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작은 도구로 써 주시기를 원합니다
함상태 이냐시오 안동교구 모전성당 희망의 모후 Cu. 단장
부족하기만 한 제가 이제까지 주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살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리면서 그동안 주님의 손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고 살아왔는지 되돌아봅니다.
월남 파병 출국 직전의 믿을 수 없던 일
저는 제대를 3개월 정도 앞둔 1968년 7월1일부터 월남 파병 훈련소에서 한 달간 실전 훈련을 무사히 끝내고 출국 준비도 마쳤습니다. 마지막 회식 후 취침에 들어갔으나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든 지 얼마 안 된 듯 한데 보초가 황급히 깨웠습니다. 사령실에서 받아왔다며 ‘십자성 부대마크’를 주면서 정글복에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맹호부대에서 소대장과 함께 안테나가 솟은 무전기를 메고 다니다 보면 저격당할 위험이 높은데 갑자기 비전투부대로 소속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주님께서 우둔한 저를 사랑하시어 주님의 작은 도구로 써주시려고 베푸신 은총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파병하게 된 것은 이 병장 대신에 이뤄진 것입니다. 제대를 이십여 일 앞둔 이 병장이 무전병으로 차출되었고, 그는 전쟁터에서 죽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다며 숙소에 누워 단식하는 바람에 통신대장님을 난처하게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죽고 사는 건 주님께 달렸는데, 이참에 해외 구경이라도 해볼까?’ 믿음이 별로 없던 저 스스로도 놀란 결정이었습니다.
파병생활은 만 10개월이면 귀국하는데, 해병 청룡여단 지원대에는 후임들이 기피하기 때문에 만 14개월을 근무했습니다. 그때 부대 앞 1km쯤 떨어진 마을 입구에서 큰 폭음이 터졌는데, 베트콩들이 한밤중 도로에 매설해 둔 지뢰에 우리의 방탄 트럭이 폭발한 사고였습니다. 매일 아침 수십 대의 트럭이 보급 수송을 위해 호이안에서 다낭까지 왕복하였고, 선임 무전병이 한 달간씩 수송대 맨 뒤의 무장 지프에 타고 지정장소를 통과할 때마다 사령실과 교신을 했습니다. 저도 주님께 의탁하며 지뢰 폭발이 있던 그 길을 한 달간이나 무사히 다닐 수 있었습니다. 화살기도만 바쳤지만 그때만큼 주님의 손길을 가까이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외아들을 사제의 길로 보낸 일
저희 외아들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집안의 종손인데 어찌할지 며칠간 고민했습니다. 아내는 하나뿐인 아들이 사제가 되는 건 말리고 싶다고 말하며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집안의 종손으로서 가계를 이어간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그리고 주위에 딸들만 있고 아들이 없는 가정을 보면서 생각을 굳혔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기쁘게 응답하자며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훗날 아내는 친구들 모임에서 ‘며느리’ 자랑을 할 때면 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섭섭하기도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들 사제는 프랑스 파리 신학교에서 십여 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본당 사목과 동시에 성경 연구와 강의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외아들 사제의 탄생으로 인해 가까운 집안의 외아들도 수원교구의 사제로 서품을 받아 착한 목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와 참사랑으로 성화된다는 것을 믿으며 우리 내외는 매일 아들 사제와 모든 사제가 주님의 착한 목자로서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거룩한 사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본당 사목회장으로서 새 성전을 봉헌하게 된 일
2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우리 본당의 과제는 새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논의되었으나 역대 신부님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다가 김종길 제오르지오 신부님께서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사목회장의 임기가 끝나기 한 달 전이었는데, 사목협의회에서 “내년부터 새 성전을 공사합니다. 완공할 때까지 전체 임원들의 임기를 연장합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임원 모두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듬해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었기에 제 십자가를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2년간을 기도와 함께 천일염과 약돌돼지, 젓갈 등을 판매하러 도시의 큰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호응이 적어서 지역에서 할인 판매를 벌였고, 수녀원을 통해 주문을 받아 배달했습니다. 저와 총무님, 가끔씩 수녀님도 동행하셨습니다. 어느 무더운 날에 총무님과 함께 20Kg짜리 천일염 50포대와 젓갈 등을 성당 지하실로 옮겼던 일은 정말 힘겨웠습니다. 간수가 흘러내리는 포대를 안고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땀과 함께 뒤범벅이 되어 거의 탈진상태였지만 주님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성당에서는 주임신부님께서 성전 신축의 고충을 아신다며 공지시간에 특별히 제게 홍보 시간을 주시고 2차 헌금까지 보내주신 적도 있습니다. 기금 마련을 위해 모두가 동참했지만, 금메달은 바로 이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젓갈을 산지에서 싸게 직접 담그기 위해 새벽에 출발해서 영암, 남해 등으로 갔다가 다음 새벽에 성당에 도착하기를 거듭한, 초인적인 활동으로 큰 활력을 심어준 박 Pr. 단장님과 여성 레지오 간부들, 그리고 기금 마련을 위해 강론을 하루에 6번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시던 김 신부님의 열정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더해 주었습니다. 자재비 상승 등으로 공사 부도 위기까지 겪었지만 주님께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는 주시지 않는다는 말을 절실히 체험하면서 간절한 기도, 희생과 봉사, 여러 은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꿈꾸던 성전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입단한 일
처음 레지오에 입단한 것은 1980년쯤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직장 일을 핑계로 기본적인 단원 의무만 하다가 퇴임하고서야 기도와 공부, 활동에 보다 더 열중하였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은 꾸리아 단장 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퇴임 때까지 제가 평단원으로서 의미를 두고 노력한 것은 ‘첫 승진 때의 다짐’ 실천입니다. 첫째는 ‘겸손하자’ 이것은 레지오 마리애 정신의 첫째이고요, 둘째는 ‘내가 왜 이 자리에?’ 이것은 직무를 잊지 말자는 의미였습니다. 두꺼운 종이에 적어 사무실 서랍을 열면 보이게 넣어 두고 자세를 다져왔습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게 어려움이 있어 보이는 직원들에게 관심을 갖고 동료로서 조언도 해주려고 애써 왔습니다.
“저도 세례를 받았습니다.”라는 기쁨에 넘친 전화를 퇴임 후에 받았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직장에서 2년간 함께 근무한 분인데, 제가 식사 때 성호 긋는 것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성당에 나가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베푸는 작은 배려 하나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