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목차
1. 함몰 웅덩이 증상
2. 조정실에서 보는 시각
3. 황금새장에 갖혀서
4.어느 성공못한 못난이의 불행한 이야기
5.부름받은 사람으로서의 삶
6.누가 내 시간 본 사람없어요?
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더 뛰어난 사람이 패했다
9.한번도 읽힌 적이 없는 책의 비극
10.마음의 정원에 질서를
11.외부의 어떤 받침대도 필요치 않다
12.모든 것은 입력되어야 한다
13.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어진 안목
14.여가 이상의 휴가
고든 맥도날드 :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홍화옥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0.
서 문
서구 사회에서는 수많은 책들이 발간되었지만 내면적이고 영적인 세계에 질서를 세우는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책은 별로 없다. 이 책은 내면 세계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가장 잘 깨닫도록 허락해준다. 본 저자가 내면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서 우리의 긍지가 형성될 뿐만 아니라 동기와 가치관 그리고 헌신에 대한 기본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며, 바로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거하심과 그 결과로서 세워지는 모든 질서에 대항한다. 죄는 무질서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릇된 동기와 가치가 무질서 안에 은거해 있다가, 방심한 찰나 그 모습을 표면에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그 죄를 내보는 방법에 대해서 쓰고 있다 :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그 원칙 위에서만 내면 세계의 질서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 명백히 밝히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초청과 위탁에 의하여 우리 삶 속에 신비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들어오신다. 각자는 개인적인 삶 속에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그 분께서 다스리도록 요청하는 것이
본 저자는 내면 세계를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다.
1)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행동을 하게 하는가 하는 동기 부여의 문제이 다. 즉 우리는 시대적인 풍조에 밀려 무엇엔가 늘 쫓겨다니는 사람(driven people)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겠다고 주님이 약속하실 때, 그 분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부름 받은 사람(called people)인가?
2)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개인적인 성장과 이웃에 대한 봉사.
3) 지적인 면이다. 창조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논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놀랄 만한 능력을 우리의 마음이 소유하고 있는데, 그 마음을 가기고 무 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4) 영적인 부분이다.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특별하고도 은밀한 영적인 대화이다. 작가는 그 영이 머무는 곳을 "내면 세계의 정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5) 우리 안에는 우리로 하여금 안식 혹은 안식일의 평화로 이끄는 부분이 있다. 이 기쁨은 비가시적 부분이다.
마침내 책 전반에 걸쳐서 작가는 내면 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고 있다.
1) 나의 내면 세계를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 영역인 내 면 세계가 행동 영역인 외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나의 내면 세계를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러한 질 서로운 상태를 지키기로 매일같이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 방식이 아닌 무질서했던 과거로부터 형성되었던 방식을 따라 살 려는 경향이 내게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4)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를 재촉하여 몰아대는 것에 감연히 맞서서 주님의 부르심에 조용히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5)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나 의 목적, 역할, 신분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청지기로서 여기고 있 기 때문일 것이다.
6)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시간을 하 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신중하게 사용하려는 결심을 매일매일 하기 때문이다. 7)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내 능력과 한계와 우선 순위에 준해 일할 수 있는 있는 시 간을 할당하기 때문이다.
8)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날마다 지 식과 지혜 안에서 성장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9)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사용하려고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10) 만약 나의 내면 세계가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늘 나의 영적 중심부를 드넓히기로 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11) 만약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갖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2)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 씀이 나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13)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 의 눈을 통하여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는 훈련에 임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나의 기도는 그분의 계획과 약속의 말씀에 맞추어지길 원하는 나의 갈망을 반 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4) 만일 나의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 제정하신 안식을 발견하기 위하여, 매일의 분주 한 일상 생활 속에 안식일적 평화를 굳게 붙잡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15) 나의 내면 세계를 질서 정연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질서 잡는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하기로 기꺼이 결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함몰 웅덩이 증상 (The Sinkhole Syndrome)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함몰 웅덩이와 같이 무너져 내리려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피곤으로 무감각해진 느낌, 실패감,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때 내부에서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삶 전체가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 갈 것 같은 붕괴 직전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 점은 바로 내적 영역(inner space), 즉 내면 세계(private world)에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문제는 내면 세계가 극도로 혼란 되거나 약해져 있는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함몰적 웅덩이 증상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잇는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1) 내적 영역(inner space) = 내면 세계(private world) : 우리의 내면 세계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부분이다. 이 세계는 선택과 가치가 결정되는 중심부이며 고독과 성찰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 곳이야말로 예배와 신앙 고백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세상의 도덕적, 영적 공해가 침투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곳이다.
2) 외면 세계(outer world) = 공적 세계(public world) : 우리의 내면 세계 보다도 다루기가 더 쉽다. 이 세계는 측정할 수 있고 눈에 보이며 계속 늘려 갈 수 있는 세계이다. 외면 세계는 일, 오락, 소유 그리고 대인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성공이라든가 인기, 재물, 미모 등으로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이 공적 세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많은 충성심과, 물질과 정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우리의 바깥의 공적 세계는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고, 또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 유혹과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행동하도록 하기 위하여 소리친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 세계는 외적 세계만큼 큰 소리로 외치지 않기 때문에 도외시되고 무시된다. 이 내적 세계는 '함몰 웅덩이'처럼 무너져 내릴 때까지 쉽게 무시된다. 윌리암 바클레이가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고백을 보자 :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의 주심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다. 무서운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은 끝나 버렸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다"라는 와일드의 표현은 내면 세계가 흔들림으로써 삶이 무너져 버린 사람의 모습이다. 즉 인간사의 극단적인 단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내면적인 존재"를 무시해 버린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의 하나는 각 사람의 내면 세계이다. 특히 자신을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사람들은 이 싸움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내면 세계를 갈고 닦아야 한다 :
"다른 어떤 위대함보다도 영혼의 위대함을 생각하고, 다른 것의 부함보다 마음의 부함을 생각하라."
2.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
배의 운명을 결정짓는 곳은 잠수함 내부에 있는 조용한 장소이다. 따라서 함장이 본능적으로 들여다보는 곳도 바로 그 곳이다. 그러나 승무원 중 누군가가 배의 안전을 돌보는데 소홀히 한다면 그 잠수함은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배가 부서져 가라앉아 큰 손실을 입게 된다. 내면 세계의 '조종실'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에게도 그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법이다. 내면 세계의 조종실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신경 쇠약, 정신 파탄, 자아 붕괴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종실에 아무 이상이 없다면 배는 아무리 거친 환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단련되고, 성숙한 성품을 갖게 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부 압력을 견뎌 내기 위한 원천이 내부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나 실패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갈릴리 바다에서 어느 날 오후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자들이 곧 공포에 질린 채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그래서 배 뒤쪽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에게 달려와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폭풍우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신 후 제자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개인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즉 바꾸어 말하면 "왜 너희 내면 세계의 조종실은 질서가 잡혀 있지 않느냐?"
우리는 내면 세계보다 삶의 외적인 부분의 온갖 소소한 데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내면 세계는 우리가 어떤 외부의 폭풍이라도 헤치고 파쇄할 수 있는 힘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데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성경 기자들은 조종실로 가야 한다는 원칙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내면 세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일이 최우선적인 것을 알고 또 그대로 가르쳤다. 창조주는 우리가 내면 세계로부터 외면 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능률적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잠언의 한 기자는 내면 세계의 원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 : 23)
작가가 조종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서는 "마음"으로 표현되었다. 잠언의 기자는 마음을 근원으로 보았고, 그 곳으로부터 생명의 샘이 솟아나서 나와 다른 이들이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의 순전함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삶에 질서를 가져오는 마음의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삶의 조종실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훈련된 선택이 요구되어진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로 결정해야 한다. 마음의 건강과 풍요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을 끊임없이 보호하고 지켜 갈 때만이 가능하다.
신약성경에서 바울도 같은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다. "여러분은 이 세대의 풍조(외면 세계)를 따르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 12:2)
즉 외면 세계를 본받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 필립스(J.B. Phillips)는 사도 바울의 이 말을 "세상에 너희를 그 틀 속으로 밀어 넣지 못하게 하라"라고 풀이했다. 바울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말하였다. 그는 올바른 선택이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 세계에 질서를 잡음으로써, 외면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는가? 아니면 내면 세계를 소홀히 함으로써 외부 세계로 하여금 우리의 모습을 결정짓도록 하려는가? 매일같이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작가가 여기서 해군 용어로 '조종실'이라는 부르는 말은 성경적인 용어로 '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 안에 질서 정연하고 고요한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곳으로부터 외부의 소란을 극복하고, 그 소란에 의해 위축되지 않는 힘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강한 내면 세계의 계발과 유지가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3. 황금 새장에 갇혀서
사람의 내면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시작하셨을 것으로 보이는 곳으로부터 시작했다. 즉, 부름 받은 사람과 쫓겨다니는 사람(driven men)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쫓겨다니는 사람들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 쫓겨다니는 사람은 오직 성취함으로써만 만족을 얻는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삶을 오직 결과의 측면에서만 보며, 그 결과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성취 지향적인 사람에게는 도착만이 전부일 뿐 여행 자체는 무의미한 것이다.
2) 쫓겨다니는 사람은 성취의 표상들에 집착한다.
그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늘 의식하고 그것을 휘두르기 위해서 소유하려고 애쓴다. 쫓겨다니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평판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된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누가 알아 줄 지, 또 어떻게 하면 자기 분야의 높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데 관심을 둔다.
3) 쫓겨다니는 사람은 보통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신의 현상태나 종교적 활동에서 자신이 성취한 것에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영적인 면에서 끌려 다니는 사람이다. 그는 더 능률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깊은 영적 체험들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조바심 가운데 산다.
4) 쫓겨다니는 사람은 전인적(全人的)인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성공이나 성취에 너무 골몰해 있기 때문에 이를 잠깐 멈추고 자문해 볼 시간조차 없다. 따라서 그들은 전진하려는 욕구 때문에 동기에 대해서 스스로를 속인다. 즉, 그들은 가치와 도덕성이 현실과 적당하게 타협하게 되며, 성공의 지름길이야말로 삶의 방식이 되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목표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윤리적 타락도 감수하게 되어 무서울 정도의 지나친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5) 쫓겨다니는 사람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서툴고 미숙하다.
그들의 시선은 목적과 목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목표 달성에 이용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별 쓸모없이 보이면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그들은 장애물이나 경쟁상대로만 여겨 버린다. 따라서 쫓겨다니는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생자의 행렬이 있기 마련이다.
6) 쫓겨다니는 사람들은 아주 경쟁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승패를 가르는 게임으로 본다. 그리고 쫓겨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꼭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능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7) 쫓겨다니는 사람은, 반대나 불신에 부딪히게 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 는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분노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닐 수도 있다. 그 대신 인격을 모독하거나 수치스러운 모욕감을 주는 것과 같은 잔인한 언어적 폭력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8) 쫓겨다니는 사람은 대개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그들은 바쁘다는 평판이야말로 성공과 자신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증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 틈없이 꽉 짜여진 스케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이려 한다. 그들은 바쁜 것이 습관이요,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바쁘다고 투정하고 동정을 받기를 즐기면서도 사실상의 변화는 아마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쫓겨다니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들에게 결정권이 있는 그러한 체제를 만들어 왔다. 그러한 체제를 가진 사업계, 교회, 가정 안에서 사람들의 성숙은 성취와 축적을 위해서 희생되는 것이다. 쫓겨다니는 목사들은 제일 크고, 제일 좋고, 가장 유명한 조직체의 장이 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에, 수많은 부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일에 지쳐 쓰러지도록 혹사시킨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노라고 자처하고 교회에서 은혜스럽다는 평판을 받지만, 회사에서 인정머리 없을 정도로 가혹한 사업가들도 있다.
이처럼 쫓겨다니는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굉장한 것들을 얻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고 있었다. 그들이 내면 세계는 무질서하다. 그가 갇혀 있는 새장은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꾸며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덫이다. 그 덫 안에서는 아무것도 견뎌내지 못한다. 따라서 강력한 내면 세계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
4. 어느 성공한 못난이의 불행한 이야기
어떤 자가 자기 아버지가 붙여준 '못난이'라는 평판을 반증하려는데 자신을 온통 바쳤다. 그는 내면 세계에 질서라곤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일은 외적인 것뿐이었다. 그도 인정하는 바대로 여러 복잡한 사업 활동과 부의 축적이 삶의 전부였다. 그는 어떤 일을 해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하든지 더 크게 되어야 하고 더욱더 강렬한 것이어야만 했다. 무엇이 그에게 충동질하고 있었을까? 과연 그의 내면 세계에 질서라는 것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의 목표는 모두 외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내면 세계를 가꾸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영적 건강은 중요치 않은 것이었으며 육체적 건강만이 중요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가족을 물질적으로 잘 부양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아버지의 칭찬과 인정이었다. 어떻게 해도 기뻐하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는 작고했는데, 중년이 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아직까지도 기를 쓰고 있는데, 처음에 그저 하나의 목표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고칠 수 없는 생활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왜 쫓기는 삶을 사는가?
그는 결코 '잘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난 유형의 사람이다. 인정과 칭찬이 결핍되었을 때에, 존경받는데 굶주린 사람들이 일을 더 많이 하고 성공한 인물임을 상징하는 것들을 더 많이 갖고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성장 배경과 불안정감을 공통적 으로 가지고 있다. 그들의 추구는 공적인 세계에 국한된 것으로 개인적인 내면 의 세계는 텅비고 결핍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 과도한 성취욕의 또 다른 원인은, 어린 시절 체험한 심각한 상실감이나 수치 감에 있다. 그들은 친밀한 부모의 사랑과 정서적인 친근감의 결핍 상태에서 자 랐기 때문에 많은 군중에 둘러 쌓이는 보상적 경험을 추구했을 수도 있다. 그 러므로 그들은 내면 세계에 질서를 잡음으로서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 지 않고, 외면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선택하였다.
3) 쫓겨다니는 사람은 또한 극도의 수치심과 안절부절함 속에서 보냈던 성장 배 경을 갖고 있다.
4) 어떤 사람들은 그저 쫓기는 것이 생활 방식이 된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 도 있다. 그들은 오직 이기고 모으는 것만 알고 있다.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이렇듯 쫓겨다니는 것이 우리의 생활 방식임을 섬짓 발견케 될 것이다. 우리는 탁월한 그리스도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아니면 어떤 극적인 영적 경험을 얻기 위해서, 또는 섬기는 사람이기보다는 사실상 사람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부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쫓겨다니고 있을 수도 있다. 가정 주부도 쫓겨다니는 사람일 수 있고 학생도 그럴 수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쫓겨다니는 사람일 수 있다.
쫓겨다니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희망
쫓겨다니는 사람이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한 변화는 쫓겨다니는 사람 자신이,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발견은 눈먼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빛을 찾는 데서 비롯된다.
과도한 성취욕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들을 가차없이 파헤치기 시작해야 한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몇 차례의 대면에서 그래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과도한 성취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고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것들을 포기하는 자기 훈련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5.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
그리스도께서 뽑으셨던 부름 받은 사람들은 기대치 않았던 지방 출신이지만 가장 독특한 자질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들은 부르심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대개 질서로운 내 면 세계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부름 받은 사람의 전형인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부름 받은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는 동료인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선민 의식에 따라 자신들을 정당화하기를 그치고 도덕적인 영적으로 회개의 필요성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 대담한 사림이다. 그는 쫓겨다니는 사람이었던 사울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던 듯싶은데 그 궁극적 목적이란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임무였다.
1) 부름 받은 사람은 청지기임을 의식한다.
요한은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대중의 인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지기의 일이란 그저 주인이 와서 취할 때가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일 분이다. 쫓겨다니는 사람 사울과 부름 받은 사람 요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소유한 존재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자는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인도하러 오셨을 때 그 무리들을 그 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너무도 기쁠 뿐이었다.
2) 부름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너희에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라고 요한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즉 요한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떠한 환상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러한 자기 인식은 이미 그의 내면 세계 안에 구축되어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내면 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대개 역할과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자신이 누구이냐 하는 것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한다.
3) 부름 받은 사람은 요동치 않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요한 자신을 가리킴)는 옆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기다리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한다."(요 3 : 29) 들러리의 존재 이유는 그저 신랑 옆에 서서 모든 관심이 신랑에게만 집중되도록 하는데 있다. 만약 결혼식 진행 중에 들러리 선 친구가 갑자기 관객을 향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재미있는 얘기거리로 관객을 웃기기 시작한다면 그는 아마도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따라서 들러리는 자신에게 시선을 전혀 집중시키지 않는 대신, 모든 시선이 오직 신랑과 신부에게만 집중되도록 할 때 자신의 소임을 가장 훌륭하게 성취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가 받아야 할 보상의 전부였다.
4) 부름 받은 사람은 확고한 위탁을 이해한다.
요한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위탁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캐묻던 사람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 : 30)고 말했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결코 요한이 말한 것처럼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쫓겨다니는 사람은 더 많은 시선을 모아야 하고 점점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5) 평안과 기쁨
다른 사람들은 요한이 실패자로 끝나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초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군중이 떠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실로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요한 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요한은 깊은 확신에 차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의 자기 평가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에 근거한 것으로 그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가치가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부름 받은 사람이 되어
가장 버림받은 곳, 광야에 있던 미미한 존재인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요한에게? 그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광야에서였을까? 광야는 고통과 고독과 고난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광야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살기 어려운 곳이다. 요한은 광야에서 메마름을 극복하고 사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요단 강에서 외칠 때 그의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의 영적 고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인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마련이다. 그런고로 광야는 요한에게 판단력과 지혜의 독립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부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요한의 청지기 의식, 정체성 의식, 자신의 역할에 대한 폭 넓은 이해 그리고 그 역할에 대한 확고한 위탁이다. 바로 이러한 속성들이 내면의 세계를 잘 세워서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사람의 특징들이다. 사울 왕의 생애와 요한의 얼마나 다른가! 따라서 우리들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사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요한이 될 것인가를 매일 씨름해야 한다.
6. 누구 내 시간 본 사람 없어요?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는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 훈련이 없이는 그 누구도 탁월한 인물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인물이 되었다 해도 자기 훈련이 없이는 그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간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면 결국엔 만사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 회사에서 부름 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그런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무질서의 증후군
제일 먼저 우리가 착수해야 할 첫 단계는 시간 사용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 비판이다. 현재 우리의 상태는 무질서한가,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자신의 무질서한 생활의 특징인 몇 가지 증후를 예를 들었다.
1) 일단 무질서한 상태에 접어들게 되면 내 책상이 흐트러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 무질서 상태를 보여 주는 증후는 내 차의 상태에서도 나타난다. 즉 차의 안 팎이 더러워진다.
3) 무질서 상태에 이르면 자기 비하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4) 약속을 잊어버리는 일이 빈번해지거나 응답하지 못한 전화 메모가 쌓이고 끝내야 할 일의 마감 일을 놓치기 시작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게 되면, 나는 내가 무질서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무질서한 상태일 때면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허비하는 경향이 생긴다. 따라 서 무질서는 끈기 있게 최선의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6)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자신이 해놓은 일을 보잘 것 없다고 느낀다.
7) 무질서한 상태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부터 얻는 기쁨을 거의 얻지 못한다.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는데 제대로 정 착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8) 내가 무질서한 상태에 있을 때면 사적인 인간 관계에서 그것이 드러나기 마련 이다.
9) 우리의 시간 사용이 무질서해질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 리의 일, 그 밖에 우리를 둘러 싼 그 모든 것들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시간의 예산 작성
개인적인 모든 시간 운영에 중심 되는 원칙은 간단하다. 즉 시간 사용을 위해서도 예산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돈에 관한 우선 순위는 명백하다. 나와 아내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정적인 우선 순위를 십일조와 헌금에 둔다.
시간의 주인
예수님은 개인비서도 없이 공적인 시간 약속들을 잘 처리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묵상을 위한 자기만의 시간과 제자 훈련을 위해 모으신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보낼 시간을 위해서도 적당량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시간을 관리하셨는지 알아보자.
1) 그 분은 자신의 사역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셨다는 점이다.(눅 18장)
2) 예수님께서는 시간 사용 면에서 한계를 잘 알고 계셨다는 점이다. 즉, 영적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의 연약함을 보강할 결심을 굳히고 내적인 힘을 모으기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 두는 적절한 예산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3) 열두 명의 제자를 훈련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갖고 계셨다는 점이다.
인간은 우선 순위가 있는 곳에 시간을 쓰기 마련이다. 이상에 열거한 이유들로서 예수님께서는 결코 시간이 부족해서 쫓기는 법이 없으셨다.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숙지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순간들을 통해 영적으로 민감해져 있었으며, 또 하늘로 오르신 후에 자신의 사역을 영속시킬 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기에 우리가 보기에 그럴싸하고 수락할 법한 어떤 초청이나 요구조차도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다.
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맥도날드의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법칙
제 1법칙 : 계획하지 않은 시간은 나의 약점이 있는 곳으로 흐른다.
나는 현재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잠재된 가능성을 소모해 버리고 있는가를 나 스스로 직시할 수 있도록 나를 염려해 준 몇 명의 분별력 있는 평신도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우리 교회의 행정을 유능한 행정 목사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그 일이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아직도 모든 결정에 대해 참견하고 싶고 모든 일에 대해 대해 의견을 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고 그에게 맡겨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고 보니 일이 잘되기 시작했다. 내가 행정 목사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자(신뢰하는 일은 알고 보니 쉬운 일이었다), 나의 온 정력을 내가 가장할 수 있는 일, 곧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일에 쏟아 부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제일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앉혀 놓고, 누가 어떤 일에 최적임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가정과 직장, 교회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제 2법칙 : 계획하지 않은 시간은, 내가 속한 영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된다.
자신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법칙이, 자신과 자신보다 우세한 사람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발견케 된다. 여하튼 다른 사람들이 내 시간을 지배하기 전에 내가 독자적으로 내 시간을 통제해야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보다도 내 주위의 강한 사람들이 여러분의 시간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제 3법칙 :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긴급한 일들에 소모된다.
누구나 제일인자의 관심을 사고 싶어한다. 모든 위원회나 이사회도 비록 그들의 의견을 듣고 싶지는 않다 하더라도 제일인자의 참석을 원한다. 곤궁에 처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최고 지도자가 즉각적인 관심을 쏟아 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급한 일이라고 해서 정해진 시간 예산을 묵살할 수 없다.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장 급한 일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해서 쓴다 하더라도 결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제 4법칙 :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일들에 바쳐지게 된다.
우리는 때로 예산되지 않은 시간을 가장 즉각적으로, 대단한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사건들에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계획되지 않은 시간에 대한 법칙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건들이 시간 사용을 명하기 전에 스스로가 계획된 시간 사용을 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무질서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붙어 다니게 된다.
어떻게 시간을 회복할 것인가?
첫째,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생활의 리듬을 알아야 한다.
둘째, 시간 사용 방법의 올바른 기준을 가져야만 한다.
셋째, 시간 예산을 충분히 앞서 세울 때 시간을 통제하고 명령할 수 있다.
i) 나의 내면 세계에서 타협에서는 안 될 요소들, 즉 영적 훈련, 지성 훈련, 안식 일적 휴식 그리고 물론 가족과 특별히 친구 관계를 위한 시간들이 적혀진다. ii) 두 번째 우선 순위는 나에게 맡겨진 중요한 일들에 대한 일정 설교 준비, 글 쓰는 것, 지도력 계발 그리고 제 자 양육이 적혀진다. - 정해 놓은 우선 순위 와 계획된 시간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의 내면 세계는 얼마나 잘 계발되겠는가?
8. 더 뛰어난 사람이 패했다.
시작할 때 아무리 1등으로 뛴다 하더라도 끝가지 시합을 마칠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경주를 끝낼 때까지 지속적인 보조로 뛰어야만 한다. 그리고 훌륭한 주자는 경주의 마지막 코스에 가장 빠른 속도로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운동 선수의 능력은 그것이 적당한 인내와 합쳐지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정신적인 무기력의 대가
우리의 내면 세계의 질서를 잡는 일은 강한 정신적인 인내와 이러한 인내의 열매인 지적 성정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억압된 우리의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쉽사리 인간의 영혼과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는 사상과 제도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고, 또 일생 동안 계속되어야 할 지적인 성장에 자신을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른 출발에 따르는 위험성
조숙한 성공 자는 대개 빨리 배우는 사람이다. 최소의 노력으로 전문가가 된 그는 대개 건강하며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어떤 것에 대해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말하거나 설득하는데 자신만만해 보인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순조롭기 때문에 그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는가는 누구나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평생 계속될 수도 있으나, 대개 30대 초반에 초반이 되면 어딘가에서 잘못될 가능성이, 재능 빠른 출발자들의 삶 속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남은 인생의 경기는 재능이 아니라 인내와 자기 훈련으로 경주해야 한다는 첫 번째 암시가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사고력이 그 기능을 잘 발휘하기 위해서는 계속 단련되어지고,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고, 넓혀지고, 강화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 정신을 훈련해야 할 필요성
우리의 정신은 사고하고, 분석하고, 혁신하게끔 훈련되어야 한다. 내적인 생활이 온전히 질서 잡힌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데 힘쓴다. 그들의 정신은 방심한 채로 있지 아니하고 활동하며, 매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정기적으로 새로운 앎과 결론들을 창출해 낸다. 그들은 매일같이 정신을 단련시키는 일에 자신을 투자한다.
엘튼 트루블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이 있는 기독교가 될 가능성이 없다. 그 세 가지란 바로, "헌신된 내면의 삶, 외적인 봉사 활동 그리고 합리적인 지적생활이다." 세 번째 요소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쉽게 무시해 버리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을 너무 세상적이며 복음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딘 지성은 결국 내면 세계를 무질서하게 만든다.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교육을 목청 높여 외쳐 대긴 했어도, 정신의 계발에 대해서는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머리 속에 많은 성경 지식을 쌓아 놓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 그들이 뻣뻣하며 변화나 혁신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고정 관념에 심각한 도전이 가해질 때, 그들은 분노와 비난을 퍼붓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폭 넓게 그리고 가장 창조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은,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서는 소유할 수 없는, 그 만큼 폭 넓은 지적 가능성이 주어졌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지적인 폭은 영원하고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넓은 안목을 제공한다. 그리스도 안에, 그 시대의 가장 지배적인 사상 가운데서도 우리의 사상과 분석력과 혁신적인 생각을 결정짓는 진리의 기초가 있는 것이다.
9. 한 번도 읽힌 적이 없는 책의 비극
성장 형태에 맞추어 사는 것
제 1의 목적 : 지성은 기도교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요, 그 분의 소유라는 것과 창조계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의무가 있으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견지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청지기적 시각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인의 사고는 모든 문제들과 사상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대한다.
제 2의 목적 :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 안에 기록해 놓으신 메시지 를 고찰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 자연적 은사로 인하여 우리 각자는 어떤 특정 분야에서 그 메시지를 더 잘 보고들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창조된 사물을 취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형상화하고 개조하여 다른 방법으로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제 3의 목적 : 정신은 내 주위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정보와 아이디어와 통 찰력을 추구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지력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기여하려고 사고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독서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몰두할 때마다 이 원천을 유념한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며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설교를 하려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자료들을 모으는 것이다. 나의 지성이 다른 사람의 성장도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사고력 성장을 위한 조직체
1) 우리는 듣는 사람이 됨으로써 성장한다.
(i)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듣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그의 정신이 성숙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의 원천을 부 정하는 것이다. 아마도 듣는 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리라. 따라서 바른 질문은 성장을 위한 귀한 정보를 이끌어 낸다.
(ii) 들음에 의한 지적 성장의 두 번째 부분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일터를 방 문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특별한 문제들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을 때 성취된 것이다.
(iii) 들음을 통해서 성장하는 세 번째의 방법은 지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iv) 지적 성장은 비판자들의 말에 귀기울일 때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 다.
2)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 성장한다.
독서하면서 나는 설교나 글의 내용이 될 만한 중요한 생각이나 사상들을 기록해 둔다. 독서 중에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만한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특별한 인용문이나 참고문을 베껴서 간단한 내용의 격려나 조언과 함께 보내는 것이 사역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3) 우리는 훈련된 공부를 통해서 성장한다.
지적 성장을 위한 세 번째의 방법은 훈련된 학습을 통해서이다. 학습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쓰느냐 하는 것은 각 사람에 따라 다르고 직업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설교자는 그들에게 맡겨진 영의 양식을 제공하는 설교를 하려면 한마디로 말해서 공부해야만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공격적인 공부를 위한 훈련을 추구할 때 성장하는 법이다.
10. 마음의 정원에 질서를
"나는 내 삶의 영적인 차원을 완전히 무시해 왔었던 것이다. 감옥에 갇혀서야 나는 하나님 없는 내 삶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러틀리지로 하여금 그의 전생애 동안 내면 세계에 중심부가 있었다는 것을 보게 해준 바로 하트브레이크 수용소에서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중심부를 영[spirit](혹은 어떤 자는 혼[soul])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내면 세계의 영적 중심부를 신체의 어느 부분에 있다고 지적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으로 그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게 교통하는 것이다. 영은 그 속성인 영원성을 결코 잃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거의 단절된 무질서한 상태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질서는 내면 세계의 다른 부분까지도 완전한 혼돈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영적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은 때때로 내적 평온의 결핍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요함이란 사실상 단지 무감각이나 공허함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기대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평정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공통된 염려는 영적인 힘을 유지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와 욕구를 꾸준히 지니는데 있어서의 무능력에 있다.
즉효적인 체험
정원을 일구듯이
내면의 세계의 정원이란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지혜를 주시며, 칭찬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시며, 격려해 주시고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곳이다. 이 정원이 질서 정연한 모습일 때 그 곳은 고요하다. 그 곳에는 번잡함과 소음과 혼란스러움이 없다.
내면의 정원은 섬세한 곳이라서 잘 가꾸어지지 않으면 어느 사이엔가 가시덤불들이 자라날 것이다. 하나님은 난잡하게 어지러워진 정원을 거닐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홀히 내버려 둔 내면의 정원이 공허한 이유인 것이다.
내면 세계의 영적 차원에 질서를 잡는 것은 바로, 영적인 정원을 가꾸는 작업이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영적인 터를 일구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예배 처소를 만들어 놓고, 때때로 그 곳에 찾아가 하나님과의 부드럽고 겸허한 사랑의 교통을 할 수 있다. 누구나 하나님과 그러한 친근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보다 많이, 어떤 이는 보다 적게....... 그 분은 우리의 능력을 알고 계신다. 지금 시작해 보자!"
우리가 놓쳐 버릴 수도 있는 특권들
i)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영적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특권을 놓쳐 버리게 된다. 예로 들자면, 창조시 의도된 대로, 우리가 지녀야 할 실재에 대한 영원하고 무한한 견지를 즐거워하는 법을 결코 배울 수 없을 것이다.
ii) 우리의 내면 세계의 영적 중심부가 단련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잃게 될 두 번 째 특권은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인 것이다.
iii) 훈련되지 않은 영이 잃게 될 수 있는 세 번째 특권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가운데 지니게 되는 경우이다.
iv) 네 번째로 영적 중심부를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 님과 비교하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지를 망각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성경에서, 또 위대한 신앙인들의 역사를 통하여 영적 훈련에 대한 명령과 선례가 수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내면의 영적 세계를 정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실 내적 공간을 만드는 자이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듣게 될 때 그 음성은 어떤 음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로렌스 수사는 이렇게 한다. "지금 시작하라!" 토마스 켈리는 이렇게 말한다. "저 중심부로 들어가라!"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청하신다. "내게 와서 배우라."
11. 외부의 어떤 받침대도 필요치 않다.
인도에서 일한 감리교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노년기에 접어들어 신체마비 증세가 일어날 움직일 수도 없고 거의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잃지는 않았다. "내 믿음을 지탱시켜 줄 외부의 받침대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내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썼다.
본 서는 영적 훈련을 논하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므로 성인들이 발견했던, 내적인 영을 강건케 할 모든 방법들이 일일이 고찰할 수 없다. 그 대신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시해 버리지만 기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네 가지의 영적 훈련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고독과 침묵의 추구, 둘째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셋째 사색과 명상, 넷째 예배와 중보로서의 기도인 것이다.
1) 침묵과 고독 : 내면 세계의 영적 부분을 질서 있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성격에 적합한 장소와 시간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가 쓴 글 :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분은 시끄럽고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만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자연, 곧, 나무들과 꽃들과 풀들이 고요함 속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보라. 해와 달과 별들이 고요 속에서 어떻게 운행하는지 보라...... 고요한 기도 속에서 많은 것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외적인 활동 영역에서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우리 영혼을 울리려면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주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것이다. 진정 우리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지 않는 말이란 전혀 쓸모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지 못하는 말들은 어두움을 짙게 할뿐이다."
2) 하나님께 귀기울임
내면 세계의 정원은 침묵과 고독을 위해 침잠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환경 속에서 의식적으로 듣는 훈련을 하기 시작할 때에도 계발된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깨우심에 민감해 있을 때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권능을 받는 설교가나 성경 교사가 말씀을 가르칠 때 그러한 들음이 가능할 수도 있다.
3) 일기 쓰기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
나는 수세기에 걸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기를 써 왔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일기 쓰는 작업은 우리 자신이 결코 적나라하게 대면해 보지 못한 내 속사람을 마주하게끔 도와준다.
일기의 주된 가치는, 내면 세계의 정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고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로서의 가치에 있다. 일기 쓰기는 고요히 침잠하여 아버지와 교제하는데 있어 놀라운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쓰도록 인도되어지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신비하게 역사 하시고 가장 깊은 곳에서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12. 모든 것은 입력되어야 한다.
"영적인 침체가 육체적인 침체로 이어졌다. 내적 체험이 외면 세계를 지탱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외적인 붕괴가 일어난 것이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것은 결코 설교하지 않겠다는 것을 인생의 신조로 삼고 있던 터라, 내면 세계가 붕괴됨에 따라 외면 세계의 붕괴도 불가피하게 초래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 세계의 정원에 입력된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존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강화시키게 된다.
i) 영적 훈련의 첫 단계는 고독과 침묵을 발견하는 것이다.
ii)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배우는 것이다.
iii) 세 번째 단계인 엔터키를 두드리는 것은 사색과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지 는 것이다.
성경은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구절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러한 말씀을 향하여 우리의 내면 세계의 문을 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상은 우리의 영을 천국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과 같다. 명상은 적당한 양의 시간, 침묵, 혼자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할 때에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13.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어진 안목
기도하기가 왜 어려운가?
1). 예배와 중보 기도를 부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도록 창조되었다. 죄의 결과로 그러한 사람들의 본래적인 갈망이 둔해진 것이다. 죄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활동이 어색한 행동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죄로 물들지 않았던 인간의 상태를 상상해 보고자 한다면, 그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한 욕구가,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자연적이고도 아주 사실적인 식욕이나 본능의 충족을 위한 갈망보다 더 크거나 같은 정도의 것이었으리라 생각하면 된다.그러나 십중팔구 그렇게도 강렬했던 영적인 갈망이 죄의 힘으로 인하여 형편없이 무디어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기도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자연적인 자아와 싸우는 것이고,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가 말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기도야말로 실질적이고 의미심장한 행동으로서 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라고 믿게 되기 전까지 예배와 중보 기도의 습관을 결코 가길 수 없는 것이다.
2). 예배와 중보 기도는 우리들의 약함에 대한 묵시적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를 하는 이유는 이 행동들이 본질상 인간의 나약함을 시인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때, 그 사람에게는 영적 성장이 있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놀라운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3). 기도는 때때로 현실적인 결과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기도 생활은 내가 기대하거나 필요로 하는 결과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기도에 대하여 내가 기대한 형태의 응답은 오히려 내게 해로울 수도 있다. 예배와 중보 기도는 나 자신의 목적에 하나님이 맞추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분의 목적에 나를 맞추는 일이다. "또한 기도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다."
기도의 내용
"주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둔감하고 어리석어지는 것으로부터 저를 지키소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 즉 그렇게 훈련된 경주자에게 필요한 정신적, 영적, 체력적인 특성을 지닐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 저의 일에 성공을 주시되 교만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너무도 자주 성공과 번영 뒤에 수반되는 자기 만족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육체적인 무기력함과 쇠잔함이 밀려올 때라도 영적인 나태와 방관함에서 나를 구하소서."
찬양
내면의 정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영적 훈련에 있어서, 그분을 우러르는 일이야말로 예배 중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어떤 기도 안에서 찬양할 수 있는가? 첫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 분 자신에 관해 계시해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경배를 시작한다.
고백
위대하신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는, 우리 자신, 즉 하나님과 비교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정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두 번째 요소인 죄에 대한 고백이다.
"죄인인 나에게 긍휼을 베푸소서."라는 기도는 단축된 고백의 기도이다. 자신에게서 불완전함과 악한 길을 찾는 성향을 직시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면서 자신을 낮추는 경험을 날마다 가져야 한다. 기도는 자기포기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날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모두를 주님께 내어놓는 것이다.
중보 기도의 사역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의 편에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보통 누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는가? 결혼했다면 물론 배우자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중보 기도는 또한 그 범위를 넓혀서, 가까운 친구들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책임 하에 두신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동역자들과 기도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14. 여가 이상의 휴식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최초의 '휴식자'임을 계시한다. "일곱째 날에 그 분은 쉬셨다......" 모세는 출애굽기 31 : 17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나 여호아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휴식을 필요로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휴식하시기를 스스로 선택하신 것일까? 그렇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휴식과 일의 리듬을 창조 세계에 심어 두셨고,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 자신이 그 리듬을 지킴으로써 그 진리를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 분은 우리의 내면 세계에 질서를 유지하는 열쇠를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안식일적 휴식의 의미
1) 영원한 진리에로의 복귀 - 성경적 의미의 휴식이 내면 세계에 질서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하나의 길이 있다. 진정한 휴식은 우리가 일생 생활의 와중에서 정기적으로 멈춰 서서 우리의 삶의 근거가 되고 있는 진리와 헌신을 정리해 낼 때 이루어진다.
2) 우리의 사명을 분명하게 함 - 예수께서는 종종 한가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홀로 시간을 보내셨다. 다른 사람들이 수면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다음 단계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힘과 방향을 얻기 위한 휴식에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부딪힌 순간마다 신선한 지혜가 번득였던 것은 이상할 게 없다. 또한 그가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반격하지도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충만했으므로 이상할 게 없다. 그 분의 영은 항상 쉼을 얻고 있었고 그의 내면 세계는 질서 정연했다.
휴식하기로 결심하는 삶
우리가 세속적 여가의 재미보다 안식일적 휴식의 평화를 선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첫째, 안식일적 휴식은 그리스도인 가족끼리의 예배를 의미한다. 올바른 예배 안에서 우리는 내면 세계의 휴식으로 이끄는 세 가지 측면, 즉 뒤돌아보고, 위를 보고, 앞을 내다보는 것 모두를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둘째, 안식일은 개인 생활에 있어 휴식과 고요함을 사려 깊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이란 내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휴식을 뜻한다.
세상 교회는 참으로 휴식을 취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여가가 아닌 진정한 안식일적 휴식에 의하여 규칙적으로 새롭게 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휴식을 취할 때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얼마나 굳세고 탄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맺음말 : 물레질
간디의 물레는 그의 삶에 있어서 무게 중심을 유지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간 경험에 있어서 수준을 고르게 하는 기구였던 것이다. 물레는 그에게 언제나 자신이 누구이며 삶의 모든 현실적인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간디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물레질을 한 그의 행위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본받을 만한 일이다.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는 견지에서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내면 세계의 질서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면의 중심부에서 우리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자신감과 기대가 되살아난다. 거기서 우리는 통찰력과 지혜를 부여받으며, 산을 움직일 만한 믿음이 생겨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라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의 일은 내면의 중심부의 훈련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우리의 일은 새로운 의미를 띠고 보다 높은 탁월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성실과 정직이 일의 추구에 있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사랑이 생기는 법이다.
******** 이 책의 전·중반부까지는 훌륭하게 논리적인 체계가 정연하며 짜임새 있게 쓰여졌다. 그러나 말미로 갈 수록 다소간 논리성의 결여가 엿보인다. 왜냐하면 너무 산만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내면 세계를 잘 가꾸어 하나님과의 올바로 교제 장소로서의 신성한 곳이 되기를 촉구한다. 특히 현대 문명사회의 복잡함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김용일목사님 홈페이지에서..
|
첫댓글 이책을 중간 쯤 읽다가 복잡하고 산만해서 덮어두었는데 이렇게 세부적으로 요약해 주시니 이해가 쉽습니다 . 감사드려요 ~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