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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중앙의 알타이 및 동의 요하문명
1.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알타이문명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에 서아시아지역(흑해 연안.아르메니아.코카서스」이란 지역)에서 출현한 청동기문화로부터의 영향 하에서 서남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3500년경에 이르러 북쪽 인근 산악지대로부터 수메르인이 그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청동기문화가 그곳으로 유입되어 들어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나오기 시작한 문명이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지역의 북부와 연결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코카서스 지역, 흑해와 카스피 해의 북안, 카스피 해의 동안 등으로부터 출현한 초기 청동기문화는 역시 선고대의 동서교통로로 알려진 초원로를 따라 동진해 나가 중앙아시아의 동북지역의 알타이지역과 그 동쪽의 몽골 북방으로 전파해나갔다.
그래서 그것은 알타이지역의 하카시아, 미누신스크 분지 등의 지역에서 기원전 3000∼2000년경에 금석병용기문화의 형태를 취한 아파나시에보(Afanasievo)문화라고 하는 초기 청동기문화를 출현시켰다. 투르크족의 선조는 흑해 북안에서 알타이지역 사이에서 형성된 바로 이아파나시에보문화라고 하는 초기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어 나온 종족으로 알려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후 알타이지역에는 역시 서쪽으로부터 기원전 2000년경에 안드로노보(Andronovo) 청동기문화가 전파해 들어갔고, 또 그 외래문화와 거의 동시에 그 지역의 내부로부터도 카라콜(Karakol)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어 나왔다. 그로부터 500여 년 후에는 그러한 내외의 청동기문화들이 기초가 되어 카라수크(karasuk)문화 등과 같은 청동기문화들이 형성되어 나왔던 것이다.
2. 고대 알타이문명과 요하문명 및 황하문명
유아사아의 북부를 가로지르는 초원로의 중간에 위치한 알타이지역은 동서문화의 충돌지이다. 바로 이 지역에서 고대에 금속기문화가 출현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고대 알타이문명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에서 그것과 관련해 논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알타이 청동기문화가 일찍이 그 지역의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알타이산맥을 타고 몽골고원으로 전파되어 고비사막을 통해 초원로의 종착지 요하 유역에 도착해 그곳에서 동아시아지역에서 최초로 요하문명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이다. 요하문명의 기초가 되었던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에서의 이 하가점하층문화(2500∼1300, BC)는 기본적으로 전기 청동기 문화로 파악되고 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경우처럼 자생적으로 출현된 것이 아니고 알타이문명의 기초를 세웠던 아파나시에보 초기 청동기문화로부터의 영향 하에서 기원전 2500∼2100년경부터 형성되어 나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알타이문명과 요하문명과의 이러한 관련성에 대해 러시아의 고고학자 I.V.몰로딘(Molodin)은「이 문화의 유적들이 몽골의 서부지역과 중국의 서북지역에서도 확인되어 (알타이문명의 기초를 이룬) 아파나시에보문화가 이들 지역에도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서의 I.V.몰로딘이 말하고 있는 아파나시에보 문화란 흑해.카스피 해의 북안으로부터 알타이지역으로 전파에 나와 알타이지역 화된 아파나시에보 문화를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들에 덧붙여 필자가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확산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로서 아파나시에보문화를 일으킨 자들이 다름 아닌 바로 이 유라시아대륙에서 최초로 출현한 이동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이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기원전 1200년대에 출현한 철기문명을 배경으로 형성된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으로 부상한 투르크족의 선조가 형성되어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또 현재 중국 고고학계로부터 파악된 황하문명의 실체는 그 최고(最古)의 것으로 황하유역에 있는 하남성(河南省) 언사현(偃師縣) 이리두(李里頭) 유적지로 이야기되고 있다.바로 이것이 하왕조(夏王朝, 2070∼1550경, BC)의 수도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 유적지 등에서 형성되었던 문화도 기원전 2000년경 전후에 초기 요하문명의 영향 하에서 형성되어 나왔던 것으로 고찰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 필자가 청동기문화의 형성시점에 주목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고대문명이 청동기문화의 형성을 계기로 해서 출현하게 되었고, 또 그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어 나왔다는 일반적 견해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청동기문화의 연구자들은 청동기문화의 형성과정을 논할 때 그것을 초기 청동기문화(금석병용기문화)시대와 청동기시대로 양분해 파악한다. 이 초기 청동기시대란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1) 외부로부터 유입된 청동기들이 주로 사용되거나, (2) 구리와 주석이 일정한 비율로 합금 처리되어 행해지는 청동야금술이 개발되어 그것에 의해 다량의 청동이 생산되기 이전 단계에서 주로 구리로 만들어진 기물들이 사용되던 시기를 가리킨다.
이 단계에서의 정치적 형태는 신석기시대에 형성되어 나왔던 부족국가의 형태로부터 탈피해 나와 주로 부족연맹국가의 형태가 취해졌던 것으로 고찰된다.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청동기 중에서 최고(最古)의 것은 기원전 약 3000년의 것으로 중원지역의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연한 구리 파편 조각의 형태인 것으로 고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청동기문화의 출현을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 취해진다. 또 중국에서의 청동기에 관한 문헌상의 최고(最古)의 기록은 『사기』(史記)의.본기 오제본기」(本紀五帝本紀)에서 황제(黃帝)가「창과 방패 등과 같은 무기 사용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했다」라든가, 동서(同書)의「효무본기」(孝武本紀)에서「황제가 보배로운 솥 세 개를 만들어 천지인(天地人)을 상징케 했다.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황제시대에 청동기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서, 현재 중국에서의 초기 청동기시대는 이상과 같은 것들에 따라 기원전 3000∼2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앙소 유적지의 그것은 기껏 해 봐야 초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의 본격적 청동기문화 시대의 돌입시점은 하왕조가 출현한 기원전 2000년경으로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홍산문화의 발굴을 계기로 해서 쑤빙치(蘇秉琦)를 비롯한 중국학자들의 경우처럼 중국의 학자들은「중국문명의 기원이 종전의 4000년 이전의 하대(夏代)에서 일거에 1000년 더 위로 올라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또 홍산문화의 유물들에 근거해, 그간 황하유역의 청동기문화를 중심으로 해서 중국의 청동기시대를「초기 청동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양분해 이해해 왔던 입장을 취하하고, 황하유역의 청동기문화를 요하유역의 청동기문화에 포함하여 중국의 청동기시대를「전기청동기시대와 후기청동기시대」로 양분해 파악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기원전 2500∼기원전 1300년에 형성된 요하의 하가점하층문화를 전기청동기문화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3. 요하문명의 주역
중국의 고고학자들에게서의「전기청동기시대.란 외부로부터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청동기의 야금술을 개발해 그것으로 청동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시기라든가, 또는 외부로부터 청동기의 야금술이 전해져 그것으로 청동기를 제조해 가기 시작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청동기의 야금술이 내부로부터 개발되었던 외부로부터 전해졌던 간에 그것이 제조되어 사용됨에 따라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적 구조는 자연히 바뀌게 된다. 그런데 어느 문명권 든 간에 거의 모든 문명권은 그것의 사용을 계기로 부족차원의 국가가 부족연맹차원의 국가로 전환해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하유역에서 기원전 2500년경에 전기청동기문화가 형성되어 나왔다고 한다면, 그 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그 이전 그곳의 홍산 신석기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어 있었던 부족국가들이 부족 연맹국으로 전환해 나왔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당시 요하유역에서 형성되어 나온 부족 연맹국이란 과연 어떤 국가였던 것인가?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10년 전인 1990년 당시 북경대 교수였던 쑤빙치(蘇秉琦, 1909.1997)는 중국문명의 기원에 대한 논의를 위해 중국에서의 국가형성단계를「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이라고 하는 3단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의 제자 귀다순(郭大順, 1938.) 등은 그의 견해를 기초로 해서 오제(五帝)시대의 전기(기원전 3500.2500년경)의 것으로 고찰되는 요녕성(遼寧省) 서부 우하량(牛河梁) 조양시(朝陽市) 건평현(建平縣)과 능원시(凌源市)의 접경지역에 위치하는 우하량 유적을 구성하는 것들, 예컨대 적석총들(길이 20.30m), 거대 건축물 유구(지름 60.100m), 그 중앙에 산재한 동(銅)을 제련한 도가니 파편들, 여신묘(女神廟) 등을 근거로 해서 그 지역 일대에「고국」(古國) 단계의 왕국이 건설되었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기원전 2500년경이 그 홍산문화의 절정기라면서 그 후 그 문화가 신석기문화의 말기에서 전기청동기문화의 시대로 넘어온 과도기였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들은 그 유적군을 남긴 주체가「동북지역의 어로.수렵문화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로.수렵민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입장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입장들을 근거로 해서 요하유역에서 형성된 그러한 홍산문화의 유적들로부터 중국문화의 기원을 찾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본연구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요하문명이 출현한 지역은 SVO 형의 언어구조를 취하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인의 영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지역에서 발생한 요하문화의 주류는 요하지역의 동쪽으로 이동해 현재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꽃피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족(漢族)을 남방의 농경민과 북방의 유목민과의 융합형으로 볼 수 있다면, 한족(韓族)의 경우는 반농반목의 예족과 어로.수렵을 주로 했던 맥족과의 융합형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홍산문화는 예맥족이 일으킨 문화였고, 예맥족에 의해 세워진 고조선은 홍산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건설된 부족연맹국 수준의 정치적 집단, 즉 쑤빙치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고국」(古國) 단계의 정치적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 볼 때 바로이 우하량 유적이 고조선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은 요하문명의 영향 하에서 그 요하문명보다 후에 출현해 그 문명보다 더 발달한 황하문명의 그늘에 묻혀 그것의 성립배경이 제대로 규명되어 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식으로 황하문명에 묻혀있는 고조선의 실체를 파헤쳐 낼 수 있을까? 우리는 고조선의 실체 규명작업의 하나로 먼저 다각적 차원에서의 고조선의 명칭에 대한 체계적 고찰이 요구된다.
명칭 고조선(古朝鮮)과「조선」
1. 한국 문헌에서의 고조선 이란 명칭과 그 의미
고조선이란 명칭은 한국 측의 문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삼국유사』(1285)이다. 이 문헌 속의「고조선 단군왕검」(古朝鮮 檀君王儉)이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의 고조선(古朝鮮)이란「위만조선」(衛滿朝鮮)보다 더 먼저 존재했던 「조선」의 의미로 쓰인 말이다. 한(漢)제국이 일어나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결심하고, 무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떠나 동쪽의 조선지역으로 도망쳐나가, 그곳에서 결국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5년에 나라를 세웠다.『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1206∼1289)은 그 나라를「위만조선」이라 말하고, 그「위만조선」 보다 먼저 그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를 고조선이라 칭했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독자들로 하여금「위만조선」보다 먼저 그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을「단군조선」과「기자조선」으로 양분시켜 파악해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우선「고조선 단군왕검」과「위만조선」이란 명칭들을 병렬시켜 놓음으로써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세웠다고 하는 나라를「단군조선」로 지칭케 할 수 있는 입장을 제시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기원전 1122년에 주(周)의 무왕(武王)이「단군조선」지역에 기자(箕子)를 봉해 세웠다는 나라를「기자조선」이라 지칭해 볼 수 있는 시각도 제시했다. 그의 그러한 입장은 국가의 명칭이 건립자의 이름에 따라 지칭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일연 자신이 후세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파악할 수 있는 입장을 제시했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자신이 그것들을 그런 식으로 명명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삼국유사』(1285)보다 2년 늦게 출판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단군왕검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단군조선」이「전기조선」(前期朝鮮)으로, 기자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기자조선」이「후기조선」(後期朝鮮)으로 각각 양분되어 파악되는데, 이러한 양분법 또한 일연이 제시한 그러한 시각에 기초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적잖은 한국의 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 근거하여 시기적으로 위만조선에 대응되는 고조선을 둘로 나누어 파악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중국 측 학자들만이 인정하는「기자조선」의 실체를 대다수의 한국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에도 적잖은 한국학자들이 일연이 최초로 제시한「고조선」라는 나라를 논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는 한반도 차원이나 황하문명차원으로는 결코 풀릴 수 없는 깊은 역사적 현실이 내재해 있고, 또 그것에는 바로 요하문명, 알타이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등도 연동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일연은 이 책에서「주 무왕(周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 BC1122)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갔다가, 후에 다시 아사달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어 1908년을 살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일연은「기자」의 실체를 인정하고「기자」라는 말은 직접 사용했지만「기자조선」이란 말은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아마도 일연 자신이 단군의 고조선 땅에서 기자가 세웠다는「기자조선」을 고조선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기자가 패망한 상왕조와 문화적.종족적 연대가 강했던 조선지역 출신의 후예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고려해 본다고 한다면, 조선지역에서 세웠다고 하는「기자조선」이 그로부터 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세운「단군조선」과 굳이 구별될 필요성이 없다는 인식이 일연에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우리는 결코 배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는 연나라 사람인 위만에 의해 세워진「위만조선」과의 대응관계를 고려한 나머지「기자조선」이란 말을 쓰지 않았었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 취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자를 원래「단군조선」 출신의 후예로 봐야 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별도로, 단군왕검과 위만이 분명「조선」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단군 조선」..위만 조선」이란 말들이 쓰이게 되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와 마찬가지로 기자도 조선지역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단군조선」이나「위만조선」에 대응되어「기자조선」이란 말이 쓰일 수 있다는 입장도 사실상 후대 학자들에 의해 취해져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조선」이란 나라를 세운 그 지역이 언제부터「조선」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또 그 지역이 어떻게「조선」으로 불게 되었던 것인가의 문제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문제는 다음 단계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일연을 비롯한 그들의 그러한 입장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 것인가의 문제부터 고찰하기로 한다.
현재 한국인들에게는 고조선이란 나라가 중국 연나라 사람 위만이 세운「위만 조선」보다 훨씬 이전에 한국인의 조상 단군왕검에 의해 조선지역에 세워진 나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중원(中原)을 자신들의 정치무대로 해서 건설한 주(周).한(漢)을 주축으로 해서 형성된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위만 조선」보다 먼저 세워진 고조선을「단군 조선」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기자조선」으로만 봐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들은「단군 조선」의 실체 자체를 무시하고「기자조선」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에서 한(韓)민족 측이 말하는 고조선과 한(漢)민족 측이 말하는「조선」이라고 하는 두「조선」들이 가리키는 말들의 의미들을 더 명확히 파악해본다는 의미에서 현재 이 분야에서 제기된「기자조선」에 대한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고조선 단군왕검」부분에서「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周)나라가 그곳으로 망명해온 기자를 (제후로) 봉함에 따라 그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이 되었다」라는 『당서』의「배구전」(裵矩傳)의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이 경우 중원 중심의 시각에서 쓰인 『당서』에는 북방민족 중심의 시각에서 쓰인 『위서』 속에 있었다고 하는「고조선 단군왕검」과 같은 내용은 결코 들어있을 리 없다. 따라서 『당서』의 관점에서 말할 것 같으면,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 즉 고조선이란「기자조선」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의 일연이나 『위서』의 위수는 북방민족 중심의 시각에서「조선」을 보려 하는 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나 『당서』의 경우는 중원 중심의 차원에서「조선」을 보려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인식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기 북방민족들의 입장은「조선」의 시작을 북방민족의 일원인 한국인의 조상으로 알려진「단군왕검」에서부터 보려는 것이었고, 중원민족 중심은 중원에서 행해지는 정치의 핵심적 세력들과 깊은 유대관계가 있던 기자로부터 보려 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은 상 왕조보다 6∼7세기 먼저 요하의 요서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어 나왔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래서 그 세력은 요하의 남부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었는데, 그 세력의 일파가 요서지방에서 황하하류로 남하해 황하를 타고 중원지역으로 나가, 그 중원지역에 있던 하 왕조를 기원전 1700년경에 무너트리고 황하 중.하류의 하남성(河南省) 일대를 배경으로 해서 상(商)왕조를 건설했던 것이다.
한편 서역의 메소포타미아지역과 서아시아의 세계는 기원전 13세기 이후 소아시아지역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지역으로 전파된 철기문화에 의해 통일되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재차 종족들 간의 지속적 투쟁들이 야기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메소포타미아지역과 그 동부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지역으로 인적 이동이 일어났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철기문화가 메소포타미아지역으로부터 동아시아 쪽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상 왕조는 그러한 철기문화의 전파를 계기로 해서 황하의 상.중류 지역에서 급속히 성장해 나온 주(周)왕조에 의해 기원전 1122년경에 멸망했다. 그러자 상왕조의 일부는 그들의 원향이라 할 수 있는 요하의 요서지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의 그러한 “귀향”은 중원을 장악한 주의 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이 당시 취하고 있던 문화가 중원의 문화였었기 때문에 중원문화와 중원세력의 북방으로의 확장이라는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들의 그러한 “귀향”은 그러한 입장에서 해석됨에 따라 요하지역에서의「기자조선」의 건립이라는 것도 그러한 인식하에서 기록되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측의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전국(戰國)시대(403.221,BC) 이후 중국측이 줄곧 주장해온「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조원진은 한국에서의「기자조선」 연구의 성과를 정리하고서「결국 문헌자료를 통한 기자조선 연구는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기자조선 연구는 서한시대 이후 후대에 꾸며졌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가 취하는 일반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측의「기자조선」에 관한 문헌들, 예컨대 『상서대전』(尙書大傳) 등에「주의 무왕이 조선으로 넘어간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야말로 중국이 스스로 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제시하면서,「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전설 자체를 보면 이미 그 표현상의 논리상으로 기자가 오기 전에 이미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기자조선이 있기 전에 있었던 고조선의 존재가 확인.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지적은 온당하다. 그러나 중국 측의 학자들은 중국 측 자료 속의「조선」은「기자조선」이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지명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의 고조선 연구의 대표적 학자로 손꼽히는 김정배의 경우 이병도의 입장을 이어받아「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병도가「기자조선」의「존속기간만은 인정해서 역사의 기틀을 살린 것은 올바른 견해.를 제시했다면서「기자조선」이 존속했었다고 하는 그 기간에「예맥조선」이라 칭할 수 있는 국가가 그 요하지역에 존재했었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고조선의 명칭 및 존속기간과 관련해「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라고 하는「삼조선」설에 대해서도「단군조선」-.예맥조선」-.위만조선」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그는「예맥조선」의 시작을 중국의 상(商)과 주(周)의 교체기인 기원전 12세기로 파악하고 있다. 그의 그러한 주장은「고고학의 편년체계.를 논거로 하고 있다. 기원전 13.12세기경에 북방으로부터 요하지역에 청동기문화가 전파되어 그것을 기초로 해서「예맥조선」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예맥조선」이라고 하는 고대국가가 존재했던 요하지역에서 기원전 9∼8세기에 중원식과는 다른 형태의 청동검, 즉 중국에서는 그것을「요녕식곡인청동단검」(遼寧式曲刃靑銅短劍)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비파형청동검」으로 통칭하는 청동검이 만들어졌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것들의 발견지가 당시 예맥족들의 활동지였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 비파형청동검을 비롯한 당시 그 지역의 청동문화가 예맥족이 일으킨 것이라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 측 학자들이 비파형청동검을 동호족(또는 산융족)이 일으킨 하가점상층문화의 유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김정배는「하가점상층문화에서 비파형청동검이 나왔다고 해서 비파형청동검과 관련된 유적.유물이 모두 하가점상층문화의 유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의 그러한 입장은 비파형청동검이 하가점상층문화의 유물일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가 그러한 입장을 취한 것은「하가점상층문화의 담당자는 동호족 (또는 산융)이고., 또「비파형청동검은 예맥족이 남긴 문화」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실상 중국의 린윈(林澐)이나 궈다순(郭大順) 등과 같은 학자들도「비파형청동문화가 예맥과 관련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선 그러한 비파형청동검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어 나왔으며, 또 그것은 하가점상층문화와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형성되어 나오는 과정에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끼쳤을 것임에 틀림없는 하가점하층문화의 담당자는 과연 누구였느냐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그래야만 그가「삼조선」 설의 논거로 제시한「고고학의 편년체계.가 그 논거로서 객관성이 제대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 취해지기 때문이다. 김정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원전 13∼12세기에 요하지역이나 한반도 북방 지역에 도래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해서 예맥족이「예맥조선」을 설립했다는 입장을 명확히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그러한 입장이란 그러한 청동기문화의 도래를 계기로 해서, 요하지역 혹은 한반도 북방에 존재했던 신석기문화를 기초로 해서 설립된「단군조선」이 소멸되고 그 잔존 세력을 기반으로 해서 예맥족이「예맥조선」을 건설했다는 입장일 수 있다. 또 그의 그러한 입장은「단군조선」이 예맥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입장일 수 있다. 따라서 김정배가 말하는「예맥조선」이 예맥족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면「단군조선」은 어떤 종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는가의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도 고찰해볼 필요성이 있다는 입장이 취해진다.
김정배는「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에서 한국민족의 기원을「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청동기시대의 예맥족」(예족은「동북.동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맥족은 서북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으로부터 찾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요하지역이나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의 신석기시대에「고아시아족.에 의해「단군조선」이건설되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고아시아족」이란 알타이지역의 북방을 흐르는 예니세이 강 유역에서 즐문토기(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 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그들이 요하지역으로 들어와「단군조선」을 설립했다고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동북공정의 자료들은 고조선이 건설된 요하지역에 이미 기원전 2500년경에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어 나왔다는 입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찰해 볼 때, 우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 고대 알타이문명 등과 연결시켜「단군조선」을 논할 때만이「단군조선」의 개념이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는 입장이 취해지는 것이다.
2. 중국 문헌에서의「조선」(朝鮮)의 명칭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문헌에는 고조선이란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문헌『삼국유사』속의 고조선은 중국 측 자료들이 말하는「조선」, 즉「기자조선」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단군조선」까지를 가리킨다. 우선 중국 측 자료들이 제시하는「기자조선」의 출현경위는 다음과 같이 파악될 수 있다.
황하문명보다 먼저 일어난 북방의 요하문명은 화북지역과 산동지역 등을 통해 중원지역으로 전파해 내려가 그곳의 황하 중.하류 지역에서 상(商)을 출현시켰다. 한편 하왕조의 성립(기원전 2070년경)이전부터 남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 현재의 영하회족(寧夏回族)자치구와 내몽고자치구 등으로 이어지는 오아시스로를 통해 황하 상.중류(北河.西河)를 타고 내려와 중원지역으로 전파해 나왔다. 그래서 그것은 기원전 3000천년대말에는 하왕조를 건설하고 기원전 2000년대 말에는 그곳에서 상을 멸망시키고 주(周:기원전 1122년 성립))를 출현시켰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상과 주가 교체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중원지역의 상 세력의 일부가 요하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중원의 서북방 지역의 정치적 세력과 중원의 주와의 관계가 모색되는 과정에서 당시 요하지역의 남단에는 그 지역으로 밀려난 구(舊) 상 세력을 중심으로 정치적 세력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다. 중국 측 자료들이 말하는「기자조선」이 바로 그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제는 설혹 당시 그러한 정치적 세력이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그 세력이 요하의 남단에 출현하기 이전에 요하지역에 존재해 있었던 고조선(단군조선)으로서는 중원의 제후국(諸侯國)로 존재하게 될 정치적 단체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동안 고조선의 존재를 가리원온「기자조선」에 관해서부터 한국 측 연구자들의 시각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특히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해서「조선」을 보려고 하는 연구자들은 분명「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 우선「기자」가 실존 인물이었는가의 문제부터 고찰해 보기로 한다. 『사기 권 38』, 『상서』(商書)의「미자」(微子)편, 『주서』(周書)의「홍범」(洪範) 등을 자세하게 고찰해보면, 우리는 그가 실존했었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상대(商代)에 은(殷)의 최후의 왕 주(紂, 사망 기원전 1027)의 숙부로 중원의 산서성(山西省) 지역에 위치한 기국(箕國)이라고 하는 한 제후국(諸侯國)의 제후로 봉(封)해졌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이유로「기」(箕)는 봉국(封國)의 이름을 가리키고「자」(子)는 작위를 가리켜「기자」(箕子)라 불리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 정도까지는 사실로 받아들여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서대전』(尙書大傳) 등에는 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상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주색(酒色)에 빠져 은의 정치가 흔들리자 측근들이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자는 서형(庶兄) 비간(比干)이 간언에 나섰다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껴 광인 행세를 하다가 노비가 되었다. 상을 멸망시킨 주(周)의 무왕(武王)은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노비로부터 석방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연산산록 너머의 조선으로 이주해 나가 살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그를 그 지역의 제후로 봉하여 그 지역을 다스리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 왕조는 구 상나라의 북방에 연(燕)이란 제후국을 두게 됨에 따라 연은 연산 산록을 경계로 그 이북의 고조선과 남북으로 대치해가게 되었고, 또 한편 중원에 있던 구 상왕조의 일파는 그들의 원향이었던 연산산록 이북의 고조선국의 영토였던 조선지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주왕조의 제후국인 연과는 달리 고조선의 일원으로 존재해 가게 되었다. 중국의 고대사 연구자들은 그 망명자들의 집단을 연산 산록 이북의 고조선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파악해 그 집단이 그 조선지역을 대표했다는 의미로서 그 집단을「기자조선」이라 불러왔다.
필자는 중국 측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로 그러한 기자동래설과 같은 것에 찬성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필자는 주의 무왕이 조선으로 이주해간 기자를 봉하게 됨에 따라 요하지역의 조선에「기자조선」이 설립되었다는 중국 측의 입장에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상.주의 교차기에 기자가 당시 적잖은 상의 유민(流民)들과 함께 연산 산록을 넘어 그들의 선조의 땅으로 알려진 요하지역의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해 나가 그곳에서의 집단적 생활을 영위해 갔을 가능성까지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주가 상의 유민을 데리고 고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를 제후직을 하사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입장은 취해진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조선 지역의 원소유자였던 고조선(단군조선)이 주의 그러한 정치적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기자를 비롯한 상의 유민들이 설혹 요하지역으로의 이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천년이상 요하지역을 차지했던 고조선(단군조선)이 그 유민집단에게 그토록 쉽사리 자신들의 영토를 넘겨줄 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유민집단의 요하지역으로의 유입이 오히려 고조선(단군조선)의 국세를 한층 더 강화시켰고, 또 그 수명을 더 연장해 나갔을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 취해지는 것이다. 김정배는「예맥조선」의 건립을 주의 건립 시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하지역의 남단에서「기자조선」이 건립되자 그것에 자극을 받아 요하유역에서「단군조선」이「예맥조선」으로 전환해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 취해지는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입장은「단군조선」의 건국 주체가 김정배가 말하는「예맥조선」의 건립 주체의 선조였을 것이라는 인식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연의 입장대로 고조선 이란 어디까지나「위만조선」에 대응하는 말로서「단군조선」과「예맥조선」의 공통분모로서의「조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김정배는「준왕은 위만에게 쫓겨난 기자조선(예맥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 말은 그가「기자조선」=「예맥조선」로 보고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실체는 하나인데 이름은 둘이라는 말이다. 그의 기본적 입장은 중국 측이 말하는「기자조선」은 처음서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우리의 예맥조선을 중국 측에서「기자조선」으로 불러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입장에 대해 필자는 중국 측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기자조선」의 실체도 인정하고「단군조선」을 배경으로 해서 기원전 12세기경에 출현 했다고 하는 김정배의「예맥조선」의 실체도 모두 다 인정한다. 또 필자는「단군조선」이「예맥조선」의 선조들이 설립한 왕국이라는 입장을 취하고,「고조선」이「위만조선」이전의「조선」, 즉「단군조선」과 주의 건립이후에 출현한「예맥조선」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필자는 주왕조의 건립과정에서 중원의 구 상왕조의 일파들이 자신들의 옛 조상의 원향을 찾아 고조선의 영토로 들어가 그 지역의 일부를 차지해 살게 되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그들이 고조선이 차지해온 요하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적 단체까지는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기자가 고조선 지역으로 넘어가 정착한 곳은 연산 산록 위쪽의 난하 하류지역, 즉 현재 옛 고죽국(孤竹國) 유적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요하지역에서의 이 지역은 요하지역의 최남단 지역이다.「기자조선」의 존재를 주장하는 중국 측 학자들은 기자가 고조선에 들어가 살게 되자, 주의 무왕이 태공(太公)을 제(齊)에 봉하고 또 소공(召公)을 연(燕)에 봉했을 때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기 때문에 조선이 당시 주의 번국(藩國)의 하나였다」는 것이고, 그러했기 때문에 그가「고조선에 들어가 고조선의 주류가 되었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이러한 논리를 사실로 받아들여 본다 하더라도, 또 상왕조 멸망 이후 설혹 기자가 연산 산록 이북의 고조선지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고조선의 영토였던 요하지역이 하루아침에 그들의 것이 되었다고 한국 측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은 중국의 연구자들에 의해「기자조선」이라 불리는 그 망명 집단이 요하지역에서 1천 년 이상 존재해 있던 고조선을 누르고 하루아침에 그 지역을 대표해 갈 수 있는 정치적 단체가 결코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기자의 망명지가 요하지역의 서남단이었다고 하는 것은 기자가 그곳에서 건설했다고 하는「기자조선」이 요하지역 내의 정치적 집단들 전체를 대표해갈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그의 망명지가 연과 떨어져 있는 요서지역의 중앙이나 혹은 요하 유역의 중앙이었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 고대 중국의 어떤 문헌들에도 기자가 고조선지역에 들어가 그곳에서 그 이전에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조선과 같은 어떤 정치적 세력 등과 대결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설혹 기자가 고조선의 영토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았고 또 주의 무왕으로부터 요하지역의 담당 책임자로 봉해져 그곳에서 정치적 활동을 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 난하 하류 지역에는 그 동안 그 지역을 지배해 갔던 정치적 단체가 존재했었던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단체는 어떤 존재였던 것인가?「기자조선」의 존재를 주장하는 중국 측 연구자들도 기자가 그곳으로 이주해 가기 전부터 즉 연산산록 이북 난하 하류의 노령현(갈석산이 있는 지역)에「조선」이라 불리던 지역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고죽국」(孤竹國) 이라 불리는 국가가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연은『삼국유사』를 통해「당나라의 『배구전』(裴矩傳)에 전하기를 고려(高麗)는 원래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함으로써 조선(朝鮮)이라 하였다.」(여기에서의「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키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구당서』의「배구전」(권 63)에도「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서 주가 기자를 봉했었고, 한나라는 이곳에 현도.낙랑.대방을 설치했다.」라고 적혀져있다. 이러한 기록들에 의거해 볼 때 기자가 그 곳의 제후로 봉해지지 이전 그곳에는「고죽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했었다는 입장을 취해볼 수 있고, 기자가 주나라에 의해 그곳의 제후로 봉해지자「고죽국」의 왕실이 그의 정치적 중심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죽국의 왕은 그의 정치적 활동지를 어디로 옮겼던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삼국유사』의「고조선 단군왕검」속의 문구,「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기원전 1122)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갔다」는 문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현재 우리에게 추정되는「장당경」(藏唐京)이라고 하는 장소는 기자조선의 정치적 무대로부터 동북으로 700 여 km 떨어진 지역인, 대릉하 중류와 요하 중류의 중간지점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고조선 단군왕검」에 의하면「단군조선」은 그곳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120km 떨어진 조양으로 천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양은「단군조선」이 그의 정치적 무대를 난하 하류로 옮기기 이전에「단군조선」의 도읍지였던 지역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예맥조선」이 다름 아닌 바로 이 장당경, 조양 등으로 천도한「고죽국」을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어 나온 국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기자조선」 설립 이후의 요하지역에는 요서의 서남단지역에「기자조선」이 존재해 있었고, 요하의 중심부에「고죽국」의 한 세력을 배경으로 해서 출현한「예맥조선」이 존재 있었다는 입장이 취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구당서』의「배구전. 등에서는「고구려가 원래 고죽국이었다.」고 하는 말의 근거는 무엇인가? 『관자』의「小匡」편에 기원전 664년 제환공이 진공을 구하면서 적 왕을 사로잡고 호맥(胡貊)을 패퇴시켜 기마오랑캐를 비로소 복종시켰다는 문장이 있다. 중국의 역사가들이 이때「고죽국」이 멸망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고죽국」의 유민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우리가 요하 동북지역에서 기원전 7세기경에 부여가 출현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부여의 출현은「고죽국」의 동북지역으로의 이동으로 인한 것을 추정해보지 않을 수 없다. 또 고구려가 요하 북쪽에서 형성되어 나오게 되는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볼 것 같으면,「예맥조선」의 일부세력이 연나라의 진개의 공격을 받아 요하북쪽에 있던 부여로 도망쳐 들어감으로써 그로 인해 강대해졌던 그 부여로부터 고구려가 출현했기에 그런 말이 가능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요서지역 남단의 난하 하류지역에는 전기 청동기시대(2500∼1200, BC)의 초기부터 요서의 북.중부로부터 남하해 내려간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고찰된다. 이러한 현상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청동기문화가 흑해.카스피해의 북안 초원지대로부터 알타이.몽고지역 등으로 전파해 나왔고, 다시 그곳에서 요서의 북쪽지역으로, 또 그곳에서 요서의 남쪽으로 전파되어 나갔던 과정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것은 중원지역에서 기원전 2070년경(『史記』「夏本紀.) 하왕조가 건설되기 3세기전의 일로 고찰된다. 당시 중원지역에는 서역으로부터 중앙의 오아시스로를 통해 청동기문화는 아직 전파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단군조선」의 후예들, 즉 중원출신의 인간들로 말할 것 같으면 동이족(東夷族)라 불리는 예맥인들이 기원전 3000년대 말경에 황하하류를 통해 중원지역으로 들어갔고 또 서역의 청동기문화가 내몽골지역에서 황하의 북하(北河)와 서하(西河)를 통해 중원지역으로 들어감으로써 양 문화가 서로 충돌해 화하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하왕조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그 후 하왕조의 정치적 중심지보다 더 황하의 하류지역인 하남지역을 중심으로 요하지역의 청동기문화의 주역세력들에 의해 상왕조(商王朝, 1766경∼1122, BC)가 건국되었다. 바로 그 시기 경에「단군조선」이 요서지역으로부터 난하 하류지역 근처의「백악산」(白岳山) 이란 지역으로 천도해 내려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난하 하류지역의 주변이 상대 이후「아사달」로 불리게 됨에 따라, 주대에 와서 그곳이 중국인들에 의해 중국어명「朝鮮」으로 불리게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상과 주의 교체기에 와서 중원지역으로부터 구상(舊商)의 유민들이 그곳으로 이주해 들어오자,「아사달.에 도읍을 둔「단군조선」은 그의 정치적 무대를 다시 요서의 장당경(藏唐京), 조양(朝陽) 등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단군조선」의 정치적 중심지가 난하 하류 지역에서 이 요서의 조양으로 이동하자, 난하 하류 지역으로 들어온 중원인들은 단군조선의 주류가 떠난 그 지역을 일명「고죽국」으로 불러갔는가 하면「단군조선」의 일파가 잔류해 있던「아사달」을 중국어명「朝鮮」으로도 불러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기자조선」의 연구자들에 의하면,「전국시대까지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록은 중국 측에 없었고.,「기자동래설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傳, 서한시대: BC206∼AD8)와 『사기』(史記,116∼100,BC)」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기와 같은 문헌들에는 「기자동래설」이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인가? 중국이 전국시대(戰國時代, 403∼221, BC)로 들어서자 북경지방을 근거지로 성장해오던 연(燕)은 중원지역에서의 주(周)의 제후세력들이 확대되어 나옴에 따라「기자조선」이라 불리는 정치적 단체까지가 포함된 고조선을 요서지역으로부터 한반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요동지역의 서편 요하지역까지 밀어내게 되었다. 『사기』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의하면, 연은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원전 1122년 상을 멸망시킨 후에 소공석(召公奭)을 북연(北燕)에 봉하게 된 것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공석은 상대에는 하내(河內).하남(河南)일대에서 세력을 휘둘렀던 소족(召族)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상 멸망 후 상의 잔존세력이 북방으로 도주해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하남의 소공석이 그들을 동정(東征)한 후, 주공(周公)과 함께 주의 동방경영에 협조해 갔다. 그 과정에서 그가 지금의 북경부근의 제후로 봉해졌었던 것이다. 그러나 춘추시대(770∼403,BC)이후 주왕실의 쇠락과 함께 북방의 산적(山賊)이 남하해 내려옴에 따라 연은 중원과의 교통로가 끊겨 중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국시대(403∼221,BC)로 들어와 중원과의 교통이 다시 열리게 되어, 역왕(易王, 329∼321, BC) 때 와서 전국 7웅국(戰國七雄國) 중 가장 늦게 기원전 323년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주왕(周王) 중심 천하의 봉건제가 쇠약해져 변방에 위치한 연(燕)의 군주 역(易)도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의 군주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환(魚.)의 『위략』(魏略, 263경)에 의하면, 전국시대로 들어와 중원지역이 정치적으로 소란해지자 북쪽의 변방에서는 연의 소왕(昭王, 311∼279, BC)에 이어 연에 이웃해있던「기자조선」의 군주(君主)도 그간의 자신의 칭호인 ‘후’(侯)를 ‘왕’(王)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연의 소왕은「기자조선」이 교만해졌다하여, 장수 진개를 보내「기자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천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그 후「기자조선」은 연의 그러한 동진을 계기로 약해지게 되어, 결국 진개의 그러한 공격 이후「기자조선」의 정치적 중심지는 요하의 중.하류에 위치한 험독(險瀆)이라는 곳으로 이동하게 됐던 것으로 고찰된다.
진개가「기자조선」을 공격한 그해는 기원전 300년으로 고찰되고 있다. 또 연과「기자고조선」과의 경계선이 된 만반한(滿潘汗)은 중국 측 연구자들은 압록강으로 보고 있지만 최근 한국 측의 연구자들은 요서(遼西)의 대릉하(大凌河)로 보고 있다.37) 그 후 연은 진(秦)에 의해 전국(戰國)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222년에 멸망했다. 그 바람에 연이 점령해오던「기자조선」의 서반부가 자동 진(秦)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연으로부터 요서지역을 물려받은 진의 시황제는 그 이듬해 전국 통일을 달성했고, 그 후 기원전 215년에는 몽념(蒙恬)에게 30만 병력을 주어 흉노에게 뺏긴 오르도스지역 이남의 황하유역을 되찾게 했다. 또 몽념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여 북방 쪽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흉노의 남침을 막을 수 있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그는 요하의 동편 유역에 위치한 현재의 요녕성 심양시로부터 출발해 감숙성(甘肅省)의 임조(臨洮)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이 기원전 207년 개국 14년 만에 한(漢)의 유방에 의해 멸망되자, 요서지역이 다시 한으로 넘어갔다. 한초에 연 지역을 맡아 다스리던 자는 노관(盧.)이었다. 그가 연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을 당시 한과「기자조선」과의 경계는 당시 패수(浿水)라 불리던 대릉하였다.
그런데 그가 모반해 흉노 쪽으로 돌아선 시점에서, 연지역의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대릉하를 건너 요동 쪽으로 넘어와 당시 요하의 중.하류의 험독(險瀆)을 정치적 무대로 하고 있던「기자조선」에 망명해「기자조선」 땅의 서쪽 지역을 지켜갔다. 그러다가 그는 기원전 190년경에「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기자조선」이 차지하고 있던 난하 이동의 요하지역이 연인 위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찰해 볼 때, 중국 측의 자료들이 가리키는「조선」이란 처음에는 고조선의 도읍이 자리해 있던 난하 하류의「아사달」이라 불리던 지역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그 후 그것은 주대 이후 그 지역에서 형성된 정치적 단체로 상상되는「기자조선」의 의미로 쓰이게 됐던 것으로 고찰된다. 즉 그것은 상이 주로 교체 되고, 또 진이 한으로 교체되는 과정들 속에서 중원의 상 세력의 일부가 중원에서 새로 등장한 주 세력에 밀려 고조선 지역인 요하의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나온 세력들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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