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긴장한 기색은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정지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스태프들 덕에 어색한 분위기도 곧 누그러졌다.
정지영은 꼬박 7년 만에 하는 인터뷰라고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그 수려한 말솜씨가 어디 갈까.
목소리만큼이나 편안하게 분위기를 주도한 건 오히려 그녀였다.
한껏 치장을 하고 나선 카메라 앞에서도 제법 능숙하게 포즈를 잡아 감탄을 자아낸 그녀.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꼈지만, 이런 건 경험이나 연습보다는 타고난 기질에 가까운 것이다.
“끼요? 그런 것 전혀 없어요!(웃음) 재미는 있지만 익숙하지는 않고,
아주 가끔씩만 하니까 색다른 경험을 하는 기분이죠. 사진이 어떻게 나올까 진짜 궁금해요.
이런 일은 안 하면 안 할수록 더 어색하고, 민망한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인가….(웃음)
오늘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촬영했는지 모르겠어요. 며칠 전부터 왠지 모르게 긴장되면서 설레었거든요.
최근에 방송에 복귀하면서부터 집에 있을 때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만, 이런 식의 촬영은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기대가 컸고, 걱정했던 것보다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저한테 좋은 긴장감을 준 것 같아요.”
그녀는 지난 6월 MBC 프로그램 <생방송 월화수목>의 진행자를 맡아 2년 만에 방송에 복귀했다.
간간이 행사 진행자로서 공개 석상에 나서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이 방송을 통해서다.
엄마로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누리다가 방송인으로서 살짝 불안감을 느낄 때쯤 좋은 기회를 만났다.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2년 가까이 평범한 여인네로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일이 그리워지더라고요.
여유롭고 편안한 것과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랄까. TV에서 동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요.
‘다시는 누가 날 찾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어느 날 퍼뜩 들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기대하지 않았던 방송 제안이 들어왔고,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요.
똑같이 일을 쉬더라도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은 차이가 정말 크더라고요.(웃음)
다시 한 번 제게 주어진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열심히 해보고 싶은 의지가 생겼어요.”
방송은 매일 오후 6시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다행히 함께 진행하는 이재용 아나운서와의 호흡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둘 다 편안한 진행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프로들이기 때문.
입사 직후부터 생방송에 투입된 터라 생방송에 대한 부담도 거의 없단다.
매일 생방송이 진행되다 보니 오히려 들쑥날쑥하던 생활 패턴이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돼가고 있어 오히려 ‘잘됐다’ 싶다.
1998년 SBS 아나운서로 입사해 ‘방송밥’을 먹은 지 벌써 15년.
프리랜서를 하지 않고 방송국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중견 아나운서가 됐을 나이다.
방송국에 가면 이제는 선배보다 후배가 훨씬 많다고 민망해하는 그녀다.
“후배 아나운서들이 진행하는 방송을 보면서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도 종종 했어요.
같은 방송, 같은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 혼자 속으로 연습해보기도 하고요.(웃음) 웃기죠?
나이가 들면서 일에 대한 욕심을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미련이 남아 있나 봐요.
그 욕심이라는 게 조금 성격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어요.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요. 그런데 요즘은 진짜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서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워낙 재능 있고 잘하는 후배들이 많아서 정말 많이 배우면서 일해요.
‘저 친구는 참 잘한다’ 싶은 후배도 몇몇 있는데…, 구체적으로 이름은 안 말할래요.
다들 각자 개성과 장점이 있는 친구들이에요.(웃음)”
다들 각자 개성과 장점이 있는 친구들이에요.(웃음)”
정지영처럼 자기에게 꼭 맞는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드문데, 거기에 경험을 얹고 욕심은 덜었다.
아마 최근 그녀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라면 단연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지난해 12월 결혼 8년 만에 아들 지오를 얻었다.
그 후로 아들 지오는 그녀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결혼 초에는 아이를 늦게 갖고 싶었어요. 남편하고도 얘기한 게,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우리 둘 다 하고 싶은 일도 맘껏 하고 여유롭게 갖자’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늦어졌고, 막상 가지려고 해보니 출산이 저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준비하는 시간도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남편하고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어요.
‘아이 없으면 어때, 우리끼리 여행 다니고 같이 운동하면서 재미있게 살면 되지’ 하고요.
(아이를 갖고 싶다는) 티를 안 낸 것일 수도 있고, 경험해보지 않은 삶이라 간단하게만 생각한 것도 없지 않고요.
그러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매일매일, 정말 진심을 다해 감사하면서 살았죠.
온 집안의 경사였어요. 제가 노산이다 보니까,(웃음) 어른들은 무조건 쉬라고 하시고.
아이가 지금 8개월쯤 됐는데, 임신부터 지금까지 정말 세상에 이런 기쁨이 있을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오랜 기다림이 말해주듯, 그녀의 표정과 말에서 환희에 찬 그 순간들이 언뜻언뜻 비친다.
‘무조건 건강하게만 태어나달라’는 엄마의 바람을 알았을까.
사진으로 본 지오는 또래 아기보다 훨씬 더 체격도 크고 건강해 보였다.
“진짜 크죠? 외모나 체격이 딱 아빠를 닮아서 몸집은 벌써 돌 지난 아이 같다니까요.(웃음)” 목소리에 신이 났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것처럼, 출산 전후로 인생의 가치관이 크게 바뀌었어요.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바다처럼 넓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매사에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요. 스스로도 품이 넉넉해졌고,
늘 겸손하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에요.
무조건 건강하고 바른 아이로 자라달라는 바람 말고는 없어요.
혹 아이를 키우면서 욕심이 생기면 어쩌나,
지금 같은 마음만 유지하면서 키워야지 하면서
나름 마음속으로 엄마 수업도 하고 있고요.(웃음)”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그녀의 남편 황현준씨는 점심시간을 쪼개 아들 지오를 보러 올 정도로 아이에게 푹 빠져 지낸다.
둘이 있을 때는 둘만의 오붓한 시간도 좋았지만, 지오가 생긴 뒤 느끼는 충만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란다.
“남편하고 맛집 다니고 요리 품평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여행은 무조건 ‘맛집 투어’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대화 주제가 바뀌었죠. ‘지오가 원래 우유를 150ml를 먹었는데, 오늘은 200ml를 먹었어.
기특하지?’ 뭐 이런 것들요.(웃음) 요즘 둘이서 ‘아들바보’ 노릇을 원 없이 하고 있어요.”
아이가 커가는 모습만 상상해도 마냥 흐뭇하다는 그녀.
손끝이 야문 그녀는 솜씨를 발휘해 아이 옷도 직접 뜨개질로 만들어주고, 맛있는 요리도 마음껏 해주고 싶단다.
실제로 요리에 소질이 있는 그녀는, 손님을 초대해 ‘풀코스’로 대접할 만큼 요리를 즐긴다고 한다.
또 아이가 아빠와 같이 손잡고 목욕탕에 가고,
축구하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어 지금은 신지도 못하는 운동화도 사놓았다.
똑같은 플랫 슈즈를 나눠 신을 수 있는 딸아이가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단다.
방송이 끝나면 아이를 보러 가는 것이 요즘 가장 큰 행복이다.
행복
지금처럼만 행복하고 싶다
누구보다 가장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20~30대를 보낸 그녀는 국내에서 ‘팬덤’을 형성한 거의 1세대 아나운서다.
특히 심야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정지영이라는 지금의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굳힐 수 있었다.
일 욕심으로 하루하루가 바쁜 시기이기도 했다.
나중에 출판사 측의 이중 번역으로 밝혀진 대리 번역 논란도 어찌 보면 유명세에 따른
일종의 대가 같은 것이었다(법원은 애초 번역본과 나중에 출판된 정지영의 번역본 자체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 대리 번역의 진위 여부를 가릴 필요조차 못 느낀다는 판결문을 발표한 바 있다).
대중의 관심과 시선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그녀에게는 힘든 성장통의 시기였을 터다.
오히려 그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고 감당하기 힘든 젊은 시절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의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
그녀의 강단이 더욱 빛나 보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30대의 절반을 훌쩍 넘어 그녀 스스로 ‘곧 마흔’이라며 웃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
호기로움과 열정보다는 삶의 지혜가 내면을 채우는 만개한 30대 중반의 삶.
“그때는 저 스스로를 들들 볶으면서 살았어요.
30대 초반까지는 단 한순간도 저를 가만히 두질 못했던 것 같아요.
잠깐 쉬는 시간에도 가만히 있는 것이 어색해 끊임없이 뭘 배우고, 학교에 다니고 했죠.
날 서게 살았어요. 실수하는 것도 용납하기 힘들었고,
사소한 실수라도 몇 날 며칠을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전전긍긍했던 것 같아요.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그런 실수 또한 자연스러운 거구나 하고 새삼 느껴요.
나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니까 저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피곤해하는 거죠.
저는 그래야만 남한테 피해를 안 주고, 민폐 안 끼치고 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조금은 빈틈 있는 모습이 저나 상대에게 훨씬 편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나중에야 안 거죠.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는 굉장히 너그러워지고,
저한테 여유를 선물해줬어요.
또 출산을 하면서는 그 여유가 훨씬 깊어지고 넓어진 것 같아요.
남들 다 갖는 아이 키우면서 절대 유난 떨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뒤늦게 얻은 선물(아이)에 매일 감사하면서 살죠.(웃음)”
그 와중에도 자기 관리의 습성은 남아 있어 방송 직후에 모니터를 해야 직성이 풀리고,
몸매 관리를 위해 몇 해 동안 저녁에는 야채만 먹는 습관을 고집하고 있다고.
‘아이를 낳고 붙은 살은 절대 빠지지 않더라’며 웃음 섞인 푸념도 늘어놓는다.
“예전에는 무조건 일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 우선순위가 저에서 아이로 바뀌는 단계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저를 아예 놓고 싶지는 않고요.
하루 종일 직장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하는 엄마보다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라 다행이에요.(웃음)
생방송이 없는 날은 온전히 아이와 함께 보내고 있고요.
지금보다 더 일상과 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때가 오면 그때는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더 나답게, 잘할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어요.
요즘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제가 직접 아이를 낳고 키워보면서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요.(웃음)”
그녀는 스스로도 요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아들 지오가 가져다준 생애 최고의 기쁨과 스스로 터득한 지혜가 더해진 결과다.
목소리만큼이나 산뜻하고 생기 넘치는 에너지가 그녀 주변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