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7> 송도해수욕장
경북매일 2022.10.04
포항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혀 있는 곳
송도해수욕장(2000년)
동해안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해수욕장으로 북에는 원산, 남에는 포항 송도라 했다. 송도해수욕장의 은빛 고운 모래는 명사십리(明沙十里)라는 말이 딱 어울렸고, 수온과 수심이 적당해 수영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송림은 더위를 피하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그런 까닭에 송도해수욕장은 여름이 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지금은 설치 작품처럼 외롭게 서 있는 다이빙대에도 까까머리들이 바글거렸다.
포항이 면에서 읍으로 승격한 1931년에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송도해수욕장은 포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양지였다. 여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사계절 내내 포항 사람들은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에서 여가를 즐겼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소풍을 간 곳도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이다.
대구 사람들에게도 송도해수욕장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였다. 대구에서 송도해수욕장으로 오는 인파를 수송하기 위해 대구-포항 간 임시 열차가 다니기도 했다. 오죽하면 송도해수욕장을 ‘대구의 앞마당’이라고 했을까. 1960년대 후반부터 영일만에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그 고운 명사십리가 서서히 유실되고 송도의 명성도 차츰 기울었다.
북새통을 이루던 송도의 횟집이나 가게는 하나둘 문을 닫았다. 송도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송도를 지켜보는 포항 사람들의 마음에도 쓸쓸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파란대문’에서 주 무대인 송도는 쇠락한 해변으로 비친다. 2007년 송도해수욕장은 공식적으로 폐장되고 만다.
동해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해수욕장
사계절 내내 여가 즐기는 인파 북적
1960년대 후반 철강산단 조성으로
모래 유실되고 명성도 차츰 기울어
2012년 백사장 복원공사 본격 시작
송도 상징 ‘평화의 여상’도 재건립해
바다·음악 즐기는 사람들 속속 모여
낭만의 선율 흐르는 공간으로 변신
‘매일같이 송도 바닷가를 거닐었다’
주옥같은 수필 작품들 남긴 한흑구
‘질투의 반군성’ 강렬한 체험 묘사한
이육사 등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
2023년에 재개장할 듯
영일만의 너른 품은 송도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푸른 파도와 시원한 샛바람, 하얀 갈매기들이 송도를 서서히 살려내고 있다. 영일만과 호미곶이 잘 보이는 자리에 커피숍과 식당이 속속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송도 역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다.
2012년 10월부터 해수욕장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유실된 백사장을 복원하기 위해 모래 15만 세제곱미터를 채우는 양빈(養濱) 공사를 하고 있고, 모래가 더 이상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수중 방파제(潛堤) 3기도 설치했다. 이 사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포항시는 2023년에 송도해수욕장을 다시 개장할 방침이다.
송도를 상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의 여상(女像)이다. 1955년 7월에 세워진 여상은 원래 해수욕장 입구 쪽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상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자 2015년에 지금 위치로 옮겨 재건립했다.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정감이 가는 조형물이다. 여상 주변에서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바다와 음악이 좋아서 스스로 즐기는 사람들이다. 멀리 중남미의 쿠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풍경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송도는 그렇게 낭만의 선율이 흐르는 곳이다.
노루와 꿩이 뛰놀던 송림
바닷가 마을은 육지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마을로 날려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일제강점기 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방풍림을 조성했다. 1911년 일본인 대지주 오우치 지로(大內治郞)가 송도 백사장 불모지 53여 정보(16만여 평)의 국유지를 대여받아 조림 사업을 전개했고, 십수 년이 지나 송림이 울창해져 1929년 어부보안림(魚附保安林)으로 지정되었다(‘포항시사’ 3권, 2009, 279쪽).
넓은 방풍림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었다. 초기에 묘목을 심으면 뿌리를 못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모래흙에는 뿌리를 내리기 힘든 탓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자란 묘목을 뿌리째 뽑아 일꾼들이 지게에 지고 한 분(盆)씩 옮겨 심었다고 한다. 송림은 그런 난관을 이겨내고 만들어졌다. 지금도 대낮에 송림에 들어서면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냉기가 돈다. 과거에는 하늘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울창했다. 포항의 원로 문인 박이득은 송도의 옛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모래언덕에 올라서면 바다가 눈앞에 확 다가온다. 갑자기 다가오는 바다의 푸른색, 비릿한 바다 내음, 순백의 모래밭, 무수히 쏟아지는 햇빛, 모두 다 눈이 부시다. 소년이 아니라도 황홀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송도는 10여만 평이 송림이었고,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너무 크고 빽빽해서 혼자 다니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숲에는 또 다람쥐, 청솔모, 산토끼, 노루, 꿩, 각종 새들이 무리 지어 제각각 송림의 주인이라고 소리쳤다.” - 박이득 ‘영일만, 그 푸른 해변의 노래’, ‘월간문학’ 2017년 2월호, 232쪽
지금은 노루와 꿩은커녕 다람쥐나 청솔모조차 보기 어렵다. 세월은 송도해수욕장과 송림, 아니 포항의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바꿔놓았다. 하지만 송림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2017년에는 포항시에서 송림 테마거리를 조성했다. 조용한 산책길 사이로 물길이 흐르고, 분수와 스틸 작품 등이 조화를 이뤄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 ‘평화의 여상’
한흑구, 이육사와 송도의 인연
송도는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여러 예술인이 이곳에서 얻은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1948년 고적지 답사차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왔던 한흑구는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송도에 잠시 들렀다가 그 직후 서울에서 식솔을 데리고 포항으로 이주했다. 그러고는 1979년 작고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으며 ‘보리’, ‘나무’ 등 주옥같은 수필을 남겼다. 동해의 사색인이던 그는 매일같이 송도 바닷가를 거닐었다고 술회했다.
이육사도 송도와 인연이 깊다. 1936년 7월 이육사는 서울을 떠나 대구에서 귓병을 일주일 정도 치료하고 7월 29일 경주 불국사를 관람한다. 그날 밤에 송도해수욕장 인근 친구 서기원의 집에 머무르고, 다음 날 신석초에게 엽서를 보낸다. 8월에는 동해송도원(東海松濤園)에서 상당 기간 체류하는데, 역사상 최장기 장마와 최강의 태풍이 몰려온다. 육사의 수필 ‘질투의 반군성(叛軍城)’(1937)에서 “태풍이 몹시 불던 날 밤, 온 시가는 창세기의 첫날 밤같이 암흑에 흔들리고 폭우가 화살같이 퍼붓는 들판을 걸어 바닷가로 뛰어나갔습니다.
가시넝쿨에 엎어지락 자빠지락 문학의 길도 그럴는지는 모르지마는 손에 들린 전등도 내 양심과 같이 겨우 내 발끝밖에는 못 비추더군요. 그러나 바닷가를 거의 닿았을 때는 파도 소리는 반군(叛軍)의 성이 무너지는 듯하고, 하얀 포말(泡沫)에 번개가 푸르게 비칠 때만은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이때를 회고한다(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다시 읽는 이육사’, 창비, 2017, 304∼305쪽 참조).
‘질투의 반군성’에서 육사가 송도에서 보낸 여름 한철이 얼마나 강렬한 체험이었는지, 그 후 육사의 문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육사가 신석초에게 보낸 1936년 7월 30일 소인 엽서는 발신지가 ‘포항 행정(幸町, 지금의 포항시 중앙동)’으로, 대구와 경주를 거쳐 포항에 온 경로와 몸 상태 등이 담겨 있다. 이 엽서는 광복 77주년인 2022년 8월에 국가문화재로 등록 예고되었다.
포항 출신의 화가 이창연은 포항의 바다를 즐겨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송도를 그린 작품이 여럿 있다. 밝고 화사한 색채에 묘한 우수가 느껴지는 독특한 화풍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2010년 55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송림 테마거리에 많은 사람 찾아와
송도에는 유서 깊은 배움터가 있었다. 포항대학의 전신인 포항수산학숙이 1953년 7월 이곳에서 문을 열었다. 포항의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정치인인 하태환이 세운 포항수산학숙은 수산초급대학, 실업전문대학 등으로 교명이 바뀌다가 1989년 2월 죽천으로 옮겼다. 포항대학 출신들은 수산업을 중심으로 포항 산업의 기반을 만든 역군이고 지역사회 곳곳에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포항대학이 이전한 후에는 동지중·고등학교가 잠시 머물다가 2002년 3월 용흥동으로 옮긴 후 아파트가 들어섰다.
송도(松島)는 지명에서 드러나듯 원래 섬이었다가 다리가 연결되면서 사실상 육지가 되었다. 그 후로도 바로 옆에 철강산업단지가 조성되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곳에서 자연에 변형을 가하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고, 송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 곱던 명사십리가 서서히 사라지자 포항 사람들의 마음 한편이 아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송도는 다시 살아나 송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발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포항 사람들에게 송도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묻혀 있는 곳이기에.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