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이신화의 유럽 인문 여행]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태양왕 루이 14세
여성조선 2022.10.04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Le Chateau de Versaille)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떠올린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비로 프랑스 혁명 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여인. 그녀의 삶은 영화, 소설 등에 아주 많이 등장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을 만든 이는 루이 14세다. “짐은 국가다”라고 했던 그가 20년에 걸쳐 세운 궁전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의 조형물.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파리에 가면 으레 베르사유 궁전(Le Chateau de Versaille)을 찾게 된다. 파리에서는 서남쪽으로 23km 떨어진 지점으로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드 프랑스(le de France)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로크 식 건물이 눈앞에 있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1638~1715년)가 20여년(1662~1680년)에 걸쳐 세운 곳이다. 아버지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의 ‘루이 르 보’가 건축을 담당하고 ‘앙드레 르 노트르’는 조경을, ‘샤를 르 브륑’은 미술을 담당했다.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평가 받는 대궁전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가구, 장식품 등이 많이 없어졌으나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주요부분은 역사미술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당시 궁정 의식을 치르거나 외국 특사를 맞을 때 사용되었던 이 궁전에서는 ‘거울의 방’이 가장 화려하고 멋진 공간으로 꼽힌다. 이 방에서는 주로 가면무도회나 왕족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궁전 안 예배당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왕과 그 가족들의 침실인 ‘루이 14세의 방’ 등이 눈길을 끈다.
침실.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
화장실이 없던 궁전
아이러니하게도 베르사유 궁전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게란트(Guerrand)가 쓴 <화장실 문화사>를 보면 당시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를 지참하거나 정원 곳곳에서 용변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 정원 관리인은 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에티켓’이란 팻말을 곳곳에 세웠고, 이것이 ‘에티켓’이라는 말이 생겨난 배경이다.
왕도 볼일이 급할 땐 시종을 불러 용변을 보았다. 루이 14세가 그때까지 살던 파리의 루브르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도 루브르 궁전이 오물로 뒤덮여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 하이힐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똥을 피하려고 신고 다녔다는 설도 있다.
집집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면 밤새 용기에 받아두었던 오물을 창밖으로 내던졌는데, 그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파라솔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프랑스 향수 산업이 발달한 이유도 이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장실을 안 만든 것은 왕비가 성 안에 불결한 것을 넣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란다. 현재는 유료 화장실이 있다.
왕비 촌락의 목가적인 풍경
필자의 눈길을 잡아끈 곳은 거대한 궁전보다 야외 공간이다. 궁전 건물 옆에는 넵튠의 샘, 라톤의 샘, 아폴론의 샘 등이 있고 아폴론의 샘 뒤쪽으로 대운하가 연결된다. 긴 계단 밑으로 이어지는 운하는 최장 길이는 8km에 달한다. 거기에 부왕이 말을 타고 사냥하던 숲을 통째로 궁전의 정원으로 삼았다. 인공 정원이 아닌 듯, 자연스러운 이 정원은 전 세계에서 모방해 만들고 있다.
목가적인 촌락.
왕비의 촌락.
쁘띠 뜨리아농.
넓은 정원과 길게 이어지는 운하를 따라가면 자그마한 호수가 있다. 호수 위에는 쪽배를 타면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더 산책로를 따라 가면 ‘쁘띠 뜨리아농(Petit Trianon)’이다. 1760년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정부를 위해 지은 성이다. 후에 마리 앙투와네트가 좋아해서 루이 16세가 그녀에게 줬다. 그 후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줬다고 한다. 그 주변에 만들어진 왕비의 촌락(Hameau de la reine)은 여느 시골 농가하고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랑 트리아농.
멀지 않은 곳에 루이 14세가 정부인 멩뜨농 부인과 밀회를 즐기기 위해 지었다는 ‘그랑 뜨리아농(Grand Trianon)’이 있다. 단층 건물로 완공된 궁전은 분홍빛 대리석 외관을 갖고 있다. 1670~1687년까지 도자기 장식이었으나 도자기가 파손되자 망사르가 6개월 만에 대리석으로 된 견고한 트리아농을 새로 지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인생
베르사유 궁전을 만들고 이궁(移宮)한 루이 14세의 인생이 흥미롭다. 루이 14세는 루이 13세(1601~1643년)와 안 도트리슈(1601~1666년) 왕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23년만에 생긴 아들이었다. 그러나 루이 13세와 왕비의 사이는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당시 마자랭(Jules Mazarin´, 1602~1661) 추기경의 아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단다.
루이 14세 초상화.
루이 14세는 아버지가 자객의 습격으로 급작스럽게 죽자 5살에 왕위에 오른다. 어린 왕은 어머니와 마자랭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그가 24살이 되었을 때, 마자랭이 죽었고 그 측근들을 축출하고 강력한 왕으로의 자리매김 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기편이 아닌 귀족들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파리와 떨어진 외곽에 거대한 궁전을 짓고 궁전 안팎에서 살게 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에게 사치와 향락, 타락한 성 문화와 패륜을 안겨주며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왕정문화를 꽃피운 곳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루이 14세는 72년의 치세기간 동안 “국가, 그것은 바로 짐이다(L'Etat, c'est moi)”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태양왕’이라고 칭하며 베르사유 궁전을 절대 권력의 요람으로 삼았다. 그러나 가장 사치스럽고 화려한 탓에 프랑스의 피폐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사실상 원인제공자는 루이 14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가발을 쓴 왕, 루이 14세의 여자들
루이 14세는 소년시절, 마자랭 조카인 마리 만치니를 만나 첫사랑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정략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도 못생긴데다 머리도 나쁘고 프랑스어도 잘 못해 늘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놀림감이었다. 왕은 부인에게 애정을 갖지 못했으나 종족보전의 의무를 다해서 5명의 아이는 낳았다. 그러나 다 죽고 한명 남았다.
루이 14세는 많은 바람을 피웠다. 두 번째로 만났던 몽테스팡이라는 기혼녀와는 8명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그녀는 질투심과 소유욕이 대단해서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그러다 왕은 당시 몽테스팡의 아이들 교사였던 맹트농(Marquise de Maintenon) 부인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왕은 세 여자(본부인, 정부 두 명)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전쟁에 나갔다 돌아온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한 여자가 퐁탕쥬다. 아리따운 그녀에게 왕은 폭 빠져들었다. 그녀의 미모는 정말 대단했는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린 머리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유행한다.
그녀는 왕의 자식을 낳았지만 금방 죽어버렸다. 엉엉 우는 그녀를 보고 루이 14세는 마음이 돌아서버렸단다. 결국 그녀는 위로금 받고 쫓겨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왕은 말년에 의지할 여자는 맹트농일 뿐이라고 다짐했다. 맹트농을 의지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부인에게 잘해줬단다. 맹트농이 신적 존재 같기도 하다.
루이 14세의 젊은 시절.
또 재밌는 일화로는 법원이나 뮤지컬 배우들이 쓰는 가발의 시발점이 루이 14세란다. 아버지 루이 13세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일찍부터 머리가 빠져서 머리를 기를 수 없었다. 마자랭이 대머리인데 루이 14세도 대머리라는 것이 묘하다. 그는 자기만의 백발의 가발을 맞춰 쓰게 된다.
왕이 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따라했고 현재도 영국의 법관들은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 그는 30세에 이를 다 뽑았다고 알려졌다. 당시에는 이가 성할 때 다 뽑아야 했단다. 그의 30세 이후의 초상화를 보면 빠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죽었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남아 현재 돈을 많이 벌게 해주고 있다.
Travel Data
가는 방법: 지하철이 편리하게 돼있다. 초보자들은 버스보다 지하철을 타거나 위치를 가늠하면서 도보 여행을 하는 것이 편하다. 앵발리드, 생미셸등에서 RER-C 5호선 Versailles Rive Gauche행을 타고 종점에서 하차해 도보로 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