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마린보이’ 박태환(19.단국대)이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결선 레이스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해맑은 미소의 19살 청년이 마침내 해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 스포츠 사상 최고의 쾌거였다.
박태환(19·단국대1)이 10일 중국 베이징 국가아쿠아틱센터(워터큐브)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수영 남자자유형 400m 결선에서 3분41초86의 기록으로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한국 수영은 1964년 도쿄올림픽 때 첫 출전한 이래, 44년 만에 서양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자유형에서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 수영의 역대올림픽 최고성적은 2004 아테네올림픽 여자 개인혼영400m 남유선(23·강원도청)이 기록한 7위다.
박태환의 이날 기록은 지난 4월18일 울산에서 열린 동아수영대회에서 수립했던 아시아기록(3분43초59)을 넘어선 것이다. 이 기록은 전날 예선에서 중국의 장린(3분43초32)가 갈아치웠으나, 하루만에 박태환이 찾아왔다. 지난해 3월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월드챔피언’에 오른 박태환은 올림픽 우승으로 다시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인간어뢰 이언 소프(호주)의 세계기록(3분40초08·이언 소프·호주)에는 못미쳤다.
박태환은 이날 출발 반응시각 0.69초로 8명 중 가장 빨랐으나, 50m를 4위로 찍었다. 그러나 100m 2위로 피치를 올리더니 150m 턴 때 1위로 치고나서며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그랜트 해킷(호주)은 초반 1위로 나섰으나 후반 체력이 달린 탓인지 6위(3분43초84)로 처졌다. 2위는 장린(중국)이 차지했다.
박태환은 이날 오후 남자 자유형 200m 예선을 거쳐, 12일 오전 결승에서, 세계기록 보유자인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와 금메달을 다툴 예정이다. 17일에는 남자자유형 1500m에 출전해 3번째 금에 도전한다. /한겨레
[2007년] 오마르 봉고 가봉공화국 대통령 방한,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환담
오마르 봉고 온딤바(Omar Bongo Ondimba, El Hadj, 1935~ ) 가봉공화국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환담하고 오찬을 함께 했다.
9일 한국을 찾은 봉고 대통령의 방문 목적은 12일로 예정된 만해평화상 특별상 수상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아프간 인질사태 해결과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눈코뜰새 없지만, ‘환담’과 ‘오찬’이라는 형식으로 2시간 가까이 봉고 대통령을 환대했다. 봉고 대통령이 한국과 인연이 남다른 때문이다. 봉고 대통령의 방한은 이번이 네 번째다.
그는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처음 방한했다. 아프리카 서부 적도 남단에 위치한 가봉공화국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신생독립국들이 비동맹 친북노선을 강화하는 냉전시대에 가봉은 한국에 남다른 가치가 있었다. 62년 아프리카 국가 중 한국과 최초로 수교했다.
75년 첫 방한 당시 정부는 김종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한 ‘국빈영접 방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십만명을 길가에 동원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당시 기아 자동차는 신형 승합차를 출시하면서 ‘봉고’라는 이름을 붙여 봉고 대통령의 존재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켰다. 환대에 감동받은 봉고 대통령은 3박4일 순방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났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몇 시간을 더 머물렀다.
봉고 대통령은 이후 10년 주기로 한국을 찾았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가봉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84년9월 방한했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96년8월 한 차례 더 방문했다. 그는 67년 가봉 대통령에 오른 뒤 40년째 가봉의 국가원수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72살인 그는 이미 2012년 대선 재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이번에 봉고 대통령이 받게 된 만해대상은 만해대상실천선양회가 1997년부터 매년 8월 백담사에서 여는 만해축전 때 주는 상이다. 지금까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강원용 목사, 김대중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티베트 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 라마, 김지하 시인 등이 받았다.
주최 쪽은 “봉고 대통령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브라자빌, 앙골와 자이르 분쟁의 조정 역할을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중앙아프리카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심적인 구실을 했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신승근 조연현 기자 /한겨레
[1998년] 정부, 주민등록번호 포함 공공번호 83종 연도표기방식 확정
2000년 이후 혼란이 예상되던 주민등록번호 등 주요 공공번호 83종의 정부 연도 표기방식이 1998년 8월 10일 확정됐다. 국무조정실은 이날 주님등록번호의 생년월일 6자리의 숫자 뒤 1(남성), 2(여성)로 시작되는 후반부 첫 번호를 2000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에게 3(남성), 4(여성)를 적용해 1900년대와 2000년대를 구분키로 하는 등 ‘컴퓨터 2000년’ 표기방식을 확정하고 정부 각 부처와 산화기관 등에 통보했다.
확정안에 따르면 의료보험 관리카드는 생년월일 6자리 뒤에 5(남성), 6(여성)으로 시작되는 일련번호가 2000년 이후 출생자에게는 각각 7, 8이 부여됐다. 또 병무청이 관리하는 병역의무대상자 국외여행허가번호의 경우, 끝의 두자리만을 쓰는 연도표기 대신 네자리 전부를 표시, 연대를 확실히 구분토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조선
[1971] 경기도 광주대단지(現ㆍ성남시) 난동사건
1971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군 신개발지역주민 수만 명이 도시를 점거한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다. 광주대단지는 서울시의 빈민가 정비 및 철거민 이주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위성도시로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이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사건 당시까지 2만 1,372가구 10만 1,325명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 이주사업은 토지 투기 만연과 이주민 분양권의 불법전매, 이주민 생계대책의 외면 등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서울시는 이러한 문제는 덮어둔 채 평당 8,000~1만 6,000원의 지가를 일시에 불입할 것과 각종 세금납부를 독촉했다. 생존권을 요구하는 주민의 요구를 묵살하고 행정 편의적인 정책으로 일관한 서울시의 이러한 태도가 사건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8월 10일 서울시장이 주민과의 대화 약속마저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지역 내 토지불하가격인하·취득세감면·세금부과연기·긴급구호대책마련 등을 요구하며 도시를 점거했다. 같은 날 오후 서울시장이 이주단지의 성남시 승격과 주민 요구의 무조건 수용을 약속함으로써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농업의 해체와 실업문제 등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도시빈민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브리태니커
[1944년] 건국동맹 결성
← 여운형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통제 아래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소그룹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민족주의자들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이후 활동이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뭉친 건국동맹은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한다"는 강령에 따라 활동했다. 또한 좌익·우익을 묻지 않았으며 불문(不問)·불어(不語)·불명(不明)을 철칙으로 삼았다. 1944년 10월경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책임자를 내정했으며, 자주적인 독립쟁취를 이루기 위한 준비로서 군사위원회·식량대책준비위원회·치안대 등을 결성했다. 다른 한편으로 결정적 시기에 해외 동포들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반일단체와의 협력을 도모했다. 건국동맹은 8·15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는 모체가 되었다./브리태니커
[1901년] 독립운동가 이봉창(李奉昌) 출생
← 한일애국단 선서식을 마친 이봉창 의사
1901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 이봉창
이봉창은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 의거를 결행한 독립운동가이다.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마친 뒤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6~7년간 기회를 엿보다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았다. 김구의 주선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다. 1932년 1월 8일 오후 2시 도쿄[東京]의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溥儀]와 관병식을 거행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려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 기수와 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을 뿐 히로히토를 죽이지는 못했다. 이봉창은 거사 직후 품안에서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열린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던 이봉창의 의거는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기개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예상밖의 결과를 낳았다./브리태니커
[1961년] 한국 표준자오선 127도 30분에서 135도로 변경
1961년 8월 10일 0시를 기해 우리나라 표준시간이 30분 앞서게 돼 일본의 표준시간과 같아졌다. 정부가 7월 28일 각료회의를 열어 우리나라 표준시간을 규정하던 표준 자오선 동경 127도 30분선을 이날부터 135도로 변경키로 의결한데 따른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표준시는 그리니치보다 9시간 빠르게 됐고, 한국은 태양의 남중(南中)시각이 정오를 조금 넘기게 됐다.
세계각국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경도 15도마다 한시간씩의 차이를 둔 표준시간을 정하고 있다. 정부가 표준 자오선을 변경한 이유는 그전의 표준자오선이 항공, 항해 또는 천문, 기상 등 관측에서 불합리했고, 우리나라의 시간을 세계 각국의 시간으로 환산할 때 불편했기 때문이다.
1908년 4월 1일 한국에 표준시가 처음 도입될 당시의 표준시 자오선은 127도 30분이었지만 1912년 1월 1일 한일합방의 영향으로 일본과 같은 135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방후인 1954년 3월 21일 127도 30분으로 다시 바뀌었다가, 이날 135도로 다시 확정됐다. /조선
[1961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중장 승진
5·16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소장!
1961년 오늘 육군 중장으로 승진한다.
청와대에서 열린 계급장 수여식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수반이 박정희 의장의 어깨에 중장 계급장을 달아 준다.
이와 함께 5·16쿠데타에 적극 가담했던 대령 37명도 준장으로 진급된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듬해 3월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다.
이어 박정희 의장은 1963년 8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같은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YTN
[1959년] 우장춘(禹長春) 박사 별세
← 우장춘
1898 일본 도쿄[東京] ~ 1959. 8. 10
별기군 훈련대 제2대 대장을 지내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구례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했고, 1919년 졸업과 함께 일본 농림성(農林省)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육종학(育種學)연구를 시작했다. 1922년부터 〈유전학 잡지〉에 〈종자에 의해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1930년 나팔꽃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제출용 논문이 시험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4년여의 노력 끝에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다시 작성·제출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논문은 세포유전학연구에서 게놈을 분석하고 기존의 식물을 실제로 합성시킨 최초의 사례로서 〈일본 식물학 잡지〉에 발표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기사(技師)가 되지는 못하고 계속 기수(技手)에 머물렀으나 1937년 다키이종묘회사[瀧井種苗會社]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자리를 옮겨 1945년 사임할 때까지 의욕적인 연구는 물론 〈원예와 육종〉을 발행하는 등 육종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했다. 8·15해방 후 식민통치로 피폐해진 농촌을 구하고자 1947년부터 벌어진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운동에 답하여 귀국을 결심하게 되어 1950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의 초대소장에 취임했다. 귀국 후 무·배추 등 채소와 볍씨 품종개량에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육종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일본의 기하라[木原] 박사가 개발한 씨없는 수박을 재배하고 후진양성에도 힘써 김종·진정기·김영실, 그리고 원우회의 제자들을 길러내 한국 농업근대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1954년 학술원 추천회원,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책임자가 되었다.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고 같은 해 8월 10일 위·십이지장 궤양으로 죽었다./브리태니커
[194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강제 폐간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현 코리아나 호텔 자리) 2층 편집국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는 이 날 마지막 편집회의를 끝내고 폐간호를 찍었다. 지령 6923호였다. 같은 날 동아일보도 폐간되었다. 두 민족지의 폐간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일문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만이 남게 됐다. 20년 만에 다시 우리 신문없는 암흑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의 폐간을 강요했다. 1940년 1월 15일 총독부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를 불러 자진 폐간을 종용했다. 두 신문이 말을 듣지 않자 총독부는 7월 들어 용지 통제권을 발동하여 신문 용지 배급량을 줄엿고 신문사 간부들을 연행하여 폐간을 종용했다. 결국,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8월 10일 일제의 폐간령에 따라 폐간계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회사의 목적을 변경하여 대중 의료 사업을 경영하고 동방문화학원(육영재단법인, 기금 1백만원)에 사옥과 기지를 기부하되 “조광” “여성” “소년”은 계속 발행한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또한 1940년 8월 11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에 또 싹이 나고 꽃 위에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라는 의미심장한 폐간사를 끝으로 최종호를 발행하고 11일 열린 임시 주주총회의 결의에 따라 해산하고 말았다./조선
[1913년] 부카레스트 강화조약 조인(제2차 발칸전쟁 종료)
제2차 발칸전쟁에서 교전 중이던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이 1913년 8월 10일 부카레스트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발칸반도 관련국가간에 국경선이 확정돼 제2차 발칸전쟁이 종결됐다.
이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 때 점령한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넘겨줘야 했다. 조약이 제정된 배경에는 아드리아노플에 진출한 터키를 견제하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열강의 압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강화조약은 발칸반도 관련국가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문제가 여전히 상존해 있다. /조선
[1894] 작가 조명희(趙明熙) 출생
← 조명희
1894. 8. 10 충북 진천 ~ 1938. 5. 11 소련 하바로프스크.
호는 포석(抱石)·목성(木星). 1920년대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목적의식적 단계로 발전시켰으며 소련 망명 후 재소한인(在蘇韓人) 문학 건설에 힘썼다. 필명은 적로(笛蘆). 가난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다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고, 이때 친구들과 시 창작과 연극공연을 전개했다.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하여 이기영·한설야 등과 마르크스주의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로는 한인촌 교사로 일했고 연해주 한인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에 글을 발표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원동(遠東) 지부 간부를 지냈으나, 스탈린의 탄압정책의 와중에서 일본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1988년 중앙 아시아 한인 거주지역인 타슈켄트에 문학기념관이 세워졌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희극 〈김영일의 사〉(동우회, 1921. 7)·〈파사 婆娑〉(개벽, 1923. 11~12)를 발표하고, 1924년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김영일의 사〉에서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나타냈고, 〈파사〉에서는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다루었으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고 관념적이다. 이어 소설 〈땅속으로〉(개벽, 1925. 2~3)·〈R군에게〉(개벽, 1926. 2)·〈농촌사람들〉(현대평론, 1927. 1)·〈낙동강〉(조선지광, 1927. 7)·〈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소설들에서는 초기의 시나 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에 입각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대표작 〈낙동강〉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소련에서는 식민지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 〈짓밟힌 고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앞장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선전·선동하는 시 〈10월의 노래〉·〈볼쉐비크의 봄〉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 〈그 전날 밤〉(1925)·〈낙동강〉(1928)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개벽, 1925. 6)·〈직업·노동·문예작품〉(중외일보, 1926. 12. 1~2) 등을 발표했다. /브리태니커
[1874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33 재임) 후버(Hoover, Herbert (Clark)) 출생
← 후버
1874. 8. 10 ~ 1964 . 10. 20
아이오와주(州) 웨스트브랜치 출생. 1895년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광산기사로 미국 서부 및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하면서 금광채굴에 성공하였다. 1899년 중국의 초청을 받고 베이징[北京]으로 갔다가 북청사변(北淸事變) 중에 체포당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에서 미국 구제위원회, 벨기에 난민 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대통령 W.윌슨의 요청으로 귀국, 1917년부터 식량국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1928년 상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농업구제와 고율보호관세를 주창하였다.
1929년 공화당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당시의 심각한 경제불황을 타개할 대책을 수립하고 군비축소를 추진하는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관계 유지 및 선린외교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대통령 H.S.트루먼의 요청으로 세계의 식량문제를 개선하는 한편, 행정부문 재편성위원회(후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naver
[1675년]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 건립
그리니치 천문대는 1675년 찰스 2세가 천문항해술을 연구하기 위해 런던 교외 그리니치에 설립하였으며 초대대장은 J.플램스티드(J. Flamsteed)였다. 태양·달·행성·항성의 위치관측에 주력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고, 1884년 워싱턴국제회의에서 이 천문대 자오환(子午環)을 지나는 자오선을 본초자오선으로 지정하여, 경도의 원점으로 삼았다.
1930년대에 런던 시가지가 스모그와 먼지·고층건물·네온사인 등 공해가 심해 관측이 곤란해지자 1945년 그리니치 남쪽 서섹스주 허스트몬슈로 이전하였다. 1956년에는 국립해양박물관과 통합했다. 1970년에 다시 카나리아제도의 라팔마스로 옮겨 관측업무를 수행하였고, 1990년에 천문대 본부를 케임브리지로 옮겼다. 그러나 그리니치천문대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한다. /naver
[1645년] 스페인의 예수회 전도사, 탐험가 키노(Kino, Eusebio) 출생
← 키노(Kino, Eusebio (Francisco))
1645. 8. 10 ~ 1711. 3.15
지금은 멕시코의 소노라 주와 미국의 애리조나 주로 분리된 피메리아알타 지역에 선교단체를 창설했다. 독일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했으며, 1665년 예수회에 가입한 뒤 1681년 선교사로 멕시코 시에 갔다. 1687년 3월에 인디언을 대상으로 한 선교단체를 처음으로 창설했다. 1691년 그는 약 40회의 애리조나 탐험을 실시했으며, 리오그란데·콜로라도·힐라 강의 발원지를 탐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피마 인디언들이 농업의 다양화를 꾀하도록 도왔고, 멕시코 북부의 은광에서 인디언들이 노예로 일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의 저서 〈파보레스 셀레스티알레스 Favores celestiales〉(1708)가 〈피메리아알타에 대한 키노의 역사 회고록 Kino's Historical Memoir of Pimería Alta〉(2권, 1919)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었다./브리태니커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최초의 세계일주 출항
←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로가 기록되어 있는 16세기의 지도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19년 8월 10일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를 위해 스페인의 세빌랴를 출항했다. 앤티워프 출신 상인의 경제적 지원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탐험에는 다섯척의 선박과 270명의 승무원이 동원됐다.
이듬해 1520년 11월 28일 남미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에 이른 마젤란은 수개월동안 서진(西進)을 계속해 1521년 3월경에 괌섬과 필리핀을 발견했다. 필리핀 세부에서는 군주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1521년 4월 27일 섣불리 막탄섬을 공격하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이 세빌랴에 도착한 것은 1522년 9월 8일이었고 생존자는 18명이었다. 비록 마젤란 자신은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류 최초 세계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조선
그밖에
2005 25일째 파업 중인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긴급조정권 발동
2003 러시아 우주인 말렌첸코 미국인 에카테리나 인공위성 통해 원격결혼식 거행
2003 이탈리아서 세계최초의 복제 망아지 ‘프로메테아’ 탄생
1999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미국최고영예훈장 ‘자유의 메달’ 수상
1999 네덜란드에서 ‘안락사’인정 법안 세계최초로 마련
1990 삼성전자, 16메가D램 개발
1989 콜린 파월, 미국 사상 첫 흑인 합참의장
1988 울진 원전1호기(발전용량 95만Kw) 준공
1983 프랑스, 챠드내전에 개입. 공수부대 투입
1981 북한군 비무장지대서 무차별 사격
1976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 위원장에 조선일보사 방일영 대표 선임
1964 전국언론인대회, 언론윤리위법 철폐투쟁 결의
1961 한국-카메룬 국교 수립
1958 소련 세계 최대의 쿠이비세프 수력발전소 준공
1954 인도차이나 반도 휴전 성립
1946 북한 주요산업의 국유화법 공포
1945 국군 가장한 무장간첩 검거
1945 일본, 전쟁 최고 지도자 회의에서 항복 결정
1945 송진우, 총독부의 정권이양 교섭을 거절
1939 철도국, 목탄자동차 시험
1934 남한에 풍수해
1925 언론인, 국사학자 천관우 출생
1920 터키, 연합국과 세브르강화조약 조인
1900 영국 일본 공사, 용암포조차 철폐와 의주개시를 요구
1898 제국신문 창간
1861 항 장티푸스 백신을 개발한 영국의 세균학자 라이트 출생
1809 에콰도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02 독일 물리학자 애피누스 사망
1792 파리시민 봉기, 프랑스 국왕을 의회내에 유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