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홧가루 날리는 고향

[청도인]

송홧가루 날리는 고향

내가 젊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고질병 중의 하나가 피부 질환이다. 매년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처음엔 몇 해에 한 번씩 발병하다가 나이 들면서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재발하여 가슴과 등에 물집(水疱)이 돋아놔서 가렵기도 하지만 물집이 터질 때는 따갑기가 여간하지 않다. 내가 다니는 병원의 피부과 의사는 알레르기성 피부염이라고 하는데 처방 약을 바르면 곧 사그라지다가 다시 돋아나는 일이 반복된다. 

청도의 내가 사는 마을은 소나무 숲 바로 아래라 어떨 때는 송홧가루가 뿌연 안개처럼 내리고, 잠시만 창문을 열었다가 닫아도 책상을 문지르면 물티슈에 노랗게 묻어난다. 환절기, 특히 꽃가루가 날리는 5월은 콧물과 재채기가 나오면서 입술이 붓다가 증세가 심해지면 매일 피부연고를 바르는데 손이 닿지 않는 등 부위를 아내에게 부탁하면 약시(弱視)인 아내는 환부를 잘못 찾거나 물집을 터트리는 일이 있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용하게도 이런 일이 오랫동안 반복하다 보면 일상이 되어 피부의 가려움도 큰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떨 땐 나도 모르게 물집이 생겼다가 저절로 낫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 가려움증을 견디는 방법도 터득했다.  

지난 일 중에 내 고향 김해와 그곳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이다. 특히 어릴 적 고향 이웃분들과 20년 전 5월에 세상을 떠나신 우리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면 가려움증이 금방 사라져버린다. 

어머니 살아생전에는 내가 등이 가렵다고 하면 두툼한 안경 너머로 가려운 데를 꼼꼼히 찾아 연고를 발라주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기억난다.

“이런 미련한 사람이 있나? 이러고도 어떻게 견디노, 빨리 병원에 가보거라!” 

나는 또 지난해 6월 암으로 고생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우를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어느 해 내 등을 처음 본 아우는 질겁을 했다.

“형님, 병원에서는 뭐라캄니꺼? 보통 일이 아니네요.” 

그리고 어릴 적 친구들과 우리 교회 교우들을 생각한다. 내 집안 조카 김가연 장로가 옮긴 염소농장에도 한 번 가봐야겠고, 특히 여러 가지 일들로 교회를 떠난 분들이 그립다. 선배 장로이신 이삼득 장로님, 그리고 친구 조윤제 집사는 천국에서 뭘 하고 계실까? 전주 사는 친구 김영우 장로, 해운대로 이사한 김동왕 장로의 근황도 궁금하고, 서울 사는 정일찬 장로의 둘째 딸 민지가 오는 토요일 서울 문화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KTX 승차권을 예매해 두었는데 마침 교회에서 버스가 출발한다고 하니 승차권을 반환해야겠다는 생각 등…. 이런 회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 그리움은 가려움증을 덮어버리는 약이 되어 이제는 그르려니 하고 산다.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결에

송화(松花)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윗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히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그리운 이 있으면

이런 곬작 호올로 숨었기도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유치환 ‘그리우면’ 전문(‘청마시초(靑馬詩抄)’ 청색지사 간 1939년) 

청마시초는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선생의 처녀시집으로 여기에 그 유명한 ‘깃발’과 함께 실린 시가 ‘그리우면’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되는 해 부산 수정동에서 청마 선생과 앞 뒷집으로 살았는데 조석으로 먼발치에서 그분을 뵐 수 있었고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드리는 기쁨이 있었다. 

그해 이른 봄 선생께서 작고하시어 분향소에서 목이 길고 청초한 정운 이영도(丁芸 李永道, 1916~1976) 시인을 뵈었다. 검정 치마저고리를 입고 깊은 시름에 잠긴 그분을 두고 훗날 세인들은 청마 선생의 편지 모음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수신자이자 연인이었다고 전한다. 

나는 젊어서 잠시 청마 선생과 이웃하며 살았고, 어쩌다 나이 들어 내가 사는 청도는 정운 선생의 고향이다. 9년 전 내가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청도로 이사 올 때 ‘시인의 마을’ 부근에는 푸른 소나무 가지가 국도를 덮고 있었다. 송홧가루 날리는 이 봄에 두 분 모두 나의 그리움 속의 인물로 내 가려움증의 약이 된다.

“남자나 여자의 피부에 색점 곧 흰 색점이 있으면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하면 이는 피부에 발생한 어루러기라 그는 정하니라” (레위기 13:38~39)

https://blog.naver.com/kjyoun24/221955385395

[에뜨랑제]

내가 사는 이곳 영천에도 송화가루가 노랗게 물들고 있답니다. 문을 열어놓을수 없을 정도로 귀찮지만 자연의 현상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시간속에 묻어버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김진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