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단식은 슬퍼하며 회개한다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많은 성인들이 단식을 하였고,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을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에 고통을 겪으며 많이 기도하고 자신의 게으름이나 호강함을 부끄러워 자숙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외적인 형식을 갖춘 단식을 기뻐하지 않으시지요. 카니발(carnival)은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나라에서 사순절 시작 직전 3일간 떠들썩한 축제로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실컷 육식하고 놀아보자는 취지인데 이와 같은 행사와 축제를 주님은 좋아하실까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단식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금요일에 지키는 소재도 그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금육하기 위해서 비싼 회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재의 분명한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식도 밥을 굶는 것으로 슬픔과 뉘우침과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울음과 슬픔을 몇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우선 곡(哭)이 있습니다. 울거나 노래하는 것으로 상가에 가면 상주가 곡한다고 합니다. ‘귀신 곡하는 소리’라고 해서 음울한 소리도 곡이라고 합니다. 눈물은 흘리지 않고 그냥 소리만 내는 슬픔입니다. 또한 통곡(慟哭)이 있는데 이는 서럽게 울면서 크게 소리도 내는 것입니다. 즉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내는 울음이죠. 통곡과 조금 다른 애통(哀慟)이 있습니다. 슬퍼서 서럽게 울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가슴을 찧으면서 슬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 울음입니다. 그리고 읍(泣)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인데 이는 근심을 하면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서 떠나가실까 걱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소리는 내지 않지만 연인과 이별할 때 흘리는 눈물이 바로 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체읍(涕泣)이 있는데 이는 애통과 같이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가슴 깊이 뉘우침으로 서럽게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당들에게 잡히고 매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시며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보고 단식하며, 애통하고 체읍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반성하며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슬퍼하면서 단식을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오 5,4)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슬퍼하고 단식하며 보속하는 사람들이 바로 슬퍼하는 사람들이지요. 교리실화에서 통회의 눈물에 대하여 이런 일화를 전승으로 전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도록 하였지요. 제일 처음 천사는 금덩어리를 찾다가 “아니야, 아니야, 이런 건 우리 하느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있어!”하고 생각하고 한 아름의 다이아몬드를 움켜쥐었다가 보기만 하고 버렸습니다. 그 후 천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귀중한 물건을 찾느라고 세상을 두루 살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인이 꿇어 앉아 울부짖더니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심에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요. 이에 천사는 가장 아름다운 회개의 눈물을 성작에 받아서 하늘로 가져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찾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낡은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사고를 담을 수 없습니다. 패러다임(paradigm)은 우리의 기본적인 사고의 틀입니다. 이 기본적이 패러다임이 잘못되었으면 그 즉시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헌옷을 꿰맬 때 새 헝겊으로 깁지 말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말라고 하시지요. 구약의 환경에 맞는 사고방식으로 주님의 새로운 약속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40대의 아버지가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시외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차 안은 온통 술 냄새가 풍기는 듯 하더니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들끼리 다투더니 오빠인 듯 한 아이가 제 동생을 때리자, 세살가량의 여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고 아버지는 조용히 못하냐고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더니 급기야 때리고 다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차 안은 온통 한바탕 소동이 일고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한다고 아빠를 성토하는 차 안의 사람들과 무식하게 때리는 아버지가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다고 나무라는 노인도 있었고 성질 급한 남자는 따지듯이 술 취한 남자에게 야단을 치자 술 취한 아이 아버지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지금 아내를 화장하고 재를 강에다 뿌리고, 애들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참입니다. 지금껏 한 번도 애들을 돌본 적 없고, 공사판에서 막노동으로 살면서 아내가 암에 걸려 죽어가는 데도 병원에 한 번도 데리고 가서 치료도 못해주고, 지금은 너무 막막해서 죽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어린 것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고향에 나이든 어머니에게 데리고 갑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봇물이 터지도록 흘러나오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를 본 차 안의 사람들은 놀라 한 결 같이 입을 다물었고 차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동승한 사람들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전환되었습니다. 마음으로 그 아버지를 욕한 사람들도 동정하는 마음으로 섣부르게 욕한 행동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우리의 패러다임은 전환되어야 합니다. 낡고 고정된 가치관과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분명 달라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람 냄새 나는 사람으로 서로 향기가 되어서 감칠맛 나는 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낡은 사고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주님! 그동안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집과 편견으로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지 못하였음을 뉘우칩니다. 이제는 당신 앞에 질투, 분노, 분쟁, 사랑 없는 모든 행위를 고백하고 새사람으로 당신 품에 달려드오니 착한 자녀 되게 하소서. 참 좋으신 아버지!!!
<나는 내 백성의 운명을 되돌려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11-1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1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12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 이 일을 하실 주님의 말씀이다. ─
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14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 주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축일7월 6일 성 이사야 (Isaiah)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 연도 : -8세기BC
같은 이름 : 이사이야
"야(훼님)는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성 이사야(Isaias)는 기원전 760년경 아모스라는 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사 1,1). 이밖에 그의 가족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체나 언어 기법, 도시인들이 즐겨 쓰는 은유, 또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때문에 그를 이 도성 출신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시찰 나갔을 때 그가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음으로 보아(7,3), 귀족이었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귀족처럼 왕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없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소명 환시를 근거로 이사야가 사제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6장의 배경은 성전 안팎이 다 될 수 있다. 6장의 환시를 보기 위해서 이사야가 굳이 사제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격조 높은 문체를 구사하고 강력한 웅변력을 발휘하는 이사야가 평범한 집안 이상의 출신으로 고급 교육까지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사야가 임금이나 조정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의 종교, 정치, 사회 정책을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출신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이사야에게는 아모스나 호세아처럼 ‘광야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집트 탈출 등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알지만 별다르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가 시나이 계약과 함께 선택된 민족의 양 기둥을 이루는 다윗 계약(2사무 7장)을 강조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왕실과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생활은 그의 사명 수행과 관련된 사항만 몇 가지 간략히 제시된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는데 두 아들에게 모두 상징적 이름을 붙인다(7,3; 8,3). 자식들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8,18). 이렇듯 이사야는 혼인과 가정생활까지 통틀어 온몸으로 하느님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소명을 받고(6,1) 그 뒤 세 임금의 치하에서 활동한다(1,1).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이사야가 므나쎄 왕 시기(기원전 687-642)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며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순교했다는 전통은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 에녹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왕 시기에는 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므나쎄 왕은 온갖 외국 종교 관습을 끌어들였고, 야훼 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이사야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축일7월 6일 성녀 마리아 고레티 (Mary Goretti)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연도 : 1890-1902년
같은 이름 : 고레띠,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고레티(Maria Goretti)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지방의 코리날도(Corinaldo)에서 가난한 농부의 여섯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지 고레티(Luigi Goretti)와 어머니 아순타 카를리니(Assunta Carlini)는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충실한 신앙생활로 인도하고자 했다.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총명하며 예의 바른 마리아는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1896년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져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농장마저 포기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팔리아노(Paliano) 인근의 콜레 지안투르코(Colle Gianturco)로, 1899년에는 오늘날의 라티나(Latina)와 네투노(Nettuno) 인근 레 페르리에레(Le Ferriere)로 이사가서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며 루이지 고레티가 그만 건강을 잃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농장 주인은 그가 하던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을 구했는데, 새로 농장에 온 사람은 조반니 세레넬리(Giovanni Serenelli)로 그에게는 17살 된 알레산드로 세레넬리(Alessandro Serenelli)라는 아들이 있었다. 1900년 마리아가 10살 때 병약한 아버지는 말라리아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린 나이지만 마리아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동생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편이었던 마리아는 첫영성체를 할 나이가 되었으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그녀는 어머니가 알려주는 바를 암송하고, 어머니 친구의 도움을 받고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안 본당 신부도 자주 그녀를 찾아 교리를 가르쳐줬다. 마침내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5월 29일 감격스러운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미사 중에 본당 신부의 강론을 들으면서, 그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늘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그해 7월 5일 오후,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평소처럼 집안일을 하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농장 일을 하며 이웃해 살던 조반니 세레넬리 가족과 그녀의 어머니도 모두 일을 나간 뒤였다. 그때 일하러 가던 중 핑계를 대고 돌아온 18살의 알레산드로는 자신의 셔츠를 기워 달라며 마리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베란다에 앉아 바느질하던 어린 마리아를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가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칼로 위협했다. 알레산드로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리아를 강제로 강간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큰소리로 “안 돼! 알레산드로. 이것은 하느님께 대죄를 짓는 거야!”라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가 끝까지 버티자 알레산드로는 이성을 잃고 날카로운 칼로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그녀의 몸에는 모두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뒤늦게 돌아온 가족들이 피범벅이 된 그녀를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다.
상처가 너무 심해 마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으나 의사들도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병원으로 찾아온 본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마지막 영성체를 했다. 본당 신부는 성체를 영해 주면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처럼, 너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든 알레산드로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겠느냐?”라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천국에서 기도할 겁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해 주실 거예요.” 이렇게 정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02년 7월 6일 오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유해는 로마 남부 네투노에 있는 예수 고난회의 은총의 성모와 성녀 마리아 고레티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녀의 영웅적 덕행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순교자다운 죽음은 그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그녀의 시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한편 알레산드로는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종신형 대신 30년의 노동형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전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밤 한 어린 소녀가 머리에 화관을 쓰고 하얀 베일을 휘감은 채 손에 백합을 들고 나타난 것을 보았다. 자신이 참혹하게 죽인 소녀가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가와 백합꽃을 전해주는 꿈을 꾼 뒤에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며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 그녀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은 형기를 모범적으로 마치고 출옥한 알레산드로는 성녀 마리아 고레티의 어머니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어머니 역시 이미 자신의 딸이 용서했다며 그를 껴안고 기꺼이 용서해 주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47년 4월 2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는데, 그때 알레산드로는 시복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어린아이를 성인품에 올리는 문제로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교황청 시성성은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수호한 그녀의 영웅적 행동을 어른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50년 6월 24일 교황 비오 12세는 그녀의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은총과 그 은총에 대한 굳은 결의의 응답에 의지하여 목숨을 바치고 동정의 영광을 잃지 않았다.”라며 그녀를 일컬어 ‘20세기의 성녀 아녜스(Agnes)’라고 칭송했다. 이 시성식 미사에는 성녀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회개한 후 새사람이 된 알레산드로도 참석했다. 알레산드로는 후에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평수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회개와 봉사의 삶을 살았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모든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히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성도덕이 문란해지는 현대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이사야(Isaiah) 형제들과 마리아 고레티(Mary Goretti)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