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대학의 허실 … 〈한일고금비교론〉
㉓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승인 2024.06.08
[조동일 칼럼]
*아래 설파 조동일 선생님의 기언은 <대학지성>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대등생극론의 각론 중 하나인 한일관계론의 일부입니다. 아래 제시된 원문주소를 통하면 연재되고 있는 다른 글도 볼 수 있습니다.
2024.6.10.
일본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東京大學(동경대학)은 건물이 낡았다. 駒場(고마바)라는 곳의 예전 第1高等學校(제1고등학교) 건물 교양학부에 2개월, 本鄕(홍고)라는 곳의 예전 東京帝國大學(동경제국대학) 건물 문학부에 1년 가 있어서 사정을 안다. 멀리 제3캠퍼스가 있다는 곳은 가보지 않았다. 새로 지은 곳에 일부만 가서 있게 하고, 전교 이전은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 본부도 있는 本鄕 교사에 주차 공간이 없어 화물수송용 이외에는 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총장 차라는 것도 없다. 택시를 부르면 교문에서 대기한다. 건물을 신축할 자리가 없어 지하로 파고 들어간다. 식당이 지하에 있다. 문학부 도서관도 지하에 자리 잡았다. 옹색하다는 말이 꼭 맞는데도 불편하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교양학부 비교문학과에서는 교수 연구실에 곁방살이를 하라고 해서 자주 나가지 않았다. 문학부에서는 객원교수 연구실을 따로 주어 마음 놓고 이용했는데, 더위가 문제였다. 냉방 시설이 객원교수 연구실에만 있는 것이 특혜라고 했는데, 전기만 넣으면 작동을 멈추었다. 고쳐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창문을 열면 모기가 들어왔다.
다른 연구실은 모두 더 좁고, 옥탑방도 있어 5월이면 40도를 넘는다고 했다. 그래도 견디면서 연구를 하는 인내가 놀라웠다. 학교 바로 앞의 우체국은 공간이 넓고 냉방이 잘 되어 있어 점심 식사 후에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다 같이 국가 예산을 쓰는 공무원인데, 우체국원이 교수보다 우대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경대학에는 책이 아주 많다. 서울대학은 따를 수 없는 정도여서 무척 부러웠다. 그런데 종합목록은 없다. 컴퓨터에서 저자와 서명,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나 학과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대부분의 책을 학과에서 가지고 있거나 관장하는데, 학과마다 분류 방식이 다르다. 찾아가서 하나씩 훑어보아야 필요한 책을 찾아낼 수 있다. 그래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다른 학과의 책은 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볼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도서관 책을 열심히 찾아 이용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광경을 소개한다. 만화를 수십 권 가져와 포개 놓고 하나씩 애독하는 학생들을 동경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만화 보는 취미를 입시 때문에 살리지 못한 것이 원통해 대학에 입학하고서 한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문학부 도서관에 여러 학과 책이 모여 있고, 복사기가 한 대 있었다. 복사기를 이용하기 위해 기다린 적은 없었다. 자기 책이 많아 도서관 책이 소용없는 것은 아니다. 집이 좁기 때문에도 책을 많이 가질 수 없다. 입시 경쟁에서 이기느라고 공부할 마음이 없어졌다. 동경대학에 입학한 수재는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교수는 연구실에 있는 학교 책만 가지고 평생 우려먹는 것 같았다.
나는 여러 도서관, 많은 학과를 찾아다니면서,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이 책을 찾고 읽고, 복사하고 대출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책이 모자라는 나라에서 학문을 하느라고 잔뜩 굶주리다가 살판을 만났기 때문이다. 일본 학생은 물론 교수도 아무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책이 많으면 의욕이 줄어들어, 최소한의 독서만 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동경대학은 학사과정 졸업생만 眞骨(진골)이고, 석사나 박사를 한 사람은 지체가 형편없다. 동창회를 學士會(학사회)라고 해서 진골에게만 회원 자격을 준다. 학사 논문을 쓰느라고 졸업을 몇 년 늦추는 일이 흔하다. 대학원은 유명무실하다. 일단 대학원에 들어갔다가 대학의 전임이 되어 중퇴하는 것이 수재의 표준 이력이다. 자기 소개서에 “대학원 중퇴”를 자랑스럽게 쓴다.
수재니 천재나 하는 말을 자주 쓰면서 칭찬하는 것은 일본의 풍조이다. 조선 삼대 천재가 누구누구라는 말을 전에 한 것은 일본의 풍조를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 옛 사람들은 才勝薄德(재승박덕)을 경계했다. 재주는 지나치면 덕이 모자라게 마련이므로 칭찬하지 않고 눌러두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재주를 지나치게 칭찬한다. 남들은 입시학원 입학을 위해 재수를 하는데, 제때 동경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으면 수재로 공인된다. 학사과정에서 놀라운 재능을 나타내면 학사만인데도 일거에 조교수로 발탁된다. 그러면 선배들까지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장차 주군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의 등장을 경축한다. 대학원에 입학하면 수재가 아니라고 자인하는 것이다. 대학원을 중퇴하지도 않고, 과정을 다 이수한 다음 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둔재라는 증거이다.
최근 5년간 동경대학 박사학위 취득자의 진로를 알리는 자료를 보니 박사가 되어 교수가 된 사람들은 한국인뿐이고, 일본인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박사 학위가 없으면 교수 공채에 응모하지도 못해, 유학생들이 어떻게 하든 자격을 따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일본의 교수는 박사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서 학위를 주지 않아 유학생의 신세를 망치고도 잘못한 줄 모른다.
학사 논문을 쓰느라고 졸업을 몇 년 늦추는 일이 흔하다. 그래 보았자 학사이다. 온 세계의 대학이 박사과정까지 연장되어 9년제로 되고 있는데, 일본의 대학은 여전히 4년제인 것을 일본 정부에서 안타깝게 여겨, 동경대학을 대학원대학으로 하면 총 예산을 30% 증액하겠다고 제안했다. 교수회에서 논란 끝에 투표해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교수회가 결의기관이어서 결론을 내는 것이 부럽다. 이 말을 삽입하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에는 전체교수회가 없고, 임의 단체인 교수협의회라는 것만 있다. 단과대학 교수회는 있으나 의결권이 없다. 그래서 큰 문제가 생기면 와글와글 떠들고, 교수협의회가 앞장서서 여론을 수렴하고 데모를 하기까지 한다. 민주적 해결의 방법은 없어, 총장이 정부 시키는 대로 하고 욕 분배도 뜻대로 하지 못한다.
일본의 대학에서는 교수회를 야단스럽게 한다. 강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 문학부 교수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이런저런 의논을 하다가 3시가 되면 조교수는 내보내고, 교수들만 남아 안건에 대한 결의를 한다고 했다. 연말이 되어 내가 한국에 가서 과세를 하고 오겠다고 신청한 것도 교수회의 결의를 거쳐 허락되는 사안이었다.
동경대학이 교수회의 결의를 거쳐 대학원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모든 교수를 동경대학대학원 교수로 다시 발령했다. 학사과정에는 교수가 없어 대학원교수가 대리로 근무하는 이상한 꼴이 되었다. 그래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돈만 받고 다른 것은 그대로이다. 학사과정 강의와 논문 지도를 교수의 임무로 삼고, 대학원은 외면한다. 수재를 가르치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둔재는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동경대학에 있을 때 서울대학교에서 동경대학의 개혁을 알아보려는 위원들이 왔다. 한참 동안 묻고 대답해도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곁에 있는 내가 말했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지요?” 그랬더니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하고, 밖으로 나와 내막을 설명했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대등의 길>, <한일 학문의 역전>. <국문학의 자각 확대>, <우리 옛글의 놀라움>,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2020년 이후 저서 : <대등의 길>(2024), <한일 학문의 역전>(2023), <국문학의 자각 확대>(2022), <우리 옛글의 놀라움>(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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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경대학의 허와 실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