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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곡선 외 6편
최종천
곡선의 애무를 받고 싶을 땐
욕조의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주 옛날에 물은
곡선을 느꼈다 그 기억 본능
녹이 슨 배관을 따라 흐르는 동안
놓아버리고 이제 나의 몸을 만나리라
“이것이 나의 곡선이에요”
나는 담겨진 물만큼이나
곡선을 그리워했던 건 사실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섹스를 하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을 때
나는 욕조에 담겨진 물에 대하여 말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욕조의 강요로 섹스를 한다
사랑이라는 강박관념에 갇힌 성을……
당연하게도 우리들 대다수는
성이 없는 사랑보다는,
사랑이 없는 성을 원한다! 그것은 옳은 일이다.
성이 사랑을 낳았다.
이제 본론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성은 유일한 實在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허구이다, 특히 예술을 핑계 삼아
성을 수식하거나 상징화하지 말자.
오늘 나는 해어진 그녀를 생각 하다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운다.
느껴보고 싶었던 그녀의 곡선이 나를 휘감는다
우리는 해어졌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 은 관념이기에 형태가 없다
실재하게 하고 싶었던 그녀와의 사랑, 이라는 관념
바다에까지 흘러넘치는 나의 형태, 나의 실재
나의 孤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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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 密度
월남전이 한창일 때
한 병사는 얄팍한 영어사전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
총탄은 그 얇은 종이들의 밀도를
뚫지 못한 것이다
그 사전이 두꺼운 종이들로 된 것이라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밀도(密度). 방사선을 차단하는 납의 밀도,
내 정신은 다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이 거대한 것
희망이라는 이 애매한 것
이런 것들의 밀도는 없다
희망은 더 이상 절망의 방패가 아니다.
“사랑해” 하면서 우리는 증오에 착수한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들이다.
예수는 사랑과 희망을 고치다 갔다.
왜 사랑과 희망은
함부로 사용해도 고장 나지 않는가?
그 이유를 나는 이미 말했다
그것에는 밀도가 없다
행복한 사랑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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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며칠 전 머그컵 세 개와 포도 주스 한 병을 샀다.
컵을 물에 씻어 포도 주스를 따르다가
그만 엎지르고 말았는데, 컵에 묻은 주스 무늬가
영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면 본래 무늬가 있었던 것인가 하여
이마트에 가서 찾아봤지만 그런 컵은 없었다.
나는 틀림없는 주스 자국이라고 생각하며
그 컵에 물을 마실 때마다 닦고 또 닦는다.
약간 희미해지는 듯하니, 더 아름답다.
바탕에 인쇄된 한글과 어우러져 실로 절묘하다.
그 컵을 나는 자동적으로 눈에 들어오도록
싱크대 위 붙박이 찬장에 두고 보고 있다.
볼 때마다 그 흩어진 보랏빛 무늬가 경이롭다.
그 아름다움은 그러니까 보랏빛 무늬가 틀림없이
내가 포도 주스를 엎질러서 생긴 주스 자국이라는
확신 때문인데, 나는 두고두고 동물처럼
사물을 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놈의 이성인지 뭣인지를
버리고 이 황홀함을 맛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늘은 다른 컵에
포도 주스를 조심히 따르며 생각하기를 우연히 주스를 엎질렀으면
하고 은근히 바래보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아! 내가 은밀히 조금은
심각하게 고독하구나! 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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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마술
우리 공장 고양이는 마술을 잘한다.
어떻게 암컷을 만났는지 그리고 역시나
도대체 어떻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는지
네 마리는 엄마를, 다른 네 마리는 아빠를,
정확하게 닮았다. 밥집에서 밥도 오지 않았는데
일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그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들 배가 고파온다.
녀석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니야옹! 하는 소리로 온 것이다.
땅바닥에 엎질러준 생선 대가리와 밥을 말끔히도 치웠다.
얼마 후엔 암컷도 같이 왔다.
공장장만 빼고는 일하는 사람 모두 장가를 못 간
노총각들이어서 그런지 고양이 사랑이 엄청 크다.
자본주의가 결혼하라고 할 때까지
부지런히 돈을 모으는 상중이가 밥 당번이다.
밥을 주면 수컷이 양보한다.
공장장은 한때 사업을 하다 안 되어
이혼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가 헤어지라고 하여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새끼를 보면 한숨만 터지는데
고양이의 새끼를 보면 은근히 후회되는 것이다.
사람인 나는 못하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고양이의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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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위하여
박씨의 검지는 프레스가 먹어버린
반 토막짜리다 그런데 이게
가끔 환하게 켜질 때가 있다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면
내 손가락에서 그의 검지 반 토막이
환하게 켜지는 것이다
박씨는 장갑을 낄 때마다
그 반 토막의 검지가 가려워서
목장갑 손가락을 손가락에 맞게 접어 넣는다
그 접혀 들어간 손가락은 때가 묻지 않는다
환하게 켜지는 검지의 반 토막이 보고 싶어
나는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곤 하는데
그러면 전신에 전류가 흐르듯 하는 것이다
상처가 켜 놓은 것이 박씨의 검지뿐이랴
과일들은 꽃이라는 상처가 켜 놓은 것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꺼져 있다
상처는 영혼을 켜는 발전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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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
못 견디게 예쁜 여자의 매력에는
독소가 있을 듯
거기다 계산이나 학력 사회적 지위까지
이토록 화려하고 보면 그녀는
독버섯이거나, 독거미이거나, 헌데
그런 여자들이 의외로?
애인이 없다고, 독은 독인데 孤獨이군
高毒, 그녀의 미소는 얼마나 농도가 짙은지
그녀의 눈빛은 다이옥신이 타는 듯 보이지 않는
불꽃을 가지고 있다 푸르스름한 그녀의
孤毒. 사내들은 모른다. 독은 독으로 치유해야 한다
그녀의 毒을 미량만 훔쳐서 나의
孤獨에 타 마시자 나의 사십 오년이나 된 실업에 타 마시자
그녀의 毒을 나의 獨에 타 백신을 제조하자
요컨대, 에이즈 백신을, 쾌락 백신을, 우울증 백신을
모든 孤獨한 여자는 毒을 품고 잔다
呱獨하지 않은 예쁜 여자는 독보다 더 위험하다
약효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毒은 없고 獨만 있다
이런 여자가 독버섯이다 독거미이다
이 지긋 지긋한 가난을 견디는
차별을 견디는 천대를 견디는
대한민국의 마누라들이여
대한민국의 졸장부들이여
그대 마누라의 씁쓸한 입술 맛은
뽀뽀가 끝나고 조금 지나면 달지 않은가
독이 병을 치료한다
세상의 절반은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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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역 청소부 한달 월급에 대하여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지원비가 드디어 한 달에 100만원씩
1200만원으로 올랐다, 용렬하게
이 몸도 신청했다. 문득 화곡역 청소부에게
한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왜 물어보고 싶었을까?
63만원이라고 했다.
시집도 내고 목돈으로 1200만원이나 벌었으니
행복은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배때지가 꼴린다, 내가 못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의 이 말은 은유도 비유도 아니다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다. 그 청소부는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하고도 그것밖에 가지지 못하나
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시인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시인들이여
행복은 권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그대는
시인은 못되리라. 행복은 누구나의 의무이다
우리의 행복함은 곧 우리가 선함이요
우리의 불행은 곧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라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원리는
화곡전철역에서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월급이 63만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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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천 : 1954년 전남 장성 출생. 1986년《세계의 문학》과 1988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눈물은 푸르다』(시와시학사, 2002)와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2007), 『고양이의 마술』(살천문학사, 2011)이 있음, 2002년 제20회 신동엽창작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