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979년 2월 5일
광주 YMCA 강당서 김지하.송기숙.문익환.양성우씨 구속문인의 밤 개최
1979년 3월 1일
윤보선.함석현.김대중씨 등 재야인사 민주주의 민족통일 위한 국민연합 결성
1979년 6월 1일
김대중씨 자택서 외부연락 일체 차단된 채 연금상태 계속
1979년 6월 15일
광주교도소 수감중인 성래운 교수, 고영근 목사 등 48명 단식 투쟁
1979년 8월 11일
경찰, 신민당서 농성중인 170여 YH무역 여공 강재해산, 여성노동자 김경숙 사망
1979년 8월 20일
천주교정평.김수환 추기경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며 서울시경까지 시위행진
1979년 9월 4일
대구 경북대.영남대생들, 유신철폐 요구 선언문 낭독 후 학생다수 구속
1979년 9월 20일
서울대생 1,000여 명, 학원민주화선언 낭독한 뒤 기동경찰과 투석진
1979년 9월 26일
고려대, 이화여대, 연대생 등 수천 명 유신철폐 외치며 데모
1979년 10월 4일
국회, 신민당의원 따돌리고 본외의장 아닌 146호실서 민주공화당의원(159명)들만으로 김영삼총재 징계 전격처리,
30년 의정 사상 최초의 의원제명 사건 발생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 시작, 부산대생 5,000여 명 유신철폐.독재타도 외치며 시내 진출
1979년 10월 18일
부산대.동아대생.시민과 합세 대대적 시위, 정부 부산에 비상계엄령 선포. 마산에서 경남대.마산대 등 계엄령 반대 외치며, 데모, 공화당사 파괴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선포
1979년 12월 12일
12.12쿠데타,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강제 연행 총격전
1980년
1980년 3월 29일
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백61명 학원사태관련 성명 발표
1980년 4월 3일
서울대생 제반 학내 자율활동허용 요구하며 농성 돌입
1980년 4월 21일
사북사태. 강원도 사북광업소 광부 7백 여명 경찰과 충돌
1980년 4월 24일
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백61명 학원사태관련 성명 발표
1980년 5월 4일
국민연합 성명발표. 학원민주화와 계엄령 해제 요구
1980년 5월 14일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두시위를 결의
1980년 5월 15일
서울시내 30개 대학 7만 여명 밤늦게까지 도심서 시위
1980년 5월 17일
전국 55개 학생대표 95명,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중 연행
1980년 5월 18일 09:40 일요일, 맑음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평화로운 민족민주화성회에서 광주학생과 시민들은 비상계엄이 확대되면 도청 앞 분수대에서
모이자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기억한 전남대 학생들이 도서관으로 향하다 광주에 진주한 7공수부대와 접전
1980년 5월 18일 10:00 일요일, 맑음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1980년 5월 18일 10:15 일요일, 맑음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980년 5월 18일 10:20 일요일, 맑음
"금남로로 가자" 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980년 5월 18일 15:40 일요일, 맑음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작전 감행
1980년 5월 18일 19:02 일요일, 맑음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1980년 5월 19일 03:00 월요일, 오후부터 비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전날(18일)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씨 사망(최초 희생자)
1980년 5월 19일 09:30 월요일, 오후부터 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980년 5월 19일 10:00 월요일, 오후부터 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980년 5월 19일 14:40 월요일, 오후부터 비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1980년 5월 19일 15:00 월요일, 오후부터 비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1980년 5월 19일 16:30 월요일, 오후부터 비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군중에 의해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
첫 발포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 의해 부상당하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투쟁에 나섬
1980년 5월 19일 20:00 월요일, 오후부터 비
수 만 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1980년 5월 20일 08:00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고등학교 휴교조치
1980년 5월 20일 10:20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간의 공방전 계속
1980년 5월 20일 18:40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광주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겪은 운전기사들에 의해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1980년 5월 20일 20:10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시민들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1980년 5월 20일 21:05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1980년 5월 20일 21:50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계엄 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이 과잉진압 행위를 제대로 보도하지않자 시민들 거센 항의를 하며 광주MBC 건물 방화
1980년 5월 20일 23:00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광주역 광장에서 무자비한 유혈진압에 항의하던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사망자 다수 발생
1980년 5월 21일 00:35 수요일, 맑음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1980년 5월 21일 02:18 수요일, 맑음
시외전화 두절
1980년 5월 21일 04:00 수요일, 맑음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발견된 사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 명이 항쟁에 적극 동참함
1980년 5월 21일 04:30 수요일, 맑음
광주KBS 건물 방화
1980년 5월 21일 08:00 수요일, 맑음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1980년 5월 21일 10:15 수요일, 맑음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1980년 5월 21일 10:19 수요일, 맑음
광주세무서 건물 전소
1980년 5월 21일 11:10 수요일, 맑음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1980년 5월 21일 12:59 수요일, 맑음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980년 5월 21일 13:00 수요일, 맑음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1980년 5월 21일 13:20 수요일, 맑음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1980년 5월 21일 14:35 수요일, 맑음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1980년 5월 21일 14:40 수요일, 맑음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980년 5월 21일 15:40 수요일, 맑음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1980년 5월 21일 16:00 수요일, 맑음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전개
1980년 5월 21일 16:43 수요일, 맑음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1980년 5월 21일 17:30 수요일, 맑음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1980년 5월 22일 09:00 목요일, 맑음
도청광장에서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980년 5월 22일 10:30 목요일, 맑음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1980년 5월 22일 11:25 목요일, 맑음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980년 5월 22일 12:00 목요일, 맑음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계양
1980년 5월 22일 13:30 목요일, 맑음
시민수습위 대표 8명과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1980년 5월 22일 15:08 목요일, 맑음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 광주 도착, 환영식 거행
1980년 5월 22일 15:58 목요일, 맑음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980년 5월 22일 17:18 목요일, 맑음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1980년 5월 22일 17:40 목요일, 맑음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1980년 5월 22일 21:30 목요일, 맑음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1980년 5월 23일 08:00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학생들, 시민들 금남로 일대 등 자발적 청소에 나섬
1980년 5월 23일 10:15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980년 5월 23일 11:45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980년 5월 23일 13:00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지원동 주남마을 앞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승객 18명중 17명 사망, 단 1명만 생존.
이때 부상을 당한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살해함.
이곳에 묻혀있던 시신은 5.18직후 주민의 신고로 발굴됨
1980년 5월 23일 15:00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와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
1980년 5월 24일 13:20 토요일, 오후에 비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방광범군은 좌측머리에 총탄 관통되어 사망함.
1980년 5월 24일 14:20 토요일, 오후에 비
송암동서 퇴각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해있던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이후 오인사격 화풀이로 인근 무고한 주민들을 다수 살상함
1980년 5월 24일 14:50 토요일, 오후에 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980년 5월 25일 11:00 일요일, 비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1980년 5월 25일 15:00 일요일, 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980년 5월 25일 17:00 일요일, 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1980년 5월 25일 21:10 일요일, 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1980년 5월 26일 05:2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1980년 5월 26일 08:0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압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1980년 5월 26일 10:0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980년 5월 26일 14:0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980년 5월 26일 15:0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980년 5월 26일 17:0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윤상원,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1980년 5월 26일 19:1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킴
1980년 5월 26일 24:00 월요일, 아침 한때 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1980년 5월 27일 03:00 화요일, 맑음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1980년 5월 27일 04:00 화요일, 맑음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1980년 5월 27일 04:10 화요일, 맑음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1980년 5월 27일 05:10 화요일, 맑음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1980년 5월 27일 06:00 화요일, 맑음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1980년 5월 27일 07:00 화요일, 맑음
3공수, 7공수, 11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1980년 5월 27일 08:00 화요일, 맑음
시내전화 통화 재개
1981년
1981년 1월 28일
전두환대통령 레이건 미대통령 초청으로 방미
1981년 2월 25일
전두환 민정당후보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
1982년
1982년 3월 18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발생, 문부식 등 반미유인물 살포하고 방화
1982년 4월 8일
최기식 신부 등 5명,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김현장씨 은닉혐의로 구속
1982년 4월 16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상임위원회(의장 김수환 추기경)
'최 신부의 행위는 사제로서 최선의 길'이었다는 담화문 발표
1982년 8월 10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관련, 문부식, 김현장에 사형 선고
1982년 10월 12일
5.18 당시 전남대학생회장 박관현 광주교도소에서 투옥 중 사망
1982년 10월 23일
김대중씨 형집행정지로 석방, 미국길에 오름
첫댓글 님을 행진곡의 제창은 안된다는 결정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음이 넘넘 답답합니다.
동서의 분열!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벽은 그저 벽으로만 남는가 봅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
그런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역사는 되풀이되고............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있는 광주항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시네요.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깨어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