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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의 치욕은 "단군조선"을 인정치 말라는 기자조선설만 인정한 장개족 돼지국밥집 아이들의 빵원집안의 개소리 때문이다.
우리는 古朝鮮을 인정한다면서도, 막상, 삼한조선으로 신한, 마한, 변한조선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癸丑十五年. 封弟嘉祿爲阿闍王, 賜國, 號曰阿斯達, 都唐莊京【白岳】, 築城, 設邑. 人民多聚成都, 作一萬戶.
계축(癸丑, 2168) 15년. 아우 嘉祿(가록)을 阿闍王(아도왕)으로 봉하고 국가를 주고 국가이름을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당장경(唐莊京)【白岳(백악)】에 도읍하였다. 성을 쌓고 마을을 건설하니 인민들이 많이 모였으니 1,0000호가 되었다.
甲寅十六年. 阿闍王 以韓天寬爲太宰, 吳善爲都統.
甲寅(갑인, BC2167) 16년. 阿闍王(아도왕)은 韓天寬(한천관)을 太宰(태재)로 하고 吳善(오선)을 都統(도통)으로 삼았다.
乙卯十七年. 阿斯達遺族貊酋據黃州而叛, 阿闍王遣吳善討平.
乙卯(을묘, BC2166) 17년. 阿斯達(아사달)의 遺族(유족)인 貊(맥)의 추장이 黃州(황주)를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阿闍王(아도왕)이 吳善(오선)을 보내 토평하였다.
즉 고구려 고의 句麗 예맥족이라고 하는 족은 9韓의 하나로 마한조선의 마한으로 료주로 료산료수 졸본주 句麗로 수분하 료하촌의 변한지지다, 즉 신한조선지지가 아니다는 개념이 붕괴되어 있습니다, 료주/유주 연주, 료동, 산동 발해, 창해 한사군 이부 ,등등이 전부 일정한 료녕산맥 연산산맥 즉 '만리장성" 이남의 이야기로 전부 이상하게 간도 만주 강동주/한반도 이야기가 전혀 아닌 것이 삼국유사 삼국사기다, 즉 신한조선의 대부여 부여로 동명 부여는 신한/신라다 그 아래 대륙신라만의 이야기로 몰아서 놀고 있다.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기원전 27년)에 대방인들과 낙랑인들이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101] 이는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인데, 그 후에 주제넘게도 ‘나라’라고 부르다가 이제 항복한 것이다.
조위(曹魏) 때(220~265년)에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불렀다. 대방의 남쪽으로 바닷물이 1천리인데 이를 한해(澣海)라 한다후한(後漢)의 건안 때(196~220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으니 왜(倭)와 한(韓)이 이에 속했다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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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교과서에서 베껴서 환단고기에 집어넣었다고 ?
눈이 있으면 봐라 무엇이 무엇을 베꼈는가?
잘 비교해보시라 ! 참고로 동사연표도 함께 넣는다.
아래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대한제국 교과서의 내용은 환단고기의 실재를 뒷받침해줄 뿐이다.
단군세기에 실린 역사적 사건들에 기자조선이라는 가상의 나라 왕들을 집어넣는 것이 대동역사략이다. 대동역사략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오류를 범한 곳이 있지만 이에 비해 환단고기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 (장수 진개 부분)
추장 아리당부가 나오는 부분에서 단군세기에는 일식 사건이 들어있다. 그리고 일식은 그해에 있었다.
몇가지만 보더라도 대한제국 교과서 정도를 환단고기가 베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오류가 있는 책을 베껴서 오류없고 더 구체적인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비교(차이) | 대동역사략(1906년 6월 국민교육회 편찬) | 환단고기(1911) | 東史年表(1915 어윤적)1915년 초기 판본, 30년대에 판본, 94년에 영인본 |
태안 & 융안 宇和冲과 于和冲 |
31대 도국왕 (B.C.432~414) 7년(B.C.426)에 태안太安(=평남 자산)의 우화충宇和冲이 반란을 일으켜 도읍에 들이닥쳤다. 왕은 배를 타고 혈구穴口로 가 잠시 머물렀다.
| 36년(B.C.426) 을묘에 융안의 사냥꾼[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장군이라 자칭하며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서북 36군을 함락하였다.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셨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해 겨울에 역적들이 도성을 에워싸고 급박하게 공격하므로 임금께서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배를 타고 해두海頭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지않아 붕어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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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424,BCE425 대동역사략은 31대 도국왕이 살아서 우화충죽임. 단군세기는 43세 물리단군 붕어,44세 구물단군 등극 대부여개칭 | 9년(B.C.424)에 왕의 군대가 도읍을 수복하고 우화충을 죽였다. |
구물 단군원년(BCE425) 구물이 병사 1만명을 이끌고 토벌하자 역적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였다. 마침내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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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춘장이냐 묘장춘이냐 | 33대 화라왕 (B.C.385~370) 6년(B.C.380) 지나 연나라 사람이 만번한滿番汗(중국 성경성盛京省=요동)에 쳐들어오자 장수 묘춘장苗春長이 크게 무찔렀다. |
45세 단군 여루 17년 신축(BCE380)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변방을 침범하자 그곳을 지키던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서물리쳤다 | 화라왕 6년 신축 주 안왕 23년 연나라 사람이 변방의 군을 쳐들어 오니 묘장춘이 그들을 패퇴시켰다 (연인침변군 묘장춘 격패지) |
위문언 vs 우문언 연운道 vs 연운島 진개가 죽었다고? (B.C.364) 환단고기에는 그 장수(其將)라고 나온다. 환단고기에는 북부여기(복애거나 범장)에 진개가 나온다.(BCE 300년경사건,번조ᅟᅥᆫ 71세왕 기욱때) | 5년(B.C.365)에 지나 연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요서에 쳐들어와 변군을 연달아 함락시켰다. 상군대부上軍大夫 위문언衛文言이 연나라 군대를 오도하五道河(중국 요동 양산성 북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6년(B.C.364)에 위문언이 연나라 군대를 연운도連雲道(=요하 입구)에서 맞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연나라 장수 진개를 활로 쏴 죽이니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가버렸다. | 병진 32년(서기전 365) 연나라 사람들이 신의를 저버리고 쳐들어와 요서를 함락하고 운장지방을 핍박하였다.번조선이 상장 우문언에게 명하여 막게하니 진막 두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 구원하였다. 복병을 두어 협공하여 연제 두나라의 군대를 오도하에서 깨뜨리고 요서지방의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재위 33년 저아(BCE364)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패한 뒤에도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어 장차 쳐들어오려하였다. 우문언이 추격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 동사연표에 우문언의 기사 있습니다. [燕人倍道入寇遙西 命大夫衛文言禦之 設伏擊破於 五道河.] 병진. 중조선 설문왕 5년. 동주 현왕 4년 서기전 365년, 이듬해에...燕人敗歸 連運島. 造船 將來襲, 衛文言追擊大破 射殺其將 |
북호인가 북막인가? (B.C.346),(BCE 350) 액니차길한 vs 액니차길(액니거길) 신불사 한자 차이 申不死VS申不私 | 35대 경순왕 (B.C.361~343) 16년(B.C.346)에 북호 추장 액니차길한厄尼車吉汗이 좋은 말 2백필을 바치고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다. 왕은 하군대부 신불사申不死에게 보병 1만과 호인 기병 1천으로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상곡성(요동에 있음)을 함락시켰다. | 재위 47년신미(BCE 350)년에 북막추장 액니거길이 내조하여 말 200 필을 바치고 함께 연을 치자고 청하였다 이에 번조선 소장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연의 상곡을 함께 공격하여 함락하고 성읍을 설치하였다. | 북호의 추장 액니차길한이 내조하여 말 200 필을 바쳤다. 그리고 함께 연을 치지고 청하여 이에 대부 신불사를 시켜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공격하여 상곡을 빼앗았다 (北胡 酋 厄尼車吉汗 來朝 獻馬二百匹 請共伐燕 乃大夫申不死率兵三萬 攻燕上穀城 拔之). 중조선 경순왕 12년 동주 난왕 19년 신미년. 서기전 3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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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여루 무인 54년(서기전 343) 상곡 싸움 이후로 연이 매년 쳐들어왔다 이에 이르러 화평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조양 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으셨다(復以造陽以西 爲界) |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매년 처들어 왔다가 이 해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평화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自上谷役後 燕連年 來侵 至是 遣使請和 許之) 왕이 승하하고 아들 후가 즉위하였다. 무인년 왕 19년 주 난왕 26년 서기전 343년 |
단군세기에는 그해 일식 기록이 적혀있다. | 39대 장평왕 (B.C.251~233) 4년(B.C.248)에 북호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연나라 정벌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자 조공을 끊었다. | (고열가단군)재위 48년 계축(bce 248) 년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그해 겨울에 북막 추장 아리당부가 연나라를 정벌하는데 출병해주기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응하지 않으시자 원망하여 이후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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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호냐 북막이냐 추장 산지객륭의 존재유무 북막 : ‘북쪽의 사막이란뜻으로 보통 고비사막을 지칭한다’(203p) | 40대 종통왕 (BCE232~222) 4년(BCE.229)에 북호가 쳐들어와 영주寧州태수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해갔다. | <북부여기> 해모수 11년임신(BCE229)에 북막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한 뒤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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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한전에 인용된 <위략>“연이 곧 장수 진개를 보내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2,000리 땅을 빼앗고 만번한으로 경계를 삼았다.”
| * 진개는 이미 죽음(B.C.364) | 해모수 재위 19년...이보다 앞서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BCE300년경사건) |
[출처] 대한제국 교과서는 환단고기의 가치를 빛나게 한다|작성자 홍익인간 |
대동역사략(1906년 6월 국민교육회 편찬)
18세기 이후에 등장한 기자조선의 역대 왕의 기록은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 참조) 《기자지(1879)》, 《태원선우씨세보(1932)》,《청주한씨중앙종친회》 등에 기자조선의 각 왕의 명칭과 치세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대 수는 같으나 그 명칭과 역년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수 | 명칭 | 이름 | 대수 | 명칭 |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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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조문성왕 (太祖文聖王, 기자) | 수유(須臾), 서여(胥餘) | 22 | 수도왕(修道王) | 양(襄) |
2 | 장혜왕(莊惠王) | 송(松) | 23 | 휘양왕(徽襄王) | 통(通) |
3 | 경효왕(敬孝王) | 순(洵) | 24 | 봉일왕(奉日王) | 참(參) |
4 | 공정왕(恭貞王) | 백(伯) | 25 | 창덕왕 (昌德王, 덕창왕(德昌王)) | 근(僅) |
5 | 문무왕(文武王) | 춘(椿) | 26 | 수성왕(壽聖王) | 상(翔) |
6 | 태원왕(太原王) | 예(禮) | 27 | 영걸왕(英傑王) | 려(藜) |
7 | 경창왕(景昌王) | 장(莊) | 28 | 일민왕(逸民王) | 강(岡) |
8 | 흥평왕(興平王) | 착(捉) | 29 | 제세왕(濟世王) | 혼(混) |
9 | 철위왕(哲威王) | 조(調) | 30 | 청국왕(淸國王) | 벽(壁) |
10 | 선혜왕(宣惠王) | 색(索) | 31 | 도국왕(導國王) | 징(澄) |
11 | 의양왕(誼襄王) | 사(師) | 32 | 혁성왕(赫聖王) | 즐(騭) |
12 | 문혜왕(文惠王) | 염(炎) | 33 | 화라왕(和羅王) | 위(謂) |
13 | 위덕왕 (威德王, 성덕왕(盛德王)) | 월(越) | 34 | 설문왕(說文王) | 하(賀) |
14 | 도회왕(悼懷王) | 직(職) | 35 | 경순왕(慶順王) | 췌(萃) |
15 | 문열왕(文烈王) | 우(優) | 36 | 가덕왕(嘉德王) | 후(詡) |
16 | 창국왕(昌國王) | 목(睦) | 37 | 삼로왕(三老王) | 오(𤉇, 火+吳) |
17 | 무성왕(武成王) | 평(平) | 38 | 현문왕(顯文王) | 석(釋) |
18 | 정경왕(貞敬王) | 궐(闕) | 39 | 장평왕(章平王) | 윤(潤) |
19 | 낙성왕(樂成王) | 회(懷) | 40 | 종통왕(宗統王) | 비(丕), 부(否) |
20 | 효종왕(孝宗王) | 존(存) | 41 | 애왕(哀王) | 준(準) |
21 | 천로왕(天老王) | 효(孝) |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다. 기자조선의 존재 부정하거나 한민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이마니시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에서 기원했으므로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조선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하였다.[5]
광복 이후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6] 1974년에는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고조선에 대한 논쟁에서 기자조선의 실재성이 논의되었고[7], 교과서에 기자조선이 각주로 언급되었다.[8] 1990년부터 발행되는 역사교과서에서도 각주로 언급되었으나[9],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 언급되지 않는다.[10]
현재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11]
기자가 고조선에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이야기는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주장이다. 주장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
1102년(숙종 7년)에 고려의 왕이 평양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외에도 정전(井田)과 같은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실제 고고학 조사 결과 이들 유적은 모두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4][11]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준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익산의 무강왕릉이 나타나는데, 이 무덤은 실제 발굴 결과 백제의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확히 연구가 이루어 지지않았다.
또한 황하 유역과 요하 동쪽 지방의 신석기·청동기 문화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도 주요한 논점이다. 중국의 청동기와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청동기는 양식이 전혀 다르며 성분 또한 크게 다르다. 기자가 상나라의 왕족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상나라와 관계가 있는 청동 유물 등이 나타나야 하나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는 두 지역 사이에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5]
기자조선과 관련된 문헌 사료를 살펴보면 선진문헌과 한대 이후의 문헌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선진문헌인 《논어》, 《상서》, 《죽서기년》 등에는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부터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한 기록과 기자조선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홍범구주는 주 무왕이 은둔하였던 기자를 찾아가서 얻은 것으로, 기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홍범구주의 전래가 불가능하다.[16]
한편 이마니시 류는 《사기집해》에서 기자의 무덤이 량국 몽현(蒙懸; 현재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평양의 유적은 위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정인보는 기자의 기(箕) 자는 임검의 검(儉) 자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발음이 변한 것이며, 검(儉)과 기(箕)는 모두 높다(高) 혹은 윗사람(上)의 뜻이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 환도성에 있던 기산(箕山)이란 일명 기구(箕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검재"를 한역(漢譯)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떠돌이 중국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으로 이민하여 들어오면서 그들에 의하여 날조되었고 사대사상이 강한 중세 조선에 이르러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 곡주 협계현조를 예로 들어 신라 경덕왕이 협계현을 단계(檀溪, 단군골)라 고친 것은 이 곳에 기산(箕山), 즉 "검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7]
현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서는 箕子朝鮮은 부정되고 있고 奇子朝鮮에 대한 것도 단군조선도 부정되어 있습니다, 즉 번한 조선 , 진번조선, 조선열전에 나오는 "조선"이 고조선이고 위만조선이 조선으로 보는 망칙한 고조선 [? ~ 기원전 108년]으로 몰아서 넣는 망칙한 역사관으로 고조선, "단군, 만들어진 신화"로 몰아버렸다.
문제는 조선상고사의 신채호는?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원전 323년 경에 불조선(番韓)의 임금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13]
八月. 帝巡國中, 至遼河之弁韓村, 立巡狩碑, 且下詔天下立石碑于國之四境. 碑面以本國文字刻歷代帝王名號. 傳之後世是爲金石之始也. 長白山興安嶺九月山馬韓村松花江邊遼河之弁韓村平壤之法首橋【朝鮮宣祖 十六年癸未 碑發掘】 沿海州各有古代國文石碑文似梵文【滄海力士黎洪星過遼河題一詩曰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莓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倘非檀氏跡云云】.
8월. 帝(제)는 나라 안을 순행하여 遼河(료하)의 弁韓村(변한촌)에 이르러 巡狩碑(순수비)를 세우고, 또한 천하에 조서를 내려 나라 땅 사방의 경계에 비석을 세우라고 하였다. 비석에는 본국의 문자로 역대 제왕의 이름과 호칭을 새기었다. 후세에 전하여지니 이것이 금석의 시초가 되었다. 長白山(장백산)과 興安嶺(흥안령)과 九月山(구월산)의 馬韓村(마한촌)과 松花江(송화강) 주변과 遼河(료하)의 弁韓村(변한촌)과 平壤(평양)의 法首橋(법수교)【朝鮮(조선) 宣祖(선조) 16년 癸未(계미)년에 비석을 발굴하였다.】와 沿海州(연해주) 각지에 고대의 국문으로 되어 있는 비석이 있는데 글자는 梵文(범문)과 비슷하였다【滄海力士(창해역사) 黎洪星(여홍성)이 료하를 지나다가 시를 한 수 기록하였는데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莓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倘非檀氏跡”라고 하였다】.
사서 읽지 마세요. 책값도 아까워! 어디 헌책방 같은 데서 한번 뒤져보라고. 완전 거짓말이야. 삼국유사에도 허황된 얘기는 나오지만, 어떤 민중적 사유라든가 그런 걸 담고 있죠. 단군신화는 그냥 신화로 해석해야지. 고대에 천조대신이 어쩌고저쩌고… 이게 말이 되냐고? 석기시대에 돌멩이 들고 싸우던 시절인데 어떻게 제국을 건설해요? 역사발전에서 그 시기는 부족국가 시대에요.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기원전 27년)에 대방인들과 낙랑인들이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101] 이는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인데, 그 후에 주제넘게도 ‘나라’라고 부르다가 이제 항복한 것이다.
조위(曹魏) 때(220~265년)에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불렀다. 대방의 남쪽으로 바닷물이 1천리인데 이를 한해(澣海)라 한다후한(後漢)의 건안 때(196~220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으니 왜(倭)와 한(韓)이 이에 속했다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서압록(西鴨綠)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께서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고 칭하셨다. 을미년(乙未年, 기원전 86년) 한 소제(昭帝) 때 고두막한께서 부여의 옛 수도를 점령하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칭하셨는데, 이 곳이 바로 신라(新羅)의 옛 땅이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고두막한이 동명왕이고 동명성왕이시다.국호가 동명이니 東明聖王이다, 무슨 제곡 고신이라 고주몽이 동명성왕인가? 단군 천자로 칭하고 檀干이다 모르면 꺼져라다, 즉 干을 마치 아무렇게 썼다고 하나 이게 단간이으로 單于로 천자칭이다, 무슨 개소리 황제를 칭하라, 왕이다, 간이다 居西干 麻立干으로 尼師今으로 이사는 苔로 太다 太王이다 辰王이다 次次雄, 웅이 王이다 차차 손으로 천대태로 太王이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냐고? 대통령이라고 했다고 소통령으로 하면 어떻게해 그러든지 말든지 이 병신 섯영대야, 인하대가 대학이니?
신한조선[단조=단군조선 47대 단군]이 대부여로 동명[부여]로 신한은 삼한일통 신한조선으로 원 단조로 신한을 신라로 사로/서라로 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夫餘하면 북부여가 아니고 대부여 동명부여 바로 신한이다 신한이 국명이고 辰韓으로 고지신국? 고조선의 신한이다, 우리는 국을 안쓴다고.
신한조선을 인정안해도 번한조선이 기자조선으로 조선후로 番汗으로 이는 滿番汗은 바로 번한 조선후의 영지로 그곳을 위만조선에게 위만에게 찬탈당한 곳으노 4군은 郡으로 바로 유주의 4군으로 하북성이다, 유주는 하북성의 옛 이름이다, 다른 이유를 갖다붙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이 고조선은 삼한중 신한조선을 위주로 말하는 것으로 송화강, 아사달은 지명으로 홍산문화권이라는 료녕성과 몽골자치구의 만리장성 북부로 중심 강역으로 기원전 1285년 기자조선이라는 변한조선과는 달리 그 위로 존재한 "단군조선 단조"로 바로 신한입니다 이 신한이 단독으로 대부여로 한 것이 기원전 425년 마한의 우화충으로 난으로 아사달지역의 장당경으로 천도한 것이다.
癸丑十五年. 封弟嘉祿爲阿闍王, 賜國, 號曰阿斯達, 都唐莊京【白岳】, 築城, 設邑. 人民多聚成都, 作一萬戶.
계축(癸丑, 2168) 15년. 아우 嘉祿(가록)을 阿闍王(아도왕)으로 봉하고 국가를 주고 국가이름을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당장경(唐莊京)【白岳(백악)】에 도읍하였다. 성을 쌓고 마을을 건설하니 인민들이 많이 모였으니 1,0000호가 되었다.
甲寅十六年. 阿闍王 以韓天寬爲太宰, 吳善爲都統.
甲寅(갑인, BC2167) 16년. 阿闍王(아도왕)은 韓天寬(한천관)을 太宰(태재)로 하고 吳善(오선)을 都統(도통)으로 삼았다.
乙卯十七年. 阿斯達遺族貊酋據黃州而叛, 阿闍王遣吳善討平.
乙卯(을묘, BC2166) 17년. 阿斯達(아사달)의 遺族(유족)인 貊(맥)의 추장이 黃州(황주)를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阿闍王(아도왕)이 吳善(오선)을 보내 토평하였다.
전부 신한조선으로 단조의 예고 신라다, 백의민족으로 白木이다 제천절로 제천지윤의 상달 음 11월이 자월로 동지섯달이다 제천절로 이는 고조선의 신한조선의 유풍이다.
매 해마다 국가의 큰 모임을 上月(상월) 三日(삼일)【옛날에 한 해의 元日(원일)은 지금의 동지 朔日(삭일)이다.】에 祭天節(제천절)로 하였는데 배달민족의 開天(개천) 開國(개국)한 날이다.
비단으로 비단 羅로 역시 신라다. 순장의 풍속 등 가야와 같은 금천 금씨 신한계다.
즉 간도로 이곳의 계림은 길림 시림으로 신라의 계림이다, 한반도/강동주의 남부는 가야다, 변한은 변한조선이 패망하고 삼한인이 한수, 중국 한수지 아리수, 한강이 아니다, 뭘 그리 漢水하니 가져다가 집어넣는가 정약용의 개소리 한수는 렬수다 미친 놈이다.
만주 평원과 북방고토지역이 여진족, 말갈/몽골, 거란, 예맥족이 아사달 내옹골지역의 홍산지역의 유족으로 료주로 북부여 북맥이 아사달지역으로 점거했닥다 다시 료주의 서안평지역으로 동부여로 옯긴 것으로 고구려는 료동경계 료주다, 변함이 없다.
청나라 淸朝로 아무리 떠들어라, 이게 신라인이라고? 신한조선인라고? 여진족 거란족 말갈몽골족이다, 즉 마한조선인의 변발이지 상투,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神市 서울인이 왜 저런 변발로 누가 스모도리, 사무라이 머리를 하냐고?
신라는 천자국 신한조선 단군조선이다 번한/변한 기자조선이 아니다 불론 해남/호남으로 남삼한의 신한이 12소국이라도 이는 신한=신라의 소국으로 정복 흡수되는 과정의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의 삼국의 정립이고 전부 남삼한 대륙의 이를 주로 적었다, 즉 한반도는 가야를 중심으로 백제가 왜군을 이끌고 가야정벌을 한다고 거점을 확보했다고 해도 그건 거점이지, 담로라고 안합니다, 즉 수도가 없었다, 주 족이 전부 중화, 오월, 탐라, 응유로 중국대륙과 해양으로 이어진 해양제국인 백제로 한반도는 기본이 바로 신한조선지지지 변한, 마한으로 기준의 제, 청주의 산동이 아니다.
마한의 재동에 삼한중 신한이 있고 재남에 변한 12소국이 있는데 이는 변한소국으로 가야도 아니다, 가야는 이미 천자국명으로 나라이름 야로 안라, 임나 등으로 써도 천자국명을 쓰라고.. 가야로 ~ 가야지 국으로 표하는 것은 고조선의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발해는 대진국 震國으로 천자국이 아니고 말갈족이라도 짱개족이 된 황제국으로 9韓인가? 이를 아무리 사방 6000리라도, 삼한으로 볼 수가 있는가 별 볼 일 없다다.
즉 발해 勃起海로 이걸 왜 간도냐고? 알토에 왜 가져와? 아무림 무식해도 만주원류로 말갈, 흑수말갈, 속말갈이라도 만주에 놓던가? 즉 만주 북방고토지 왜, 간도 斡道라는 간도에 말갈족을 가져다 놓냐고? 신한조선, 삼한을 무시해도 유분수다, 전혀 청나라이전까지 빼앗긴 적이 없는 즉 쌍성총관부로 東寧府로 해도, 고려의 강역으로 절대 청나라 여진의 땅이 아닌 신라의 강역이다,북방고토가 아니고 간도와 강동주/한반도는 기본, 신한조선 신라의 영지다, 놀지 말라고...
고구려의 기본 강역은?
高句麗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其人性凶急, 喜寇 . 其國有王, 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 衣先人, 尊卑各有等級.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 本有五族, 有<涓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고구려'는 '요동'경계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이는 고구려로 기원전 37년이라도, 이는 기원전 58년이라도 그 료동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료하촌 료주로 료동이든 료서든 료주로 이는 산서성을 기점으로 료동으로 료산은 태행산맥이지 이를 무슨 어디? 한반도 어디냐고? 아니다 녕산도 아닌 료산이다 료주다 료하다.
부여, 신한, 신라의 남쪽이다, 료녕산맥 만리장성 아래로 아사달주 홍산문화권 말고 앙소문화권으로 사방 2000리면 산서성이다. 동으로 옥저 만리장성 남쪽 하북성의 지역이고 예/돔예=朝鮮이라고 한사군설치 이부설치 지역이 예/동예로 조선이라고 하는데 뭘 더 찾고 질엘하고 있는지/ 낙랑 대방, 에 예는 강릉이다?? 어디 그런 이야기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있는가? 어디 후한서 있고 어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한반도 평양 낙랑홀이고 어디 경상도 경주까지 내려가냐고? 동서남북이 전혀 감이 없다, 위에서 아래라는데 왜, 한반도에 쑤셔넣느냐고?
방위가 틀려먹었다. 송화강 길림에서 아래면 동남쪽 한반도 강동주가 아니고 남으로 가라고 남북은 대륙으로 가지 저 너른 땅을 두고 어떵 개자식 우똥이가 병신도나 수학도 몰라 방위도 몰라, 개쪽발이 개새끼 쥐새끼나 저리 그린다, 료동이명 료주로 뭐라고? 조선의 서쪽이다, 그래 낙랑군, 사군의 서쪽이다고 그 사군 조선/예맥은 유주 하북성이다, 동서남북이 전혀 개념이 없냐고?
'고구려'는 '요동'경계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조선/예맥 예/동예고 료주와 하북성 북부까지로 사방 2000리다. 한사군내가 고구려가 아니고 한사군/이부는? 조선=예맥이다, 옥저는 그 위고, 더 북쪽은 부여다.
고구려 옥저
조선/예맥
이게 그림으로 못그리냐고?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이는 하북성의 북부고 가히 천리다 사방 천리인데 어떻게 사방 100리-200리냐고? 도대체 강역, 사방 수리는 어디다 빼먹고 그리냐고?
濊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句麗)[ ].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예'의 남쪽은 '신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단단대령은 태행산맥이면 서쪽으로 산서성에 위치해야 한다는 소리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가 나온다. '한 환제'때에 이것들을 받쳤다. 신하 '송지'가 말하길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가히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간다. 고로 과하라고 하는 것이다. '박물지', '위도부'에서 보았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정시' 육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동예'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내'를 '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
위나라에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로 기원후 256년 정시 6년으로 고구려가 동예을 복속하자 위가 쳐들어간 것으로 고구려-위의 전쟁이다, 이에 고구려는 겨우 사방 1000리로 위는 5호 16국으로 사라진 것으로 병신 왜귀 개병신의 개소리다.
즉 기원후 3세기 고구려는 일대 위기로 위와의 전쟁으로 사방 1000리까지 좁아지는 위기를 맞았다 이는 료주로 다시 광개토대왕와 장수왕 시절에 구당서에 의하면 최대강역은 남북 2000리에 동서 3100리로 사방 6200여리다 즉 고구려 최대강역으로 그린 현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동서와 남북이 튀바뀐 것으로 북쪽으로 늘려도 3100리면 그건 남북 2000리가 아닌 3000리다, 동서로도 만주, 간도에 가져다 놓고는 동서로 3000리 그런데 한반도안의 동서는 1000리다, 900여리에 압록강/두만감의 지역만 2000여리다. 즉 강역에서도 이미 틀려먹었다.
료주도 아니고 유주의 하북성도 아닌데 왠 지랄염병이냐고? 그리도 미개한 신라인들이라서 신라의 신한지지인 알토를 가져다가 고구리요 햐면 아이고 맥족님 부라자 하냐고?
기본 개념이 상실된 무뇌아의 개말종들이다, 정말 틀려먹었다 료하, 황하지 이를 무슨 료의 난하다, 료하는 료녕성?? 遼가 물 수냐고? 땅 멀, ㅁ 얼로 제천지지.. 료산 기산 등이 어디냐? 그 료주는 고래로 료하촌=변한촌이라고 한 곳인데 어디야?? 산서성이고 유주도 1주로 사방 3000리면 한반도도 1주로 강동주라니까, 무슨 개소리냐...
韓(馬韓)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신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신한'은 고조선의 '신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을 하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각각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대방군이 황해도면 한은 그 남쪽인데 사방 4000리냐고 삼한으로 그려도 정말 사방 400리로 그릴래? 1/10로 그리니 좋냐고? 참 한심하다. 한심해서 말이 안나온다. 사방 4000리면 고구려 사방 2000리보다도 2배로 그려야지.. 삼한으로 나눠도 사방 4000리면 한반도 사방 3000리보다 크다고...
치욕이다 완전 개수모다, 신한조선이 단군조선으로 사방 3만리의 고조선중 한반도 강동주 사방 3000리를 똥칸으로 파서 그 뚜겅으로 고구려/발해라니?? 맥족이 왠 신한지지에 있냐고? 왜 우리가 예맥족이 되어야 하냐고? 정말 여진족 하니, 우리가 신라인이니 변발을 했냐고?
도대체 뭘 보고 역사를 연구하고 지도를 그리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소똥에 쥐새끼말을 듣고 수학도 못하고 명왕성이 지구를 도냐? 이 기경량아? 수학을 알아서 천문학을 이야기하냐고? 완전 세울엘리또 병신 닭대가리같다, 병든 딸대가리가 유태란 먹고 헬렐루야 하는 개병신 새끼들의 기씨가 흉노족이야, 몰라/ 아하 원나라 대원제국의 기황후의 자손이 기씨냐?
恥辱으로 정말 치욕스럽다, 수치스럽고 정말 광복된 것이 맞냐고? 72년 동안 더 퇴보한 것은 저 밀친 산돼지족 빨치산 바크 원순의 역사문제연구소의 마르크스 실증사학 운운하는 도올 맥길 피똥싸고 도앙치는 산돼지족의 개소리 역사다, 고구리 빨기해[勃起海] 개소리 뻘해론이다.
-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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