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아는 만큼 더 재미있는 조선(朝鮮) 왕족 무덤 이야기
장경왕후, 인종과 인성왕후, 철종(강화도령)이 묻혀 있는 곳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 왕조의 왕릉 희릉(禧陵), 예릉(睿陵), 효릉(孝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삼릉 정문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희릉’, 중앙에 ‘예릉’, 왼쪽에 ‘효창원과 의령원’이 자리잡고 있다.
왕릉과 원만 보고 갈 경우 30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여유롭게 산책을 하면서 힐링을 즐기려면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
경내에는 오래된 소나무를 비롯하여 울창한 수목들이 산책로를 그늘로 만들고 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도 무색해진다. 서삼릉 숲속을 거닐며 힐링도 하고, 조선 왕릉에 대한 지식도 만들어 보자.
<참고> 능, 원, 묘의 구분
조선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서삼릉(西三陵)은 중종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인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조성되면서 3개의 능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西三陵)’이라고 불리게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1970년 5월26일 사적 제200호로 지정됐다.
총 면적은 약 7만여평이며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尹氏)의 희릉자리로 택해지면서 처음 능자리로 사용되었다.
본래는 130여만여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을 차지했으나 지금은 여러 곳으로 분할되어 약 7만여평이 남았으며
이 중 절반가량이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1870년(고종 7)에는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원래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을 집중 관리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왕릉과 함께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이었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귀인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에 귀인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으로 이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기의 왕릉과 3기의 원,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 54기가
자리잡고 있다.
서삼릉 내에 위치한 인종 효릉과 소현세자의 소경원, 폐비 윤씨의 회묘를 비롯한 경선군·경완군묘, 경혜옹주묘, 태실,
왕자·왕녀·후궁 묘역은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하여 비공개로 관리중이다.
본래 서삼릉의 능역은 광릉수목원에 필적했다. 현재 서삼릉의 전체 면적 중 79만여㎡가 농협중앙회의 종우장과
한국마사회의 종마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대체 부지를 마련해 시설을 점진적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1491~1515)가 홀로 묻힌 단릉이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됐다.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을 얻어 7일만에 사망했다.
능은 원래 헌릉(서울 서초동)에 있었으나 22년 뒤 김안로의 술책(정광필, 남곤 등이 조성한 묘자리에 큰 돌이 깔려있어서
좋지 않다는)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효릉(孝陵) 12대 인종(1515~1545)과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쌍릉이다.
인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죽자 대왕대비인 정현왕후 윤씨(제9대 성종의 계비)를 더욱 섬겼으며,
아버지인 중종이 위독하자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겨울철인데도 목욕하고 분향하며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빌 정도였다. 중종이 죽자 8개월만에 승하했는데 부모의 곁에 묻어줄 것과 장사를 소박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능은 원래 병풍석이 없다가 인성왕후가 승하한 후 인종 곁에 묻히면서 현재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병풍석을 둘렀다고 한다.
철종의 ‘예릉(睿陵)’
25대 철종(1831~1863)과 철인왕후 김씨(1837~1878)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이곳은 원래 중종의 정릉이 자리했던 곳이다. 그러나 문정왕후에 의해 이장되면서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장할 때 그대로 묻었던 정릉의 석물을 재사용하여 예릉 조성 당시의 석물 크기보다 훨씬 거대한 석물의 크기를 엿볼 수 있다.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철종은 강화도에 살던 중 1848년 24대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영조의 유일한 혈손이었기 때문이다.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은 그 아들 상계군 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여 1786년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801년에는 천주교인이라 하여 은언군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사되었다.
게다가 철종의 형 원경은 모반을 꾸미다 발각되어 사사되었으니 철종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왕이 된 철종은 힘든 생활을 이어가다가 재위 14년에 사망한다.
예릉은 이러한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능으로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정조와 의빈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효창원(孝昌園)’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원이다. 그는 1782년(정조 6) 후궁 의빈 성씨가 낳았다.
1784년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2년 뒤 홍역으로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죽자 시호를 처음에는 온효(溫孝)로 정했다가
문효로 고쳤다. 문효세자는 고양 율목동(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장사지내고 효창묘라 했다.
1870년(고종 7) 효창원으로 격상되고, 1944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1786년(정조 10년)에 고양 율목동에(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였는데, 1870년(고종 7년)에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했고, 이후 1944년 일제가 현재의 자리로 강제 이장했다. 처음 조성될 당시에는 문효세자 이후
세상을 떠난 의빈 성씨의 묘와 100보(약 50m)였는데, 2개의 묘를 이장을 한 현재는 약 2km에 달한다고 한다.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령원(懿寧園)’
영조의 손자이자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원이다.
그는 1750년(영조 26) 세자빈 홍씨(훗날 혜경궁)에게서 태어났다. 이듬해 왕세손으로 책봉됐으나 다음 해 3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손이 죽자 시호를 의소로 정하고, 양주 안현(鞍峴)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장사지내고
‘의소묘’라 했다. 1870년(고종 7) 의령원으로 격상됐고, 1949년 서삼릉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공개 능(陵)과 (원園)
인종의 ‘효릉(孝陵)’
12대 인종(1515~1545)과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쌍릉이다.특이하게도 인종의 릉에만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인종의 릉에도 원래는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가 선조 때 인종의 릉에만 병풍석을 둘렀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까지 비공개 능역이었다가 소현세자의 소경원과 함께 2023년 9월 8일에 개방됐다.
하지만 2023년 10월 21일 가축 전염병 방지로 인하여 다시 비공개 권역이 되었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소경원(昭慶園)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원이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회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무덤으로, 1504년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킬 당시 폐비 문제에 관계된 자들을 처벌할 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복위시키면서 회릉으로 승격시켰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제헌왕후의 작위도 삭탈되고
능도 묘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석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 본래는 서울시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서삼릉 능역으로 이전됐다.
후궁 빈·귀인 묘역
후궁묘의 ‘빈·귀인 묘역’에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과 황제의 후궁의 묘 16기를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옮겨왔다.
비공개 지역으로, 효릉을 포함한 비공개 묘역들이 개방함에 따라 예약을 하고 관람할 수 있다.
한편 서삼릉에는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이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의 태반과 탯줄을 담은 태항아리가 묻힌 석실(石室)이다.
왕실에서는 태가 주인공의 삶과 국운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이를 소중히 갈무리해 전국 길지 명당에 묻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였던 1929년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발굴, 수습해 태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이전했다.
당시 ‘일(日)’자형으로 조성됐던 담장과 일본식 철문을 철거하고, 1996년 발굴조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곳에는 왕, 황제, 황태자의 태실 22기, 왕실과 황실 가족들의 태실 32기 등 총 54기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 있다.
전국 최다 규모의 태실군이다.
이 밖에 서삼릉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각지에서 옮겨온 왕자와 왕녀, 후궁들의 묘역이 있다.
왕자·왕녀 묘역에는 조선 및 대한제국 왕·황제의 왕자묘 8기와 왕녀묘 14기 등 총 22기의 묘가 모여 있다.
또 빈·귀인 묘역에 16기, 숙의 묘역에는 5기의 후궁묘가 있다.
본래 서삼릉의 능역은 광릉수목원에 필적했다. 현재 서삼릉의 전체 면적 중 79만여㎡가 농협중앙회의 종우장과 한국마사회의
종마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대체 부지를 마련해 시설을 점진적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서삼릉은 바로 옆에 있는 원당목장과 함께 돌아보면 좋다.
*서삼릉 참고 및 인용 자료 : [조선의 왕릉]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위키백과] [나무위키]
서삼릉 방문 안내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운영 시간 : 09:00~18:00
*휴무일 : 매주 월요일
*입장료 : 성인 기준 1,000원(65세 이상 무료)
*대중교통 : 지하철 3호선 원흥역 7번 출구(삼성초교 방향)로 나와 앞쪽 버스정류장에서 043번 버스로 환승하여
10분 정도 달려서 ‘서삼릉·원당 종마목장’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 정류장에서 600m 거리다.
(단 043번 버스는 일요일과 공휴일은 운행하지 않는다.)
*참고 : 대중교통 접근 방법은 6월29일 포스팅한 ‘수도권 이색명소 원당목장’을 참고하기 바람.
*승용차 주차 : 가능 / 요금 : 무료(별도의 주차시설이 없으며, 목장 입구 도로변에 주차해야 한다.)
*방문일 : 2024년 6월26일(수)
<용타기 블로그 안내>
*블로그 제목 : ‘삶은 아름다운 현실이다’
*블로그 주소 : https://blog.naver.com/byt0108
첫댓글 용타기님 글 덕분에
천천히 돌아봅니다
저곳 왕릉에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게으름덕에 아직도
못가고 있네요^^
나중에 시간 되면 함 들려 보세요.
고즈넉한 분위기가 힐링에 으뜸입니다. ㅎ
바로 옆에 있는 원당목장과 함께 둘러보면
금상첨화입니다.
원래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을 쓸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정략적으로
왕릉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가슴이 컥 막힙니다.
그래요, 방장님.
우린 그런 치욕의 세월을 살아왔으며,
그것이 슬픈 역사로 남았네요.
많은 비가 내리는 날.
용타기 방장님의 왕릉 답사기를 읽으며
함께 저 길을 걷습니다.
늘 완벽한 답사기.
고맙습니다.
몇 개월 전, 카페 회원께서 제게 보낸 쪽지가 기억납니다.
그때는 쪽지 미사용 시스템이었지만
회원은 카페지기와 운영자에게는 쪽지를 보낼 수 있었거든요.
길목 카페는 해외여행방의 뿅망치 작가님.
그리고 국내여행방의 용타기 작가님.
두 분의 보물이 있고,
그 보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카페지기가 있어서
다른 카페와 구별되는 격이 높은 카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회원의 쪽지를 기억하며
용타기 방장님의 답사기를 읽었습니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조선 왕릉은 단순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종종 조선 왕릉에 관한 이야기를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건강하시죠?
저곳은 아주 오래전에 .
군생활때 대북한 보안교육 받다가.
취침나팔 불면 ...
두꺼비 몇병씩 들고.
교육생들과 담넘어 가서.
처리하고 복귀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대는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 ..
올려주신 자료를 보니..
옜날이 그립군요..ㅎ
항상 건승 하시기를 소원 드립니다.🍒
그런 추억(?)이 있으셨군요. ㅎ
지금은 인근에 군 부대는 없는 거 같더군요.
무더위에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한달전에 지인과 같이 산책한적이 있습니다
인천에서 가깝고 좋은곳으로 한가롭게 주말을 즐긴적이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이곳은 우리 역사를 알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