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편연재소설(59) -
산 자의 레퀴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때가 아마 1983년이었을 것이다. 출근할 때 몹시 추워서 양복 속에 내의를 입고도 다시 바깥에 두툼한 외투를 걸쳤던 걸 기억하는 사실로 짐작컨대 분명히 한겨울이었다. 퇴근길에 글을 쓰는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가형의 집 부근에서 시내버스를 내렸다. 술이란 묘한 것이어서 멀쩡한 정신일 때는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한잔 걸치기만 하면 갑자기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가형이 사는 강동구청 청사 앞을 지나며 나는 갑자기 가형이 보고 싶었고 그래서 무조건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가형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형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오랜만에 모처럼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형수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소주 한 병을 달라고 했고 형수는 가형이 마시다 둔 술이 반병쯤 남아있는데 그것도 좋으냐고 내게 물었다.
“까짓 것 어때요. 몇 잔만 마시면 되니 그거라도 주십시오.”
형수가 냉장고에서 정말 두어 잔이 비는 소주병과 김치, 콩자반, 고등어 자반구이 따위를 소주 안주로 꺼내와 소파 앞 다탁에 차려주었다. 자작으로 소주를 두어 잔 따라 마시던 나는 불현듯 얼마 전 가형과 술을 마실 때 나왔던 치즈가 생각나서 형수에게 치즈를 주면 고맙겠다고 얘기했다. 형수가 대답했다.
“치즈…, 그것 없는데요?”
“저번에 보니 꽤 많던데 벌써 다 먹었군요?”
“형이 워낙 치즈를 좋아하잖아요.”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대체 형님은 언제 들어오는 겁니까?”
“글쎄요. 오늘은 전화도 없이 이렇게 늦네요.”
“늘 이렇게 늦습니까?”
“요즘은 그래도 많이 안 늦는 편이에요.”
헌데 돌연 현관의 벨이 울렸다. 가형이 마침 귀가를 한 것이었다. 가형은 술을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이었다. 제품 납품 문제로 콘택트렌즈 제조회사에 들를 일이 있어서 귀갓길에 잠시 성수동에 들렸었노라고 말하며 내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가형이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고 형수는 소주 몇 병을 사오라는 가형의 말에 꼼짝없이 슈퍼로 향했다. 혼자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나는 전작 때문인가, 매우 갈증이 심해 천천히 냉장고로 다가갔다.
가형이나 나나 모두 이북 출신이어서 한겨울에도 냉면을 즐겨 먹고 물도 꼭 냉수만 찾았다.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고 냉수를 찾던 나는 그만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냉장고 안에 베개만큼 큰 치즈덩어리가 비닐에 포장된 채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비교적 공명심이 강한 나였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 상태가 아닌가.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소파로 돌아가 벗어두었던 양복과 외투를 팔에 걸친 채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리고는 가능한 한 빨리 가형의 집에서 멀리 달아났다.
그런 사람이 바로 나의 하나밖에 없는 형수였다. 먼 훗날, 형수에게 지나가는 말로 당시의 섭섭한 감정을 토로했을 때 형수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 아마 잘못 보았을 것이다 하고 딱 잡아떼었고 그래도 내가 사실이라고 우기자 그렇다면 자기가 머리가 나빠서 치즈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을 거라고 둘러댔다. 헌데 문제는 그런 사소한 일이 정말 부지기수로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생각하기조차 싫었고 또 꺼내보아야 가형이나 나, 식구들 등 집안 망신일 뿐이었다. 좋은 얘기도 자꾸 하면 싫다는데 형수에 관한 한 절대로 좋은 얘기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 고충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가 형수에 대해 차마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결혼 직전과 신혼 초기에 일어났다. 결혼 1개월 전, 나는 집사람과의 결합을 앞두고 일단 신변을 정리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아름답고 깨끗하며 신성하기까지 한 결혼을 목전에 둔 나로서는 근무하던 직장 부근에 깔린 외상값이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로 빌려 쓴 돈을 모두 갚기로 결심했고 불쑥 가형의 집으로 갔다. 내가 결혼식을 올리기 약 2년 전 따로 독립해서 살고 있던 가형의 집은 그 무렵 성내동 건너 풍납동에 있었다. 핑계는 가형을 찾아간 거지만 실상은 형수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아주 큰돈은 남자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작은 돈은 말하기조차 부끄럽고 창피해서 가급적 삼가는 것이 통상 남자들 세계의 불문율이었다. 가형은 예상한 대로 집에 없었다. 일부러 집에 없을 때를 골라 찾아갔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형수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 힘들게 돈 얘기를 꺼냈다. 형수가 얘기했다.
“제가 그러게 큰돈이 어디 있어요?”
“단돈 십만 원인데요?”
“형님이 겨우 먹고 살만큼만 가져다주는 거 왕삼촌도 잘 알잖아요?”
“저는 형수만 믿고 왔습니다. 무조건 만들어 주십시오.”
“없어요.”
“그래도 만들어 주십시오."
“형님에게나 물어보세요.”
“형수…?”
“없는 돈을 어떻게 만들어 내라는 거예요?”
형수는 완강했다. 워낙 고집이 센 데다 시집 식구들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는 더욱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이자를 갚겠습니다. 그러니 좀 해 주십시오.”
"네…?”
"원금을 다 갚을 때까지 다달이 이자를 내겠습니다."
“그래요. 이자를 갚겠다면 몰라도….”
갑자기 형수의 단호한 태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보았다. 형수의 눈가에 가늘게 흔들리던 욕망의 그림자와 기어코 네가 내게 무릎을 꿇는구나 하는 일종의 성취감을…. 형수에게 물었다.
“이자는 얼마나 됩니까?”
“요즘은 오 푸러(프로)라고 하던데요?”
“오 프로면 십만 원에 오천 원이겠군요?”
“그야, 머리 좋고 계산에 밝은 왕삼촌이 더 잘 알겠죠.”
“알겠습니다. 헌데, 형수님 돈을 제게 주는 겁니까?”
형수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마침 이 동네에 돈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을 내가 알아요. 그 사람에게 한번 부탁해 보려구요.”
“알겠습니다. 돈은 모레까지 부탁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만원을 5부 이자로 빌렸는데 나는 그 돈과 이자를 결혼 직후 집사람에게 고백하고 고스란히 떠넘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모가지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그럭저럭 견뎌내겠는데 당장 매달 갚아나갈 10만원의 원금과 5천 원의 이자가 문제였다. 집사람은 그 돈의 이자를 쥐꼬리만한 봉급에서 떼어 다달이 갚아나갔다. 그리고는 내가 해외건설협회에 취직한 지 3개월 후 원금과 이자를 모두 일시에 해결했다. 두 달 동안만 무조건 참아달라고 떼를 썼어도 평생을 아내에게 돈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잔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을 그만 참을성 부족으로 낱낱이 고백했다가 크게 약점을 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래도 그 때는 남의 돈을 무사히 갚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원금과 이자를 다 갚고 깨끗이 잊어버렸던 그 일이 다시 뇌리에 살아난 것은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이 태어나 나란히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인 10년쯤 후의 1986년이었다. 경기도 남양주군 퇴계원 내곡동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 산소의 비석이나 상석床石 등 석물石物을 새로 단장하게 되면서 동서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형수로부터 내가 결혼 전 빌려 쓴 10만원의 돈 얘기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아마 바른 말 하기로는 오히려 나보다 더 우월한 집사람이 형수에게 ‘형님이 이 집안의 가장 어른이니까 가장 많이 내셔야지 어떻게 똑같이 분할해서 내자고 그러세요?’ 했더니 형수가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서 파르르 떨며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말아, 동서! 함부로 야박한 얘기하는 거 아니야.”
“뭐가 함부로 말하는 건데요?”
“내가 이 집 식구들 일이라면 이에서 신물이 나와. 동서는 아는지 모르겠는데 결혼 전 왕삼촌에게 10만원을 빌려주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알아?”
“아니, 무슨 말이에요. 왕삼촌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직장에서 물러 나왔고 그래서 내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는 바람에 내가 곧 갚았잖아요?”
“그 때 내가 왕삼촌에게 준 돈이 무슨 돈이었는지 동서는 모르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우리 민혁이 고등학교 등록금이었어. 고등학교 등록금을 빌려주고 제 때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밤마다 가슴을 졸였다구.”
“그건 알겠는데, 그런데 그 얘기와 지금 우리 얘기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더러 동서가 야박하다고 그랬잖아?”
“야박한 건 사실이잖아요?”
“뭐가 야박해?”
“그 때는 식구끼리 사이인데 이자를 오 프로나 받았고 지금도 형제간에 사는 차이가 있고 책임도 다 다른데 똑같이 내자고 하니 말이에요?”
“싫으면 그만 둬. 나도 싫은 걸 억지로 떠맡았으니까.”
“뭘 떠맡아요?”
“남자들이 해결할 일을 왜 타성바지 우리가 이렇게 얼굴 붉혀가며 해결해야 해?”
“그럼 그렇게 하세요. 없었던 일로….”
동서들 간의 모임은 허사로 끝났다. 그러나 아버지 산소의 석물을 새로 하는 문제는 여자들끼리의 말다툼으로 쉽게 결말지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은 남자들이 나섰고 내가 구중이에게 돌아갈 몫의 일부를 보조하고 가형이 전체 예산의 40프로를 책임지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나저나 내게는 그놈의 10만원이 골칫거리였다. 남의 돈을 빌려 온 것으로만 알고 이자까지 꼬박꼬박 갚았는데 그 돈이 민혁이의 고등학교 등록금이었다는 사실을 덜컥 알아버린 것이었다. 세상엔 몰라도 좋을 일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어쩌다 돈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얘기만 나오면 형수의 그 때 행실이 슬그머니 뇌리에 살아올라 나를 씁쓸하게 만들곤 했을 뿐 아니라 집사람은 나를 비난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때의 일을 꺼내 끝내 골탕을 먹였다.
또 한번은 신혼 초기에 일어났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실직자가 된 나는 친구 조일문이 내어준 연립주택 안방에서 온종일 구들장 신세를 지며 책을 읽거나 글을 썼고 집사람은 남편인 나를 대신해서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지은 다음 나를 먹여놓고 아예 점심상까지 차려 두고 출근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지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 오후가 되자 명일동 연립주택에 대대적인 손님이 들이닥쳤다. 친구 조일문의 생일에 초대된 체육관 사람들과 한국 프로복싱계의 인물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집사람을 데리고 외출을 감행했고 그리고는 할 일 없이 천호동 시장을 배회하다가 풍납동 가형의 집으로 갔다. 마침 가형은 집에 있었다. 가형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웬만큼 취기가 퍼질 무렵 가형이 내게 말했다.
“사는 집이 연립주택이라고 했냐?”
“예.”
“연료는 뭘 쓰냐?”
“연탄이지요, 뭐.”
“연립주택 이층인데 연탄을 어디다 쟁여 놓는 거냐?”
“연탄광은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 밑 창고에 별도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매일 매일 그 날 쓸 분량을 이층으로 옮겨놓는 거지요.”
“한 달에 연탄이 얼마나 드는데…?”
“취사와 난방을 연탄으로만 하다보니 매일 열두 장씩 들어갑니다.”
“매일 열두 장이면 한 달이면 삼백 육십 장이잖아?”
“그렇지요.”
“너는 얼마나 연탄을 부담하는데?”
“백 장이요.”
“연탄으로 사다가 쌓아 놓곤 쓰는 거냐?”
“그건 집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저는 잘 몰라요.”
“연탄 한 장에 얼마나 하는지는 알고 있어?”
“한 장에 육십 원 아닙니까? 배달료까지 포함해서….”
“그런 한 달에 육천 원을 부담한다는 얘기네?”
“그렇군요.”
“내가 형수에게 연탄 이백 장 값과 쌀 한 가마니 값을 내어주라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쌀 한 가마에 2만9천 원이니까 1만2천 원을 더하면 4만 1천원이로군.”
“….”
나는 너무 감격해서 눈물마저 핑 돌았다. 게다가 가형은 그 날 나더러 명일동으로 돌아가지 말고 함께 자자고 내게 말했다. 나와 집사람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 밤 열시 경 건넌방으로 옮겨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집사람을 꼭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 이 달치 연탄 값 냈어?”
“아니요. 헌데 왜요?”
“우리가 얼마를 냈지?”
“6천 원이요.”
“그래. 알았어. 당신, 이 달치 연탄 값과 쌀값은 내가 부담할 테니까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마라. 알았어?”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글쎄, 그렇게만 알고 있어.”
“…?”
집사람이 무슨 일인가 몰라 눈을 반짝반짝 빛냈지만 나는 곧 가볍게 코를 골며 잠의 바다로 침몰했다. 다음 날, 집사람은 풍납동에서 곧장 광화문 직장으로 출근하고 이내 가형도 집을 나갔다. 나는 건넌방 이부자리 속에 뒹굴며 이제나저제나 형수가 부르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오전 10시가 넘고 11시가 넘어 정오가 되도록 형수는 집안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가형의 지시를 받고 돈을 빌리러 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후 두 시가 넘도록 끈질기게 버텼다. 이윽고 형수가 돌아왔다. 내가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며 마루로 나갔고 형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왕삼촌. 아직도 집에 계셨어요?”
“예…?”
“저는 왕삼촌이 집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앞집에서 수다만 떨었네요.”
“그랬습니까?”
“시장하실 텐데 점심상 차릴까요?”
“아니요. 배 안 고파요.”
“그럼 그냥 가시겠어요?”
“예.”
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씻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러나 선뜻 대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마치 똥마려운 개가 마당을 서성거리듯 줄곧 형수의 눈치만 살폈다. 허나 아무래도 형수는 전혀 돈을 내어 줄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 뒤늦게 방을 청소하고 마루에 걸레질을 하면서 아예 나를 무시하다가 아직도 안 가고 무엇을 하냐는 투로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예…?”
“아직 안 가시고 뭐하세요?”
“저, 형이 무슨 얘기 없었습니까?”
마지못해 나는 용기를 내어 형수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요?”
형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다 틀렸구나. 나는 낙심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사람에게 얘기나 하지 말 것을 하는 후회가 목덜미를 쳤다. 그랬다. 형수는 그런 여자였다. 냉장고에 선물로 들어온 각종 과일과 음식이 몽땅 썩어나가도 시집 식구들과 나누어 먹느니 차라리 돼지에게나 줄 그런 위인이었다. 헌데 형수는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대체 무엇인가. 며느리들의 허물이 있으면 남이 알세라 잘 다독거려 덮어주고 간혹 섭섭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혼자만 알고 적어도 이쪽저쪽 옮기지는 말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슬기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가출과 외도 그리고 형제간의 자잘한 이간질로 우리는 모두 상당한 충격과 아픔을 겪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일곱 남매를 낳아 기른 어머니의 은공을 누구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먹고 싶은 것, 없어요?”
내가 물었는데도 아무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정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받았다.
“뭐이든 간단히 먹자마. 초상집에 가면 또 뭘 먹어야하지 않갔네?”
“알았어요. 제가 아는 집이 있는데 버섯찌개를 아주 잘합니다. 거기서 간단히 요기나 하고 가지요.”
대성리를 지나 청평 쪽으로 전진했다. 청평을 지나면 가평 조금 못 미처 버섯찌개를 아주 맛있게 끓이는 음식점이 있었다. 나는 버섯찌개 전문점 앞마당에 프라이드를 주차시키고 앞장서서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벌써 오후 1시30분이었다. 그런데도 음식점은 몰려온 손님으로 버글버글했다. 버섯찌개 4인분에 공깃밥 다섯 개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도 모두 침묵만 삼켰다. 맛있는 점심을 아주 맛없게 먹고 다시 춘천으로 출발했다. 춘천은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마침내 춘천시내로 진입해 들어갔다.
오늘의 목적지인 춘천의료원은 팔호광장을 지나 효자동 쪽으로 가면 왼쪽 언덕으로 불쑥 나타났다. 큰 고모부의 상청은 지하 1층 7호실이었다. 아들이 없어서 그랬는가, 사위들이 고종사촌동생들과 함께 위패를 지키며 문상객을 맞고 있었고 둘째와 셋째 고모는 2층의 식당에서 문상객들에게 식사시중을 들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큰 고모부의 새 여자와 그 여자의 전남편 자식들은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큰 고모부의 사위 셋이 자기네가 알아서 초상을 치를 테니 3일 동안만 참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고 했다.
큰 고모부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천주교에 귀의한 것 같았다. 향을 사르고 절을 하는 대신 미리 준비된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고 묵례를 올린 뒤 사위로 구성된 상주들과 맞절을 했다. 큰사위는 나의 C고교 1년 후배고 작은 사위는 C고교 1년 선배였다. 따라서 나는 나름대로 가법에는 매우 어긋나지만 작은 매제에겐 말을 높인 반면 큰 매제에겐 말을 낮추었다. 나의 이러한 말투를 생전의 큰 고모가 질색하며 고쳐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건성으로 대답만 했을 뿐 실제로 고치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매제가 된 인연보다 학교 선후배의 인연이 더 빠르니 조금이라도 빠른 인연을 따르겠다는 내 주장과 논리는 일견 합당하기도 했다. 문상을 끝내고 2층 식당으로 올라가자 두 분 고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고 있었다. 춘천의료원에서 서울로 출발한 것은 부산에 살고 있는 막내고모가 도착하고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도 네 여자는 줄곧 입을 닫고 있었다. 강촌을 지나 상천으로 빠지기 직전 ‘메기의 추억’이라고 하는 토속민속주점에 들러 대추차와 생강차를 나누어 마시고 대성리의 구암 동산을 지나 양수리 쪽으로 좌회전했다.
왼쪽으로 팔당호의 파란 물을 바라보며 얼마를 달리자 오른쪽 언덕 위에 찻집 ‘노을과 눈물’이 나타났다. 나는 그곳에서 일방적으로 차를 세우고 ‘노을과 눈물’로 올라갔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여자들이 줄줄이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면목동에서 계수를 내려주고 성내동에서 형수와 헤어진 뒤 어머니를 성남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시간은 벌써 밤 열시를 훨씬 넘고 있었다.
제 15 장
내가 심었던 아름드리 미루나무 아래서 사위를 둘러보며 30분쯤 머물다가 구래초등학교 운동장을 빠져나와 다시 단양촌으로 방향을 꺾었다. 내가 상동에 살던 1956년 공식적으로 문을 연 상동문화회관은 아직도 폐허가 된 채 단양촌교 건너 상동광업소와 우측의 산동네인 단양촌이 서로 갈라지는 삼거리 저편 구석에 옛 모습 그대로 쓸쓸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객석에 관객을 앉혀놓고 영화 필름을 돌린 지는 상당히 오래 전 일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문화회관의 문짝이란 문짝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극장 앞 광장엔 건축 폐기물이나 쓰레기더미 사이로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동차 몇 대만 하얀 눈에 덮인 채 폐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나의 핸드폰이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뚜껑을 제친 뒤, 귀로 가져갔다.
“네, 유행웁니다.”
“당신이우?”
집사람의 전화였다. 집사람이 내게 말했다.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그건 왜 물어?”
“그냥이요.”
“내게 할 말이 있어?”
“저, 사실은 오늘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애들이 남해대교를 둘러보고 여수 돌산과 동백섬에도 들렸다가 모레쯤이나 올라가자고 그러지 뭐예요?”
“그래? 당신 생각은…, 어떤데?”
“저 혼자 따로 떨어져 나오기도 그렇고,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괜히 혼자 튀지 말고….”
“그럼 모레 올라가도 당신, 괜찮겠어요?”
“내가 어린앤가. 내 걱정은 말고 당신이나 감기 안 걸리게 몸조심해.”
“알았어요. 고마워요, 여보.”
“알았으면 그만 전화 끊어.”
“헌데 당신 지금 있는 곳이 어디예요?”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서울이지요?”
“그래.”
“오늘 집으로 들어가실 거지요?”
“알았어. 가급적 빨리 들어갈게.”
“여보, 안녕!”
집사람이 먼저 핸드폰을 끊었다. 나는 핸드폰을 든 채 차창 밖을 주시했다. 문화회관의 다 깨어진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꼴두바우‧高頭巖’가 곧장 건너다보였다. 한마디로 ‘꼴두바우’는 상동의 심벌이었다. 턱골에서 발원한 뒤 텅스텐을 제련한 싯누런 폐수와 만나 잿빛으로 변한 채 흘러오는 턱골천과 만항재에서 발원, 세송細松과 단양촌을 통과한 세송천이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꼭지 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꼴두바우는 높이가 무려 150m에 달하는 깎아지른 바위절벽으로 일명 ‘고두암’이라고도 했다.
단 한 개의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진 고두암 바로 밑에는 상동의 산신을 제사지내는 칠성각이 세워져 있었으며 ‘교가校歌’는 물론 ‘상동광업소가’, ‘교회가敎會歌’에까지 두루 그 이름의 쓰임새가 다양했다. 이다운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집으로 빨리 들어가라고 했지요?”
“그랬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어떻게 해?”
“서울은 여기서 너무 멀지 않아요?”
“걱정할 것 없어. 집사람은 지금 울진 영덕에 있고 남해대교와 여수를 거쳐 모레 저녁에나 서울로 올라오겠대.”
“그랬어요?”
“그건 그렇고 내 동창들이 아직 있는지 나는 전화나 한번 해야겠어.”
나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잠시 이다운에게 인계하고 잠바 속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왜냐하면 수첩에 구래초등학교 동기동창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구래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 전학을 갔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회원자격이 주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기동창들은 기꺼이 나를 구래초등학교 동창회 멤버에 끼워주었고 한 때는 이사급 간부로 봉사하도록 배려도 했다.
비록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내가 정신적으로 졸업한 학교는 겨우 3개월을 다니고 졸업장을 받았던 춘천의 교동초등학교가 아니라 입학 후부터 전학을 갈 때까지 무려 5년9개월을 함께 뛰어 놀며 공부한 상동의 구래초등학교였다. 본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새로 생긴 칠랑리 분교로 내려가서 4학년까지 3년을 다닌 후 5학년으로 진급할 때 다시 본교로 올라가서 2년여 동안 본교생을 나는 학교에 다녔다. 그 때 본교에서 같이 생활한 김기복金基福과 천성억千晟億이 모두들 떠나버린 상동의 굽은 소나무가 되어 쓸쓸히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건 지난여름 구래초등학교 총 동문 하계체육대회가 끝난 다음의 일이었다.
전국에 흩어진 상동의 초․중․고 동창들이 모두 초청되는 총동문회 형식의 이 하계체육대회는 서울 잠실의 고수부지에서 개최되었고 나 또한 실로 3년 만에 참석,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때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에 따르면 김기복은 단양촌 연립주택에 거주하며 주변의 공터에 토종닭과 꿩, 개, 칠면조, 토끼 따위를 키운 뒤 상동과 태백을 연결하는 31번국도 연장 개설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치랭이골의 여러 음식점에 납품하면서 살아간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유망한 축구선수로 뽑혀 서울의 경신고등학교로 진학했던 천성억은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바람에 중도에 선수생활을 포기하고 도로 상동으로 내려와 상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결혼과 이혼, 재혼을 거듭하며 고무라골 입구 어디인가에다 자동차정비업소를 열었다고 했었다. 수첩을 열자 맨 첫째 장에 김기복의 이름과 주소가 보였다. 김기복 : ☏ 033-378-2031, H․P 011-9886-2031. 이름과 전화번호를 바싹 붙여 쓴 건 수첩의 종이가 협소했기 때문이었다. 이다운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김기복의 핸드폰 번호를 꼭 꼭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핸드폰은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이번엔 수첩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천성억 : ☏ 033-378-1600, H․P 011-387 -1601. 나는 다시 한번 천성억의 핸드폰 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고 이윽고 상대편의 목소리가 핸드폰 저쪽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틀림없는 천성억의 목소리였다. 한국전쟁을 겪는 바람에 취학이 늦어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나이가 많아서 초등학생이 되었던 천성억…. 나이를 먹은 만큼 남보다 월등히 키가 커서 언제나 교실 제일 뒤쪽에 앉아있던 천성억은 축구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결국은 서울의 유명한 축구 학교로 스카우트되는 영예까지 안았다. 그러나 사실 운동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교실 뒷자리에 앉을 정도로 키가 컸던 천성억은 그놈의 키 때문에 선수생활을 포기한 채 쓸쓸히 귀향열차를 탔고 지금은 팔자에도 없는 자동차 정비업소 사장이 되어 옷이며 손에 기름을 묻혀야 하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억이냐?”
내가 물었다.
“누구야?”
천성억이 대뜸 반말로 나왔다.
“나, 행우야. 유행우….”
“뭐야, 행우…? 아니 네가 갑자기 웬 일이냐?”
“나 지금 상동에 들어와서 꼴두바우가 보이는 상동문화회관 앞에 있다. 넌 지금 어디 있냐?”
“그래? 상동엔 무슨 일로…?”
“그냥, 왔어. 한번 둘러보려고….”
“그랬구나. 어쨌든 우리 만나자. 나 지금 가게에 있어.”
“가게라면 정비업소…?”
“그래. 상동 카센터. 온종일 기다려도 나타나지도 않는 손님 기다리느라 죽으나 사나 가게에 붙어있지 뭐.”
“거기가 그럼 고무라골 근처 어디냐?”
“바로 고무라골 입구야.”
“그래? 아까 영월서 들어올 때 고무라골 입구의 폐 재를 봤는데 카센터는 보이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있어. 카센터 옆으로 예전의 고무라골 시내가 흐르지. 어쨌든 오면 컨테이너 건물이 하나 보잉 거야. 그리고 그 뒤 언덕으로 슬래브 건물이 한 채 보일 거야. 그게 우리 집이야. 나 지금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다.”
“알았어. 내 잠시 더 둘러보고 그곳으로 갈게.”
“어디를 더 둘러볼 건데…?”
“둘러 볼 곳이 여기저기 제법 많아. 헌데 김기복은 요즘 상동에 없냐?”
“기복이가 왜 없어?”
“핸드폰이 영 안 터지던데…?”
“기복이 그 자식, 아마 지금쯤 산에 올라가 있을 거야.”
“산에…?”
“기복이, 요즘 등산 가이드 노릇 하고 있잖아. 서울서 태백산 등반 팀이 오늘 새벽같이 내려온다고 어제 저녁 나에게 전화를 했었어.”
“그랬구나. 알았어. 그럼 끊는다.”
나는 핸드폰을 접었다. 이다운이 어디로 갈 건지 묻는 눈길로 시동을 걸며 나를 돌아다보았다. 내가 말했다.
“저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지.”
“그러면 어딘가요?”
“상동광업소 공장과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곳을 통과하면 곳곳에 사택 촌이 있고 그곳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턱골이라는 마을이야. 내가 어려서 상동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이삿짐을 풀었던 곳이지. 거기 ‘백운료’라는 독신자 사택이 있어.”
“알았어요.”
이다운은 겨우 트럭 한 대가 지나다닐 만한 단양촌교를 건너갔다. 그리고는 경비원도 없는 경비초소를 통과해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선 공장지대를 관통한 다음 오른쪽으로 상동의 화이트컬러들이 일하던 사무실의 건물 몇 채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갔다. 상동에 들어온 이후 도대체 사람 구경하기가 힘이 들었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사람이 살아가는 흔적은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코란도보다 먼저 하얀 눈길에 선명한 발자국을 점찍으며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코란도는 상동의 화이트컬러들이 사용하던 간부식당과 미니 골프장을 지나자마자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캐터필러가 무너진 불도저 한 대가 벌겋게 녹이 슨 채 눈에 파묻혀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생겼어요.”
이다운이 먼저 말했다.
“나도 알아. 아무래도 이쯤에서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겠군.”
“저 위의 골짜기에 뭐가 있어요?”
“턱골!”
“그 턱골에 꼭 가야만 할 이유라도…?”
“가야할 이유는 없어. 그저 내가 살았던 곳이고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여섯 살의 유년이 남아있는 곳이니까 이번 기회에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야.”
“여기서 몇 년을 살았다고 했지요?”
“칠 년.”
“제법 긴 세월이네요.”
“내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기야.”
“그런데 못 봐서 어떻게 해요?”
“나중에 걸어서라도 올라갈 수 있으면 올라가야지. 자, 차 돌립시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체념은 빠를수록 좋았다. 게다가 일단 천성억과 통화가 끝난 뒤였으므로 녀석부터 먼저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해외건설협회에 근무할 때 나는 그다지 세호건설과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우선 내가 하는 일이 잡지나 만들고 글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세호건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도 그럴 만한 업무가 연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세호건설을 대표해서 해외건설협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해외공사 파트의 직원이나 그 파트를 총괄하는 임원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세호건설 직원들과 잘 지내려고 나도 모르게 노력했고 내가 관장하는 업무 중 세호건설과 관계되는 것은 가능한 한 세호건설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놓는데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자조하며 ‘똥물’이라고 일컫던 ‘밀물’을 제작하는 한편 ‘해외건설취업자 자녀 그림 현상공모’, ‘해외건설취업자 가족 서간문 현상공모’, ‘해외건설취업자 가족 백일장’ 따위의 부대행사를 관장했는데 해마다 한 차례씩 있는 이 행사에 가능하면 세호건설 소속 가족들이 많이 입상하도록 애를 쓰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떨어질 사람을 입상시키는 등의 비겁한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다만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고, 세호건설 가족과 다른 건설회사 가족이 경합할 경우 세호건설 가족이 입상하도록 신경을 조금 기울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일련의 행위에 대해 세호건설의 어느 누구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런 나와 세호건설과의 인연은 묘하게도 세 번째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9개월 근무하고 다시 대한전문건설협회로 옮겨 3년1개월을 근무한 다음 일괄사표를 쓰고 물러 나온 나는 꼬박 3년 가까이 전업작가로만 세상을 살아갔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세호건설과 만나는 인연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입사한 곳이 세호건설은 아니지만 세호건설을 방계 회사로 거느린 세호그룹 비서실의 홍보분야 총 책임자로 출근을 시작했다. 내가 1974년 세호건설 정수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간이식당의 밥을 먹으며 근무할 때의 본사는 명동성당 밑에 있던 중앙극장 바로 뒤편의 동양빌딩이었다. 그 후 퇴계로 7가에 그룹사옥을 짓고 그곳으로 잠시 옮겼다가 1991년 9월, 지금의 서울 역 건너편 후암동 언덕 오른쪽에 위치한 세호빌딩으로 또 한번 그룹사옥을 이전했다. 나는 서울 역 세호빌딩 22층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와 세호그룹과의 인연을 재정립시켜준 사람은 내가 해외건설협회에서 ‘밀물’을 만들 때 고정필자로 7년 가까이 좋은 글을 제공했던 조영봉曺榮奉이란 경상도 사람이었다. 해외건설협회를 퇴사한 다음에도 피차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던 우리는 적어도 1년에 몇 차례씩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이곤 했는데 그 조영봉 씨가 세호그룹 비서실장의 부탁을 받고 나를 천거했던 것이었다. 조영봉 씨는 해외건설협회장을 역임한 전 재무부장관 박동주 씨와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고 그런 박동주 씨와 세호그룹 창업주인 김성만 명예회장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했다.
일제시대 때 경남 마산 인근의 4년제 무릉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인 두 사람은 박동주 씨가 해외건설협회를 물러난 뒤 김성만 씨가 설립한 세호장학문화재단의 재단이사장으로 3년 동안 재임하는 등 지난 1985년 예상치도 않았던 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기찬 교우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조영봉 씨가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 1992년 1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조영봉 씨는 내게 다시 한번 직장생활을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일주일만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새 내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문학에 뜻을 두고 감히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를 갈망했으나 그렇게 아름다운 글은 아예 써보지도 못한 채 마흔 고개를 훌쩍 넘어 오십 고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기업이란 곳이 대부분 이익의 창출에만 눈이 벌겋게 뒤집혀 있을 뿐 ‘홍보’니 ‘출판’이니 하는 소프트웨어 분야는 오로지 자신들이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무작정 낭비하는 부서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기업풍토에서 나와 같은 사람은 아예 때려죽여도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홍보니 출판이니 하는 업무를 맡는 사람들은 대개 비타협적이거나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지향하는 지독한 반골反骨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울러 성격적으로 무조건 적과 동지만 존재할 뿐 그저 그렇고 그런 회색분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결코 보이지가 않았다. 그곳이 사지死地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내 마음이 명령하면 끝내 찾아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더구나 사사건건 옳고 그름에 대한 시비나 붙고 잘잘못을 따지는 직원을 어느 경영자가 쌍수로 환영하고 박수 치며 좋아하겠는가.
어쨌든 나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3년 동안 전업 작가생활을 수행해온 나로서 다시 직장에 출근을 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렵고 힘들었지만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쓰면서 나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었다. 다만 나의 가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집사람은 늘 월급쟁이인 남편의 수입에 맞추어 계획적인 살림을 살아온 사람이었고 두 아이들도 그런 건 마찬가지였다. 월간 소년잡지를 구입하고 학교에서 가입한 적금의 부금 마감일도 모두 한 달 주기로 형성돼 있는 세상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고뇌와 갈등 끝에 결국 나는 나 자신을 포기한 채 세호그룹 비서실에 출근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행복과 가족의 불행 중 나의 행복을 희생시키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어차피 나는 어디에 있건 결코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숙명과 운명으로 태어난 주제에 새삼스레 ‘나의 행복’이 어떻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조영봉 씨에게 내 의견을 전화로 통보했고 이틀 후 조영봉 씨로부터 세호그룹 사옥 22층에 있는 세호그룹 비서실장 집무실에서 김영국 비서실장을 만나 면담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1992년 1월9일, 나는 오후 두 시경 세호빌딩 22층으로 김영국 비서실장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했다. 그 날은 목요일이었고 4호선 지하철 서울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모래알 같은 싸락눈이 함부로 흩날렸다. 김영국 비서실장은 황해도 사람이었다. 이북 사투리를 간간이 구사하는 비서실장의 말투가 너무 귀에 익고 반가워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는 황해도 연백이라고 선선히 자신의 고향을 밝혔다. 내가 말했다.
“어쩐지…. 저는 평안북도 벽동입니다.”
“그래요? 그럼 거기서 태어났단 이 말이오?”
“세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너무 어려서 넘어왔기 때문에 고향에 대해 잘 모르겠군?”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에게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아득한 옛날 흑백영화를 본 것처럼 기억에 훤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헌데 당신, 작가라고 했소?”
“자랑할 만한 글은 아직 쓰지 못했습니다.”
“조 박사 말에 따르면 홍보나 출판, 언론관리 등에 경험이 상당히 풍부하다고 들었는데, 할 수 있겠소?”
“지금까지의 직장생활이 거의 그런 업무만 담당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직장을 많이 옮겼소?”
“해외건설협회, 출판문화협회, 대한전문건설협회… 이 정도였습니다.”
“사기업에서는…?”
“아직…,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이 의외로 많겠군. 사기업이란 본래 피도 눈물도 없는 아주 냉정한 곳이라 말이오. 그래, 해낼 수 있겠소?”
“이것만은 미리 약속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먼저 배반을 하고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의 본뜻은…?”
“이곳에서 정년을 맞고 싶다는 뜻입니다.”
“오, 그래요?”
김영국 비서실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날의 면담은 그 정도로 끝이었다. 비서실장 집무실을 나오자 인사 및 홍보 담당 이사 한 사람이 또 한번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신상명세서와 이력서를 제출 받았고 ‘아마, 곧 출근을 하게 될 겁니다.’하는 인사를 듣고 나서야 세호빌딩을 나올 수 있었다. 그랬는데 곧 하게 되리라고 했던 출근은 1월이 다 가고 2월 중순이 넘도록 오리무중에 빠지고 세호그룹 비서실에선 전화 한 통 집으로 걸려오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내가 먼저 조영봉 씨에게 연락을 취했고 다음 날 조그마한 문제가 생겼다는 통보가 날아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