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宗 32년
〈무오〉 32년(1078) 봄 2월 병진 연등회(燃燈會)를 열었는데, 한식(寒食)이었기 때문에 3일 앞서 거행하였다.
여름 4월 을사. 우원령(禹元齡) 등을 급제시켰다.
갑자. 송(宋) 황제의 생일이므로 동림사(東林寺)와 대운사(大雲寺) 두 사찰에서 축수재(祝壽齋)를 열었다.
신미, 송(宋)의 명주교련사(明州敎練使) 고윤공(顧允恭)이 첩(牒)을 가지고 와서 보고하기를, 송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통신(通信)할 뜻이 있다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송에서 외역(外域) 고려(高麗)에 사신을 보내리라 어찌 기대하였겠는가? 과인(寡人)은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다. 무릇 접대를 담당한 모든 관원은 각각 직책을 잘 거행하여, 객사관에서 대우하는 일에 실수함이 없도록 하라. 부지런하고 공손하여 능력이 두드러진 자는 당연히 관직을 높일 것이고, 게으르고 용렬하여 과실이 있는 자는 특별히 강직 또는 파직을 적용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5월 경자. 공부상서(工部尙書) 문황(文晃)과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사훈(崔思訓)에게 송(宋) 사신을 안흥정(安興亭)에 맞이하게 하였다.
6월 갑인. 송(宋) 국신사(國信使)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와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 등이 예성강(禮成江)에 도착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 노단(盧旦)에게 명령하여 동반[筵伴]이 되어 서교정(西郊亭)에 이르게 하였고, 또 그 다음에는 중추원사 형부상서(中樞院使 刑部尙書) 김제(金悌)가 동반이 되어 순천관(順天館)에 들게 하였으며, 그리고 지중추원사 호부상서(知中樞院事 戶部尙書) 김양감(金良鑑)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양신(李梁臣)을 사신 접대를 위한 관반사(館伴使)로 삼았다.
정묘. 태자(太子)에게 명령하여 순천관(順天館)에 나아가 송(宋) 사신을 안내하게 하였다. 〈송 사신이〉 창합문(閶闔門)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회경전(會慶殿) 뜰로 들어오자, 왕이 마침 병환으로 좌우가 부축하여 나와 조서(詔書)를 받았다. 〈송 황제가〉 조서에서 이르기를,
“경(卿)은 대대로 많은 복록[百祿]을 받아서 삼한(三韓)을 편안하게 하고, 의(義)를 사모하고 앙모하며 오로지 조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배[方舟]로 조공하기 위해 여러 번 강과 바다의 깊은 곳을 건너왔다. 이에 예의 바르고 온순한 정성을 갖추었으므로 마땅히 칭찬하는 은사를 입어야 할 것이며, 특별히 사신을 달려 보내 나의 뜻을 밝히니 멀리서 그대의 명철함을 생각할 때 마땅히 나의 특별히 우대함을 체득할 것이다. 이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와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보내 그대에게 국신물(國信物) 등을 보내고, 별도의 목록을 같이 갖추었으니 도착하거든 수령하라.”
라고 하였다. 보낸 것으로 국왕의(國王衣) 2대(對)는 각각 금은 잎사귀로 장식한 칠갑(漆匣)에 담았는데, 1대에는 자주빛 꽃무늬 비단 겹 공복 1령(領), 옅은 색 꽃무늬 비단 한삼(汗衫) 1령, 붉은 꽃무늬 수놓은 비단 겹 삼첨(三襜) 1조, 붉은 꽃무늬 수놓은 비단 겹 포두(包肚) 1조, 붉은 꽃무늬 수놓은 비단 허리띠[勒帛] 1조, 백면(白綿)으로 짠 비단 겹 바지[袴] 1요(一腰)가 들어 있었다. 장화[靴] 1량(緉)은 홍투배대(紅透背袋)에 넣어 수놓은 붉은 비단 겹보자기 2조로 쌌으며, 요대(腰帶) 2조는 각각 홍투배대에 넣어 수놓은 비단 보자기 1조로 싸서 도금한 갑(匣)에 담았다. 1조에는 옥(玉) 16도(稻), 누진(鏤塵)‧백희(百戱)‧해아(孩兒)‧두미(頭尾) 등 모두 열 가지이며, 대모(玳瑁)를 장식하고 금띠를 두른 붉은 가죽에 못[釘]을 쳤다. 다른 1조에는 투서(透犀)가 17도, 두미 모두 열 가지이며 대모로 장식하여 금띠 두른 붉은 가죽에 못을 쳤다. 말이 4필인데, 1필은 금은으로 황홀하게 장식하고 불룩 솟게 만타라(蔓陀羅) 꽃을 아로새긴 장식품과 수놓은 자색 비단 안장, 겹가죽 언치[革毚], 가슴걸이[纓]를 자루에 넣어서 한 데 쌌다. 1필은 금은으로 황홀하게 장식하고 불룩 솟게 보상화(寶相花)를 아로새긴 장식품과 쑥빛처럼 푸른 비단에 수놓은 안장, 겹가죽 언치, 가슴걸이를 자루에 넣어 한 데 쌌다. 1필은 금은 실로 술을 드물게 달고 불룩 솟게 만타라 꽃을 아로새긴 장식품과 가슴걸이, 고삐[轡], 자색 비단 깔창[屜] 등이 들어 있었다. 1필은 금은 실로 술을 드물게 달고 불룩 솟게 보상화를 아로새긴 장식품과, 가슴걸이, 고삐, 쑥색 푸른 비단 깔창 등이 들어 있었다. 채찍[全鞭] 2조는 각각 수놓은 자색 비단 자루에 넣었는데, 1조는 대모이고 〈다른〉 1조는 녹아(碌牙)였다. 금으로 꽃을 새긴 은그릇이 2,000냥, 분(盆)이 10면(面), 뚜껑 있는 완[盖椀]이 10부(副)인데 매부(每副) 2개씩이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천금(川錦)이 100필인데, 가는 열선(列仙)이 5필, 천하악훈문(天下樂暈文)이 5필, 잡화훈문(雜花暈文)이 5필, 가는 합라운안(合羅雲鴈)이 5필, 가는 반구운안(盤毬雲鴈)이 10필, 가는 찬안운지(欑鴈雲地)가 10필, 굵은 족사금조(簇四金鵰)가 10필, 굵은 취모사자(翠毛獅子)가 10필, 굵은 황사자(黃獅子)가 20필, 굵은 보소(寶昭)가 20필이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꽃무늬 비단이 100필인데, 명황(明黃)이 10필, 남황(藍黃)이 10필, 연분홍[淺粉紅]이 10필, 진분홍[深粉紅]이 10필, 행황(杏黃)이 10필, 치황(梔黃)이 10필, 옅은 색깔이 10필, 매홍(梅紅)이 10필, 자주색이 10필, 운벽(雲碧)이 10필이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릉(大綾)이 100필인데, 명황이 10필, 남황이 20필, 연분홍이 10필, 진분홍이 10필, 행황이 10필, 치황이 10필, 옅은 색깔이 10필, 매홍이 20필, 자주색이 10필, 운벽이 10필이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소릉(小綾)이 200필인데, 명황이 20필, 남황이 20필, 연분홍이 20필, 진분홍이 20필, 행황이 20필, 치황이 20필, 옅은 색깔이 20필, 매홍이 20필, 자주색이 20필, 운벽이 20필이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꽃무늬 사(紗)가 500필인데, 명황이 50필, 남황이 50필, 연분홍이 50필, 진분홍이 50필, 행황이 50필, 치황이 50필, 옅은 색깔이 50필, 매홍이 50필, 자주색이 50필, 운벽이 50필이었다. 백초(白綃)는 2,000필이었다.
별도로 보낸 것으로 용봉다(龍鳳茶)가 10근인데, 매 근을 금은으로 도금한 죽절합자(竹節合子)에 넣어 명금(明金) 5채(綵)로 장식하고, 요화판주칠갑(腰花板朱漆匣)에 담아 붉은 꽃무늬 비단 겹보자기로 쌌는데 용다(龍茶)가 5근, 봉다(鳳茶)가 5근이었다. 살구씨[杏仁]로 빚은 법주(法酒)가 10병인데, 각각 금은으로 도금하고 꽃무늬를 아로새긴 병에 넣어 명금 5채로 장식하고, 요화판 주칠 녹자(盝子)에 담아 붉은 꽃무늬 비단 겹보자기로 쌌으며, 금을 아로새긴 붉고 누런 녹아박판(碌牙拍板)이 10관(串)인데, 각각 매홍과 용지(茸枝)에 금은으로 도금한 탁자(鐸子)를 달고 살아있는 색깔의 금박 자루에 넣어 명금 5채로 장식한 요화판주칠갑 2구(具)에 담았다. 붉고 누런 아적(牙笛)이 10관인데, 각각 금은으로 도금한 실[絲]로 감고 살아있는 색깔의 금박 자루에 넣어 명금 5채로 장식한 요화판주칠갑 2구(具)에 담았다. 붉고 누런 아박판(牙拍板)이 10관인데, 각각 금은으로 도금한 실[絲]로 감고 살아있는 색깔의 금박 자루에 넣어 명금 5채로 장식한 요화판 주칠갑 2구에 담았다. 용봉촉(龍鳳燭)이 20대(對)인데 용촉이 10대, 봉촉이 10대이며 각각 붉은 비단 자루에 넣어 명금 5채로 장식한 요화판 주칠갑 4구에 담았다.
왕이 조서를 맞이하여 예식을 마치고 나서 좌우 관료에게 말하기를,
“황제 폐하께서 작은 나라를 잊지 않고 멀리 대신(大臣)을 보내 특별히 후하게 하사함을 보일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영광스럽고 감사함이 지극하나, 삼가 두려운 것도 실로 많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여러 신료를 거느리고 하례한다고 말하였고, 동서(東西) 2경(京), 동북양계병마사(東北兩界兵馬使), 8목(牧), 4도호부(都護府)도 또한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하였다. 태자에게 명령하여 건덕전(乾德殿)에서 송 사절단을 위해 잔치를 열게 하였다.
가을 7월 을미. 안도(安燾) 등이 귀국하였다. 왕이 표문(表文)을 붙여 사례하고, 또 스스로 풍비증(風痺症)이 있음을 말하며 의관(醫官)과 약재를 요청하였다. 당시는 송(宋)과 단절한지 오래되었는데, 안도(安燾) 등이 처음 오게 되어 왕과 국민이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전례에 따라 의대(衣帶)와 안장 달린 말[鞍馬]을 기증하는 것 외에도 선물한 것이 금은보화와 미곡(米穀)과 여러 물품 등이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갈 때에 배에 다 싣지 못하므로 〈그들이〉 받은 물건을 은으로 바꾸기를 요청하니,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청을 들어 주라고 하였다. 안도(安燾)와 진목(陳睦)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날마다 공급하는 음식을 줄여서 값을 깎아 은으로 바꾼 것도 매우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랑(侍郞) 여단(呂端)이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간 뒤로 중국의 사신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사신이 왔다기에 높은 절개를 우러러 보려고 했더니, 그 하는 짓이 이와 같을 줄은 몰랐다.”
라고 하였다.
이 달에 흥왕사(興王寺) 금탑(金塔)이 완공되었는데, 은으로 내부를 만들고 금으로 표면에 입혀서 은이 427근이고 금이 144근이 사용되었다.
9월 계유. 초하루 일본국(日本國)에서 탐라(耽羅) 표류민[飄風民] 고려(高礪) 등 18인을 돌려보냈다.
갑오.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팔조음부곡(八助音部曲)은 성(城)이 바닷가 평지에 위치하여, 여러 번 동로(東路) 해적의 침범을 당하여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요청하건대 그 성을 옮기게 하십시오.”
라고 하자, 제서(制書)를 내려 이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여진(女眞)의 고마수(高麻秀) 등 40인이 내투(來投)하자, 남쪽 지역의 주현(州縣)에 살게 하였다.
겨울 10월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마리해(麻里害) 등 23인이 내조(來朝)하자, 이름을 고쳐주고 관직을 하사하였다.
11월 정유. 요(遼)에서 선사사(宣賜使)로 익주관내관찰사(益州管內觀察使) 야율온(耶律溫)이 왔다.
12월 신축. 초하루 요(遼)에서 위위경(衛尉卿) 여사안(呂士安)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