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전 북 리뷰(Book Review)
THIS KIND OF WAR/ 『이런 전쟁』 (2)
T.R.Fehrenbach 지음/ 최필영(외) 옮김/ 플레닛미디어, 2020.
1970년대 초, 필자가 공군에 있을 때 대간첩작전에 투입된 적이 있었다. 경기도 어딘가 야산 참호에서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하룻밤을 잠복했는데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어둠 속에서 실전의 팽팽한 긴장을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만약 내 앞에 무장공비(武裝共匪)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해야 할까?’ 밤새도록 그 대답의 길이는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낯익은 전투비행단의 활주로를 벗어난 이날 밤의 특별한 외도는 지금도 내게 유일한 교전현장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북 리뷰, 『이런 전쟁』을 다시 시작하려니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전쟁터 근처에도 가본 적 없고 그냥 카빈총 하나들고 야산 참호에서 공비 구경도 못한 채 하룻밤을 보낸 게 고작인 내가 ‘과연 전쟁사를 얘기할 입장이 될까?’라는 생각, 그게 먼저다. 또 다른 하나는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에 대한 우리 시대의 거대한 무례(無禮)였다. 4년 전이었다. 역전의 노(老)장군에 대한 국가적 예우가 처참하게 망가져 내린 것이다. 국가적 수치요 시대의 아픔이었다. 무슨 얘긴가. 당시 국회를 장악했던 좌파 집권당에서 별별 희한한 법이 다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하더니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악법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친일파 파묘법(破墓法)’, 즉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의 시신을 파낸다는 법이었다. 조선왕조 시절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재현시키겠다는 희한한 발상이고 기막힌 반일(反日) 이벤트였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 보훈처 사람이 당시 백수를 맞으신 백선엽 장군을 찾아가 현충원에 묻힐 수 없음을 은근히 암시했다. 백장군 사후, 대전현충원에 모셔지긴 했지만 광복회장이란 자는 장례식날 현장에서 온갖 행패를 다 부렸고 문정부 인사 어느 누구 하나 조문하지 않았다. 실로 해괴망측한 패역의 절정이었다.
☜* 1950년, 1사단장 시절 참모와 작전협의 중인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이 젊은 날 독립군 구경도 못한 채 만주국 간도 특설대에 잠시 몸담은 이력을 꼬투리 잡아 그들 멋대로 친일파 낙인을 찍은 결과였다. 그 시대 식민지 공간에서 숨 쉬고 살았다면 과연 누가 누구를 ‘친일’이라 매도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하다 하겠는가? 무릇 한 인물의 공과(功過)를 나누고 판단하는 것은 오직 역사가의 몫일 뿐 결단코 이념에 매몰된 권력의 몫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6,25 전쟁을 극복하고 기적처럼 다시 살아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누가 친북(親北)더러 친일(親日)을 가려내고 심판하라 허락했는가? 나라를 백척간두에서 구해 낸 구국의 전쟁영웅을 국립현충원에 모실 수 없다면 앞으로 서울 동작동 거기는 그냥 공동묘지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한심한 작태는 정말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절대로 할 짓이 아니었다. 더구나 백선엽 장군이 지켜낸 대한민국에서 잔뼈가 굵었고 나라의 단물을 빨아먹는 인간들이라면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될 금수(禽獸)만도 못한 배은망덕(背恩忘德)이 아닐 수 없었다. 4년 전 일이지만 돌아보면 지금도 이런 패역의 작태는 오늘 우리 사회에 여전히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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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 6,25 전쟁 얘기로 되돌아가자. 1950년 10월 13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면서 압록강 이북에 대기하던 60만 중공군은 이후 한국전쟁의 거대한 상수로 돌변했다. 중공군을 지휘하던 린바오(林彪), 펑더화이(彭德懷), 쑹스룬(宋時輪)등은 홍군(紅軍) 시절부터 야전을 거친 역전의 노장(老將)이자 천재적 지장(智將)이었다.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습을 피해 매일 밤 21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무기와 탄약과 식량을 짊어진 채 노래를 부르며 28킬로미터씩 걸어서 기동했다.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다듬어진 든든한 다리와 두둑한 배짱을 지닌 군대였다. 일체의 지시를 어기면 현장에서 총살할 만큼 군기는 엄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날이 밝으면 완벽하게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엔 공군기가 수백 번을 날아 다녔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은 중공군의 기묘함과 배짱뿐만 아니라 완벽한 군기가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미군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살인적 추위와 끔찍하게 험준한 죽음의 계곡에서 음산한 공포의 밤을 유령 같은 군대와 싸워야 하는 운명으로 내몰렸다.
1950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일로 북상하던 유엔군의 전선이 서부는 청천강에서 동부는 장진호에서 각각 중공군의 나팔 소리에 갇혀버린 이유는 이뿐이 아니었다. 당시 중공군은 미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군의 장점과 약점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작전계획이 바로 미군의 후방으로 파고 들어가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군의 전면과 후면을 모두 압박하면서 타작하듯 공격해 들어가는 것, 이른바 하치-시키(Hachi-Shiki)라는 V자형 공격대형이었다. 중공군에게 이런 전법은 험준한 산악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형에 잘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해전술과 유일한 통신수단인 조명탄, 나팔 신호와도 연계할 수 있었다.
즉 공격 목표를 향해 부대 중 하나는 신속하게 적을 우회하여 후방을 차단한다. 적 전차와 포병이 아군의 작전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잘 닦인 길과 평지는 공격로로서 피해야 한다. 소수의 선두 정찰부대들이 공격 나팔을 불어 신호를 보내면 대규모 병력이 종대로 뒤를 따르며 공격한다. 이런 지시를 받는 중공군 병사들은 잘 먹고 잘 입고 건장했다. 솜을 누빈 흰색, 겨자색 혹은 푸른색 상의를 입었고 다수는 털이 들어 간 방한화를 신었다. 그들은 강인했다. 식량과 보급품과 박격포탄까지 짊어지고 다녔으며 적이 어디에 있든 마치 바다인 양 땅을 휘젓고 다녔다. 그들 대부분은 글을 모르는 소농 출신이었으며 공군도 없고 포병도 없고 무전기 같은 과학적 장비도 없었지만 그들은 용감했고 죽을 때까지 명령에 따랐다. 이후 중공군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산악에서 싸우면서 20세기 들어 가장 결정적인 패배를 미군에게 안겼다.
1950년 11월 중순, 대략 18만 명의 중공군이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미 8군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12만 명의 중공군은 미 10군단을 에워싼 채 장진호 인근에 도사리고 있었다. 워커 중장이 이끄는 미 8군이 서부전선에서 고전하는 동안 알몬드(E.M.Almond) 소장이 지휘하는 미 10군단이 한반도 동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북상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장진호로 치고 올라가는 미 해병 1사단과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는 한국군 2군단이 압록강을 향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예하 부대들은 서서히 지옥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잔인할 정도로 험악한 해발 1,600미터가 넘는 개마고원 일대의 산악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회랑은 오직 산비탈 따라 이어지는 절벽에 걸린 실오라기 같은 오솔길뿐이었다. 고토리, 하갈우리, 진흥리, 유담리는 장진호로 이어지는 죽음의 좌표였다. 문제는 북한의 지독한 추위였다. 혹독한 추위는 중공군의 총알보다 더 많이 미군을 쓰러뜨렸다. 추위에 노출된 미군 장병들은 동상에 걸려 하얗게 변했다. 수은주가 영하 24도까지 곤두박질치자 해병들은 멍해져서 우왕좌왕했고 어떤 병사는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50센티 깊이까지 얼어붙은 땅을 감각 없는 손으로 파고 들어가 몸을 숨겨야 했다. 수통의 물과 캔 속의 전투식량이 얼어붙고 야포도 얼었으며 차량은 시동을 끄면 다시 시동을 걸 수 없었다. 밤새도록 바늘로 살을 찌르는 듯 온몸을 파고들었던 추위는 해가 떠도 다를 게 없었다.
쑹쓰룬이 지휘하는 중공군은 장진호 주변 고지 전면에 걸쳐 약한 곳을 두들기며 후방협곡으로 병력을 들이밀 빈틈을 찾았다. ‘집에 들어 온 뱀을 잡듯이 미 해병을 죽여라!’ 쑹쓰룬의 지시가 떨어지자 중공군은 마치 개미 떼가 기어가듯 긴 줄을 만들었다. 그들은 겨자색 상의에 맨손을 집어넣고 행군 때 부르는 구슬픈 단조의 곡을 부르며 공격 명령 나팔 소리를 기다렸다. 곧이어 최전방의 해병은 총열이 달아오를 만큼 쏘아댔고 중공군의 총탄은 마치 채찍처럼 고지를 내리쳤다. 나팔을 구슬프게 울려댈수록 환한 달빛 아래 유난히 하얀 눈밭에는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신들이 즐비했고 군인들은 그 전우의 시체 위에 다시 쓰러져갔다. 고지는 빼앗았지만 다시 빼앗겼다. 파편에 맞아 흘러내린 피가 수염에 엉겨 붙어 얼었다가 다시 말라버릴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아무도 울부짖거나 고함치는 사람도 없었다. 가끔 가슴을 헐떡이면서 ‘젠장 내가 맞았네. 하나님 맙소사!’ 하다가 픽 쓰러질 뿐이다. 하지만 그해 겨울 살인적 강추위 속 장진호의 미 해병은 용감했고 잘 싸웠다.
마침내 맥아더 극동사령부로부터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해병들은 이를 ‘후퇴’라 하지 않고 ‘남쪽으로의 공격’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남쪽으로 가는 내내 공격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해서 빼앗은 땅은 적에게 넘겨주었다. 해병들은 얼어붙은 전투식량을 체온으로 녹여 먹으며 종일토록 싸워서 고지를 하나씩 통과했다. 피를 흘린 채 몸이 반쯤 얼어붙은 해병들은 차량의 흙 받이와 보닛에 줄로 몸을 묶어 눕거나 소 썰매에 실려 갔다. 이미 중공군이 중심 고지를 장악한 상태에서 해병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난 앞에서도 공격전을 펼치며 퇴로를 열었다. 그리고 철수하는 대열 위로 해병 항공단 항공기들이 끊임없이 날아와 중공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했다. 그러나 중공군 역시 초인(超人)은 아니었다. 끔찍하게 험한 지형에서 보름 이상 몰아친 전투에다 굶주림과 이질로 인해 그들도 무너져갔다.
☜* 눈 속을 헤치며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미군 병사의 모습
이 장면은 한국전쟁사 기록사진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후퇴하는 해병 앞에 마침내 하갈우리 임시비행장 활주로가 보였다. 해병들은 허리를 펴고 케이던스(cadence/구보나 행군시 인솔자가 선창하면 제대가 후창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상병 수천 명은 하갈우리에서 비행기로 죽음의 계곡을 빠져 나왔지만 나머지 병력은 다시 고토리까지 15킬로미터를 22시간이나 더 걸어야 했다. 묻힌 지뢰와 끊어진 다리가 가로막았지만 도로 정면 좌우 700미터를 살아남은 10군단 육군들이 다 쓸어주었다. 이제 철수하는 미 해병과 육군을 가로막을 세력은 없었다. 드디어 동해 옆 평지까지 내려왔다. 미 10군단 7사단도 한국군 1군단도 다 그곳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공군과 해군 함포가 엄호하는 회청색 동해의 항구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고지에서 굶주리는 중공군은 결코 이들을 바다로 쓸어낼 수 없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쑹스룬과 그의 지휘관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남하하고 있던 그때 마침내 동부전선의 10군단은 흥남과 원산을 통해 남한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2차 대전 됭케르크의 철수와는 달랐다. 아무도 서둘러 배를 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없었다. 일체의 장비와 물자, 심지어 휘발유까지 들고 배에 올랐다. 게다가 필사적으로 배에 오르려는 수만 명 북한 사람들도 배에 태웠다. 병력 10만 5,000명, 피난민 98,100명, 차량 1만 7,500대, 물자 35만 톤을 실었다. 당시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아(Meredith Victory)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2004년 9월 21일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동해안에 거대한 화염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안 수송선단은 파괴된 항구를 적에게 넘겨주고 바다로 나갔다. 그 무렵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이 서울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면서 이들보다 먼저 알링톤 국립묘지로 돌아갔다.
비록 미 해병대가 자존심을 잃지 않고 철수하고 미 8군이 질서정연하게 평양에서 물러 났지만 청천강과 장진호 일대의 작전은 미국 전쟁사에서 가장 큰 패배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미 육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14만 미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한 것은 기자들과 분석가들의 눈에는 재앙으로 보였다. 이제껏 미국이 겪은 최악의 패배였다는 의미다. 아시아를 공산주의자에게 내어 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만큼 자칫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서서히 워싱턴을 지배했다.
바야흐로 한국전쟁은 정치적 문제로 치닫고 있었다. 트루만 행정부에게 중공과의 전쟁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벌리는 잘못된 전쟁이었다. 동시에 이 전쟁은 소련을 끌어들이는 빌미가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당연히 맥아더의 중공에 대한 분노, 즉 만주에 대한 핵 공격과 중국 본토로의 확전을 통한 응징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합참에 보낸 장문의 맥아더 보고서는 끝없이 트루만을 압박했다. 인민군만이 적이라는 관점에서의 작전 수행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거대한 후퇴가 초래한 유엔군의 심각한 패배 의식이었다. 손가락에 화상을 입은 사람은 언제나 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1951년으로 해가 바뀌고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면서 유엔군과 중공군은 각각 무수한 전사자와 맞바꾼 엄청난 교훈들을 한아름씩 안고 있었다. 적 앞에서 나팔을 불고 고함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을 배운 중공군은 고무창을 댄 신을 신고 조용히 다가왔고 미군은 초병들에게 2인당 한 개씩 침낭을 제공했다. 인기는 없지만 생명을 구한다는 교훈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무렵 워커의 후임으로 늘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던 강골의 원칙주의자 리지웨이(M.Ridgway) 장군이 미군의 지휘봉을 넘겨받았다. 리지웨이는 가는 곳마다 공격을 말했고 새로운 투지를 불어넣었으며 그 크기만큼 패배 의식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해 2월 14일, 지평리 전투가 터졌다. 마치 뚜껑이 열린 듯 쏟아져 나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병력이 움푹 파인 지평리로 밀려들었다. 하지만 기계화도 못 갖추고 통신 능력도 미비하고 공군도 없고 게다가 보급선까지 길어진 중공군이 유엔군의 화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산악이 아닌 진화된 전투방식이 통하는 전쟁터를 선택하게 된 미군의 작전이 지평리 전투를 시작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미 8군은 과거의 상처에서 부활했고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상 리지웨이가 거둔 첫 승리였다.
1951년에 이르러 확전론자이자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온 세상의 뜨거운 감자였다. 처음에는 트루만 역시 유엔 압박용으로 핵을 언급할 만큼 맥아더와 입장이 비슷했다. 그러나 이후 워싱턴의 입장은 오락가락하면서 그에게서 멀어졌다. 곧바로 이른바 ‘맥아더 카이사리즘(Caesarism)’이 미국 조야와 전 세계를 흔들었다. 유엔 회원국들은 오로지 종전(終戰)을 원했고 전면전, 특히 핵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다.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2차 대전을 치른 지 고작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자국을 지키는 전쟁도 아닌데 핵전쟁을 감수할 나라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독실한 상공회교도이자 전형적 미국인이었던 전쟁영웅, 맥아더 역시 전쟁을 혐오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참전한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하고 그것은 성전(聖戰)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끔찍한 희생들이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점점 더 워싱턴을 향해 전쟁을 위한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즉 병력증강과 일본의 무장과 만주폭격을 요구했고 자신의 요청이 승인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임을 주장했다. 워싱턴은 맥아더를 달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세계평화는 집단안보로 지켜지는 것이며 한국도 지켜야 하지만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의 방어도 필요하다고 맥아더를 설득했다. 트루만 역시 현 상태에서의 종전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만주기지 폭격과 중공 본토로의 공격 전환 없이는 북한을 제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누구도 패배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긴 쪽도 없는 전쟁이었다. 전선은 그대로고 수십만이 죽고 불구가 되고 집을 잃었으며 전투, 고통,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에게 이런 전쟁은 수치에 가까웠다.
맥아더는 워싱턴과 중공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맥아더의 성명을 읽던 트루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발언은 대통령에 대한 도전장이 되어 백악관과 동맹국의 총리실을 강타했다. 워싱턴으로 이어진 전화선에 불이 났다. 결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고 가장 존경받지 못한 대통령 트루만은 맥아더의 해임을 결정한다. 이미 고립주의로 기울어진 미국의 분위기는 맥아더의 전쟁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치 감각은 전무한 채 오직 승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1951년 4월 9일 오후 3시 15분, 대통령 트루만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리지웨이를 후임으로 지명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유럽은 환호했고 한국전선에 배치된 영국군 대대는 잔치를 벌였으며 유엔군 부대들은 공중으로 총을 쏘았다.
맥아더의 퇴장 이후의 한국전쟁은 사실상 개점 휴업상태였다. 미군은 비록 절망이란 잿더미에서는 일어났지만 중공군 사냥에는 질려버렸다. 하지만 리지웨이는 끊임없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는 장병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땅에 꽃 피우신 서구문명의 힘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것인가? 포로를 쏴 죽이고 국민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무법 통치가 신성하게 인정받는 그런 공산주의 정권을 몰아낼 것인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노예로 살 것인가?’
당시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부담은 전적으로 미군과 한국군의 몫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다른 유엔 참전국들을 다 합친 것보다 10배나 더 많았다. 그러나 이미 한국은 폐허로 변했다. 군인과 남녀노소를 포함해 130만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사망률은 20명당 1명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4월 초 50만 병력의 유엔군은 모두 38선을 넘어서 있었다. 병력 손실이 막대했던 중공군은 서둘러 병력을 북한으로 들이밀어 75만에 이르렀다. 서울 공략을 목표로 한 서부 전선의 임진강 북방과 중부 전선의 철의 삼각지대는 거대한 화약고가 되었다. 어느덧 봄이 깊었다. 눈 내리는 겨울, 전사해 얼어붙었던 군인들의 해골이 언덕을 굴러 내려와 꽃망울을 터뜨리는 진달래와 개나리 사이에서 안식을 얻었다.
중공군 1만 5,000명을 전사시키며 서울 회랑을 지켜낸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가 용맹스럽게 싸웠던 글로스터 고지 전투가 전쟁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날도 봄꽃 흐드러지던 그해 봄이었다. 그렇다고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다. 그해 5월 중순, 중공군 3개 병단 13만 병력과 인민군 3만 8,000명은 중부 전선의 춘천에서 남으로 전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축한 이른바 ‘노네임 라인(no name line)’에서 중공군은 미군의 피 맛을 보는 듯했다. 유엔 공군력도 소용없었다. 산악 지형에서 한 줌 쌀과 메주콩만 먹고 탄약을 등에 진 채 전진하는 군대를 공군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뺏고 빼앗기는 끝없는 고지 전투를 극복한 미 보병 2사단은 마침내 중공군의 나팔 소리를 잠재웠다. 결국 아래로 처져 내려온 노네임 라인을 다시 밀어 올려 수평을 만들었다. 중공군은 미군 1개 사단을 상대로 10개 사단을 투입했지만 포병의 사격으로 6만 5,000여 명이 전사했다. 포병사격을 받은 계곡 한곳에서는 무려 5,000여 구의 시신이 나왔다. 이른바 ‘5월의 학살’이 끝나자 미 8군은 다시 북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들을 멈추어 세운 것은 포격이 아니라 회담의 결과였다.
무릇 모든 전쟁에서 죽음의 계곡은 전선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포로수용소는 거대한 죽음의 공간이었고 또 다른 전쟁터였다. 유사 이래 전쟁포로들은 살아있음이 죽음만 못했고 전쟁의 폭력은 포로들을 울부짖는 동물로 만들어 놓았다. 제네바 협정에 이르러 비로소 전쟁 포로는 자국 죄수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이런 현상은 보편적일 수 없었다. 이것은 다만 문화와 화학반응의 문제일 뿐이었다. 예컨대 일본의 일상식사를 일본 농부나 일본군 포로에게 먹이면 무기한 살 수 있으나 서구인에게 먹이면 굶어 죽는다. 포로수용소에서 군인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그냥 고깃덩어리다. 미군 포로들은 중공으로부터 그들의 흉악범, 반동 계급과 유사한 취급을 당했다. 특히 공중폭격으로 북한 땅을 쑥대밭으로 만든 유엔 공군 포로는 실로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이들에 비하면 일반포로들에 대한 굶주림, 의료부족, 상당한 정도의 사상 주입은 약과였다. 비록 그들 수준이긴 하지만 그나마 유화정책이었다.
특히 중공군은 미군 포로들의 계급을 없애고 상급 장교들에게 가장 모멸적인 작업을 시키면서 군기를 무너뜨렸다. 서로 를 뭉치게 할 군기가 사라진 공간은 다만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으로 변해갈 뿐이었다. 식사는 매일 삶은 기장과 옥수수 약간, 포로들은 가끔씩 개를 잡아먹으며 겨우겨우 영양을 보충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더러운 헛간에서 서로에게 몸을 붙인 채 밤을 새웠고 생나무를 연통 없는 난로에 태울 때 죽음의 그림자처럼 퍼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포로들은 바닥을 기어 다녔다. 영양부족으로 감염병과 이질로 마구 죽어 나갔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가 없어 보였지만 그다음으로 빨리 죽었고 이상하게도 젊은 포로들이 많이 죽었다. 당연히 적응력이 강한 포로들은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므로 살아남았다. 무엇인가를 고수하는 것도 생존을 도왔다. 어떤 포로는 극도로 중공군을 증오하는 바람에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남았다. 포로수용소를 옮길 때 포로들이 목격한 풍경은 참담했다. 그냥 던져버린 포로들의 시신에는 개들이 코를 박고 물어뜯었다.
☜ * 인민군 포로들이 줄지어 남쪽으로 행군하는 장면
하지만 거제도에 수용된 8만 명 중공군, 인민군 포로들은 달랐다. 당시 미 8군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포로에 관심이 없었다. 포로에 대한 아무런 전문성이 없는 병참부서가 포로를 관리했다. 경험이 없다 보니 관리가 부실했고 그냥 섬에다 몰아 놓았을 뿐이다 보니 결국 포로들을 둘러싸는 철조망 하나조차 없었다. 포로들은 그냥 벌판에서 모여 앉아 대부분은 평생 구경도 못했을 밥과 채소와 생선을 엄청나게 먹어 치웠다. 수용소 건물을 짓고 나자 마침내 미국 조지아주 캠프 고든(camp gorden)에서 특별히 훈련된 헌병대가 도착했다. 포로 관리를 맡을 헌병대 지휘관 피츠제럴드 대령의 첫 일성은 ‘포로는 우리와 동일하다. 우리의 임무는 포로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다.’였다. 심드렁했던 포로들이 활기를 되찾으면서 서서히 미군 간수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포로에 대한 학대란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미군이 쓰다 버린 것이긴 하지만 체육 기구 수 톤이 거제도로 들어왔고 민주주의를 다룬 책과 미국헌법 복사본도 지급되었다. 병원도 지었고 매일같이 회진도 했다. 가장 계급이 높은 리학구 총좌와 사실상의 리더인 홍철이 포로들을 조직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포로들은 미국의 비용으로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심지어 도료를 받아 내 오성홍기, 인공기, 성조기를 예쁜 돌에 그려 수용소 뜰을 장식하기도 했다. 공산당 선전 구호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하면서 거제도는 이념이 설치는 이상한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포로들이 등사판으로 찍어내는 신문은 섬을 덮을 지경이었다. 포로들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만족해했다. 가끔씩 저들 사이에서 구타당한 시체가 하수구에 처박혀 있는 것만 빼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제네바 협정 이상의 인도적 공간이었다. 어느 날 포로수용소 보급 장교 그레고리 소령이 한국인 하우스 보이에게 포로들이 만든 신문에 무엇이 써 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가 대답했다. ‘미국인들이 참 바보라고 쓰여 있는데요.’ * 20240615/ 글 최익제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