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일 오후 서울 영등포동에 있는 한 직업소개소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여성들이 직업소개소 직원들과 상담을 하고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빵 먹으며 직업소개소에서 대기
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직업소개소가 붐비고 있다. 일거리는 줄고, 일자리 찾는 사람만 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12월 현재 서울에 있는 직업소개소는 1517곳이다. 이 가운데 노동부가 방문객이 가장 많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상위 10개 업소를 본지 취재팀이 직접 돌아본 결과, 하나같이 "불황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석 달 전에 비해 하루에 들어오는 일자리는 절반으로 줄고, 찾아오는 구직자 숫자만 두 배 넘게 늘었다"고 했다.
28일 오후 1시30분, 서울 등촌동의 한 직업소개소에서는 40~50대 여성 3명이 카스텔라 한 개를 늦은 점심으로 나눠 먹고 있었다. 정모(여·52)씨는 "월급 150만원 받는 입주 가사 도우미 자리를 구하러 왔는데, 좀처럼 자리가 안 난다"며 "급하게 사람 찾는 곳이 날까 해서 점심도 빵으로 때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명품 들고 가사 도우미 구직
직업소개소에 들어오는 일자리는 파출부·경비원·식당 서빙 등 하루~일주일 단위로 임금이 지급되는 막일이 대부분이다. 강남과 목동 일대의 전업 주부들, 전직 공기업 직원, 대학원생 등이 막일이라도 하겠다며 일거리를 찾아 직업소개소 대기실을 서성거리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띄었다. 서울 사당동 강남한누리 직업소개소 박영희(49) 실장은 "요즘 들어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강남 아줌마'들이 남편 사업이 망하거나 구조조정으로 실직하면서 아이들 학비를 벌러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28일 오후 2시, 구찌 로고가 찍힌 손가방을 든 주부 한모(51)씨가 파스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서울의 목동의 또 다른 직업소개소에 들어섰다. 한씨는 작년 11월 남편의 정수기 대리점 자금 사정이 나빠지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편 몰래 식당에서 날품팔이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날도 식당 일을 얻으려고 아침 일찍 영등포의 모 직업소개소에 들렀다가 허탕을 치고 목동으로 왔다고 했다.
한씨는 "목동에 있는 224.8㎡(약 68평)형 아파트와 제네시스 승용차도 처분하려고 내놓았다"며 "우리 집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아줌마의 소개로 식당 일을 시작했는데 몸도 힘들지만 일자리가 없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전직 공기업 간부도 막일 찾아
최근 공기업에서 퇴직하고 직업소개소를 찾은 이도 있었다. 20년간 공기업에서 일한 이모(55)씨는 감원 바람으로 자의반 타의반 사표를 쓴 뒤, 지난해 10월 영등포시장 입구에 있는 모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그는 "경비원이나 막노동 아무거나 좋은데, 나이가 많다고 두 달째 일거리를 못 찾고 있다"고 했다.
서울의 모 여대 영어교육대학원을 휴학 중인 김모(여·27)씨는 등록금과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 역삼동의 신한국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6개월 전까지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던 김씨는 "점점 수강생이 줄어들면서 모이는 돈이 없어 그만뒀다"며 "교통비와 식비가 부담스러워서 차라리 입주 가사 도우미로 들어가려고 한다"고 했다.
◆식당 사장이 종업원으로
구직자들은 면접을 본 뒤에도 하염없이 "일하러 오라"는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에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둘 경우에 대비해서 연락처나 알아놓으려고 면접을 보자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서울 삼성동의 삼성직업정보센터 김성원 사장은 "경비원, 가사 도우미 같은 일자리도 평균 20명쯤 면접을 보고 그 중 한 명을 뽑는다"고 했다.
김 사장은 불황의 상징으로 '식당 일자리가 줄어든 것'을 꼽았다. 김 사장은 "작년 11월까지는 식당 종업원 일자리가 하루 70개쯤 됐는데, 요즘은 10개도 안 될 때가 많다"며 "영세 식당들이 직원들을 내보내고 가족들끼리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업원을 두고 고깃집을 하던 사장이 불경기로 폐업한 다음, 종업원으로 일하겠다고 나선 경우도 있었다. 성모(여·45)씨는 2년 전 영등포 시장 안에 고깃집을 차렸다가 올 1월 보증금과 권리금 1억5000만원을 모두 날리고 가게 문을 닫았다. 성씨는 "연말 특수를 기대하고 버텼는데, 손님이 거의 없어 가게 문을 닫았다"며 "요즘 식당 주방 일을 찾으러 다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