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오는 소리 / 박인기
묵은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30년도 더 지난 나의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아마도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였던 듯하다. 내가 내 글을 읽으면서도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일까. 시절로 치면 꼭 이맘때쯤의 서간이다. 편지의 서두는 이러하다.
“하늘 높아지고 물빛도 서늘합니다. 밤이면 은하의 별 무리 총총하고, 그 별빛에 화답하듯 지상의 온갖 풀벌레 울음소리 적막 가운데 가득합니다. 가을 오는 소리 기척에 귀는 밝아지고 정신은 맑아지는 듯합니다. 청량한 기운이 다가오는 9월입니다. C 선배님! 그간도 별고 없으셨는지요? 저는 고향 부근 황악산 자락 어느 암자에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마음 다스리는 공부도 하고, 글 쓰는 일에 제 마음을 묶어두는 시간으로 삼으려 합니다.”
진정성이 넘쳐나는 편지는 수신인이 둘이다. 겉봉에 적은 명시적 수신인 말고, 숨은 수신인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진정성 넘치는 편지쓰기에는 알게 모르게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숨은 기제가 작동한다. 진정성이란 ‘과도한 자기 주관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편지 받을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지로 나아가는 숨은 프로세스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편지에서 내가 구사한 ‘문안의 인사법’에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하지만 요새 누가 이런 식의 문안 인사를 쓴단 말인가. 그저 편한 대로 “잘 지내지?” 또는 “별일 없지?” 하는 식이다. SNS 인사는 아예 ‘문안의 언어’도 없이 용건만 전한다. 나도 젊은 시절 한때는 편지 서두에 안부 인사를 하면서 계절 타령을 얹어놓는 것이 좀 진부하고 상투적인 언어 운용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금 옛날식 문안 인사가 띠는 고풍스러움이 좋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 자칫 형식적일 수도 있고, 그 인사에 허위의식이 실릴 수 있음을 나도 경계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다시금 보인다. 안부를 묻는 인사에 계절 변화를 감득하는 말이 실려 가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를 이제야 발견한다. 나이 듦에 대한 고마움, 맞다.
계절의 변화를 지각하려는 인간의 정신은 겸허하고 고매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리듬과 그 감수성을 안으로 일깨운다. 신에 다가가는 심령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가을밤 풀벌레 울음소리가 밤하늘 총총한 별들과 교감하는 걸 느낌으로써 우리의 영성은 얼마나 높이 고양되는가. 그런 마음 사연을 편지글 안부 인사에 담아서 그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가.
국민 가수 패티 김의 명곡 중에 <구월의 노래>가 있다. 나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가사의 첫머리는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며 ~”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에게 오고 있는 구월의 안부에 귀 기울여 보자. 사랑하는 이여! 그대 지금 어디서 구월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느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