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Of5GyKhYTE
예배영상
고후 1:17, 계획과 복음은 모두 예입니다. 2024.6.30.
여러분이 볼 때에 지금 누군가가 잘못하고 있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찾아가서는 엄히 경고하고 책망하여 바로잡고자 하는 계획이 있을 때, 그때 그것을 포기하고 글자나 문자로 편지를 써서 그들을 바로잡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 후서는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바라볼 때, 그런 심정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만연한 문제를 볼 때, 가슴 아프고 눈물나고 근심이 지나치게 많아서 잠도 잘 수 없었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2번씩이나 방문에서 그들을 바로잡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자고 했던 이런 그의 계획은 하나님께 “예”가 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였습니다.
고후 1:15–16,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계획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가 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했던 일을 포기했는지, 그것을 변명하고 핑계?되는 것이 이 서신의 주된 목적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방문계획을, 그것도 하나님께 예가 되는 이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첫째. 교회를 아꼈기 때문에 방문계획을 포기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고 하는 계획은 경솔한 것(무책임한 결정)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 곧 하나님께 예가 되는 계획이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 방문은 사사로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계획이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방문계획이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다 예가 되고, 또 아멘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계획//복음=예).
고후 1:17–20,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문제투성이였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그들을 아꼈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을 참고 또 참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방문해서 그들의 믿음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도 있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방문을 포기했습니다.
고후 1:23–24,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아끼다’(페이도마이), 아끼다, 삼가다, 참다. 모면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아껴서 참고 기다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불같은 성정으로 치면, 당장 방문해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를 아끼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내가 개척했으니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해 보겠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돕는 자(수네르노스, 동역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린도교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방문해서 그들의 믿음 생활을 지배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을 아끼시고, 여러분의 기쁨, 행복, 구원, 축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죄 지을 때마다 찾아와 심판하거나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참으시고 여러분이 주관적으로 신앙생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 근심 중에는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에는 벌 받을 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두 번씩이나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교회를 위해서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교회를 방문할 때는 그의 강한 책망으로 인하여 모든 고린도교회를 슬프게 만들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주의 종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할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방문할 때에는 슬프고 근심된 일이 아니라 좋은 일, 기쁜 일로 방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넘치도록 사랑했습니다.
고후 2:1–4, 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여러분을 넘치도록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벌 받을 만한 그런 죄를 지을 때마다 여러분을 찾아와 책망하거나 바로 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은 마음으로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눌림’(뜰리핍스, 환난, 고통, 괴로움, 근심)과 ‘걱정’(수노케, 감옥, 고통, 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사도 바울도 교회를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방문을 포기했습니다.
고후 2:5–6,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람들이 만날 때, 기쁨과 행복으로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자기 주장이 너무나도 강하게 되면, 그런 만남은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랑의 감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직장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좋은 일로, 축복하는 일로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셋째, 교회는 그들을 벌 주지 말고,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법대로 따지자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벌 받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 교회를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벌받을 사람을 벌주게 되면, 그는 더욱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고, 교회를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벌받을 만한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벌을 내리지 않듯이, 참고 또 기다리고 계시듯이,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벌 받아 당장 지옥 갈 여러분들을 위해서 용서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베풀듯이 하나님처럼 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하나님처럼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고후 2:7–11,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벌 받을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며, 또 그것은 교회가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탄의 계책에 빠지는 것입니다. 벌 받을 사람을 벌주는 일은 도리어 그들에게 큰 근심과 슬픔에 빠지게 하여, 결국은 사탄에게 내어주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오직 용서, 위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찾아가서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그냥 용서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베풀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