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독일유학시절: 3-3. 헝가리 탐방후 귀행 대장정
○ 헝가리 국경도시에서 1박 후 부다페스트 입성
뷘을 벗어나 한 두어 시간을 달리니 헝가리 국경지역에 도달했다. 마침 그해 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동유럽국 국교개설 외교정책에 의해 헝가리가 1호국으로 한국과 수교가 되었다. 한국인 학생여권으로는 아마도 우리가 최선두 그룹으로 헝가리 땅을 밟게 될 터였다.
헝가리 국경선에 도달하니 국경검문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타 서유럽이나 동유럽 국적의 방문자들처럼 비자신청을 해야 했다. 사실 서유럽국 간의 무비자 여행을 습관처럼 하던 터라 비자를 따로 발급받고 들어가는 것이 좀 특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독일 내 헝가리 영사관이 아닌 국경선 현장에서 바로 발급받을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헝가리가 입국객들 상대로 비자장사를 하는 듯 인당 20마르크를 비자비로 요구했는데 예상보다 비싼 비용이었지만 공산권 국가를 한국여권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고마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노태우 정권이 88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동유럽권 국가들과 수교 드라이브 정책을 펼친 덕분에 우리는 그 첫 수혜그룹이 될 수 있었다.
헝가리 국경경찰이 우리 여권들을 다소 놀란 듯이 살펴봤지만 의례적인 방문 목적을 묻더니만 특별한 까탈을 부리지 않고 흔쾌하게 입국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우리는 다소 감격스러운 기분 속에 헝가리 국경을 넘어 이 나라 제2의 도시라는 ‘죄르’란 곳이 눈에 보이자 부다페스트 입성을 내일로 미루고 여기에서 하룻밤 묵으며 여독을 풀려했다.
독일 신문 ‘빌트’지에서 독일 여행객들이 헝가리에서 휴가를 보내고 온 방문 체험기사에 의하면, 여기서는 공산품이 귀해 웬만한 일제 카셋레코더 신품 하나를 제공하면 괜찮은 민박집에서 한 일주일은 머물 수 있었다는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 동구권에서는 달러보다 독일 마르크가 더 환영받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죄르는 서유럽국 도시들보다는 훨씬 규모가 작고 한적한 시골 소도시 같았다. 독일인들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어느 거리에 들어서니 독일어로 ‘Zimmer frei’(묵을 방 있음) 라는 방을 붙인 집들이 몇 군데 보였다. 옳다구나 여기서 묵고가자 싶어 여인네들이 추천하는 집을 찾아가 방이 있는가 물으니 시원스레 있다는 답을 들었다.
뷘에서처럼 방 2개를 요구하니 침대와 집기들을 다소 투박했지만 가성비 좋은 큰 방들을 내어주었다. 우리는 흡족해 하며 헝가리에서의 기념비 적인 첫 숙박을 하게 되었다. 짐을 풀고 샤워들을 한 뒤 주인이 알려준 바대로 근처 파출소 같은 데에 가 우리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간다는 서식 신고를 한 다음 체류 허가증을 따로 발급받았다. 경찰 제복이 독일에서보다는 약간 촌스러워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박한 인상을 풍겼다.
돌아오는 길에 우유와 콜라 같은 탄산음료를 사러 어느 가게에 들렀더니 우유는 우리 어린 시절 오렌지 주스처럼 삼각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있었고, 콜라는 빈 병에 주유기 같은 걸로 채워서 팔았다. 예상치 못한 진풍경이었다. 6, 70년대 한국 시골에 있는 구멍가게들에서나 자주 보던 풍경들이 여기서 여전히 재현되니 마치 타임머쉰 타고 과거로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독일 대도시에서 살다보니 이곳 일상에서 만나는 자그마한 문화충격처럼 여겨져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한국제 라면들을 보여주며 몇 개 선사한 뒤 먹는 법을 가르쳐주니 꽤 신기해 하며 좋아라 했다. 우리는 내일 부다페스트 입성을 위해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 날 모두 꿀잠을 자고 아침을 적당히 챙겨 먹은 뒤 주인집에 작별을 고하고 나서는 부다페스트로 여정을 잡았다. 하룻밤을 자고나니 낯설어 보이던 이 나라도 제법 구면인 것처럼 익숙하게 여겨졌다. 50년대 세계축구계를 주름잡던 축구강국의 이미지와 작곡가 리스트, 컴퓨터 CPU를 고안한 천재 폰 노이만, 인텔 회장 앤디 글로브를 배출한 헝가리로 다른 한국인들보다 먼저 입성하는 행운을 누린 게 꽤 흐뭇했다.
헝가리는 당시 동독을 제외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2차대전 종전 후 동유럽 공산권 3대 주요국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부다페스트로 접근할수록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못지 않은 세련된 유럽의 풍모들이 드러났다.
이 나라는 고대 켈트계 원주민이 정주하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서로마가 무너진 후 동로마의 느슨한 통치 속에 지내다 10C 경 동쪽에서 쳐들어 온 마자르인들이 주류가 되어 헝가리라는 이름을 가진 초기 국가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13C 초 몽골군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고, 그 세력이 쇠퇴하자 16C부터는 오스만 터어키와 오스트리아의 완충지역으로써 준속국적 운명을 맞았다.
서구 열강의 부상에 의해 오스만 터어키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공백을 메웠고, 그 왕가 역시 19C 중반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비스마르크 프로이센과의 보오전쟁 패배 여파로 실추된 영향력을 최소한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1867년 5월 헝가리인들과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수립해 헝가리인들에게 외교와 군사쪽을 제외한 자치정을 부여했다.
이 자치정 기간 중 헝가리인은 자국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제외한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들에게는 상대적인 우위를 유지하며 루마니아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 지역까지 통치자의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1, 2차 대전에서 패한 주축국 진영에 속한 탓에 트란실바니아 할양과 그로 인한 국민사기의 저하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전 유럽에서 가장 자살율이 높았던 사실도 이러한 역사적 환경에 기인하는 듯 했다.
사실 우리 일행이 부다페스트에 들어섰을 때 이 도시가 보이는 서유럽적 세련됨에 적지 않게 놀랐던 부분들이 당시로서는 몰랐지만 헝가리가 걸어온 역사의 궤적을 살펴보니 그제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도나우(영어권의 다뉴브) 강 서편의 부다와 동편의 페스트가 합쳐져 부다페스트가 되었고, 80년대 중후반까지 인구 200만명을 가진 동유럽 최대의 도시였다.
○ 부다페스트 입성 신고식과 ‘발길따라’ 관광
우리는 부다페스트 중심가라는 안드라시 거리 어디에 벤츠 봉고를 세워놓고 숙소를 정하기까지 좀 늦은 점심 외식이라도 하고 가자는 의견을 모아 거리 탐방을 시작했다. 파리나 베를린, 뷘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 중심가를 일행들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거니는 데 어느 동양 부인네들의 얼굴이 띄었다. 그런데 우리를 쳐다보는 눈매가 강력한 적의감을 품은 듯 여겨졌다.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중년 여인네들이 이곳에 주재하는 북한 외교관들의 부인이라는 직감을.. 우리 일행 모두도 뷘에 이어 다시 조우한 북한 사람들을 그 어떤 섬뜩함에 놀라 인사라도 붙일 염도 품지 못한 채 우리를 째려보고 등을 돌리는 그녀들을 그냥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광장 근처에 이르자 현지인 청년 두 명이 우리에게 ‘사요나라!’ 하며 접근해 왔다. 달러나 독일 마르크화 있으면 공식 은행환율보다 4배나 더 쳐 환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현지 포린트화가 필요해 은행에 들려 바꾸려 했는데 암환전상이 4배나 더 후하게 쳐주겠다 하니 옳다구나 하고 200 마르크를 내놓았다.
돌아다니면서 본 공식 환전소 對마르크 환율을 알았기에 곱하기 4해서 계산된 포린트를 줄 수 있냐 했더니 오케이 하며 10, 20, 50, 100, 500, 1000 단위의 포린트화 한 묶음을 내어놓았다. 헝가리 화폐는 새겨놓은 돈 단위만 다를 뿐 지폐 크기와 색깔이 달러처럼 단일 녹색에다 똑같은 크기 임을 그때서야 알았다. 회계 돈지갑을 맡은 오SH씨가 들어온 돈 금액이 좀 모자란 듯 하다 해서 헝가리 친구들에게 어찌 된거냐고 묻자 이상한데? 하며 누구 한 사람 오면 보는데서 다시 확인하고 잘못 계산되었다면 맞춰 주겠다고 했다.
우리 중 한 사람이 대표로 따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친구는 전체 돈을 세어보더니 어, 좀 모자라네 하며 지폐 몇 장을 더 얹어 부족한 부분을 채운 포린트 지폐 한 뭉치를 주며 눈을 찡긋거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 친구가 떠난 뒤 숙소에 같이 가서 나눠 먹을 수박 한 통을 근처 노점상에게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려 환전된 돈다발을 살피다 첫 한 두장 20포린트와 10포린트 아래는 1, 2, 5의 저금액 지폐로 좌악 깔려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무슨 야바위꾼처럼 돈을 세는 체 하며 돌려줄 때 단위 낮은 포린트화 다발뭉치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었다. 우와, 60년대 한국 시장통에서나 있었을 법한 야바위 사기술을 여기서 만나다니 하며 일동 모두 아뿔사! 하는 소리를 내질렀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총금액을 공식환율로 계산해보니 20마르크 남짓한 가치였다. 200마르크가 1/10로 변신한 것이었다. 헝가리에 대해 괜찮았던 국가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 사기 야바위꾼의 나라 같으니라고..
각 가족마다 공동해손을 당했다 여기고 비상금을 털어내어 쪼그라던 공동사용 경비를 좀 더 추렴해야 했다. 일단 중심가 구경을 위한 어슬렁거림을 기분도 그렇고 해서 중단한 뒤 두 밤을 지낼 숙박소를 먼저 찾기로 했다. 중심가를 벗어난 지역으로 오니 민박이 가능한 ‘Zimmer Frei’라는 벽광고들을 여인숙 같은 데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죄르에서처럼 방 2개를 빌려 숙박팀을 나눈 뒤 여장을 풀었다.
샤워도 하고 사온 수박도 깨어먹으며 휴식을 좀 취한 뒤 숙소를 나와 가라앉은 기분들을 좀 더 회복시키기 위해 시내로 나가 어느 레스토랑을 발견하고는 유명하다는 헝가리식 쇠고기 스테이크인 ‘굴라쉬’ 메뉴를 어른들 용으로 7인분을 시키고 아이들은 수프나 감자 으깬 메뉴를 주문했다. 웨이터들은 유복한 일본인 관광객들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 의자도 챙겨주며 서빙을 해주었다.
백포도주, 적포도주, 미네랄 워터 등을 곁들여 쇠고기 굴라쉬 요리 맛을 감상했는데 감칠 맛 나는 소스와 야채 및 감자 샐러드 등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는 호평을 내어 놓았다. 이제야 기분들이 풀리며 계산서를 받으니 독일에서보다는 확실히 가성비가 탁월한 가격대들이라 꽤 만족스러웠다. 마르크화로 팁을 약간 추가해 지불하고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쪽으로 차를 천천히 몰고 갔다.
1904년에 건립되어 도나우(다뉴브) 강변 페스트 지역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은 영국 국회의사당을 본따 지었다는 듯 장려하면서도 숭고미가 살아있는 네오 고딕식 건축미를 뽐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통합되었다 독립한 헝가리 만의 정체성을 축하받으려는 것처럼 약간 과장된 웅장함도 엿보였다. 동시에 단아한 분위기도 함께 풍겨 헝가리인들의 만만치 않은 문화지성적 저력도 같이 내비치었다.
국회의사당을 근경과 원경에서 살펴본 뒤 그 근처에 포진되어 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도 눈에 띄기에 놓칠 수 없다 여기고 찾아갔다. 요즘처럼 인터넷에 즐비하게 올려놓은 세계 유명 관광지에 대한 여러 국내 방문객들의 탐방기와 사진 정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30여년 전 우리 일행은 막 국교가 수립된 헝가리같은 신생지에 그야말로 사전정보 없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발길따라 눈에 띄는’ 명소 탐방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유럽 최고라는 부다페스트의 야간 관광도 놓치고 말았다.
온갖 풍상 속에 근 60년 간에 걸쳐 1906년 완공되었다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우리의 세종대왕급인 헝가리 왕국의 초대국왕 이슈트반 1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했다. 헝가리의 주요 국가행사들을 이곳에서 도맡아 치룰 정도로 국가 상징성이 돋보였다.
이러한 배경지식이 전무했던 우리는 로마나 밀라노, 파리, 쾰른 등을 방문시 익히 보아왔던 여러 대성당들 중 한 곳이거니 하고 외부를 살펴보며 건성건성 거닐었다. 그러다가 나머지 지역은 내일 다시 다녀보자 하고 입성 신고식도 치르며 몸들도 피곤해 유명 야경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숙소로 철수하였다.
부다페스트의 첫날 밤을 우리끼리의 맥주 환담회 같은 것도 없이 모두 내일 일정을 위한 숙면으로 대신하자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 아그들과 YB의 아그들도 여정이 제법 벅찼는지 칭얼거림들 없이 잘 자 주었다.
○ 도나우 강 유람선과 부다 지역 관광
간밤을 숙면으로 잘 보내었는지 모두 밝은 아침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YB의 컨디션이 다소 가라앉아 보였다. 함부르크에서 여기까지 며칠 간 오며 나와 적절히 운전을 나눠맡으며 일행을 잘 이동시켰는데 어쩐지 몸살끼 같은 게 생겨 오한이 일기에 자기는 내일 귀향길을 위해 오늘 관광 동행은 포기하고 숙소에서 혼자 푹 쉬어보겠다는 것이었다.
일행 운송에 대한 책임감으로 부다페스트 2일차 탐방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루 혼자서 운기조식하겠다는 그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어 그리하라 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내가 모는 노란 벤츠 봉고를 타고 오늘 하루 시내 관광길에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둘러보고 온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있던 페스트 지역에 이어 오늘은 도나우강 양안을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를 지나 건너편 부다 지역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 전에 마수걸이로 도나우 유람선을 타고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안 슈트라우스 2세의 곡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로 유명한 도나우 강 위를 한번 거닐어 보자는 의견이 먼저 모아져 탑승 매표구로 향했다. 함부르크 엘베강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들 탑승료와 비슷한 듯한 탑승권을 끊은 뒤 우리는 유럽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유람선에 올라탔다.
딱 30년이 지난 2019년 5월19일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들이 야간 유람선 관광을 하다 다른 대형 유람선과 충돌해 탑승한 선박이 전복되는 바람에 총 26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를 접하는 순간 30년 전 같은 코스로 유람하며 강과 양안을 굽어보던 우리 일행의 도나우 강 여정이 다시 회상되었다.
이번 사고로 밝혀진 도나우 강은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평시에도 유람선들이 몰리면 언제나 충돌과 전복사고에 노출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배경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말로만 듣던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그리 푸르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됨) 위에 한국인 관광객의 선발대 격으로 올라 타본다는 의미에서 더 매료되었다.
독일, 영국, 스페인 등 유럽 각국에서 찾아든 방문객들과 함께 섞여 1시간 여의 해상유람을 하니 그 연전에 했던 노르웨이 호수 여행과는 또 다른 흥취감이 생겼다. 요안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 곡 선율과 다뉴브 강과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헨델의 ‘수상음악’과 미국 작곡가 애디슨 와이즈만의 피아노 소품 곡 ‘은파(silvery waves)’의 멜로디가 뒤섞여 머리 속에서 흥얼거려졌다.
약간 덥기는 했지만 화창한 날씨 속에 양안을 볼 수 있는 도나우 강의 수상여행을 마친 뒤 우리는 국회의사당 맞은 편에 있는 부다 지구 쪽에서 내려 강 너머로 보이는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성당 등을 배경으로 한 인증샷들을 단체로 같이 찍고, 서로에게도 개별 포즈를 취하게 해 찍어주었다.
그 다음 도나우 강 전경과 양안을 굽어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언덕배기가 눈 앞에 띄기에 다른 관광객들처럼 우리 일행도 편안한 자세로 유모차까지 끌며 따라 올라갔다. 그 언덕 명이 ‘겔러르트(Gallert)라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12C 독실한 기독교인 겔러르트가 이곳에 기독교 전파를 위해 왔다가 이교도들에 의해 순교를 당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명명했다는 것이었다.
언덕 정상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인들을 위압하고 감시하기 위한 세웠다는 ‘치타델라 요새’가 있다는데 당시에는 아무런 사전 여행지 조사도 없이 왔기에 놓치고 온 것이 도리어 당연했다. 언덕 중간에서 국회의사당과 세체니 다리 등을 굽어본 것에 이 언덕의 위치적 역할을 다한 것으로 지레 간주하고 왼쪽 아래를 보니 또 무슨 왕궁과 요새 같은 것이 보이길래 옳다구나! 저기를 둘러봄으로써 우리의 부다페스트 여행은 그 대미를 찍을 수 있겠구나 싶어 방향을 바로 아래쪽으로 틀었다.
‘어부의 요새’와 ‘부다 왕궁’ 두 곳을 둘러볼 작정이었는데 후자가 가는 길에 더 가까이 있어 들어가게 되었다. 부다 왕궁은 13C초 몽골군의 침공을 피해 당시 헝가리의 벨라 4세가 이곳 언덕에 방어용으로 성터를 축성한 곳이라는데 세월이 흘러 마차시 왕 시절에는 르네상스식 건물들로 변형되었다 했다.
그 후 18C 오스트리아 마리 테레지에 여왕 시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을 받은 건물양식과 구조물들로 재변형되어 당시에 이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들어갔을 때 전체 분위기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변방 영주들 아성답게 웅장한 건축미 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은 채 소박하고 수수함이 더 많이 배여 있었다.
우리는 서유럽국들에서 자주 보던 왕궁 양식을 이곳 부다페스트에서도 살펴본다는 데 다 큰 의의를 두고 한 시간 여 느긋한 산책을 하듯이 궁건물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외양과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상 구조물들만 살펴보았다. 그 다음 이번 부다페스트 여정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어부의 요새’로 발길을 돌렸다.
이 명소는 18C 초기 성의 기초형태가 건설되어 19C 말에 현재의 형태로 완공되었다는 데 도나우 강변 지역 어부들이 외적의 침공시에 시민군으로 동원되어 이곳 요새에서 요지들을 방어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우리가 들어서니 뾰쪽한 고깔 모양의 첨탑들이 마치 디즈니랜드의 동화 속 성처럼 독특한 풍모를 보여주었다.
일곱 개의 탑들은 그 옛날 헝가리를 세운 일곱 마쟈르 부족들을 상징한다고 했다. 요새 내부 곳곳에는 서방국 탐방객들로 붐볐고, 우리 역시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성내 구석구석을 느긋하게 살펴보았다. 집시같은 현지인 거리 악사들이 여기저기 포진하여 피리도 불고 전통 악기들을 연주하며 방문객들을 불러모았다.
요새 어딘가에는 이 나라 국가영웅 같은 이가 말타고 있는 형상의 청동 기마상도 있었는데 헝가리의 세종대왕이라는 이슈트반 1세 왕이 그 주인공이었다. 우리 아들 두 놈도 모처럼 호기심이 많아졌는지 걸어다니는 큰 놈은 이곳저곳을 와이프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 작은 놈이 탄 유모차를 혼자서 끌며 거리낌 없이 돌아다녔다.
어른들이 각자의 기분대로 여기저기 다니는 중에 유모차에 탄 채로 은명이가 출입이 금지된 장소에 들어갔었는지 헝가리 순찰경찰에 의해 뭐라뭐라 지적질을 당하고 있었다. 나와 와이프가 찾아가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바디 랭기지로 몰라서 그랬다고 선처해 줄 것을 최대한 공손하게 사정해야만 했다. 첨탑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도나우 강 전경과 멀리 강 건너편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성당이 꽤 그윽하게 눈에 들어왔다.
○ 부다페스트 마지막 밤의 아쉬움과 함부르크 귀행 대장정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긴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관광 타임을 아쉬워 하며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봉고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숙소에 홀로 있는 YB의 경과도 궁금했고, 내일 아침 일찍 함부르크로의 귀행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유럽내 3위권에 든다는 명성을 당시에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숙소에서 좀 쉬었다 다시 나왔을텐데 몰라서 놓친게 너무 아쉬웠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좀 차도가 있을 줄 알았던 YB의 상태는 도리어 오한이 가시지 않은 채 몸살끼에도 억눌려 있었다. 혈색이 파리해지며 끙끙거리는 것으로 보아 내일 귀행길에 운전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할 예감이 크게 들었고 이 불안감은 그 다음 날 바로 현실로 확인되었다. 나는 그래도 밤사이 YB의 컨디션이 어쩌면 호전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데 낙관론을 품으며 이번 여정의 마지막 밤 숙면을 우려 속에 청하였다.
낮에 많이 돌아다닌 탓에 잠은 다행히도 푹 잘들었다. 그 다음 날 일어나보니 YB도 부인의 간병과 일행들의 문안 등에 약간 기력을 차렸지만 운전대를 맡길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오늘 일행 10명의 무사 귀행은 내 손에 달렸구나 생각하니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지만, 가는 도중에 YB의 기력이 회복되면 운전교대를 할 수 있겠거니 기대하며 숙소에서 취사한 아침식사를 든든히 하며 9시 못미쳐서 귀행 길에 올랐다.
당시 한국인인 우리는 체코와 수교 전이고, 통독 전이라 체코와 동독을 가로지르는 최단 육로 코스(1,170Km)를 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오스트리아를 가로 질러 독일 국경도시인 파사우에 도달한 뒤 뷔르츠부르크->카셀->하노버 노선을 타고서야 함부르크까지 도달하는 노선으로만 와야했는데 총거리를 대충 계산해 보니 무려 1,500여 Km에 이르렀다. 올 때와는 달리 중간 방문지가 없기에 직접 달린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1박은 하고 갈거라 내심 예상했다. 혼자서 좀 비장한 마음으로 운전대에 앉았다. 일단 첫 목적지는 헝가리 국경을 벗어나 뷘으로 잡았다.
일행은 부다페스트에서 보고 체험한 인상들을 나누는 가운데 나는 그 얘기를 들어가면서도 옆자리에서 경로 지도를 봐주는 표HB와 바로 뒷좌석에서 기사 심기경호를 담당하며 이런저런 가벼운 얘기를 건네주는 다정다감한 송IH 덕분에 혼자서 가야한다는 중압감을 많이 완화할 수 있었다, 표씨 뒤에는 부인 오SH가 자리하며 자기 남편과 이번 여행에서 느꼈던 여러 소감들을 부부대화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들려주었다.
중간 좌석대에는 우리 식구와 YB 식구가 각자 아이들을 건사하며 나란히 앉았고, YB는 맨 뒷자리에 자리잡아 앉아있다 누워있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든 스스로 호전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에게는 이번 여행이 길이 기억될 여행 중 하나일 걸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다음날 한 밤중 4시 반 경에 함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호전세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아 그는 만감이 교차되었을 성 싶은 고독한 내면여행을 귀행길 내내 펼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앞 조 일행의 존재로 인한 심리적 도움을 받아 비교적 담담한 심사 속에 편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정오 경에 헝가리 국경을 벗어났고 중간에 보이는 휴게소 등에서 패스트 푸드와 커피 타임을 가지며 짧은 휴식을 취하고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열심히 미니버스를 몰았다. 운행능력이 탁월한 KAL 여객기 수석기장이 비행 중 운항을 못하게 되어 그 옆에 있던 부기장의 심정으로 일행을 사건사고 없이 함부르크까지 무사히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차를 모는 내내 쉬지않고 들었다.
항로사 표씨의 권고에 따라 지리적으로 구석진 곳에 위치하는 뷘행보다 직선코스로 독일 국경에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린츠행을 택했다. 독일국경을 넘어서면 가성비 좋은 독일 숙박소에서 1박이라도 할까 생각했으나, 지도를 보니 국경을 넘으면 파사우가 있고, 거기서부터 익숙한 독일 아우토반으로 올라타면 밤 12시 좀 넘어서는 함부르크 근처에 다다를 것도 같아 무리를 해서라도 무박의 논스톱을 하기로 결정했다.
오후로 들어서며 혼자서 하는 운전이다 보니 집중력 저하와 졸음운전의 함정에라도 빠질까봐 한 시간 여 운전하고는 눈에 띄는 휴게소에 들려 잠깐 휴식을 취하고 떠나는 주행을 반복하자 정상 컨디션 때의 예상시간보다 중간 경유지 도착시간이 훨씬 지체되었다. 그래도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독일 국경을 넘어 파사우 쪽에 도달하니 낮이 긴 유럽의 하계에도 날이 어두컴컴해진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래도 독일 땅에 마침내 들어섰다는 사실이 뭔가 육로 외국여행을 막 끝낸 것 같은 안도감과 푸근함을 나와 우리 일행들에게 가져다주었다. 휴게소에서 감자 및 크라우트를 곁들인 소세지 메뉴를 다른 이들과 같이 시켜 먹은 뒤 남은 여정을 위해 차에 먼저 가서 눈 좀 붙일테니 한 30분 간 여기 있다 탑승하라고 부탁했다.
차에 올라오니 YB도 잠 좀 들었는지 모르지만 담요를 덮어쓴 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난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젖힌 채 잠을 청했다. 그야말로 꿀잠이었다. 일행이 약속시간 후 들이닥치자 더 잘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이 시점에서 긴요한 토막잠을 짧게라도 잤다는 사실이 심적인 안도감을 크게 주었다.
다시 뽀빠이 시금치를 먹은 듯 새 힘을 얻어 운전대를 잡았다. 일행 역시 식사와 볼 일도 하고 봤겠다, 독일 땅에도 들어왔겠다 기분이 모두 올라와 한동안 차 안이 수일 전 함부르크에서 출발할 때와 같은 분위기가 재현되었다. YB를 빼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같이 한 여행체험을 공유한 데 대한 자족의 격려사들이 이어졌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뉘른베르크를 거쳐 뷔르츠부르크까지는 2시간 여 논스톱으로 차를 몰 수 있었다.
뷔르츠부르크 근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아이들은 벌써 잠에 빠져 있어 어른들만 근교 휴게소에 내려 거의 마지막일 것 같은 커피와 티 타임을 가졌다. 이제 지도를 보니 함부르크까지 한 450여 킬로 남았는데 계속 직선으로 북상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해 멍한 정신상태에서 오직 목적지까지 주파해야 하는 지옥의 자동차 장거리 레이스에 참가한 기사처럼 비장한 책임감과 깡다구에 의존하는 정신운전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최선을 다해 150여 킬로 떨어진 카셀까지 몰고는 짧은 휴식 후 또 150여 킬로 거리에 있는 하노버까지 간 다음에 토막잠 한 숨 자고는 나머지 150여 킬로 남은 목적지 함부르크로 입성하리라 표시와 송씨, 그리고 나 3명이서 주행계획을 세웠다. 내가 졸음에 빠지지 않게 둘이서 돌아가며 날려주는 말걸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으며 카셀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셋이서만 내려 휴게소에서 커피타임과 담배 한 대씩 나눈 뒤 하노버까지만 가면 함부르크에 거의 다 온 마지막 구간만 남아있다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노버행 아우토반에 올라탔다. 시계를 보니 밤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기에 당신네들보다 집중력이 좀 더 남아 있으니 두 사람에게 마지막 스퍼트 구간을 위해 눈 좀 붙이라고 했다. 둘은 알았다며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깨워달라는 말을 하고 여기서부터는 체력 비축을 위해 서로 간에 대화도 삼간 채 비몽사몽 모드로 들어갔다.
당시 독일의 고속도로는 속도 무제한 구간이 대부분인데다 한 밤중이라 차도 띄엄띄엄 오가는 화물트럭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어 시속 140~160 킬로를 계속 유지하며 몰 수 있었다. 고요하고 적적한 야밤에 혼자서 잠자는 일행을 등덜미에 업은 듯 뒤로 하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기분은 색다른 체험이었다.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의 84년작 영화-‘파리 텍사스’에서 주인공 트레비스가 자신의 의처증으로 이혼한 전처이자 고객을 볼 수 없는 밀폐공간에서 유흥접대부로 생활하는 제인을 수소문 끝에 거울 벽 밖에서 만나 회한의 대화를 나눈 후 아들 헌터의 양육을 부탁하며 데려다 준 뒤 헤어져 한 밤의 고속도로를 온갖 비감스러운 만감이 교차한 채 고물 차 몰고 가는 마지막 인상적 씬이 떠올랐다.
다른 한편 1927년 뉴욕에서 파리까지 단엽기로 33시간 논스탑 대서양 횡단비행을 성공시킨 항공우편배달 야간비행사 출신인 찰즈 린드버그가 총항로 구간 1/3을 남긴 지점에서부터 허기와 수마에 저항하며 ‘졸면 대서양 바다에 바로 다이빙한다!’라며 스스로를 옥죄던 그 결기어린 깡다구 정신이 트레비스의 마지막 고속도로 질주 씬과 함께 연속적으로 떠오르며 졸음운전에 맞서려는 내 결의에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어느 구간에서인가는 군대에서 격심한 야간행군시 자면서 걷는다는 체험담처럼 나는 눈을 떠있다고 여겼지만 순간적으로 가수면 상태에 빠진 적이 몇 번 있었음을 화들짝 놀라면서 깨달았다. 오, 가호의 여신이여.. 이 몸이 하노버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우리 일행을 보호해 주소서 하며 무신론자 주제에 다급히 삼신할미로도 칭호를 바꾸며 매달렸다. 우리 운이 다하지 않았는지 수마의 치명적인 화는 다행히 입지 않은 채 우리는 하노버 휴게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비몽사몽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깨우자 비로소 깜짝하며 일어났다. 셋이서 손님도 없는 적막한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 씩 하고 담배도 한 대씩 힘나게 해주는 대마초처럼 의미있게 깊숙히 빨아들였다. 한결 살 것 같았다. 함부르크까지 도달한 마지막 에너지를 얻은 듯 우리는 함부르크를 향한 봉고에 다시 올라탔다. 눈 좀 붙인 두 사람이 새로 깨어난 듯 열성을 다해 말을 붙이며 마부가 최후의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애를 썼다.
드디어 우리가 아는 함부르크 남쪽의 지명들이 줄줄이 표지판에 나타나자 잠에 빠져있던 여인네들도 자다 일어나 떡받는다는 기분으로 함부르크 근접 소식에 기뻐하며 새 아침을 맞는 기분을 드러내었다. 나도 이제 마지막 원기를 쥐어짜 함부르크 진입을 위한 엑셀을 밟았다. 함부르크로 들어와 엘베강이 흐르는 다리 교각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주황 불빛의 가로등들이 ‘이제 니들은 확실히 여정 끝낸게 맞아!’ 하고 우리를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YB가족과 송씨를 욀뮬렌벡 기숙사에 내려다 주고 표씨 부부와 우리는 같이 사는 케머러우퍼 기숙사 주차장에 도달해 길었던 여행의 대미를 찍었다.
독일 남부, 오스트리아, 헝가리까지 이르는 6박7일간의 여행 길에서 마지막 무박 이틀 간의 귀행 오딧세이가 특히 말도 못하게 힘들었지만 이 또한 세월 지나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으리라 여겨져 독일 생활에서 무슨 큰 방점을 찍는 순간들처럼 뇌리에 아로 새겨졌다. 32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대장정이 주마등같이 떠올라져 이렇게 기술되는 걸 보면 그 추억이 얼마나 생생했나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아무튼 우리가족은 80년대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해에 일주일 간의 긴 여행을 큰 사고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마친 것에 감사해 했다. 학업전선에 예기치 않은 차질들이 와 스트레스와 우울한 기분에 빠져 있던 시절 이 여행은 여러모로 내게 힐링을 시켜줘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해 주었다. 뭐 앞으로 어떤 험한 일이 다가와도 이 또한 부대끼다 보면 알아서 지나가리라 하는 낙관적 환경적응능력을 새로 장착시켜준 것 같았다.
(다음 회에 계속..)
첫댓글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았군요.의외로 아이들이 차안에서 찌증 안내고
잘 견뎌주어서 다행입니다.
그래요.. 상황이 그리되어 지금 생각하면 택도 없는 무리운전의 귀행을 했네요.. 지적대로 아그들이 잘 자주지 않고 칭얼됨을 계속했다면 당연히 어디선가 1박을 했을텐데.. 요놈들이 모두 남아들이라 너무 잘 자줘 무리한 고고씽을 했던 모양임다.
에이..
너무 무지막지한 운전이었쏘...
옛날에 우리 누나에게 들은 얘긴데
한국 아주머니가 여자분들을 여러명 모아서 여행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많이 죽고 다쳤답니다.
이 와중에 운전하던 아주머니도 돌아가셨는데
그 남편되는 분이 자기 아내가 죽은 것도 슬프고
다른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하여 아주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김박 일행은 다행히 아무탈 없이 잘 와서 추억거리가 되긴 했지만...
맞네요.. 올라오면서도 체력이 한계점에 도달할 때는 에이, 어디가서 1박이라도 하고 올라가자 하는 생각이 자주 났지만, 모두 다 차 안에서도 잠들을 잘 자주니 "내가 잠들기 전에 1마일이라도 더 가자" 하는 정신으로 계속 기레이 한거네요.
지금 생각하면 여러 사람의 안전을 위해 있을 수 없는 자기다짐이고 객기였지만, 하늘이 불쌍한 놈 그냥 한번 봐준 덕에 일행들이 무사하게 도착한 것 같았심다. 그 후 두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결심하고 운전에 관한 한 반성의 삶을 살고 있네요.. 요즘은 마누라도 운전 잘하고 해서 어떤 장거리 길에도 최대 1시간 이상은 단독 계속 운전하지 않는 원칙을 준수하고 있심다..
잘 읽었심다. 운전 고생하셨네요.
나도 전에 7박 8일, 10박 11일 하며 광막한 미국 서부를 혼자서 가족만 태우고 장거리 운전을 몇 번 해 봤는데 여기서는 다른 주에 가는 것이 유럽에서 다른 나라 가는 것만큼이나 머니까 돌아오는 길에 캘리포니아에 들어서면 마치 고향에 다 온 듯한 안도감이 들더군요.
헝가리는 본래 조상이 우랄 산맥 쪽에서 온 아시아 관련 종족이라 이야기만 들어도 조금 친근감이 드네요. 비록 성당 건축이나 성곽 같은 외향이나 문화를 보자면 서구나 별 다름이 없지만요.
귀로의 상황 묘사 솜씨가 긴박감을 주는군요. 김박에게는 예사로운 서술 능력일지 몰라도 아무나 그렇게 써 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 법사도 장거리 운전 경험이 있어 대체운전자 없이 혼자서만 단독 주행해야 하는 상황을 같이 겪은 모양이네요.. 야간 장거리 주행한 경우도 제법 있었겠심다. 사실 요럴 때 그간 살아온 자기 삶을 반추하며 미래를 구상하는 생각정화의 기회도 제 경우에는 가져집디다.
미국은 땅덩이가 크니 다른 지역 갔다 목적지에 1,000Km 전방에만 들어서면 사람들이 '다 왔다!'하는 심경이 된다하니 참 그 스케일이 유럽 사는 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달라보이데요.. 먼 다른 주에 갔다가 캘리포니아주만 들어서면 여정이 거의 끝났다하고 여겨진다는 게..
헝가리 주류 마자르인들이 아시아계 훈족의 일파라 합디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여겨지네요.. 몽골족 및 투르크족과도 전투를 통해 많이 조우했을테니 동유럽내에서는 아시아인의 혈통이 가장 많을거라 생각됨다.
귀행길 묘사가 생각하지도 못한 긴박감을 불러일으켰다니 고마운 격려사네요.. 황감하게 접수하겠심다.
@김재민 돌이켜 보니 나는 다른 가족과 번갈아 운전하면서 장거리를 간 적은 없네요. 각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를 몰고 워키토키(김박 이야기에도 나오더구먼요) 들고 간 적은 있지요. 셀룰라폰 이전 시대 이야기입니다.
헝가리인은 훈족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지요. 훈족은 대개 터키계(흉노)로 추정되는데 헝가리인의 조상인 마자르인이 유럽으로 오기 한참 전에 지금의 헝가리 등지로 쳐들어왔다가 멸망 후 소멸했지요.
마자르인과 가장 친근관계에 있는 현존 민족은 우랄산맥의 동쪽, 오브강 중상류에 남아 있는 만시족이지요. 이들의 얼굴이나 체형은 동서양 중간 쯤 되는데 이들의 일파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혼혈하여 현재의 헝가리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빠졌네요.
@이원익 아, 그 옛날 휴대폰이 나오기 전에는 두 서너차로 같이 여행 다닐 때 워키토키가 참 요긴했겠심다. 우리는 다른 가족들과 북유럽 여행 다닐 때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네요.. 서로 콘보이처럼 붙어다녔기에 그런 필요를 못느낀갑심다.
마자르가 훈족의 일파가 아니라니 권위자인 법사의 견해를 접수하겠네요.. 그리고 흉노의 주력민족이 터어키계였다니 그것도 새롭심다. 지리적 분포를 보니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아나톨리 반도) 쪽은 맞는 것 같네요. 그 근처에 있는 페르샤 쪽은 흉노 터어키와 또 다른 민족 분열을 보입디까?
터어키 사람들이 우리를 형제 민족이라 부르는 걸 보면 우리 조상들도 우랄 알타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중국으로부터 동이로 불리워졌을거라 유추됨다. 그렇다면 우리민족도 흉노족의 한 지류였다 여겨도 무방하겠네요.. 갑자기 흉노라는 단어가 우리 편인 것처럼 친숙하게 들림미다.
@김재민 아이고 답신을 늦게 봤네요. 터키족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흉노의 본향은 지금의 외몽고이며 몽고족은 그들의 동북쪽에 살았었지요. 이때는 완전한 동양인들이었지요. 그러다 터키족이 몽고족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해 가면서 확산하고 혼혈하는데 지금의 이란인 페르샤와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거치며 언어와 문화는 유지하되 피는 현지인의 피를 더 많이 받아들여 서양화 되지요. 페르샤와 소아시아의 원주민은 역사시대에는 인도 유럽어를 쓰는 백인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지요. 흉노의 일파가 거꾸로 동진하여 신라의 경주 김씨가 됐다는 설은 개연성이 있습니다만 우리민족의 주류가 흉노족이라기보다는 본래의 한국민족(고아시아족? 알타이족? 미상)에 흉노족 일파가 들어와 지배층이 됐을 수도 있다고 봐야겠지요.
터키를 우리가 걸핏하면 형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일종의 우리 짝사랑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터키인들은 우리보다는 일본을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625 때 참전한 것도 형제를 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터키가 1.2차 대전 때 줄을 잘못 서 손해를 많이 봤는데 극동에 전쟁이 나자 이번에는 실수 없이 빨리 숟가락 얹어서 전과를 제대로 챙기자는 목적이라는 설이 진실에 가깝겠지요.
나성에서 시애틀까지의 거리가 1800키로 정도 되니..1500키로면 매우 먼 거리라 하겠습니다.
그런 귀향 거리를..그대로 달렸으니 중간에 자주 쉰다 하지만..상당히 무리였다 생각되는군요.
저도 나성에서 시애틀을.. 차로 몰고간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1박을 해도 쉽지가 않더군요.
몸이 좀 좋은 젊은 사람들은.. 20시간 연속 운전으로 주파했다는 등의 자랑을 하기도 합디다만-
당시 부다페스트를 목표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신듯 한데..
저도 김창훈 부부와 아리조나 피닉스란 도시를 목표로 세부 계획없이 무작정 떠났다가
운전만 엄청나게 힘들게 한 기억만이 주로 남게 되더군요.
시애틀-LA 구간이 1800이나 된다고요?.. 미국 지도를 보니 능히 그 쯤 될 거리임다. 저가 비행기가 일상화 되기 전 시절이라면 자동차 주행도 이해가 되네요.. 뭐한다꼬 이 노선을 차로 1박까지 하며 다녀왔능교? LA친구들 만나러?..
어제 안그래도 소생은 모처럼 1년 만에 김동조 사장, 성욱조 단장과 세명이서 12시에 가락시장 근처에서 만나 무려 5차까지 자리를 바꾸면서 8시간 반이나 이 아재들 말대로 이빨들 한번 제대로 털고 왔네요.. 특히 어제의 주 이빨털이는 단연 성단장이었심다. 아, 그 자리에 서토도 있어야 했는데.. 리액션의 황제 동조 사장이 옆에서 추임새 끝내주게 넣어주고 해 이 만남자리가 모두에게 코로나 시국의 우울함들을 제대로 털어내는 정화의 자리기도 했심다.
내게도 이빨 털 기회를 줬지만 도저히 그 입담에 쨉이 안돼 보조 파트너의 역할을 전혀 못하니까 성단장이 "니는 글잽이로써 손이나 털어라" 하며 입담경연에서는 자동탈락을 시켜줬심다..혼자서 마이크를 잡고서는 자신의 가족사, 중고교 시절의 화려한 일탈기, 고교 클럽사(옥스포드, 워커스, 무스탕 동시 참여), 교우들 간에 있었던 다양한 스토리를 원도 한도 없이 다 들었네요.
요전의 김박사 요청에 따라..산울림 김창훈에 대한 글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앞전의 본문 글에서는 댓글이 많았던 데다..글이 빨리 뒤로 넘어가게 되어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회가 마땅치 않더군요.
한 때 유명 밴드로써 많이 알려졌던 사람이니만큼..굳이.. 좀 상세하게 관련내용을 풀어볼게요.
김창훈은 애초 나와 전혀 인연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지만.. 식품공학을 전공한
착실하고 실력있는 대학 후배인데다..
같은 직장에 2-3년 후배로 입사하여 우연히 같은 부서에 배치되면서 바로 내 밑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내가 미국으로 발령되자.. 김창훈도 2년 뒤 쯤인가
미국으로 나오게 되어 또다시 함께 근무하게 되었으니..어찌보아..아주 인연이 많은 사람이라 하겠지요.
산울림 밴드와 그 형제들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둘째 창훈씨는 서토와 같은 S대 농대 출신이더만요. 저그 형 창완씨도 같은 출신이었고요.. 아마 그래서 창훈씨가 서토와 학맥으로 좀 알게 된 사이인가 했는데 알고보니 미국지사에서 서토와 사수-부사수의 관계였다하니 더 밀접한 인연의 관계였네요..
사람이 음악만 잘하는게 아니라 직장생활인으로서도 딱 부러진 처신을 했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라 여겨짐다.. 지금도 미국에 거주하는 지 아니면 조기 귀국을 했는지도 궁금하네요.. 예인과 자유영혼 기질이 쫌 있어보이는 서토 외에 체제순응적인 다른 직장동료들과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성은 갖고 있습디까.. 아무튼 흥미로운 인연이었겠심다.
당시 제가 나올 때만 해도 상사 주재원들은.. 일종의 외교관 등급의 비자를 받았으나
이후로 규정이 바뀌어 일반 노동 비자로 바뀌게 되는 바람에
김창훈은 일단 방문비자로 나와서 일하는 중.. 미국에서 노동비자를 다시 획득해야 하는
혼돈된 상황이 되어.. 거의 1년 이상을 가족초청을 하지못하고..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따라서 초기 한두 달 정도는 저의 집에서 함께 지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이상하게도.. 바뀌어진 비자 행정상의 곡절이 많았던 탓인지 아니면 변호사의 업무부실
이었는지.. 비자획득이 계속 늦었졌고 따라서 거의 1년 이상의 기간을..LA 다운타운에서
하숙을 얻어 혼자 생활해야 했습니다. 공연한 고생이 많았지요.
입국 후 거의 1년 반이나 지난 후에야 드디어 부인인 김미회씨 그리고 아들과의 상봉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도 들어 볼만한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지만..주요부분이 아니니..그 내용은 줄일게요.
오, 여기서는 창훈씨가 한달 정도나 서토집에서 같이 기거했다는 사실도 밝혀지네요.. 아니 이 양반은 당시 한참 뜬 산울림 밴드생활에 왜 전념하지 않고 생활인의 길도 선택했는지 그 연유 역시 궁금함미다. (김진회가 한번씩 만나면 지 혼자 썰을 밑도끝도 없이 펼치다가 내가 경청하고 있음을 중간확인 시켜주듯 그 인과관계를 다시 물어대면 '햐, 일마 와 이리 궁금쯩이 요리 많노? 이바구 끊기거로.." 하며 투덜거리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묻고 가야지요..)
뭐할라꼬 그런 고생을 사서 했는지는 모르지만 미모 부인과도 1년 반이나 생이별하며 살았다니 그 애가 탐이 마치 이중섭이 일본으로 부인과 자식을 같이 보낸채 담배갑 은박지에 긴 사연을 깨알처럼 써보내던 그런 심정이었겟다 여겨짐다. 서토가 그 기간에 좋은 보시를 베풀었구려.. 하모, 사람이 당연히 그랬어야제..
김미회씨와 같이 동행했다는 여행기는 특별히 궁금하니 있는 기억 없는 기억 다 짜내어 여기에 한번 읊어주소.. KBS 여앵커 시절 눈에 어찌나 우아하게 비치던지 당시 KBS PD하던 내 대학친구 윤모에게 한번 만남의 자리 부탁했으나 주선 명분이 서로 닿는게 없다고 나혼자 캇트 당한 아픔도 있었심다..
와~1500km 운전! 무사고였던건 天運이었오.
향후 헝가리갈때 좋은 안내서가 되겠지만 갈 가능성은 1%^^
쪼매만 있으면 헝가리,첵코 편도 나옵니다.
그래요.. 사고 안 당한게 진짜 자비로운 부처님 보살핌 때문이라 지금도 믿고 있심다. 헝가리 더 갈 수 없으리라는 예감은 나 역시 같이 갖고 있네요.. 아직 못가봤기에 갈 여건이 되면 눈을 돌릴 최애 후보지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역으로 꼽는 중임다.
@이길영 길영공의 동유럽 탐방기 기대하네요.. 이번에는 너무 빠르지 않는 템포로 연재해 주소..
@김재민 하루살이와 모기가 같이 놀다가 모기가 저녁이 되자 피빨아 먹으려가야 한다고 내일 놀자고
하루살이에게 말하자,하루 살이 하는 말이
"모기야! 니는 좋겠다! 내일이 있어서...!"
@이길영
모기가 하는 말이...
"하루살이야, 니는 내일이 없으니 울매나 좋겟노-
나는 정말 힘들어 죽것다. 내일도 또 피빨아 묵으러 가야댄다." ^^
@김의철 하기사 언제부턴가 저녁에 눈 감으면 아침에 못 일어나면 좋겠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언제 누가 위의 부류에 들어 갈 지는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김박사, 전일.. 서토가 많이 좋아했던 성욱조/김동조 사장과 오붓하게
회동했다니.. 무엇보다 반갑고.. 또한 부럽기가 짝이 없네요.
요즘 워커스 소식이 거의 없기에..모두들 노인 나이에 가까이 접근해가다 보니
기가 빠지고.. 힘도 달리고 해서 그런가 했지요.
성단장의 촌철살인 입담이 아직도 대단하다니..서토의 예상이 많이 틀렸던 모양이며
여전히 대단한 심신의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는듯 하여 더구나 반가운 소식이네요.
이미 세월이 많이 흐른 이야깁니다만..특히 두 분은 이전 한국 방문시에.. 2-3차 까지
자리를 같이 동행해 주었고..
특히 김동조 사장은..당시 굳이 서토를 차에 태우고 변화한 서울 주변을 안내/설명 해주며..
골프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만들어..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었지요.
아, 서토가 예전 2000년대 초중반 우리 홈카밍데이 행사 때와 부친 상 때 한국 들어온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이 두 양반과 만나서 제법 찐한 회포를 푼 적도 있은 모양이네요.. 그저께도 서토 얘기 한 챕터 할애해 제법 나눴심다. 서토는 역시 어디 가나 화제의 인물이 맞습디다.
이 모두가.. 사실, 진정 갚아내고 싶은 추억이라.. 지금쯤의 나이면..이 분들을 초청하여
오레곤 곰사냥도 같이 하고..잘생긴 미국 미녀들을 옆에 앉혀 ,즐겁고 흥겨운 시간을
함께 하는 일정을 당연히 잡을 만도 하겠거늘...
우짜다 보니..아직까지도 생업에 헉헉대야 하는 바람직 하지못한 상황에 머물러 있어..
참으로 스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기분에 젖는 경우가 잦습니다.
마침 이 두 분의 소식을 듣자니..그러한 간간한 생각이.. 문득 다시금 나게 되는군요.
두 분께 안부전해 주시고..언젠가..
김박사와 더불어..함께 자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계속 노력하겠슴미다.^^.
오레곤에서 곰사냥이란 게 요즘은 사라진 이벤트겠지요?.. 우리 복날에 개고기 파티하며 수십만 마리 견공들을 도살하는 것이 이제는 야만적인 풍습이라해서 점점 음성화되듯이 말임다.
미국 본토산 미녀들보다 세계 각지에서 이민온 미녀들과 어울려 우리 룸살롱 같은 데서 술판 대접한다면 그 경비가 서토 한달 생활비가 날아갈 판 아임미까.. 그럴 각오까지 되어있다는 맘만 전하고 행여나 객기는 부리지 마소.. 두 아재들도 충분히 이해할 것임다..
지박사는 술담배 예전부터 전혀 안하는 독실한 양반이라고 두 아재가 확인해 주던데 그 말도 신기합디다. 고교, 대학시절에도 그랬는지.. 나는 그저께 두 아재가 어찌나 맥주, 소주를 호탕하게 마시던지 무알콜 맥주 갖고 오지 않은 김에 맥주 한 서너컵, 소주는 근 10년만에 2잔이나 받아마셨네요. 입담 분위기 망치지 않기 위해.. 모처럼 알콜이 들어가니 중간에 좀 졸리기는 합디다만 그리 큰 부작용은 못 느꼈심다.
저도 장거리 운전 혼자서 많이 했습니다만,원칙을 사전에 세웁니다.
코스에 따라서 구경을 하는 코스가 있고, 그냥 이동을 하여야 할 코스가 있습니다만, 물론 마누라 컨디션을 생각해서
그렇게 정하였지만, 오전 오후 각각 2시간 운전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평균 하루 평균 주행 250킬로 정도 ,최대 300킬로 단위로 숙소를 정합니다.
만일 무리가 있으면 여행은 당장 그만 두어야 하기 때문에 컨디션 안배를 해야합니다.
이렇게 하면 3-4주 혼자 운전해도 괜찮습니다.
여럿이 교대로 운전을 한다하더라도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길영공, 좋은 장거리 운전 습관 가졌구료.. 그래도 핸들 잡으면 2시간까지 가능하다 하니 나보다는 아직 생생한 듯 하요.. 나도 본 습관을 참고해 체력안배에 더 신경을 쓰리다. 마누라가 2시간 내가 1시간 하는 주행 원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