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말
역사의 종점에 선 최후의 인간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ㅣ 이상훈 옮김 ㅣ 한마음사
제3부 인정받기 위한 투쟁
13. 태초의 순전히 특권을 차지하기 위한 목숨을 건 싸움
헤겔은 우리들에게 역사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 근거한 메카니즘을 부여하고 있다. “인정”이라고 하는 비유물론적인 인간의 인격 속의 비이기적인 부분에 기초를 두는 자유로운 사회, 즉 비이기적인 부분을 근대의 정치적인 계획의 핵심으로 삼으려고 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유로우면서 ‘미결정적’인 존재이며, 역사적인 시간의 경위 속에서 독자의 성질을 낳을 수 있는 존재였다.
≪정신현상학≫에서 “최초의 인간”을 인간의 원형이며, 시민사회의 형성이나 역사의 진행과정 개시 이전에 존재한 기본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먹을 것이나 수면, 주거 특히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하는 욕망 등 자연적 욕망에 관해서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자연계 혹은 물질계의 일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동물과 다른 것은, 비물질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고 다른 인간으로부터 필요한 존재가 되거나, 혹은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혼자만으로는 자신을 의식할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한, 개개의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라든가 자기 확인이라고 하는 개개인의 감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평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데이비드 리스맨이 말하는 “타인지향형”이다. 그리고 동물과 또 다른 점은 단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저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질은 인정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위험에 처하게 한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이 다른 이간을 만나면 반드시 싸움을 일으켜서, 상대에게 자기를 인정시키려고 생명을 거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 지향적이며 사회적 동물이지만, 그 사회성은 그를 평화로운 시민사회 속으로가 아니라, 수순한 위신을 찾는 격렬한 사투로 내몰아 간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결과는 세 가지다. 싸운 쌍방이 죽은 경우, 인간으로서의 생명도 자연의 창조물로서의 생명도 종말을 맞이한다. 싸움을 한 양쪽 중에서 어느 한쪽이 죽는 경우, 살아남는 자는 불만족스런 상태로 남는다. 자신의 승리는 인정받으려고 해도 상대의 의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싸움이 주군과 노예의 관계를 낳고 끝나는 경우가 있다. 한쪽이 폭력적인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기보다는 노예생활에 만족하고 결의한다. 주군이 된 쪽은 자기의 생명을 위험에 내맡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에 만족해한다. 이 “최초의 인간” 끼리의 첫 만남은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 혹은 로크가 말하는 전쟁상태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폭력적이지만 그것은 사회계약이나 기타 평화스러운 시민사회의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복종이라는 불평등을 낳는다. 초기 계급시회는 원시사회가 분화되어 단순히 주인과 소작인인가라는 경제적 역할에서가 아닌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자기의 생명을 자진해서 위험에 내맡긴 주군과 안위를 택한 노예로 나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역사의 초기 단계의 인간에 대한 헤겔의 해석 중 순수한 위신을 구하는 싸움에 자진해서 생명을 거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특질이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위신을 구하는 싸움에 자진해서 생명을 거는 일의 중요성은 자유가 갖은 의미에 관한 헤겔의 견해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물리적 동물적인 성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동물적인 성질을 정복하고 부정하는 스스로의 능력, 즉 참다운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연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은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에는 인간 자신의 본성, 그 주위의 자연환경 그리고 자연 법칙이 포함된다. 그 자신의 법칙을 창출해서 그것을 고수한다고 하는 선천적인 자유 때문에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선택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간 고유의 존엄은 이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 기인하며 더 높고 더 강한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현재의 본능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본능의 억제 그 자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순수한 위신을 위한 싸움에 자진해서 생명을 거는 것으로 인간은 자기를 보전하는 가장 강력한 기본본능에 반해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입증하고 있다. 이 “반 본능적인 행위”는 정신적인 현상이 물질의 운동역학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경제론적, 기계론적,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적 사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정받기 위한 인간의 욕망과 강력한 자연의 본능(죽음의 두려움)조차 거스를 정도로 확실한 자발성을 말한다. 헤겔의 자유는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더 없이 인간적인 본질이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혹은 자연에 순응하여 어떤 제약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끝나는 곳에서 자유가 시작되는 인간적인 자유이며 인간 본래의 자연적이고 동물적인 존재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자기를 창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출현한다. 이 자기창조의 과정을 상징할 수 있는 출발점이 수수한 위신을 구하는 사투인 것이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즉 인류사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상호적이면서도 동시에 평등한 기초 위에서 인정받고 싶다고 하는 주군과 노예 ‘쌍방’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방법의 탐구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이 목적을 달성하는 사회질서의 승리와 함께 막을 내린다.
14 최초의 인간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공산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어느 일정한 시기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주의가 갖는 실제의 의미를 먼 옛날부터 통상적으로 로크철학의 문맥(?)에서 이해되어 왔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선언이나 헌법에 성문화된 미국 민주주의의 근저를 이룬 원칙은 제퍼슨, 메디슨, 헤밀턴 등의 헌법 제정자들의 저작이 토대가 되었으며 그들의 사상은 대부분 홉스와 로크와 같은 영국 자유주의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홉스는 두 가지 점에서 유명하다. 첫째는 그가 자연상태를 “고독하며, 가난하고, 더럽고, 잔인하며, 덧없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절대적인 군주 주권론을 주장한 것이다. 정부의 정통성은 왕권신수나 지배자의 당연한 우위성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자 측의 권리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원리를 최초로 확립한 것이다. 홉스의 자연상태는 “정념에서의 추론”이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규정에서부터 정의와 공정의 원칙까지 도출하고 있다. 원시 사회의 현실은 사랑이나 협조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며 인간은 필요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오히려 “하찮은 일”을 둘러싼, 즉 인정받기 위한 싸움 쪽이 많다. 사람들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으로 강하게 내몰고 있는 것은 정념이고 물질적 소유에 관한 강한 욕망아 아니라, 야심 있는 소수인의 긍지와 허영의 만족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홉스의 자기 보존의 본능은 예를 들면 “쾌적한 생활을 위한 모든 필수품”과 함께, 인간으로 하여금 평화를 지향하게 하는 가장 강한 정념이었다. 주군에 의한 노예의 지배는 홉스에게 있어서는 전제정치이며, 거기서는 노예가 힘이라는 절대적인 위협에만 복종하며 주군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홉스는 귀족적 주군의 긍지(허영) 속에서 하등의 도덕적 구원도 찾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인정을 구하는 욕망, 메달이나 깃발과 같은 “하찮은 것”을 둘러싸고 자진해서 싸우려고 하는 자세야 말로 자연 상태에 있어서의 모든 폭력이나 인간적인 비참함의 근원이 된다고 말했다. 홉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인간적인 정념은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이며, 가장 강력한 도덕적 요청-그가 말하는 “자연법”-하는 것은 자기의 육체적 존재의 보존이다. 자기 보존은 기본적으로 도덕과 관련된 사실이다. 이렇게 정의와 공정에 관한 모든 개념은 자기보존의 합리적 추구에서 근거하고 있으며, 부정과 악은 폭력, 전쟁 그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갖는 구심력은 홉스를 근대 자유주의 국가로 이끌어 간다. 왜냐하면 실정법(법관례나 판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를 거쳐 실제로 제정한 법률)이나 정부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는 자기 존재를 보존하다고 하는 만인을 위한 “자연권”에 의해서 인간에게는 폭력도 포함해서 그 목적 달성에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수단을 행사할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정부적인 싸움. 이 무정부 상태를 구하는 것이 사회계약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이며, 이 정부에서는 모든 사람이 “만물에 대한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며, 타인에 대해서 자유를 행사할 때에도, 타인이 자신에 대해서 행사하더라도 좋을 정도만 행사 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따라서 홉스에게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전통은 명확하게 “동물적인 본성”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소수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인간의 최저의 고통 사항으로 되어 있는 정념-즉 자기보존-의 이름으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다. 이 정념은 인간만이 아니라 보다 ‘하등한’ 동물에게도 통하는 공통 요소로 인식된다. 홉스는 인지에 대한 욕망이나 “단순한 삶”을 내려다보는 경멸의 마음이 인간의 자유의 시초가 아니라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홉스는 국가를 “교만에서 생겨난 모든 자들의 왕”인 리바이어던으로 비유하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그러한 긍지 높은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억눌러 죽여버리는 것이다. 국가의 정통에 관한 유일한 원천은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권리’를 지키며, 그것을 유지하는 능력에 있다. 기본적 인권이란 생존, 즉 만인의 육체적 존재를 보존하는 권리이다. 유일한 정통 정부는 충분히 생명을 보존시켜 주며 만인의 만이에 대한 싸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정부이다. 사회계약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육체를 상처 입히지 않고 보존해 갈 수 있는 담보로서 부당한 긍지와 허영을 포기한다는 합의이다. 즉 인정받기 위해 특히 위신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목숨을 거는데서 오는 우월성에 대해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자신의 우월성을 타인에게 내보이고 뛰어난 미덕을 기반으로 하여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는 인간의 일면, 즉 자신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긍지 높은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본인의 긍지에 대한 열등감의 소산이라고 설득된다.
군주의 절대 주권을 국왕의 타고난 통치권 때문이 아니라, 군주들에게는 대중의 합의에 이르는 어떤 형태의 힘이 부여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하고 있다. 정통성을 가진 통치자는 대중의 합의를 얻을 수 있지만 전제 군주는 그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의회정치와 민주정치 체제보다 단 한명의 인간에 의한 통치를 선호한 이유는 오만한 자들을 억누르는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크는 자기 보존의 더욱 기본적인 정념이라는 점, 그리고 생존권이라는 기본적인 권리에서 모든 권리가 파생되었다는 점은 홉스와 같은 의견이지만 절대 군주가 인간의 자기 보존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절대 군주제가 아닌 제한된 정부, 기본적 인권을 보증하고 비통치자의 합의에 따라 권위를 얻는 입헌정치 체제(의회 또는 입법부 주권)를 주장한다. 홉스가 말하는 자기 보존의 자연권은 로크에 의하면 국민의 이익에 반하여 부당하게 권력을 휘두른 폭군에 대한 혁명의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
로크의 자기보존은 다른 모든 권리를 파생시킨 기본적인 자연권이며 인정에의 욕망도 그것에 희생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로크는 인간의 단순한 육체적 권리뿐만 아니라 쾌적하며 또한 부(富가멸부:재물이 많고 넉넉하다)를 산출해 낼 수 있는 생활을 영위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근면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누구나 사유재산 제도를 통해서 풍요함을 창출할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의) 광대하고 풍요한 토지의 지배자가 영국의 날품팔이 노동자보다 의식주 모든 면에서 열등하다는” 자연의 빈곤상태는 사회적인 면에서 풍요로움으로 대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크의 최초의 인간상은 자연상태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기는 하지만, 그 욕망을 자기 생활을 유지하고 거기에 물질적 위안을 주려 하는 욕망에 종속시키도록 철저히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유하는 물질적 소유물을 지킬 뿐만 아니라 무한한 부를 얻을 가능성을 개척하기 위해 시민사회로 적극 나아가는 것이다. 미국의 건국사업에는 구석구석에까지 로크의 이러한 이념이 골고루 미쳤던 것이다. 제퍼슨이 말한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권리는 로크가 말한 생명과 재산에 관한 자연권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을 지키며 국가권력의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기 위한 감시역이라는 점에서 관해서는 미국의 자유주의에 있어서난 다른 비슷한 입헌공화국의 자유주의에 있어서도 공통으로 인식되어 있다.
어떠한 정치적 권위가 수립되든지 간에 그 이전부터 그들이 인간으로서 여러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동시에 정부의 첫째 목적은 그와 같은 권리를 지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이러한 권리는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권리장전에 열거된 것은 물론 최근들어 생겨난 “프라이버시권” 등의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어떠한 권력이든 간에 그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을 지키며 국가권력의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기 위한 감시역이라는 점에서 관해서는 미국의 자유주의에 있어서난 다른 비슷한 입헌공화국의 자유주의에 있어서도 공통으로 인식되어 있다. 앵글로색슨계 사상가들은 헤겔이 말하는 군주를 자칭하는 자들에게 만인이 노예와 같은 일종의 무계급사회 속에서 노예의 생활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노력이야말로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의 만족감을 특히 “사람위에 군림하는” 고통을 죽음의 고통과 비교했을 때, 폭력적인 죽음에의 공포와 쾌적한 자기 보존에의 욕망이 실로 강렬하여, 이기적인 손익 계산을 철저히 교육받은 합리적인 정신 속에서는 이러한 정념이 인정에의 욕망을 능가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헤겔이 말하는 위신을 싸움을 불합리한 것이라고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홉스와 로크의 사상은 자기 보존 혹은 쾌적한 자기 보존을 도덕적으로 최우선시하고 있다. 로크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자유사회란, 다만 상호의 자기 본존을 위한 설정할 뿐, 인간은 공공심도 애국심도 필요 없으며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시민을 위해 적극적인 목표를 정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보다 탁월한 생활양식, 보다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제창해 주지도 않는다. 적극적인 목표를 가진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든 간에, 그 내용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정부라는 것은 실로 어떤 권리의 행사가 다른 권리의 침해가 도는 경우를 제외하고, 다양한 “생활양식”을 용인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적극적이고 또한 보다 ‘고상한’ 목표가 없을 경우, 로크류의 자유주의의 중심부에 뚫린 공백은 결핍과 기아라는 옛날의 제약에서 해방된 오늘날에는 항상 제한 없는 부의 추국에 의해 메워져 가는 것이다. 목전의 자기 보존과 물질적 행복을 위해서만 악차같이 애쓰며 사리사욕ㅇ르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밖에 주위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인간들, 자유사회의 전형적인 산물인 ‘부르주아’처럼 이기적인 도덕심만을 낳게 된다.
여기에서 앵글로-색슨의 자유주의 전통은 인지에의 욕망에 대해서 헤겔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태도는 근본적으로 긍지 혹은 허영(즉 인정)이라고 하는 정념과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의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가에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자기의 편협한 사욕과 육체적 욕구 이상의 것에 눈을 돌리지 않는 인간에는 실로 멸시할만한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에는 폭력에 찬 자연상태와 예속상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으며 나아가 애국심, 용기, 관대, 공공심이라는 고귀한 정념의 밑바닥에도 자기 극복의 동경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성 중의 완전힌 도덕적인 측면 즉 협소한 육체적 관심사를 희생하여 육체를 넘어선 곳에 있는 목표와 주의(主주인주義옳를의)를 추구하는 성격과 어떠한 형태로든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주군의 관점을 버리고 노예의 관점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헤겔에게 있어서 주군과 노예 관계는 역사상 필수 불가결한 발전 단계이고 주군의 의식은 동물적인 성질을 뛰어넘지 못한 노예보다 한층 고고한 것이며 인간적인 것으로 자진해서 생명을 위험에 내맡긴 귀족적 전사의 긍지 속에서 도덕적으로 칭찬해야 할 것을 발견했으며 자기보존만을 추구하는 노예의 의식 속에서 도덕적인 비굴함 같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인정을 추구하는 주군의 모습을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간주함으로써 도덕적 차원을 예찬하고 이를 지키려 애썼던 것이다. 인간을 도덕 실천의 주체로서 이해하고 고유한 존엄성은 육체나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과 관련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도덕적 차원과 그것을 인정시키기 위한 투쟁이야말로 역사의 변증법적인 과저의 원동력으로 여겼던 것이다.
15 불가리아에서의 휴양
“인정”이라는 기초 개념은 서양의 정치철학만큼 오래되었으나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나타내는 표현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패기’ 또는 ‘기개’, 마키아벨리는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 홉스는 인간의 교만과 허영, 루소는 인간의 자존심에 관해, 알렉산더 해밀튼은 명성에의 사랑, 제임스 메디슨은 야심, 헤겔은 인지, 니체는 “붉은 뺨을 가진 야수”로서의 인간을 말했다. 이와 같은 말은 모두 다양한 사물에 ‘가치’를 설정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측면에 관련되어 있다. 긍지, 분노, 수치심 등의 정념의 기본적 원천을 이루는 인정의 일부이며 욕망으로도 이성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타인을 밀어내고 자기주장을 고집하게 하여, 칸트가 말하는 “비사교적 사회성”의 상태로 몰아가기 때문에 정치적 공동체는 전체에 공헌할 수 있는 형태로 완화‧억제하는 것이 정치의 중심과제였고 근대 정치철학(로크류)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기 때문에 이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라는 현상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두 청년 귀족 글라우콘과 아디만토스와의 대화에 기록된 공정한 도시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현실의 도시’에서는 외적을 막기 위한 수호자, 혹은 전사 계급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주요한 특징을 그리스어로 ‘튜모스’thymos 약간 어색한 역어를 쓰자면 ‘패기’라고 표현한다. ‘패기’ 있는 인간을 큰 용기와 분노를 갖고 바깥쪽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외적과 싸우는 고귀한 개에 비유하고 있다. 즉 기꺼이 생명을 내거는 자세로써 자신을 위한 용기 및 분노의 감정과 관계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없다.
≪국가≫ 제4권에서 혼의 삼분설을 포함한 ‘패기’에 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혼을 다종다양한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일면을 갖고 있으며, 가령 굶주림과 갈증의 경우 욕망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에로 좋든 싫든 간에 몰아간다. 다만 목이 말라도 물이 더럽혀져 있음을 알고 마시지 않는 이지적 계산적인 부분이 욕망을 거스르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혼은 욕망과 이성이라는 두 부분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아디만토스가 '패기'를 또 하나의 종류의 욕망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려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사형수 옆에 시체 더미를 보고 싶어 했던 레온티우스라는 남자 이야기를 한다.
그는 보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리면서 동시에 혐오의 기분도 품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버둥거리며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해, 눈을 크게 뜨고 시체 쪽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보는 편이 낫다, 저주받은 놈, 이 아름다운 광경을 마음껏 봐라."
위 갈등을 두 가지의 욕망이 충돌한 것에 불과하다는 해석은 어느 정도 기계론적인 심리학과도 일치한다. 홉스의 의지란 단순히 ‘숙고한 끝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욕구’이며, 그런 까닭에 더욱 강력하고 집요한 욕망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욕망끼리의 충돌 결과로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었다면 분노가 일지 않았을 것이므로 '분노'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자제 이외의 결과로 나타났으면 그러나 분노와 관계있는 감정인 긍지를 느꼈을 것이다. 즉 레온티우스의 분노가 혼속의 욕망이라는 부분에서 생겨난 것도, 이지적인 부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온티우스가 자기의 내적인 갈등의 결말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분노는 소크라테스가 '패기'라 부르는 제3의 혼의 전혀 다른 부분에 기인하는 셈이다. '패기'로부터 발생하는 이 분노는, 소크라테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바르지 못한 욕망과 바보스러운 욕망을 억누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는 이성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이성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국가≫ 안에 등장하는 '패기'는 오늘날에 "자존심"이라고 불릴 만한 자기에 대해 설정하는 평가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 레온티우스는 스스로를 존엄과 자제심에 찬 태도로 행동할 수 있는 타입의 개인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스스로의 자존심에 채 부응할 수 없을 때에는 자기에 대해 화를 냈다.
소크라테스는 패기있는 인간 즉 자기자신의 가치를 보다 높게 평가하는 인간일수록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는 한층 더 화를 내는 법이라고 설명하면서 분노와 "자존심"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비록 "기아와 추위, 그 밖의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이와 같은 인간의 혼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바르다고 생각하는 편에 서서 싸우는"것이다. '패기'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정의감과 같은 것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타인이 그것을 부정하는 자기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행동을 하면 화를 내는 것이다.
영어의 성냄과 동의어인 "분노"라는 말을 보더라도 자기 평가와 분노(노여움)와의 밀접한 관계 있다. "존엄"은 인간의 자신에 대한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고 자기 가치관이 침해되면 분노가 생겨나는 것이다. 거꾸로 자신이 자신의 자존심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 않음을 타인에 의해 깨달았을 경우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자기의 정당한 진가에 적합한 평가받았을 때 '긍지'를 느끼는 것이다.
분노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전능한 감정이며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기아나 갈증이나 자기 보존과 같은 자연의 본능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그러난 그것은 외계의 물질적인 것을 구하는 욕망은 아니다. 만약 분노를 욕망의 하나로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망을 추구하는 욕망" 즉 우리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인간의 의견을 바꾸게 하고 스스로의 자기 평가에 따르는 형태로 우리가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쓴 '패기'라는 말은 다름아닌 헤겔이 말하는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심리학적 토대인 것이다 귀족적인 군주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 속에서 타인에게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의거해 평가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에 대한 가치관이 상처받으면 격한 분노에 휩싸이는 것이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패기'의 한 활동이며 타인이 자신과 같은 평가를 해주길 바라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타인의 인정 없이도 안에서 '패기'에 찬 긍지를 느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존경은 사과나 포셰 자동차 같은 물건이다. 의식의 한 상태이며 자기자신의 가치관에 관해 본질적으로 확신을 갖기 위해 그 가치관이 타인의 의식에 의해 인정받아야 된다. 그래서 '패기'는 반드시 아니라 해도 일반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요구하도록 사람을 몰아간다.
1989년 가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된 바츨라 하벨은 1980년 초 ≪힘없는 권력≫이라는 책에서 청과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청과상은 진열장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다. 자신의 이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충동
슬로건은 실제로 하나의 신호이며 무의적이면서도 확고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는 기대 받는 대로 행동을 취하고 있다다.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며 나무랄 데 없는 사람입니다. 순종적이며 평온히 그대로 가만히 두어도 될 사람입니다."라는. 비밀스런 밀고자들로부터 청과상을 지키려는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활이 걸린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나는 두렵다. 그러므로 무조건 복종한다."라는 말 대신 자신을 실추시키지 않으면서 수치스러워할 거 없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법으로 순종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덮고 권력의 '이데올로기'라는 본심을 감추는 것이다.
하벨이 여기에서 '존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공포 자체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며 만인이 갖고 있는 자연 본능인데 청과상이 갖는 공포를 감추는 것은 공포심에 어쩔 줄 모르는 동물 이사의 존재라는 자기 가치의 신념과 관계있다. 본인을 도덕적 실체의 주체이며 주의(主義)에 의해서 자기의 자연적 욕구도 억누를 수 있음을 마음속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벨이 지적한 바는 갈등의 회피이다. 주눅 든 비굴한 인간이 아니라 주의주장을 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공포와 욕망에 지지 않는 '양심'을 갖춘 인간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레온티우스와 청과상은 마지막에 공포와 자연 본능인 욕망에 정복된 것이다. 둘의 차이는 레온티우스가 약함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비난한 것이고 청과상은 이데올로기의 은신처에 피난하여 자신의 타락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벨을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준다. '패기'의 근본에 존엄과 자존심은 어떤 면에서 참된 선택력을 가진 도덕 실천의 주체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이며 자기 인신을 인간의 천부적인 특질이라는 것이다. 도의적 품성과 도덕 실천의 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다는 신념은 존엄과 타협을 끝없이 강요함으로써 그들에게 굴욕을 준다는 말로 표현된다. 타협은 진열장에 표어를 건다든지, 동료를 고발하는 데 서명한다든지, 부당한 박해에도 입 다물고 있다든지 하는 형태를 취한다. 하벨이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물질적 풍요에 대한 약속을 못 지켜서나 노동자계급의 희망을 묵살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긍지에 타협을 요구한다고 하는 파우스트적 교환조건을 달면서 물질적 풍요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에서도 소비주의의 매력 덕분에 "자기실현" 혹은 "자기발전"등의 명목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 두 체계간의 상이성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패기'를 억제하지 않으면 생화조차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패기'는 용기는 풍부한 공명심 또는 타협에 불복종하는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에 올바른 정치질서에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라톤과 하벨에 의하면 바른 정치질서란 단순히 상호불가침 조약 이상이여야 하고 동시에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16 붉은 뺨을 가진 야수
정치나 역사 변동을 해석할 때 '패기'라는 요소를 이해할 수 없다면 커다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의지의 힘이라는 것을 욕망과 이성만으로 환원시키는 홉스류의 현대 정치학자가 말하는 "이익집단"간의 경제적인 해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인간 혼속의 '패기' 부분에 눈을 돌려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구소련과 중국에서 일어난 개혁의 근본적 추진력이 된 것은 그 번영을 추구하는 욕망에는 민주적 권리와 정치 참가 획득을 목표로 하는 요구, 즉 자신들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제체를 지향하는 요구가 존재해 있다. 개혁을 하건 혁명을 하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제도를 갖는 정치 시스템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미국사회에서 지난 30년 가까이 가장 논란이 컸던 인공 임신중절에 관해서는 태아와 여성 쌍방의 권리대립을 둘러싸고 전개되었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가정이나 전업주부의 역할이 갖는 존엄과 직업여성의 존엄간의 뿌리 깊은 의견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여성은 중절이 여성에게 표현되어야할 존경에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고 직업여성은 중절권이 없는 것이 남성과 대등해야할 여성의 존엄을 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