쌍방 진출이 가능하다.
(2) 시기 : 1987년 11월 정식 설립
(3) 방법 : 가. 준비위원장은 총원 행정체의 재가 이후, 제9차 총회 대의원들과 서울지구
수녀들의 추천을 받아 현 행정체가 임명하며,아리랑 분원에 거주한다.
나. 준비위원은 2명으로 하며 1명은 서울지구 수녀들이 선출 하고 1명은
위원장이 임명하며 준비위원회는 임시 수녀원의 제반 행정 및
제1차 서울 프리오랏 총회를 준비한다.
다. 원장 선거 : 대구 프리오랏 원장 선거 전.
피선거권 - 프리오랏 차원
선 거 권 - 서울지구 수녀들
(4) 경제 : 1987년 11월 이후부터 약 5년간 사업체 보조(현재 보조 수준) 및 의료 혜택을 제공한다. 상지 피정집에 인접한 150평의 땅을 매입한다.
서울 프리오랏 설립 준비
제9차 대구 프리오랏 총회 결정사항에 따라 서울 프리오랏 설립 시기는 1987년 11월 16일로 결정되었고, 1986년 9월 9일부터 1987년 11월 15일까지 1년 2개월을 준비기간으로 정했다. 이 기간 동안 아리랑 분원을 본원으로 정하여, 프리오랏의 분가와 설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서울지구의 수녀들은 1986년 10월 10일에 상지 피정집에서 첫 번째 월모임을 갖고,이 요한나 수녀를 서울 프리오랏 설립 준비위원장으로,이 소피아 수녀를 준비위원으로 선출했고,권 마리아 고레띠 수녀를 준비위원장이 준비위원으로 임명하여 서울 프리오랏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1987년 8월 8일에는 서울 프리오랏 제1차 총회 준비를 위한 준비위원회원으로 이 요한나 수녀,권 마리아 고레띠 수녀,이 소피아 수녀,이 아눈시아타 수녀,이 미쉘 수녀,양 마리 비안네 수녀,백 젬마 마리 수녀를 선출하였고, 이 준비위원회원들은 서울 프리오랏의 규범 초안을 작성하고, 서울 프리오랏 총회를 준비하면서 서울 프리오랏 설립에 대한 제반 업무를 진행했다.
프리오랏 인원 배정
1987년 2월 10일에 대구 프리오랏의 김 순복 베다 원장 수녀는 서울 프리오랏 소속수녀와 대구 프리오랏 소속 수녀의 명단을 발표했으며, 수녀들은 본인의 소속 프리오랏으로 이동했다. 두 프리오랏 인원 배정 기준의 원칙은 1986년 현재 서울 지역 분원에서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녀들은 서울 프리오랏 소속으로 정하고, 그 외 지역에 있는 수녀들은 모두 대구 프리오랏에 남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의 분원에서 소임을 하고 있지만, 대구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수녀들과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수녀 중에서 서울 프리오랏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수녀들은 각기 원하는 지역으로 가도록 준비 기간 동안 인사이동을 했다. 외국 유학중인 수녀들에게는 서신으로 그 의향을 물어 그대로 해 주었고, 타 프리오랏에 소속되어 선교 중인 수녀들과 총참사는 그들이 선교지에서의 소임을 마치고 귀국할 때 스스로 결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987년 11월 16일, 분리전 대구 프리오랏의 서원 수녀 273명 중 대구에 속하게 된 수녀는 201명(종신서원자 144명, 유기서원자 57명)이고, 서울 프리오랏에 소속된 수녀는 72명(종신서원자 50명, 유기서원자 22명)이었다. 당시 대구 프리오랏의 청원자와 수련자는 46명이었고, 서울 프리오랏에는 3명의 청원자가 왔다.
설립당시 서울 프리오랏 소속분원과 사도직
분원과 사도직에 대해서는 대구와 경상도 지역의 분원과 사도직은 대구 프리오랏에 속했고, 서울과 경기도지역의 분원과 사도직은 서울 프리오랏에 속하도록 확정했다. 당시 대구 프리오랏에 속하는 분원은 14곳이었고, 큰 사도직은 대구 파티마 병원, 마산 파티마 병원(현 창원 파티마 병원의 전신), 김천 성의 여자 중 · 상업 고등학교, 함창 상지 여자 중 · 상업 고등학교가 있었다. 서울 프리오랏에 속하는 분원은 9개의 분원(아리랑분원, 돈암동분원, 개봉동분원, 미아3동분원, 미아5동분원, 성북동분원, 왕십리분원, 서강분원, 성남분원)이었고, 큰 사도직은 서울 애화학교, 농아 자활원, 상지 피정집이었다.
양도받은 자산목록
1987년 11월 7일 대구의 김 베다 원장수녀와 대구 프리오랏 행정체 수녀들이 상지 피정집에 와서 서울과 대구 프리오랏 분리 전의 마지막 행정체 회의를 하면서 프리오랏 분리 마무리를 했고, 대구 프리오랏의 배 발라바 당가 수녀와 서울 프리오랏의 이 미쉘 당가 수녀가 회의에 동석하여 서울 프리오랏의 재산 목록과 토지, 건물들의 등기권리증과 서울 프리오랏 모든 건물들의 설계도를 인계하고 재산 인수서에 쌍방이 서명 날인했다. 분가당시 대구 프리오랏이 서울 프리오랏에 양도한 자산 목록은 다음과 같다.
소재지 | 지목 | 비고 |
서울 성북구 동선동 | 대지 | 동선동분원 |
건물 | ||
서울 성북구 돈암동 | 대지 | 아리랑분원 상지피정의 집 |
건물 | ||
서울 도봉구 미아동 | 대지 | 미아동분원 서울애화학교 |
건물 | ||
서울 도봉구 수유동 | 대지 | 청각장애인 자활원 |
건물 | ||
경기 중원구 상대원동 | 대지 | 성남분원, 탁아소 만남의 집, 행려자의 집 |
건물 | ||
경기 화성군 관암면 기천리 | 대지 |
2. 서울 프리오랏 설립
제1차 서울 프리오랏 선거총회를 주관하기 위해 1987년 11월 12일에 에델트루드 와이스트 총장수녀와 이레네 다발루스 부총장수녀가 로마에서 내한했다. 서울 프리오랏 수녀들은 11월 15일에 상지 피정집에서 총장수녀와 부총장수녀의 참석 하에, 「성녀 겔트루드」를 서울 프리오랏의 주보 성인으로 모시기로 투표로 결정했다. 서울 수녀들은 원장 선거일을 앞두고 15일 아침부터 16일 아침까지 24시간 성체를 현시하고 성체조배를 하면서 서울 프리오랏 설립과 원장 선거를 위하여 기도했다. 1987년 11월 16일 아침 7시 30분에 서울 프리오랏 수녀들은 상지 피정집 성당에서 성녀 겔트루드 축일과 서울 프리오랏 설립 미사를 성대하게 드렸다. 미사중 복음 낭독 후에 에델트루드 와이스트 총장 수녀가 제대에 나가서 서울 프리오랏 설립을 선언하심으로서 서울 프리오랏이 설립되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이 새로운 시작의 중요한 문서인 서울 프리오랏 설립 증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 언 서
대한민국 서울에 성녀 겔트루드 프리오랏 설립 증서
1987년 11월 16일, 겔트루드 성녀의 축일에 우리회의 총원 행정체의 결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프리오랏을 세웁니다.
이와 동시에 교회법에 의한 정식 수련소를 설립할 허락을 부여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새로운 시작에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로마-서울
1987년 11월 16일
에델트루드 와이스트 총장 수녀
서울 수녀원 초대원장 선출
1987년 11월 16일 오후에 서울 프리오랏 종신서원 수녀들은 에델트루드 와이스트 총장수녀와 이레네 다발루스 부총장 수녀의 주관으로 원장 선거를 실시하여 이춘이 요한나 수녀를 서울 프리오랏의 초대 원장으로 선출하였고, 당일 저녁 기도에 원장 취임식을 했다.
다음날부터 이어진 제1차 프리오랏 총회에서는 서울 수녀원의 정체성을 시대와 지역이 요구하는 사도직을 하도록 방향을 설정했으며, 소규모의 공동체로서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을 충실히 할 것을 다짐했다. 제1차 총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서울 프리오랏 총회(1987.11.17-19, 23-26)
제1차 프리오랏 총회 결정사항-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위하여 큰 구조를 요하는 사업체는 하지 않는다.
주방일과 세탁은 우리의 손으로 한다. (특별한 예외 인정)
각 공동체는 그 시행일을 협의하여 결정한다.
행정체에 분과별 담당 고문을 둔다.
1) 영성 및 양성분과 2) 전교(본당, 원목, 교목, 신자재교육)분과 3) 사회사목분과
4) 교육분과 5) 재정 및 건축분과
4. 본원은 아리랑 부지에 건축한다.
5. 농아양로원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내가천리에 신축한다.
6. 지원기를 4-6개월 둔다.
7. 청원자는 사복을 한다.
8. 재양성 기간은 3-6개월이다. 재양성 프로그램은 수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작성한다.
9. 재정 위원회와 건축위원회를 둔다.
서울 프리오랏 규범
서울 프리오랏은 제1차 서울 프리오랏 총회에서 서울 프리오랏의 규범을 작성 하고 로마 총원의 승인을 받았다. 규범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위하여 가능한 한 큰 구조를 요하는 사업체는 지양하고, 우리나라의 현실과 교회의 요구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며, 본당 사목, 신자 재교육 및 피정지도, 원목, 도시 빈민 사목, 노동 사목, 유아교육, 청각 장애인 교육과 양로원 사도직을 통해서 병약자와 노인, 억압 받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봉사할 것을 규정하고, 공동 기도와 전례, 공동체 생활, 선교, 양성, 권위의 봉사에 대한 지침을 정했다.
3. 서울 프리오랏 본원 건축
서울 프리오랏 설립 당시 서울 프리오랏의 본원 건물은 없었다. 초대 원장 이 요한나 수녀, 부원장 양 빌지니아 수녀, 당가 이 미쉘 수녀, 서울대 병원 원목실 양 베르나르다수녀, 전례 담당 백 젬마 마리 수녀는 상지 피정집 수녀들과 함께 상지 피정집 수녀원에 거주했다. 서울 프리오랏 설립과 동시에 아리랑 분원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상지 피정집을 운영하던 아리랑 분원 수녀들도 본원 수녀가 된 것이다. 당시 본원 생활을 설명하면, 상지 피정집 2층 수녀원 기도실을 공동방으로, 공동방을 본원의 기도실로 사용했고, 원장은 집무실이 별도로 없어서 원장 침실에서 업무를 했다. 당가실도 없어서 당가수녀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복도 끝에 책상을 놓고 사무를 보았다. 따라서 제일 시급한 문제가 프리오랏 본원 건물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건축부지
우선 서울 프리오랏 수녀들은 '본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의논했다. 당시 서울대교구 소속 박귀훈 신부님께서 주신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토지(임야 1,575평)를 본원 위치로 생각해보았으나, 그 땅이 그린벨트 지역이고 일조건이 좋지 않아 수녀원의 조건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에 수도생활에 도움이 되는 자연환경도 생각하였으나 재정적 여유가 없어서 이 방법도 불가능했다. 결국 가능한 방법은 상지 피정집 주위의 일반 가옥을 매입해서 상지 피정집 대지와 합병하여 본원 건물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대구 프리오랏은 제9차 총회에서 결정한대로 상지 피정집 뒤편에 위치한 대지 147평(돈암동 413-64)을 매입해 주었다. 수녀들은 상지 피정집의 동남편에 있는 일반 가옥 2채(돈암동 413-156, 413-157)를 더 매입해서 각각 마오로집과 플라치도집이라 명명하고, 이 두 집을 수련소로 하고, 돈암동 413-64와 돈암동 413-65 대지를 돈암동 413-79 대지와 합병하여 상지 피정집 뒷 터를 서울 프리오랏 본원 건축 부지로 정했다.
건축비 조달
서울 수녀원은 본격적으로 본원 건축을 계획하면서 우선 동선동 집(대구 프리오랏 시절의 서울 연락소)을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에 매각했고, 건축비 조달을 위하여 외국의 원조와 은인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 미쉘 당가수녀는 미국 스카일러(Schuyler) 베네딕도회 미션 하우스(Benedictine Mission House)의 헤르만 콤브루스트(Herman Kombrust) 당가 신부에게 원조를 청했는데, 다행히 헤르만 신부로부터 건축비를 원조해주겠다는 답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1988년 초부터 건축 설계를 하여 같은해 7월 1일에 본원 건축 기공식을 했다.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스카일러에서 원조금을 수차에 걸쳐서 보내주었는데, 이 원조금은 미국의 은인들이 각각 몇 십 달라씩 기부한 것을 모아서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 총원, 독일 Missio, 독일 원조 기관인 Kirche in Not와 국내 은인들로부터도 약간의 원조금과 후원금을 받았다. 그래도 건축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대구 프리오랏에 도움을 요청해서 건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건축비 조달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이 미쉘수녀의 소회를 옮겨본다.
1987년에 서울에 당가로 오니 아무리 가난하다지만 세상에 집이 없는 거예요. 상지피정집 분원에 곁방살이로 끼어 사는 처지라 공간이 없어서 상지분원과 피정집 성당이 연결되는 복도 구석에 책상 하나를 놓고 당가실을 차렸어요. 그렇게 하면서 서울수녀원 본원을 지어야 했던거지요. 그런데 건축할 돈이 없었어요. 우리는 빈손이었기 때문에 하늘만 쳐다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대구수녀원의 베다 원장수녀님께 서울수녀원 건축비를 요청했어요. 하지만 대구 사수동 수녀원 건축비도 지불하지 못한 상태라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돈이 없다고 했어요. 수녀님들은 당가인 나만 바라다보는 거예요. 당가가 본원을 지을 것이라고 믿고 언제 서울 본원 건물을 건축하냐고 묻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우선 동선동 분원 건물을 팔아서 종자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동선동 수녀원의 시작은 골롬반회와 긴밀한 관련이 있어요. 우리 수녀님들이 이북에서 피난 나왔을 때 골롬반 신부님들의 초대로 몇 분의 수녀님들이 전남 광주에서 전교를 했어요. 그때 골롬반 신부님들이 분도회를 좋아하셔서 광주를 떠나지 않기를 바랬지만, 우리수녀회는 대구에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그 후 골롬반회가 서울대교구 돈암동 본당을 시작할 때 우리 수녀들을 초대하면서 동선동에 살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수녀회 첫 서울 분원이 출발했지요.
그런데 본원 건축을 위해 동선동 분원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당시 골롬반회는 외국인 사제들만 있어서 골롬반회 재단을 못 만들었기 때문에 동선동 수녀원의 건물은 서울대교구 재단에 속해 있었어요. 동선동 수녀원을 매각하는데 많은 행정적인 어려움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셨어요.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결국 동선동 매각 금액을 골롬반회로부터 기부받게 되었고, 이는 본원 건축금액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어요. 우리가 골롭반회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고, 이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요한나 원장 수녀님은 본원 건축을 골롬반회에서 받은 일정 금액에 맞게 조그만 집을 짓자고 하셨지만, 나는 당시 성소자들이 많은 때라서 수련소를 포함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느님, 우리 수녀들이 눈과 비를 피하고 들어가 살 수 있는 정도의 아주 간소한 집을 지을테니 건축비를 보내주세요”하고 절절하게 기도했지요. 그런데 분가 후 내가 서울에 오기 전에 미국 놀폭 당가실에서 3년 있는 동안 헤르만 신부님을 알게 되었어요. 개인으로 잘 아는 관계는 아니었고 수녀원에 오시면 다른 수녀님들과 함께 인사하는 정도였어요. 나는 기도를 하면서 무작정 헤르만 신부님께 편지를 썼어요. 내용은 ‘내가 서울에 와서 당가가 되었다. 대구에서 분가해 나왔는데 새 프리오랏에 수녀들이 살 집이 없다. 동선동 분원 판 돈밖에 없으니 서울수녀원 본원 건축을 도와달라’고 절실하게 썼어요. 놀랍게도 약 10일 전후로 답이 왔어요. ‘내가 건축비를 줄테니 집을 지으세요.’
그래서 설계를 하고 건축을 시작했어요. 헤르만 신부님은 건축비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하시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참으로 묘하게 ‘돈을 얼마 지불해야 하는데...’하면 돈이 오는거에요. 그래서 한번도 미루는 일이 없이 건축비를 주면서 공사를 진행했어요. 공사 중간 쯤엔 돈 때문에 조마조마한 일도 있었어요. 그래도 신부님께 언제 얼마를 주실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처지였어요. 저는 신부님께서 돈을 보내주시는 대로 쓰면서 그 공사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서 매달 은인들에게 감사편지를 썼어요. 클라릿다 수녀님이 그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면 왜관 수도원 인쇄소에 보내고, 인쇄소에서 수백장을 소포로 부쳐오면 원장 서명을 해서 소포로 미국에 보냈어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라 거의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했어요. 공사 중간쯤 되어 자금조달이 어렵게 되었을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대구수녀원 행정체에 건축비 일부를 보내줄 것을 공문으로 요청했고, 줄 수 없다면 그 내용을 공문으로 써서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대구 원장이 장 피아 수녀님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다행히 대구에서 요청한 금액을 보내주어서 건축을 마칠 수 있었어요.
본원 건축
본원 건축 부지 지역은 ‘풍치지구’로 지상 3층밖에 지을 수 없는 조건이었고, 건축부지가 경사로 되어 있어서 필요한 구조의 건물을 설계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러한 악조건을 잘 활용하면서 건물의 유지·관리를 위해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검소한 내부구조와 외형의 수도원 건물이 되도록 노력했다. 본원 건축의 건평은 940평으로 지었다. 건축 설계사는 간(間) 건축 연구소 김병선(안드레아)님 이었고, 건축 시공사는 대신 건설 주식회사의 박명신(프란치스코)님이었다. 건축 기획과 감독은 이 미쉘 수녀가 담당했고,성당 내부 디자인은 강 마태아 수녀가 했다. 서울 수녀원의 형편에 알맞게 성당의 전체적인 인테리어를 검소하게 맞춘 강 마태아수녀의 소회를 옮긴다.
한국에서 성체대회가 있던 해에 서울 수녀원을 지었어요. 그때 묵상을 하는데 성체의 의미가 특별히 다가왔어요. 그래서 성체대회도 기념하면서 성당 정면의 부조를 쪼개어지는 성체로 했지요. 쪼개어지는 성체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우리 수도자들도 아버지의 뜻대로 온 존재가 봉헌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대는 봉헌하는 손이에요. 그때까지 왜관에서는 제대를 합판에 무늬목을 붙여서 만들었는데, 두드려보면 속이 비어있었어요. 저는 나무의 성질을 생각해서 조각나무들을 하나하나 집성해서 제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감실도 봉헌하는 손의 형태로, 독서대도 말씀을 봉헌하는 형태로 만들었어요. 감실은 앞에서 보면 사각형인데, 사각형은 예수님의 관을 나타내고, 동그라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해서 전체적으로는 관을 깨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어요. 성당의 지붕은 사각형인데 네 군데 귀퉁이의 모양을 다르게 해서 팔각형 천장이 나왔어요. 수평인 천장하고는 소리가 달라요. 제가 음향에 대해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성당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무슨 자재를 쓰면 공명이 좋을 것 같다는 감이 있었어요. 경험 통해서 얻은거에요. 팔각의 의미도 부활이지요. 서울 수녀원은 돈이 없어서 벽에는 벽지를 바르고 천장은 할 수 없이 나무를 하고, 환기는 에어컨을 할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창을 열고 닫고 하면서 하려고 했죠. 결과적으로 창들도 비딱비딱하면서 화려한 벽장식이 되었고, 공명도 잘 되고 우리 형편에 맞춰서 했는데, 비교적 괜찮게 나왔다고 생각해요. 성당 나무문은 제가 신경써서 디자인했어요. 나무가 갈라지는 성질이 있어서 조각 나무를 붙여서 무늬를 만들었어요. 손잡이는 둥글게 튀어나오게 했는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성당문은 성과 속이 전이되는 공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성당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정면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성체의 모습을 바라보며 묵상할 수 있도록, 성당 전체를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삶까지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한편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축성식
1989년 10월 13일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주례로 서울 프리오랏 본원 건물의 성대한 축성식을 했다. 성당 제대에는 남종삼(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수녀원 건물을 검소하게 잘 지었다고 칭찬해 주셨고, 수녀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집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본원 건물을 짓기 위하여 특별히 성 요셉께 기도드리면서 성 요셉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본관을 「요셉 집」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에델트루드 총장 수녀님께서 서울 수녀원에서 주문한 나무로 된 성모상과 성 요셉상, 성 베네딕도상을 독일에서 소포로 보내주셨는데, 이 조각상들은 마침 축성식 전날 서울에 도착하여 본원 축성과 함께 축성을 했다. 그리고 서울 수녀원의 주보 성인인 성녀 겔트루드 조각상도 필리핀에서 주문하여 선물로 보내주셨다. 1960년대부터 서을 프리오랏의 설립을 생각하셨던 에델투르드 총장 수녀는 축성식에 오셔서 축사를 해주셨는데 그 전문을 옮긴다.
경애하는 추기경님, 저의 사랑하는 서울 수녀님들,
큰 기쁨과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저는 오늘 우리의 서울 수녀원,성녀 겔트루드 프리오랏의 본원, 새 수녀원 건물 축성식에 참여합니다. 진심으로 여러분과 함께 주께서 마련해 주신 이 날을 즐거워하며, 무엇보다 먼저, 이 집을 우리에게 주시고, 또 이 집의 축성식에 우리 모두 함께 참석할 수 있게 안배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집은 성교회를 위하여 이루어졌고, 성교회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 집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이 양성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또 그보다 더,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찬 이 순간, 희망 가득히 장래를 기대하는 이 순간에, 저는 오늘의 이 성녀 겔트루드 수녀원이 설립되기까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1965년 봄, 그 당시 서울대교구 노기남 대주교님께서 대구 수녀원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 얼마 전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서독을 방문하셨으며, 그 방문 동안 한국 여성 교육에 헌신할 수 있는 수녀회에 서울에 있는 한 땅을 기증할 것을 계획 하셨습니다. 노 대주교님께서는 벌써부터 포교 베네덕도 수녀회가 서울에 창설될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육여사께서 여성교육에 투신할 수도 단체를 찾고 계심을 아시고, 저희 포교 베네덕도 수녀회 수녀가 직접 육여사와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 총장 겔트루드 링크 수녀(당시 대구 수녀원 수련장), 본원 당가 장 멕틸디스 수녀, 그리고 당시 대구 파티마 병원장이었던 저, 이렇게 셋이 청와대로 육여사를 방문하고, 따뜻한 차 대접을 받으면서 의논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아리랑 언덕 위의 이 땅을 서울시로 부터 불하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때 서울시 부시장님과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 건물이라고는 두 개의 군인 막사뿐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즉시 독일로 갔으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이 아리랑 언덕 위에 가사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육여사께서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가사학교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난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땅의 폭이 좁아서 교육시설 건축 허가를 받을 수 없었고, 이곳에는 수도관도, 전기 시설도, 울타리도, 연결되는 길까지도 없었습니다. 25년 전 이야기지요.
1973년, 우리는 이 땅을 육여사의 원의에 따라 사용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을 진실되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 땅을 보는 그 첫 순간 이곳에 한국의 둘째 수녀원이 설립되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또 이것 역시 노 대주교님의 원의였음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1973년, 벌써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구체적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시는 이곳에 물을 공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물을 파야했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50미터를 파도 물은 없었습니다. 저는 대전에 계시는, 물 줄 기 잘 찾기 로 유명하셨던 프란치스코회 도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아리랑에 오셔서 보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 아래에는 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우물을 파야 합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 1973년 9월 26일 一 한국순교자 축일, 그날 우물을 파시던 분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물, 물!” 이렇게 그분은 전화로 저에게 소리쳤습니다. 물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상지 피정집입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1975년 말, 저는 한국을 떠나야했습니다. 저는 로마에 소임을 받았으며 오늘까지 그곳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한국 수녀님들께서는 건축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주위에는 공장이 없었고, 공장이 없는 곳에 여공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계획과는 달리 성인 교육과 피정을 위한 상지 피정집을 마련하였으며 오늘까지 수녀님들께서 이 사도직에 헌신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둘째 프리오랏을 설립하는 것에 대한 저의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1987년 11월 16일, 72명의 수녀님들로 이 성녀 겔트루드 수녀원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후배 양성을 위한 수련소도 즉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건축의 긴급성을 느꼈지만 그것이 경제적으로 불가능함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한나 수녀님께서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셨을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자금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원과 수련소를 위한 집을 필요로 함을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더욱 잘 아시고, 모든 것을 선처하실 것입니다. 그 분께서 젊은 여성들을 베네딕도 수도삶으로 부르시고, 그분은 당신 자신이 부르신 수도자들이 날마다 당신을 찬미할 수 있는 집, 포교 베네딕도 수도삶의 특은을 따라 한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들을 위한 선교사로서의 수련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집을 주님께서는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까지 제가 여러분에게 드렸던 이 말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믿었고 제가 믿은 바를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모든 것은 꿈같았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일들이 이 하나의 꿈으로 시작됨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의 꿈, 그러나 그 꿈이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일 때, 또 하느님의 뜻을 실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응답이 있을 때, 그것은 현실화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건물을 축성하는 이 순간, 저는 여러분에게 꿈을, 큰 꿈을 가지실 것을 권고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경청하십시오. 그분이 원하시는 꿈만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큰 꿈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 모든 인간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께서는 에페소서 서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태초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그 신비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소유가 되었고, 그분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선택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수녀님들,
오늘 우리가 축성한 이 성당에 하느님 찬미의 노래가 끊어지지 않을 것을 저는 기대합니다. 그 찬미의 노래가 여러분의 일, 말, 여러분 자신의 전부를 통하여 많은 이들에게, 온 세상에 메아리쳐질 것을 저는 기대합니다.
이 새 집, 하느님의 새집을 얻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집은 그분의 집, 그분이 지으신 집입니다. 그분은 감실 안에 묵묵히 계시지만 이곳에 참으로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그분을 중심으로 하여 함께 있도록, 그분의 증거자, 그분의 전달자가 되도록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포교 베네딕도 수녀로서의 성소가 얼마나 귀한지를 잊지 마십시오.
이 성소에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또 아십시오. 우리의 성소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 그 사랑에 매일 진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큰 책임을 내포함을 아십시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 또 앞으로 입회할 모든 분들을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여러분의 주보이신 겔트루드 성녀의 사랑의 돌보심에 맡깁니다.
여러분 모두와 또 이 건축을 도우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많은 성소가 강물처럼 지속되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또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여기 이 수녀원으로부터 강물처럼 젊은 포교 베네딕도 선교사들이 출발할 것을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회의 가장 어린 수녀원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성녀 겔트루드 수녀원을 저는 저의 마음 안에 저의 관심사로 간직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축하드립니다. 저희들의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해주시는 귀빈 여러분, 지극히 공경하는 김 추기경님, 참석하신 많은 신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순간이 있도록 여러 면으로 도와주시고, 또 앞으로 계속 염려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구 프리오랏과 이 하느님의 집을 가능하게 도우신 모든 은인들에게 특별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89. 10. 13
총장 에델트루드 와이스트수녀
서울 프리오랏 재단 설립
서울 프리오랏이 1987년 11월 16일에 독립 수녀원으로 설립되었으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수도회명이 동일한 두 개의 재단법인을 허가할 수 없다고 하여, 서울 프리오랏은 얼마동안 재단법인상으로는 대구 프리오랏의 「재단법인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9년에 다시 서울 프리오랏의 독립 재단법인 설립을 시도하여, 로마 총원의 에델트루드 와이스트 총장수녀의 재단 설립 추천서와, 서울대교구의 김수환 추기경님의 추천서, 대구대교구의 이문희 대주교님의 동의서를 첨부하고, 서울 프리오랏 재단 이사회 회의록과 대구 프리오랏 재단 이사회 회의록, 대구 프리오랏으로부터 받은 서울 프리오랏 소속 부동산 증여 계약서, 서울 프리오랏의 사도직 명세서와 각 사도직의 운영 및 활동 설명서와 증빙 서류 등을 구비하여 1990년 5월,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했다.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한 당시의 당가 이 미쉘 수녀가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한 결과 1990년 7월 2일에 「재단법인 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라는 명칭으로 서울 프리오랏의 독립 재단법인을 허가 해주었다. 이로써 서울 프리오랏은 로마 총원을 중심으로 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독립 프리오랏이면서 독립 재단법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김순복 베다 수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남한정착 65년(1950-2015), 하느님 은총의 길, 65년, 2015.
이숙자 미쉘 수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서울 수녀원 25년사(1987-2012), 2013.
서울 프리오랏 제1차 총회 회의록, 1987.
<나 눔>
1. 서울 프리오랏 설립의 역사를 읽으며 마음에 새기고 싶은 부분을 나누어봅니다.
2. 2025년 우리 수도회 한국진출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023년 한해는 우리 선배 수도자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수녀님 자신에게 우리회 한국진출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 수녀회가 100주년의 의미를 특별히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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