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직업 ‘관료’의 삶의 모습
이혜옥
나는 시골에서 쓸쓸히 지내니
세파의 곤궁함을 어찌 견디리
목 내밀고 한번 나가고 싶으니
부디 도와 주시면 얼마나 좋겠소
이규보
고려인들이 꿈꾸던 최고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앞의 이규보의 노래에서 보듯이 바로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는 당대 최고의 신분층이며,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고려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층인 그들에게는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사민가운데 선비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하였는데 여기서 선비란 곧 관료층을 의미한다. 당시 관료는 중앙, 지방의 현임으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실직이 없는 관원으로서 녹은 없이 토지만 받는 사람이 1만 4천여 명이라 하였으니, 당시에는 1만7천여 명의 관료층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배층으로서 누리던 특권과 그것이 반영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색깔로 차별한다
우리나라 모든 신하들의 관복은 이미 풍토에 알맞게 만들어서 상하를 구별하였으니 이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공민왕
당시 관료들에게도 소위 유니폼이란 것이 있었다. 유니폼의 상징성은 ‘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관직의 차등을 뜻한다. 고려초기에는 관복을 자주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의 4단계로 구분하여 차별성을 분명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착용하는 모자와 허리띠에도 모두 정해진 재료와 색깔이 있었다. 이규보의 시에 ‘옷의 무늬로 귀천이 나뉘니 세상에선 이 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든가. ‘옛날 푸른 적삼 입었을 땐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더니 이제 붉은 옷 입으니 뭇사람 다투어 따르네’라 한 것에서도 당시 색에 부여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이후 관복은 점차 실용성을 중시하여 검은 옷으로서의 통일을 이루지만, 모자와 허리띠 등의 규정에는 여전히 차별이 남아 있었다.
당시 의복은 일반적으로 삼베와 모시로 만들었다. 면화는 아직 재배되지 않았고 견직물은 값이 비쌌다. 일부 고급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극히 섬세하고 수준 높은 직물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이 쓰거나 조공품으로 이용되었다. 고급 견직, 모직, 면직물류는 염색기술이 미흡하여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비단 한 필은 은 10냥이나 되었고, 부인들이 외출시 썼던 너울도은 한 근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최자가 “불면 날 듯, 연기인가 안개인가. 희디 흰빛, 눈인가 서리인가. 청, 홍, 주, 녹으로 물들여 비단을 만들어 공경사년들이 입어 끌제, 바스락 바스락 떨치며 반짝이네”라고 노래하였던 것도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의복의 색은 단지 시각적 효과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별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관료라 해서 항상 고급 직물의 옷만 입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이들도 흰 모시옷을 입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왕가의 처, 첩과 귀인으로부터 일반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복의 구별이 없고,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분을 하였다고 한다.
좋은 벼슬과 많은 녹
안개인 양 구름인 양 반공중에 노니니 좋은 벼슬 많은 녹이 날 잡지 못하리 고려의 관료들도 일단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주로 사시에 출근해서 유시에 퇴근하는 것이 규정으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관직종사에 뒤따르는 수입의 형태는 크게 달랐다. 당시 관작은 9품으로 차등화 되어 있었고 관료들은 각각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전시과와 녹봉을 받았다. 전시과는 근무의 대가로 토지를 분급 받는 것이며 녹봉은 현물인 미곡으로 받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전시과’는 문무백관에게 등급에 따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지와 땔나무를 베어 낼 수 있는 시지를 주는 것으로 이 전과 시를 합한 것이다.
이 제도는 976년에 처음 제정된 이래 목종 때에 정비되고 다시 문종 때에 완비되었다. 초기에는 인품과 공로에 따라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목종 때부터는 관직의 등급만으로 분급한 데서 제도적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관직별로 18과로 나뉘어 지급된 것을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공무원 제도가 9급으로 나뉘어 차등적인 보수로 지급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실제 수입은 얼마나 되었을까. 문종 때의 전시과 규정에 따르면 제1과에 속하는 문하시중, 중서령, 상서령 등의 최고위재상들은 전지 100결, 시지 50결에 비하면 아주 적지만, 당시 호구당 실제 경작지가 1결에도 미치지 못하던 실정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토지를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시과는 토지 자체를 ‘주는’것이 아니라 계권 또는 문계라는 증빙문서를 통하여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량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제1과의 경우 토지의 비옥도에 딸라 200석에서 400석 정동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시지에서는 주로 땔감을 채취하였지만 개간하여 경작지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짭짤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었다. 전시과는 관료가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유족의 생계유지라는 명목으로 세습되었다. 따라서 전시과는 관료들의 근무수당으로서의 성격에 그치지 않고 그들 가족의 지속적 경제기반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식적 수입원인 녹봉도 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400석을 받는 1과부터 10석을 받는 47과까지 세분하였다. 녹봉은 정월7일과 7월7일, 일 년에 두 번 받았다. 관료들의 녹패를 팔기도 하였다. 녹봉은 주로 쌀, 보리 등의 곡물로 지급하였으나, 베나 비단 등을 주기도 하였다. 관료들이 받는 녹봉과 전시과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대략 비슷한 양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시과는 원칙적으로 평생을 보장하는 데 반하여 녹봉은 현직자에게만 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관료들은 공로에 대한 포상 등을 이유로 보너스를 받거나 고위관료에 한해 공음전이라는 특혜적 성격의 토지를 지급 받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서 남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였으며 고리대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많을수록 좋은 것 몇 가지- 노비, 여자, 부
가지런히 늘어서 수많은 집들 멀리서 바라보니 옥두 높은 곳에 비단 장막 걷혀 있네 필시 잔치 벌렸으니 붉은 비단 찬란하리 멀리 바람 따라 아련한 풍악소리 기녀들은 소매 걷어 팔목을 드러내고 애교 띤 얼굴로 술잔을 드리며 살풋 눈을 흘기니 사람들은 해가 져도 흩어질 줄 모르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가족은 5인 정도로 구성되는 소가족 형태가 주였다. 그러나 그 당시 관료들의 생활에는 노비와 여자가 항상 따라다녔다.
토지와 함께 관료의 주요한 경제기반은 노비였다. 목종 때 경주 사람 융대는 양민 500여명을 사노비로 만들어 궁인 김씨와 고위 관료 김락 등에게 뇌물로 주었으며 종친, 대갓집 중에는 100여 구이상의 노비를 소유한 사례도 있었다. 모든 노비가 한 집안 내에서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실제로 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서 그의 땅을 경작하는 외거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나, 함께 거처하면서 잡일에 종사하는 노비들도 다수 존재하였다.
가난한 시절의 이규보의 집에도 몇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하며,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이 구차하게 지내던 시절에 채마밭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서 노비들이 과일이나 채소류를 가꾸었다고 한다. 당시 부잣집에서는 여름날 큰 자리를 깔아 놓고 여종들이 곁에 늘어서서 수건과 정병을 들고 시중하였으며 부인들이 나들이할 때에는 종자 2, 3명이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당시 고위 관료들은 양민을 억지로 노비로 삼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도 전하는데 어떤 양민이 가아제로 종이 되어 관에 고소를 하자, 관리 김서와 그 동료들이 그의 원통한 사연을 알면서도 권력가의 세도를 겁내어 권력가에게 유리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러자 꿈에 하늘에서 날카로운 칼이 내려와 그들을 모조리 내리 찍었다. 이튿날 실제로 김서는 등창이 나서 죽었고 그로부터 한 달을 넘기지 않고 그 동료들 역시 다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양민들의 사무친 원한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칼이 모든 것을 지배했던 무인집권기에는 일상적 의미의 노비보다는 전투적 의미에서 자신에게 충성할 인물이 필요해졌다. 사병화된 가노들을 비롯하여 자발적으로 권세가에 뛰어들었던 문객들이 세력가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권력가의 문에 모여들어서 혼돈의 시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충성의 대가로는 물질적 보상이나 관직을 받았는데, 그 주군의 세력 비호하에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일도 많았다. 경대승 집권기에는 그이 문객이 양가 자제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대승이 비호하여 처벌받지 않고 풀려난 일도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당시 부유층들은 서너 명의 부인을 두고 조금만 성격이 맞지 않아도 쉽게 이혼을 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일부다처제가 풍미했던 것으로는 볼 수 없으나 세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충분히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었으며 사랑하는 기녀를 두기도 하였던 것이다.
문집들을 보면 지방으로 부임된 관리들과 관기 사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간간히 전하고 있다.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기생이 남쪽 지방에 있었는데 그 기생에게 정을 주었던 군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크게 취하여 “내가 이곳을 떠나면 다른 놈이 널 차자하겠지”하고는 바로 촛불로 그녀의 양 볼을 지져버렸다.
임춘에게도 이러한 슬픈 일화가 있다. 그가 벼슬에 싫증이 나서 성산군에 가서 묵을 때의 일이다. 그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군수가 기생 하나 보내어 모시게 했으나 밤에 도망쳐 버려, 이에 상심한 임춘이 원망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대를 풍자하는 양날의 칼, 푸른 기와집과 비 새는 초가집
백성들을 긁어 먹고 윗사람에겐 아첨하는 풍속이 오래니 온 나라에 즐펀히 속임수만 따르도다. 후한 벼슬 높은 지위는 그리워할지라도 청천백일이야 속이기 어렵도다.
관료들은 관직과 가문의 성쇠 또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관료들의 경제 기반은 국가에서 보장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문의 성쇠 또는 능력에 따라 그들의 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 대대로 고위관직을 누려왔던 자들은 많은 재산을 모아서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평소 거처하는 집 이외에도 별업이라는 별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무인집권기 권력자인 최충헌 집안은 호사가 극에 달해 누각이 새가 날아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리울 만큼 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치는 최고위 권력자층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공경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치니 커다란 누각은 춤추는 듯 서늘한 마루,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 있어 금벽이 휘황하고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오색 양탄자로 땅을 깔고 온갖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의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게 아양을 떠네.
최자는 이렇게 사치풍조를 노래했으며, 이규보도 일천집 여기 저기 푸른 기와가 즐비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치의 뒤에는 반드시 빈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벼슬을 잃거나 가문이 한미한거나 혹은 청백한 성품의 소유자인 경우에는 관료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였다. 벼슬을 잃은 이규보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땅에 재상이 몇 명이나 되는가.
나 또한 외람되이 재상했던 몸이로세.
나만이 청렴하고
남들은 그렇지 않은 것 아니련만
아찌타 가난 걱정 홀로 면치 못하는고.
공정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설문경의 경우를 보자. 그가 병이 들어, 채홍철이 진찰을 하러 안채에 들어갔더니, 다 낡은 베 이불에 누워 있는 광경이 마치 중이 거처하는 방 같았다. 채홍철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와 비교하면 흙 벌레와 황학 같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학사 팽조적은 책을 탐독하는 버릇이 있어 두어 개 서까래에 띠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집에서 사방에서 비바람이 들이치고 땔나무와 지을 쌀이 없어도 항상 태연하고 침착했다고 한다.
한편 임춘의 가문은 건국 때부터 공이 있어 국가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은 적이 있었고 대대로 문장가와 관료를 배출하였다. 임춘 자신도 문장으로서는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한 번도 벼슬을 하지 못하고 일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가 쓴 편지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다.
고향을 떠나서 오랫동안 강남에서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아침에 저녁거리를 걱정할 만큼 구차스럽고 가난하니
고을에서 비웃고 친구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절교합니다.
운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임춘의 편지는 가세가 기울고 관직을 얻지 못하면 비록 관료의 집안이라도 비참한 처지를 면치 못함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관직을 지낸다손 치더라도 가문이 든든하지 못하고 이재에 밝지 못하면 역시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대에 자린고비의 원조랄 수 있는 지씨성을 가진 인물의 이야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는 충렬왕대의 재상인데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가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였다. 설날과 한식날마다 묘지에 사람을 보내어 장례에 쓰는 돈 모양의 종이인 지전을 주워 오게 하여 다시 종이로 만들어 썼고, 또 버린 짚신을 주워서 거름으로 땅에 묻고 동과라는 수박 비슷한 채소를 심어서 많은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게다가 남의 제삿날에 부조로 쌀 1말만 가지고 가면서 하인은 10명이나 데리고 가 포식시키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반쯤 와서 하인들에게 수저를 하나씩 거두었다. 하루는 모두 수저를 내놓는데 하인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내놓지 않아 그 까닭을 물으니 수저를 얻지 못하고 바리때를 얻었다 하였다. 그러자 지씨가 웃으며 “내가 욕심내던 것이 사발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단지 자린고비의 원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가 풍자하는 양날의 칼, 사치와 빈곤 속에서 배어 나온 시대적 반향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 늘어선 푸른 기와집들을 상상해 보라.
무수한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푸른 기와의 빛이 바래지 않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 쉬지 않고 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와집 뒤편 개미굴 같은 초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노래한다.
차마 이대로 죽어 한데 길에 버려지길 기다릴 순 없어
마을을 비우고 산에 올라 도톨밤을 집는다네
그 말이 처량하고 절실도 하구나
듣고 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라
그대 보지 않았나
고관집 먹는 것이 하루에 만전어치
맛난 음식이 솥마다 가득가득 별처럼 널려 있네
하인들도 술 취하여 비단 요에 토하고
말은 배불러 금마판에서 소리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