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강집(蓮江集)은 조선시대 문신·학자 오정남(吳挺男, 1566∼1626)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4년에 간행한 시문집으로 3권 1책의 목활자본이다. 1914년 후손 기선(琪善)·재언(在彦)·계수(繼洙)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기선·재언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63수, 권2는 제문 1편, 서(書) 1편, 소 2편, 권3은 부록으로 뇌사(誄辭) 1편, 가장 2편, 행장 1편, 묘갈명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 율시로서 친구와 화답한 것이 많다. 오언배율의 「수은강항만(睡隱姜沆挽)」은 강항에 대한 36수의 만시로, 당시의 병란을 회상하며 그의 충절의 행적을 읊은 것이다.
「송최일옹소(訟崔逸翁疏)」는 상벌제도의 의의를 논하고, 흥양병사 최희량(崔希亮)이 임진·정유의 왜란 때에 10여회나 전공을 쌓은 사실이 뚜렷함에도 보훈이 없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므로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만언소(萬言疏)」에서는 토목의 폐해, 과거의 폐단, 변비의 급무, 병제의 문란, 양전(量田)의 잘못, 두미법(斗米法)의 제정, 향약의 시행 등 7개조의 시무를 개진하였다.
오정남(吳挺男)의 자는 영연(英蓮), 호는 연강(蓮江),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경차관(敬差官) 오세상(吳世相)의 증손으로 나주 곡강리(羅州 曲江里)에서 오천수(吳天壽)의 아들로 출생했다.
정유왜란(丁酉倭亂)에 소의장(昭義將) 임환(林歡)과 함께 창의하여 순천 예고(曳槁)에서 전공을 세우고 인조(仁祖) 2년 1624년 이괄의 난에 참봉(參奉) 진경문(陳景文), 지평(持平) 임위(林瑋) 진사(進士) 행유(幸惟) 등과 함께 양곡을 모아 관군을 도와주었다. 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우비(優批)를 받았다.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증하였다.(호남절의록) 그 공으로 의금부제사(義禁府諸事)에 제수되었다.
그의 유집 연강집(蓮江集)이 남아 있으며 서는 기우만序(奇宇萬 1914)이 쓰고 오계수(吳繼洙 1914),오재언( 吳在彦 1914), 오기선(吳琪善 1914)이 썼다.
나주 창랑정(寄滄浪亭主人), 백화정(過百花亭墳), 벽오정(題李士華碧梧亭), 경렴당(寄柳進士景濂堂韻), 풍영정(次風詠亭韻) 등에서 시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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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9년 정사(1617) 7월 13일(을해)
09-07-13[08] 정원이 오정남ㆍ나의소 등을 탄핵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국가가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도를 높이고 어진이를 떠받드는 길뿐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은 문장과 도덕이 실로 백세의 사표(師表)인 바, 다섯 현신들과 더불어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성스러운 세상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유생 박문환(朴文煥) 등이 스승을 떠받드는 의리를 분발해서 먼길을 달려와 진소하여 경현서원(景賢書院)에 배향(配享)하여 본보기로 삼을 수 있도록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상께서 그들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는 바, 이는 실로 사림의 크나큰 다행입니다.
지금 오정남(吳挺男)ㆍ나의소(羅宜素) 등이 무뢰한 자들로서 이에 감히 선현을 무고하면서 평생동안 하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었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하는데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심지어는 박문환 등의 유적(儒籍)을 불태워 성명을 삭제하면서 스승을 떠받드는 거조를 저지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흉악하고도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흉도들이 선현을 무고하고 사림을 무함하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 바, 신들이 가까이서 모시는 직책에 있으면서 감히 입다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이 상소와 계사를 해조에 내려서 회계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 다섯 현신 : 조선조의 뛰어난 유학자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蠧)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킴.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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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 광해군 9년 정사 > 7월 19일 > 최종정보
광해군 9년 정사(1617) 7월 19일(신사)
09-07-19[01] 사헌부가 어진이를 무함하는 것에 대한 정죄를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의 급선무는 어진이를 떠받드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실로 사습(士習)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사습이 바르게 된 뒤에야 치도가 융성해지는 법입니다.
선정신 조식은 시골로 물러나 은거해 있으면서 도와 덕을 이루고 세워 한때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후학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에 성조(聖朝)에서 표창하여 시호를 내리고 관작을 올렸으며, 사문(斯文)이 흥기되고 다사(多士)들이 고무되어, 종사(從祀)하라는 청을 이미 진달하였으며, 배위(配位)에 올리라는 명이 곧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괴귀(怪鬼)스러운 무리들이 감히 사사로운 싸움을 가지고 선현에게까지 욕을 미치게 해, 거짓을 날조하여 헐뜯음이 끝이 없습니다. 이미 유생의 상소를 배척하고 또 원적(院籍)을 불태웠는바, 인심이 나쁨에 대해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런데도 치죄하지 않는다면 선비들의 습속이 바르지 않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어진이를 떠받드는 실제가 미진하게 되고 다스리는 방도가 어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속히 오정남(吳挺男)과 나의소(羅宜素) 등이 선현을 무고한 죄를 바루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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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득록(愚得錄) 해제
구성과내용
부록은 2권으로, 상권은 世系와 困齋先生事實이라고 명명된 연보인데 저자의 사후 黨爭의 부침과 함께 끊임없이 전개된 신원운동과 서원의 폐치, 문집 간행 사실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하권은 羅宜素가 편차한 것으로 추정되는 行狀과 眉叟 許穆이 찬한 困齋先生傳이 실려 있다.
困齋先生愚得錄附錄下 / 困齋先生行狀
先生生于嘉靖己丑。卒于萬曆庚寅。壽六十有二矣。此狀未知出於何人。或云正郞羅宜素編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