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의 정서 표출이 시인의 시적 역량
박영교(시인·한국시조시인협회수석부회장)
시조는 시조이기 이전에 먼저 시이어야 한다. 시로서 승화, 즉 형상화 되지 아니한 시조는 자수율이나 음보율(音譜律)로 맞춰 놓았다고 해도 좋은 시조작품이 될 수는 없다. 환언(換言)하면 시조가 시의 범주 속에서 시조로서 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서 시조시인은 이중고(二重苦)를 겪을 수밖에 없다. 좋은 시조를 읽어보면 각 장(章)의 언어적 묘미(妙味)도 있지만 특히 종장(終章) 처리를 잘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운 선생은 시조의 종장은 우리나라 여인이 입는 한복(韓服) 주름치마의 말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시조작품에서 훌륭한 종장 처리의 능력이 곧 그 시의 정서 표출이며 그 시인의 시적 역량(力量)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작품을 통해 그 자신의 정서(情緖)를 표출한다. 이 정서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므로 시인 자신의 시에 쓰여 진 시적 이미지는 그 실제적인 대상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 시에서 이미지가 선택된다는 것은 그 시인이 그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관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시조에 대해 질문을 하면 시조를 잘 모른다고 하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시조를 쓰는 시조시인은 시(자유시)를 모르고는 훌륭하고 좋은 시조작품을 잉태하기 어렵다고 단언할 수 있다. 2008년 시조문학 봄호에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았다. 그 중 신작특집의 작품들, 단시조단, 봄시조단, 그리고 시조문학 신인특집 등의 작품을 보면서 그 무게가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신작특집의 작품을 보자.
목숨 있는 것들 죽음으로 몰아넣는 밤
간절한 소망은 절망으로 묻혀 갔다.
새벽은 흠뻑 젖은 채 증언하듯 밝아 온다.
지은 죄의 용서를 무릎 꿇고 비는 착한 이들
마지막 번갯불을 희망으로 꿈꾸며
정말로 떠내려갈 것은 마음 속의 욕심 하나.
- 김경자 <수해를 당하며> 전문
김경자의 작품 <수해를 당하며>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가 반성해 야할 일은 우리 인간들 마음 속 욕심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치거나 어렵게 만든다는 것으로 우리들 살아가는 주변에서 종종 보아오고 있는 일이다. 남대문 방화사건이라든지 전 야구선수 이 모 씨의 네 모녀 살해사건 등도 모두 욕심으로 기인하여 그르친 결과라고 본다. 우리는 그 잘못을 응징하면서 하늘의 벌까지 내리기를 바란다. 김경자의 작품 속에는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2수 1편의 작품 속에서 이 두 수의 종장처리가 돋보인다.
연둣빛 이른 봄날/ 그대를 만났습니다.//
떨린 가슴/ 피맺힌 속내/ 차마 말 못하고//
꽃샘이/ 서리 친 날에/
손수건을 건넸습니다.
- 김정희 <자목련, 봄날> 전문
김정희의 작품 <자목련, 봄날>은 자목련이 피는 봄날을 맞아 시인 이 꽃샘추위를 보고 애틋한 정서를 노래한 단형시조이다. 이른 봄날 자목련이 피는 뜰에서 그의 피맺힌 속내를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꽃샘추위 속에 무서리가 하얗게 피는 날 그 눈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는 시인의 따뜻하고 마음과 아픈 정을 읽을 수 있다.
생각의 한가운데/ 은빛 삽날이 꽂혔다.//
낭자히 피를 흘리며/ 깨어나는 나의 의식//
원효의
발길을 돌린
해골에 고였던
그
물
같은
- 나순옥 <충고> 전문
우리는 역사를 통해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직언을 하거나 거스르는 언행을 해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누구의 충고든 잘 받아서 자신의 생각 한가운데 빛나는 삽날로 꽂아두는 것,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하다. 그 충고의 말 한 마디가 내 자신의 의식 속에서 피 흘리며 다시 깨어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충고가 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도 훌륭하다고 느껴진 다. 그 충고가 원효의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고 아침에 일어나 얻은 깨달음 같은 것이라면‘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종장의 후구는 음악에 있어서 스타카토와 같은 느낌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섣달그믐 넘지 못해/ 숨이 찬 밤이 있다//
바람 다 솔가해 간/ 빈 가슴 노송 한 주//
옹이진/ 먼 기억마다/
홀로 켜둔 푸른 외등
- 박권숙 <독거> 전문
박권숙의 작품 <독거>를 읽으면 쓰디쓴 입맛이 다셔진다. 옛 고목에는 날아다니던 새들도 앉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도 매일반이다. 그가 어떤 사람으로 세상살이를 했는가에 따라 사람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고 세상을 야박하다 탓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박권숙의 <독거>는 다 떠나고 없는 노송 한 그루 그 푸르름도, 지난 젊음도 다 솔가해 가버린 그에게는 오직 옹이처럼 박힌, 전설과도 같은 옛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외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박꽃 피어/ 박꽃처럼/ 새하얗게/ 살라하데//
박 열려/ 박 덩이처럼/ 둥글게도 / 살라하데//
늦가을/ 흰 박 속 긁어/
고픈 배나/ 달래면서……
- 조동화 <박씨를 심었더니> 전문
조동화의 작품 <박씨를 심었더니>는 박의 외형과 내연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글로 승화 시켰음을 찾아볼 수 있다. 박꽃 색깔, 둥근 모양, 박 속의 내용을 섭취하는 것까지, 그들의 장점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운율이나 가락에서 고려 때의 고승 나옹선사의 시조와 비슷한 맛이 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마음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좋은 시이고 시조다.
입추를 넘기고도
정신 차릴 수 없는
질긴 인연의 비 연일 거침없이
슬픔이 남은 사람의
옷을 흠뻑
적신다.
- 조영일 <가을 비> 전문
조영일의 작품 <가을 비>는 계절적인 정서와 비, 그것도 가을비에 대한 독자의 정감을 불러일으킬 포에지가 슬픔을 말리고 남은 몇 조각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과 옷, 이것의 조화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객관적 정서로 보아 가을비는 쓸쓸함이거나 슬픔으로 일관할 수 있는 정서이지만 슬픔이 남은 사람의 옷과 거기에 가을비를 얹는 시너지 효과로 슬픔의 크기를 키워내었다.
너를 기다리다 불을 끄고 누웠지만
신경은 빨갛게 단 알전구 필라멘트
늦게 와 밉고 반갑지만 모른 채 누워있다.
올 듯 올 듯 아니오니 빈 방에 아린 청승
대문에 귀가 묶이고 열두 번도 눈이 더 갔다.
언젠가 너도 알리라, 살붙이들 먼 발소리.
- 채천수 <핏줄> 전문
채천수의 작품 <핏줄>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은 다 같을 것이다. 요즘 어린이 토막살해범, 부녀자 납치범, 여대생 암매장 사건 등이 많다. 이 작품 첫째 수 중장‘빨갛게 단 알전구 필라멘트’로 표출한 시인의 신경에서, 세월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은 그 필라멘트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첫 수 종장의 미묘한 심적 표현은 일품이다. 둘째 수 중장‘대문에 귀가 묶이고’의 표현, 그리고 둘째 수 종장에서 부모의 심정을 다 말해놓고 있다.
죽고라도 그려낼 눈빛/ 언약 너와/ 맺고 싶다//
뼈도 살도 해진/ 몸으로 한 번/ 꼭 한 번//
하룻밤/ 한나절에도 천리를 가는//
귀신처럼,
- 홍성란 <와다> 전문
홍성란의 작품 <와다(wada)> 외 <인도 이야기>, 그리고 사설시조 <역말 느티나무의 길>등 5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홍 시인이 쓴 작품 <와다>와 <인도 이야기>는 인도의 인습이나, 풍속, 그곳의 인간적인 삶의 내용을 모르고는 작품을 접하기가 어렵고 까다롭다. 장구한 역사와 심오한 사색, 사상의 다양성과 영향력, 종교와 다신교의 문화적 전통의 난해성이 그것이다. 작품을 보면 우선, 죽고라도 그려낼 눈빛-언약 너와 맺고 싶다는 것-(初), 뼈와 살도 해진 그런 몸으로라도 꼭한 번 -(中), <초·중장은 도치법>, 하룻밤 한나 절에도 천리를 가는 귀신처럼, -(終), 그렇게라도 맺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속 언약을 피력한 것으로 본다.
밤새 살짝 다녀간 발자국이 담을 넘어가자,
마치 아는 놈인양 아버지는 혀를 찼다.
허 그놈, 또 다녀갔구나, 가져갈 게 뭐 있나.
- 정휘립 <봄눈>둘째 수
정휘립의 작품 <봄눈>은 부제 <-이 악(惡)의 봄에·10>가 붙은 작품이다. 원래 3수 1편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둘째 수만 잡았다. 올 봄에는 꽃샘추위로 봄눈이 많이 내린 해이다. 간밤에 저만치 눈이 쌓이고 추위가 함께 오지만, 그 눈을 통해 도둑이 다녀간 발자국을 보면서‘허 그놈 또 다녀갔구나’라고 하는, 마치 그 도둑을 아는 사람 대하듯 하는 아버지의 인간적이고 마음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인상 적인 작품이다. 장삼식의 작품 <동백이 머문 자리에서>와 윤우영의 작품 <초설> 은 두 작품 다 종장처리가 문제이다. 전자(前者)는 종장의 어조가 너무 강하다. 후자(後者)는‘누군가/ 낙관을 찍으며/ 멀리멀리 눈길 간다.>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낙관(落款)은 글이나 그림을 다 그린 후에 한 번 찍으면 그만이다. 누가 낙관을 자꾸 찍는 사람이 있는가? 넓게 보면 서산대사의 시(踏雪野中去不須胡亂行…)의 느낌이 가서 좋다. 다음은 단시조 또는 단형시조의 작품이다.
흔들려도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다
매달린 빈 손 안에 획
검은 벽만 지나가고
그늘에 메마른 얼굴
쇳소리만 감겼다.
- 강영환 <지하철 손잡이> 전문
대도시의 지하철을 타 보면 손님이 없을 때, 지하철 손잡이의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강시인은 이것을 잘 포착하였다. 이 작품은 지하철의 일상을 떠 올려 주는 작품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앞엔 검은 벽만 휙휙 지나가고 그 손잡이에 의지한 승객들의 굳은 표정을 떠 올리게 한다.
오래 머물려나보다.
예전엔 쉽게 떠나더니
종횡으로 달려온 날들
스치는 창가에서
가야 할
산길은 멀고
마취보다 더한 꽃향기.
- 권혁모 <독감> 전문
권혁모의 작품 <독감>은 세상살이의 정감이 느껴진다. 시인이 작품에서 노래하듯 요즘 독감은 시도 때도 없이 침범할 뿐만 아니라 한 번 침범하면 길게 자리를 잡는 것이 보통이다. 예전에는 고뿔로서 잠시 있다가 떠나지만 요즘 감기는 너무 오랜 기간 채류 한다. 사람들의 면역성이 그만큼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독감을 앓는 것이 산길은 멀고 봄의 꽃향기보다 더 독한 독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권 시인의 <겨울산>에서는 사람이 사는 것이란 못 이루고 돌아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 종장에서 불가에서 도를 닦은 느낌이 든다.
없더라.
예시인의 글 자취도
목욕하는 선녀들도
기계처럼 설명하는 여성동무 안내원과
정(釘) 처서 깊게도 새긴 붉은 색깔 구호들밖엔.
-김석영 <금강산 유감> 전문
김석영 작품 <금강산 유감>은 누가 읽어봐도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금강산엘 안 가 봐도 TV를 통해서도 충분한 공감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없더라.’라는 부정어를 먼저 앞에 놓고 옛 시인의 글 자취와 목욕하는 선녀들도 없고, 설명을 기계처럼 잘하는 여성동무 안내원, 그리고 정(釘)으로 깊게 파놓은 붉은 색깔의 구호들밖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 별 되어/ 안겨온다//
출국장/ 들어서며/ 솟구치는/ 속울음//
한순간/ 마주친 눈길/ 아니 본 척/ 돌린 고개//
- 김선희 <속울음> 전문
김선희의 작품 <속울음>은 외국으로 떠나는, 누구인지는 몰라도 떠나보내는 상황 속에서 출국장에 들어서며 솟구치는 속울음을 참으면서 마주친 눈길을 못 본 척 돌려 세우는 시적 서정이 느껴진다.
떠나는 거친 바람/ 가지 끝에 눈빛을 낳고//
영혼 깊숙이 뜨는/ 신선한/ 메시지 한 통//
오십견/ 도진 한나절/ 혈맥이 확 뚫린다.
- 김세환 <이른 봄> 전문
김세환의 작품 <이른 봄>에서 사람은 늙거나 젊음에 관계없이 봄을 느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서 좋다. 겨울바람이 거칠게 불어도 봄기운은 막을 수 없나보다. 제아무리 찬바람이라 한들 가지 끝에는 봄빛이 눈을 트게 하고, 오십견 도진 아픔도 영혼의 신선한 메시지 한 통으로 혈맥이 확 뚫린다는 시인의 긍정적이 삶이 돋보인다.
겨울도 섣달 보름// 달빛은 눈길에 찬데//
귀먹은 그리움에// 하얗게 야윈 계절//
한창(寒窓)에// 구슬픈 소리// 돌아가는 기러기.
- 김태은 <설야> 전문
위의 작품은 김태은의 <설야>이다. 이 작품의 정감(情感)은 눈이 온 섣달 보름, 달빛이 눈길에 차고, 귀먹은 그리움에 하얗게 야윈 계절, 차가운 창(窓)에 돌아가는 기러기의 구슬픈 소리 들리다. 이 <설야>는 톡톡 튀는 표현으로 돋보이는 작품이다. 단 초장 둘째 구와 중장의 둘째 구, 그리고 초장의 둘째구와 종장 첫 구의 상이 겹쳐지고 있어서 아쉬움을 느낀다.
없는 듯 들리는 얘기 바다만한 창을 가졌다//
물 오른 봄 맑은 기운 다 말할 수 없을 때//
사막과 산을 넘어온//
네 목소리 꿈결 같다.
- 황다연 <이슬비 소리> 전문
황다연의 작품 <이슬비 소리>는 이슬비 즉 봄비를 의미하면서 우리 의식(意識)에 없는 듯이 들려오는 그 봄비의 속삭임이 온 세상 만물들을 잠에서 깨워서 넓은 세상을 열고 있음을‘바다만한 창(窓)’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그 맑은 기운 다 말할 수 없을 때, 오랜 갈증과 시간을 참아 온 네 목소리 꿈결 같다. 라고 했다.
이 외에도 임종찬 작품 <두만강 가에서 북한을 보며>와 <꽃 피는 이치> 등 2편, 박상문의 작품 <환승신>외 1편 등도 발표 되었다. 봄 시조단의 작품을 보자.
다치지 않게 떠나야 한다 내가 다치고
사랑을 버리게 해 주십시오 그대 행복을
내원사 가서 빌었다 고운님 고운꽃 내가 빌었다.
-권도중 <내원사 가서>전문
권도중의 작품 <내원사 가서>는 시인의 고운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작품이다. 절필을 하다시피 한 그가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격려의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이다. 70년대의 시인인 그가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발표할 것을 믿는다. 김명호의 작품 <누이>는 2수 1편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요즘 디지털시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물론 그 때 그 시상은 귀하게 마음에 와 닿고 있으나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며, 이런 작품은 그 당시에 발표해야만 작품의 극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작품이다. 심성보의 작품 <입춘(立春)>은 각 장의 구가 늘어나서 언급하지 못했다. 너무 어구가 늘어진 것 같다. 좀 좁힐 수 있을 것인데. 다음 시조문학 신인 특집 작품을 보자.
찬 하늘 노을빛이/ 차 창가에 머물 때/
잔잔한 바람 일어도/ 나뭇잎은 슬프다/
가슴에 미어진 만큼/ 버릴 건 버릴 때다.//
떨리는 울음 끝이/ 귓전에 걸려와도/
갈잎의 속사임도 아닌/ 서걱대는 소리들만/
사르르 함께 모아서/ 겨울얘기 하고 있다
- 김금자 <겨울얘기> 전문
김금자의 작품 <겨울얘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詩)나, 시조(時調) 작품을 읽어보면 한 눈에 형상화 되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런데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시조에서는 초, 중, 종장 사이의 스텝이 알맞은 간격이어야 이미지 전달이 잘 된다. 그러나 그 보폭이 너무 넓거나 생소한 어휘의 언급은 형상화가 잘 되지 않고 이미지의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겨울 얘기>는 무난하다. 단 둘째 수 중장 의‘속삭임’을 속사임으로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인은 낱말 하나에도, 부호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한다.
잔설을/ 비웃듯이/ 빛살이 속삭이네//
풀꽃이/ 꿈틀 이며/ 새움의 귀띔소리//
동장군/ 치마 속에서/ 봄을 낳는 진통 소리
- 허둘순 <봄이 오는 소리> 전문
허둘순의 작품 <봄이 오는 소리>을 읽으면서 시조의 묘미를 좀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초, 중장을 이끌어 내려오다가 종장의 표현에서 이미지의 연결과 형상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봄빛 앞에서 잔설은 아무리 내려도 맥을 추지 못한다. 밤새 수북이 쌓인 눈이 내려도 봄 햇살에 다 녹아버리는 일기가 신기하기만 하다‘. 새움의 귀띔소리’와 ‘동장군 치마 속에서 봄을 낳는 진통 소리’이런 표현이 신인으로서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는다.
새순이 날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린 듯
남긴 것 하나 없이 다 내 주고 미소 지며//
빈 팔을/ 들고 선 모습/ 내 어머니 같아라.//
새봄이 멀지 않다 소리 내어 외는 노래/
몸 에이는 칼바람을 빈 몸으로 감내하며//
속으로/ 불 지피는 모습/ 내 어머니 같아라.
- 김영애 <겨울나무> 전문
김영애의 작품 <겨울나무>도 앞에 언급한 신인작품과 같이, 이미지 연결의 보편성과 스텝의 조밀성, 정연(井然)한 상황의식이 독자로 하여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2수 1편으로 구성된 작품 속에는 겨울나무를 내 어머니의 겉과 속마음을 비유(譬喩)로 표현 한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 겨울나무에는 아무도 없다. 남긴 것 하나 없이 다 내 주고 미소를 지으며 팔을 들고 선 내 어머니 모습(겉), 둘째 수에서는 윙윙거리며 외치는 나목의 노래는 칼바람을 맞으며 감내하면서 속으로 불을 지피는 내 어머니모습(속)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좀 아쉬움을 지적한다면‘모습’이라는 낱말과‘내 어머니 같아라.’라는 구절을 반복해 사용하지 말고 둘째 수에서는 조금 변형시켜 표현했었더라면 한결 돋보이는 작품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강성효의 작품 <정(情)>은 동시조풍으로 읽혀지는데 초, 중장과 종장의 거리가 너무 스텝이 먼 것 같다. 의성어나 의태어로 구성된 작품은 그 무게가 가벼워지고 또 그것이 종장에 전해지는 모습도 경쾌한 것이 좋다. <정>은 초, 중장 속의 낮달과 종장의 터진 솜사탕 가슴에서 거리감이 느낀다.
이상으로 시조문학에 발표된 작품을 읽어보았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발표지에 발표한 후에는 적어도 그 작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하고, 또한 발표한 후에는 독자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어떤 의도로 작품을 창작 했는지 독자들은 알 필요도 없다. 오직 독자 들이 그 작품을 읽고 마음속의 정화작용(catharsis)이 이루어졌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의 해석 따위는 더욱 필요 없는 것이다. 시인의 정서를 통해 시인이 쓴 시의 이미지 형상화(形象化)로 그 시의 정서 표출이 시인의 역량(力量)으로 가슴에 쌓였던 스트레스나 정신적 억압 등에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 또한 족한 것이다. 발표된 작품을 보면서 시조시인들의 작품이 점진적으로 향상되고, 또 좋은 작품을 빚으려고 노력하는 시인들의 모습이 엿보여서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