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명품고택 순례 여행
안동이라면 양반 · 선비 · 종가를 으레 떠올립니다. 이들 모두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유교가 남긴 문화입니다. 안동의 유교문화는 문화재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종가에는 종손(宗孫)과 종부(宗婦)가 종가의 본분을 다하고자 정성을 가다듬어 조상제사를 지내고 낯선 손님을 맞이하면서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유교 전통이 강한 만큼 안동에는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색창연한 종가가 많습니다.
경북 안동은 집단적 종가문화의 원형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수도임을 자처하는 안동지역의 종가들은 그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고 권위적입니다.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에서 학문의 주류를 형성했던 영남학파의 근거지로 대학자나 세력가를 배출한 고장답게 그 인물만큼이나 위엄을 갖춘 종가들이 많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문화적 깊이와 아름다움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안동의 종가들을 순례하며 그들의 유교적 세계관을 살펴보는 것도 뜻 깊은 여행이 될 것입니다.
만휴정(晩休亭)
눈부시게 흰, 100여 평의 암반 한쪽을 흐르던 옥수(玉水)가 넓은 웅덩이를 채우고, 남은 물은 비탈진 암반을 미끄러지다가 10m가 넘는 폭포가 돼 떨어집니다. 이 계류를 끼고 세워진 정자가 만휴정입니다. 대제학을 지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 선생은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이나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습니다.
선생은 기력이 쇠해지자 이곳 송곡폭포 위쪽에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습니다. 늙어서 쉬려 들어갔다 하여 ‘晩休亭’입니다. 지금은 기와로 바뀌었어도 아담한 계곡과 맑디맑은 계류가 정자와 함께 이루어내는 절묘한 조화는 환상적입니다. 만휴정 주변에 넓게 펼쳐진 반석 위로 흐르는 계곡물이 용소를 이루고 있는데, 반석에는 김계행의 유훈인 ‘吾家無寶物 寶物有淸白’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내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뜻으로 선생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국 고유의 소박함을 보여주는 정자이면서도 주변의 계곡을 정원처럼 즐길 수 있어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특히 살짝 출렁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스릴도 맛볼 수 있습니다. 만휴정에는 김계행 선생이 81세에 유훈으로 남긴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愼 待人忠厚)’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자신의 몸가짐을 삼가고 신중하며, 남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후덕하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묵계종택(묵계서원)
묵계서원(默溪書院)은 안동지방의 유림이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과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1436) 선생의 학문과 청백리 정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13년(1687)에 창건하였습니다. 이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69년에 훼철(헐어내어 걷어버림)되는 수난을 걷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이르러서야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挹淸樓)와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이 복원되었으며, 서원 옆으로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도 조성돼 있습니다.
서원은 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서원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이 시원스럽게 시야에 들어와 마음까지 후련해집니다.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노송들은 묵계서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기와지붕을 얹은 돌담길을 따라 산책하듯 서원 주위를 걸으면 머리까지 상쾌해지는 솔향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 고택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읍청루에 올라가면 멀리 만휴정이 있는 송암계곡과 주변의 산세가 아름답고 그윽합니다. 안동김씨 묵계 종택은 묵계서원에서 멀지 않은 묵계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휴정을 지으면서 살던 집이 멀어 근처에 건립해서 여생을 보낸 주택으로, 건립 당시의 재료들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습니다. 정침은 ㅁ자형의 팔작지붕 집으로, 보존 상태가 좋습니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입니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우물마루를 깐 4칸 대청과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계의 은행나무
수령 약 7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37m, 가슴높이 둘레 14.5m, 뿌리 부분 둘레가 16m에 이르러 장정 14명이 껴안아야 할 만큼 굵습니다. 줄기 굵기로 우리나라 최대의 거목입니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운다는 전설이 있는 영목(靈木)입니다.(천연기념물 제175호) 임하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약 3년여의 작업 끝에 그 자리에서 15m 높이로 들어 올려 현재의 자리에 심어졌습니다.
당시 은행나무 4곳에 빔을 박고 유압으로 하루 1-5cm를 들어 올릴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나무를 살리는데 든 비용만 23억원이 들었습니다. 예전부터 영험 있는 신목이라 여겨 지금도 저녁이면 굿을 하러 오는 무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은행나무 뒤로는 은행나무를 복구한 기록을 전시해 둔 ‘은행나무 전시관’도 있습니다.
지촌종택(지례예술촌)
숙종 때 대사간을 지낸 의성 김씨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선생의 종가로, 1663년에 건립돼 3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임하댐이 생기면서 198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주했으며, 본채는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의 ㅁ자형입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본채와 사당, 방앗간, 별묘, 곳간, 문간채 등이 있으며 지촌 선생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지산서당도 있습니다.
춘양목으로 만든 고택의 문은 모진 풍파를 겪었던 세월의 깊이만큼 넉넉한 자태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행랑채, 사랑채, 별당, 안채, 서원, 사당 등 10채의 전통 가옥이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시원스런 대청마루, 돌계단, 삐걱거리는 대문, 마당 한편의 장독대 등 지촌종택은 유교 건축문화의 정수를 보여 줍니다. 특히 이곳은 근방 8km 이내에 집 한 채 없을 만큼 산과 호수로 완전히 고립된 자연 속의 별천지 세상입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바로 왼쪽에 위치한 사랑채 현판에는 ‘無言齋’라고 쓰여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곳에 서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분위가 아늑하고 여유롭습니다. 폭 50cm 정도의 작은 난간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한 운치를 보여줘 사랑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합니다. 머무는 시간이 오래 될수록 종택에서의 시간 흐름은 바깥세상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느림의 미학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무실종택(務實宗宅)
전주 류씨 무실파의 대종택이다. 무실의 입향조는 전주 류씨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6세손 류성(柳城)이다. 류성은 의성김씨 김진의 사위가 되어 영주에서 안동으로 이거해 왔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 후반 또는 18세기 전반에 건립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원래 있던 곳인 임동면 수곡리 691번지에서 현 위치로 옮겨 왔다. 1991년 봄 사랑채에 화재가 발생하여 다시 보수하였다. 본채는 정면 7칸, 측면 6칸의 민도리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부속 건물로 솟을대문, 행랑채와 사당이 있다.
정침은 ‘ㅁ’자형이지만 전면 좌측의 사랑채가 돌출한 형이다. 중문간(中門間)의 우측에 갓사랑방 1.5칸이 놓여 있고, 이 갓사랑방에서 우측으로 돌출한 부분의 전면에는 사랑 마당 쪽으로 개방된 3칸에 길쭉한 사랑 대청을 설치하였으며,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크기로 정면 3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대청의 왼쪽 어간 앞에는 안방으로 들어가기 쉽게 댓돌을 놓았다. 대청의 왼쪽에는 안방이 있는데 크기는 2칸이며 2개의 출입문이 있다. 안방 뒤쪽에 조그만 광창도 나 있다.
수애당(水涯堂)
댐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봄이면 푸르른 보리밭이 호수와 아주 잘 어울리는 풍경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주 류씨 수곡파의 종갓집인 무실종택과 나란히 서 있는 이 집은 수애 류진걸 선생이 1939년에 건립한 곳으로 숙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3채의 건물로 29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 한옥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침과 고방채 모두 합각지붕으로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고방채는 정면 10칸의 ‘ㄱ’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수애당은 사묘재실로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춘양목으로 지어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문살의 문양이 일반 가옥에 비하여 특이하며, 전체적으로 조선 말기의 건축기술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안동호반나들이길
민속촌 석빙고 앞 보조댐부터 법흥교까지 2㎞ 구간에 조성된 산책로로 육각정, 목교, 데크로드 등이 설치돼 있습니다. 나들이길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봄이면 온 산을 뒤덮는 산벚꽃과 함께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신선하고 울창한 숲들이 우거져 삼림욕장을 방불케 합니다. 그리고 가을이면 갖가지 단풍들이 호수에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겨울이면 눈 내리는 주변 경치와 함께 한 폭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또 호반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다 보면 호수에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지나다니는 모습이나 물새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라 가족들이 일광욕을 하는 모습도 볼 수도 있고, 계절마다 피고 지는 작은 들꽃들과 함께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다람쥐, 고라니 같은 동물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책로 곳곳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와 벤치, 전망대가 설치돼 있어 잠시 땀을 식히며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끼리 목교를 건너며 낭만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주변의 문화재, 관광명소와 연계돼 있어 산책로를 걸으며 강 건너편 임청각과 신세동 7층 전탑을 볼 수 있으며, 산책로와 연결된 법흥교, 안동조정지댐을 통해 이들 문화재를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또 개목나루, 민속박물관, 민속촌, 안동문화관광단지와도 연결돼 있어 자연과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교인 월영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물에 비친 월영교와 다리 난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보노라면 여행에서 지친 심신을 보상 받기에 충분합니다.
월영교 야경
월영교(月映橋)는 안동물문화관과 안동댐 민속경관지를 연결하는 나무다리로, 2003년 개통했습니다. 길이는 387m. 국내 최장 목책교입니다. 월영교는 매일 밤마다 빛 장관이 연출됩니다. 야경 출사지로 꽤 유명합니다. 형형색색의 예쁜 조명이 야경의 극치를 보여 주고, 다리 난간에서 분사되는 분수의 물줄기까지 더해져 월영교의 야경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월영교는 생김새가 독특합니다. 미투리 짚신을 형상화해서 그렇습니다. 한 조선 여인의 사연이 담긴 미투리입니다. 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사업지구 현장에서 주검 한구가 발견됐습니다. 주검의 가슴 위에 미투리 한 켤레와 한글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편지는 1586년 31세로 요절한 이응태의 아내, 원이 엄마의 것이었고,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는 환자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힘 없으니, 쉬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 가소. ...’ 기교 없이 심사 쏟아낸 문장이 절절합니다. 그래서 월영교를 지나는 안동호반나들이길을 원이엄마 테마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보내야하는 원이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