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한바퀴 111-독립기념관(천안)
충남관광 100선
6월9일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박물관. 이를 운영하는 국가보훈부 산하 공공기관(준정부기관)도 독립기념관'입니다. 겨레의 탑과 불굴의 한국인 상이 박물관의 상징이며 이 박물 관이 바로 천안시의 랜드마크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 운 독립운동이 주요 주제입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관람 시간은 하절기(3월~10월 ) 9:30~18:00, 동절기 (11월~2월) 9:30~17:00로 관람 마감 1시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하며 정기 휴무일은 매주 월요일입니다
목천IC에서 똑바로 직진하면 나옵니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으로 11대.12 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오르는데, 전두환은 기본적으로 전임자 박정희 대통령 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따라 하는 행적을 보였습니다. 당연히 박정희가 한일기본조 약으로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교환공문)을 공여하기로 합의를 본 사실을 그냥 넘길 리 없었던 전두환은 1981년 4월 23일부터 노신영 외무장관을 통해 일본에 물 밑작업을 해 '북한의 남침을 우리 남한이 막아주고 있는데, 방위비 명목으로 일본이 돈을 내는 게 당연하다'라며 일본에 100억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소위 아프리카 독재국가의 전임 독재자가 쫓겨나거나, 제거되어 다음으로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과거 식민지배했던 국가를 찾아가 '예전에 맺은 계약이나 조약 따위는 전임자와 맺은 것으로 새 관리자 격인 자신은 모르는 일이니 자신과 새 로 조약, 계약을 맺어야 한다'라며 독재를 답습하는 전형적인 억지입니다. 이런 전 두환의 궤변에 일본은 1982년 7월, 자국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보복했고,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몰랐던 한국인들은 일본에 거세게 항의하자 첨엔 100억 달러짜리 교섭 날아가나 싶어 침묵으로 일관하던 전두환은 국민 여론이 까딱했단 자신도 찍혀나갈 판으로 바뀌자, 전두환이 극일을 주장하며 건립한 건물이 바로 독립기념관입니다.
1982년 8월 28일 각계 55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기념관 건립준비위원 회'가 출범되었고, 박순천 여사가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1982년 8월 31일부터 국 민성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도출처 성금 목표액은 원래 500억 원(3250만 달 러)이었으나 1983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기공식까지 706억 원이 걷혔고, 정부도 246억 원을 지원해 총 1000억 원(7500만 달러)의 공사가 되었습니다. 다만 설립 발기인 선정부터 말성이 일었습니다. 처음 이들은 부랴부랴 '독립기 념관 건립준비위원회'를 구성 후 발기인 명단을 발표했으나, 이들 중 수십 명이 친일부역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습니다. 결국 마지못해 이들 이름을 빼 고 다시 1982년 10월 5일 '독립기념관 건립사업 전국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이후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 사이 전두환은 계속 일본과 교섭을 해나갔고, 최종 40억 달러로 합의를 보았습니다.1983년 1월 11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방한해 이 교섭을 매듭지었습니다. 이후 전두환은 전두환 대통령 일본국 공식 방문으로 전 두환은 자신이 받아낸 40억 달러를 공론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대신 일본은 독립기념관 건축물 자재를 모두 일본자재로 쓸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두환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전두환이 정작 독립기념관 건설 명목으로 내놓은 국가 예산은 상술된 1850만 달러(약 246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뒷보다 국민 성금으로 사들인 건축자재가 모두 일본자재입니다.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중국 근대사와 관련 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한 형태로 수정하면서 역사 왜곡 이슈가 터졌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문부성의 일방적인 수정에 항의하는 교과서 집필진의 항의가 있었고 일본 내 여론도 문부성 비판으로 흘러가면서 대한민국 내 언론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자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알려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500여억 원의 국민 성금을 기초 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정재정,2014,302](대한뉴스1415]
독립기념관 등 1980년대에 건축된 대형 건축물들은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의 융합이라는 기치 아래 문화 공보부에서는 대형 복합 문화 공간의 거대 프로젝트를 전국적으로 추진했다 따라서 독립기념관, 중앙청 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 전환,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이 대형 프로젝트로 추진되어 건립되었습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에 방문하는 외국인 손님들의 눈높이 에 맞는 문화 시설을 만들려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습니다
독립기념관이 천안 목천에 들어선 이유는 이 일대가 유관순, 조병옥, 이동녕 등 여러 항일 독립 지사들이 태어나서 활동한 곳이기도 하고, 1970년대 말 박 정희가 행정수도 이전지 중 하나로 고려했던 곳(이른바 '천원지구')으로 교통 과 지세가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문화교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팔만대장경 만드는 모습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팔만대장경 만드는 모습
자랑스런 우리 문화
고려의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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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무기와 병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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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개방시 모습
통신의 발달
전신국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 운동
갑오개혁
대한제국
태극기
1986년, 원래 개관 예정이었던 8월 15일을 불과 열흘 남짖해가 발생해 본관이 불타 개관이 무기한 연기된 일이 있었습니다 의한 스파크가 원인이었는데, 지붕 하부가 가연성 높은 강 재에 송판, 루핑 등으로 덮여 있었으며 전기공사를 진행하 자라 380V짜리 선을 110V선에 연결한 게 화근이었고 지 시설 또한 준비되어 있지 않아 화재의 규모가 컷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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