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재다 외 1편
박설희
브래지어 사러 왔는데 치수를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눈대중으로 얼추 비슷한 치수의 것을 들고 성큼 일어선다
양팔을 들게 하고 브래지어로 내 가슴 치수를 잰다 나도 모르는 내 가슴의 치수를 잰다 줄었다 늘었다 어떨 땐 콩알만 했다 어떨 땐 듣도 보도 못한 공간으로 휙 날아가 버리는 내 가슴을 잰다 내 가슴 크기를 나보다 더 잘 안다고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며 사양해보지만 막무가내, 평생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느라 살가죽에 가까워진 젖가슴으로 당당히 서서 내 가슴 크기를 잰다 당신 가슴은 얼마라고 숫자를 댄다
황송히 그 숫자를 받아들고 아, 내 가슴이 이만하구나 그런데 큰 건지 작은 건지 기준치를 몰라 쩔쩔매다가 생각해보니 가슴 크기의 평균이 뭐가 중요하랴
내게 딱 맞는다며 자신 있게 내미는 브래지어를 웃음으로 받아 들고 돌아서려는데 주변 노점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원 남문시장의 가슴들이 다들 깔깔 웃는다 빈 가슴으로 웃는다 비워서 충만해져서 웃는다
사과를 베어 물다
사각, 밝게 웃으며 한 입 베어 문다
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잖아, 온통 헐은 대장 어디선가 피가 터져 발만 동동 구르는데 급사할 수도 있다고
과육이 으깨지는 소리가 나며 입 주위로 과즙이 번진다
응급실이든 중환자실이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상이야, 어제도 의사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어
창백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들며 혀와 말의 길이 부드럽다
바로 옆 침대가 비어 있어서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갔다고 그래, 집에 갔느냐고 했더니 돌아갔다고, 처음 온 곳으로 갔다고
입 안 가득 베어 문다, 대학병원에서 혈액암으로 이 년째 투병 중인 아이를 둔 엄마가 희망을 베어 물 듯 사각사각 맛나게 사과를
사과는 줄어들고 입 안의 물기는 많아지고 사과향이 점차 주변에 퍼지면서 으깨지는 사과는 말이 되고, 활기가 되고, 희망이 되어 스며들고
어제도 같은 중환자실에서 둘이나 갔지만, 그래도 우리 애는 살아 있어
멍든 것처럼 시퍼런 사과를 마지막으로 베어 물고 으적으적 씹다가 꿀꺽 삼키고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며
박설희
강원도 속초에서 유년을 보내고 2003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슴을 재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